세로토닌하라! - 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감정은 뇌에 따라 움직인다 세로토닌하라!
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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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인 이시형 선생은 탁월한 정신과전문의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power celebrity로서 익히 알려진 분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사회적 성취가 결합하여 빚어낸 여유와 자신감을 듬뿍 담은 책이군요. 전반적인 내용이 무엇일 것이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읽지 않으려 했는데 저 자신이 세로토닌이 부족한 경향성을 지닌 사람이라 아무래도 한 번 들여다봐야겠다 싶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목차를 쭉 훑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휘릭 스쳐갑니다. 첫째, 흠, 과연 이시형이군! 둘째, 어? 일본 냄새? 앞의 것은 사족을 붙일 까닭이 없으니 넘어가고. 일본 냄새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일본 에도(江戶) 시대 사무라이적 화의(和醫)로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가 있습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을 canonical text로 하는 음양오행론적 주류의학을 거부하고 <상한론(傷寒論)>이란 다른 전승의 text에 터 잡아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의학의 핵심은 이른바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입니다. 즉 모든 병은 하나의 독에서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생각은 분명히 사무라이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병의 성격이 그러하다면 치료의 성격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징(藥徵)>이란 저서에서 모든 약에는 한 가지의 주치(主治)가 있음을 천명해 놓았지요. 그의 이런 사고는 병의 증거와 거기에 맞는 처방은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의학사상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최근 우리나라 한의학계를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 열풍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의 의학으로 무장한 학회가 전 한의사의 1/5 이상을 거느린 공룡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주류한의학의 설명 방식이 은유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단도직입으로 딱 잘라 설명하는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류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회적 트렌드와 맞물려 있는 현상일 것입니다. 뭐에는 뭐가 좋다, 하면 온 국민이 일제히 그리로 쏠리는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치우침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초일극집중구조'로 나아가고 있으니  한의학계 또한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의 관점을 연장하여 행복 문제를 거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복일( )설"이 의당 나올 테지요. 바로 그 ( )에 세로토닌을 집어넣으면 어렵지 않게 "세로토닌하라!" 는 강령과 함께 powerful한 사유/실천 체계가 나올 것입니다. 마치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의 그림자 밑에 공룡학회가 탄생했듯 세로토닌 깃발을 높이 든 일본인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이 책이 나온 게 아닐까, 추측했던 바, 아니나 다를까, 저자 서문에 아리타란 일본인이 중요하게 언급되었고 맨 뒤에 그가 쓴 추천사가 있더군요. 그러나 이건 여전히 추측입니다. 얼마나 크게, 그리고 한 방향으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2. 이 책의 내용이 형성된 구체적인 곡절과 과정은 일단 덮어두고 "세로토닌하라!"는 강령을 펼쳐낸 책의 내용 자체를 검토해 보기로 하지요. 두 가지 화두를 설정하겠습니다. 하나는 이 책은 무엇을 목표로 삼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서 과연 "세로토닌하라!"는 무엇일까? 

<세로토닌하라!>는 의학적 견지에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려는 목표를 지닌 책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 지향은 자기계발  또는 성공입니다. 이른바 시크릿류의 담론에 뇌과학을 접목시킨 것이지요. 저자의 활동영역과 사회적 위상을 생각하면 이 책이 치유를 위한 것이라 하든 자기계발을 위한 것이라 하든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그게 자연스러울 만큼 저자의 사유와 삶이 광폭이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잘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스러움이 어떤 진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의학적 작업은 그 사람의 인간적 완성을 향한 도정에 참여하는 활동이고 자기계발을 이끄는 공학적 작업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을 부추기는 전략을 제공하는 활동입니다. 인간적 완성과 사회적 성공은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 둘을 일치시키거나 균형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인간적 완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사회적 성공에만 골몰하지요. 현대사회는 특히 이런 경향성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오직 '대박나는' 삶을 사기 위해 영혼을 파는 사람들로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을 움켜쥔 자들은 다양한 상품을 준비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미 '대박난' 사람들로 하여금 사후논리를 통해 '대박나는' 삶을 꿈꾸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게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게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지침서. 간절하게 원하면 다 된다, 아, 이 얼마나 달콤하고 황홀한 환상입니까. 결코 죽을 때까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지요.  

이런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또 휩쓰는데 어째서 세상은 이리도 살기가 힘들까요. 이런 책들에 감동 받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OECD국가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을까요. 그 의문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도리어 이런 상황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음모적 프로젝트에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그리고 뇌과학자, 심지어 종교 지도자까지 합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포식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오늘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상을 팔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어째서 이런 전략이 먹히는 걸까요? 서두에 스치듯 말씀드린 바, '초일극집중구조'의 위력이지요. 사회적 상징 조작으로 '영웅'이 탄생하면 세상은 온통 그의 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끝내 '영웅'이 되지 못하는 대다수는 끊임없이 다른 '영웅'을 찾아 헤맵니다. 영원회귀!  

이런 순환의 한 고리에 오늘 우리의 화두인 세로토닌이 놓여 있습니다. 왜 하필 세로토닌일까요? 아마도 이 문제의식은 저자 자신에게도 내부적 고민이라기보다 외부적 임팩트였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저자가 먼저 세로토닌을 깊이 들여다보았다면, 나아가 뇌과학적 진실을 좀 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았다면, 유독 세로토닌 하나를 보편적 당위 표제어로 삼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근거에서입니다. 

저자의 말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연출해내는  뇌내 물질에는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 세 물질,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들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만큼 중요한 물질로 감마아미노부티르산(GABA)과 아세틸콜린(Ach)이 있습니다. 저자가 왜 이 두 물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을 세로토닌과 대척점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는 구조에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로토닌형 인간의 8가지 특징 부분을 보면 오히려 GABA 형 인간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풀어 행복하다." 이 부분. GABA는 정서의 안정을 연출하는 물질로서 따스하고 품 넓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형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Ach형 인간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뇌형이다." 이 부분. Ach은 창조성을 연출하는 물질로서 전형적인 우뇌형 인간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대목에 이르면 세로토닌형 인간의 8가지 특징 또한 세로토닌을 깊고 넓게 들여다보며 발견해냈다기보다 이미 이상적인 인간형을 전제하고 그 모든 특징을 세로토닌에 환원시켰다는 혐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잠재능력 200% 올려주는 전두엽 만들기 10계명도 세로토닌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깁니다. 세로토닌은 전천후의 능력을 지닌 이른바 전능물질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로토닌하라!"는 명백한 환원주의입니다. '영웅' 만들기입니다. 마치 TV에서 인기 배우 데려다 토크쇼 하는 걸 보면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봉사도 열심이고 심지어, 인격도 고매하다고 과대 포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4. 세로토닌. 그렇습니다. 중요하지요. 특히 스트레스 덩어리인 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스트레스 물질을 제어해주는 세로토닌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조점을 넘어 세로토닌 하나를 내세워 보편적 당위 표제어로 삼는 것은 전략의 차원에서는 용인할 수 있으나 진실의 차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맨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세로토닌이 부족한 것으로 진단 결과가 나온 사람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거기까지입니다.  

5. 사족-이 책을 읽는 동안 세로토닌은 외부에서 식품물이나 약으로 공급해줄 수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십상이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세로토닌은 물론 그 전구물질인 트립토판을 듬뿍 함유한 식품도 많고 한약재, 탕약처방도 많습니다. 심지어 세로토닌 수용체와 신경계 자체를 조절하는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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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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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고 말기엔 아까워 어떤 구절의 표현, 어떤 대목의 내용을 살피면서 다시 읽었습니다. 소설 가운데 이런 경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몇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첫 장을 0번으로 매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맨 나중 것을 다시 0 혹은 00번으로 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하면서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랜 동안 제 글쓰기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 어린(!) 이야기꾼이 똑 이런 발상을 해냈는지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19 뒤에 '다시, 19' 씩이나.......  


첫 장을 열어 읽기 시작하면서 ‘아, 보통 내기가 아니구나!’ 직감합니다. 생각의 무애자재한 지평과 방향, 거기에 상응하는 문장의 단소정한(短小精悍). 자지와 보지를 대놓고 말하는 단도직입의 거침없는 입심, 그래도 ‘거시기’ 선에서 일단 자제하는 절제의 주상절리. 순진무구를 길라잡이로 내세운 발칙한, 그러나 절묘한 도발 전략. ‘아, 무당 제대로다!’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의 대칭(대립)구도를 큰 틀로 하여 진행됩니다. 이 대칭구도 에는 다양한 변주가 등장합니다.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는 사람, 버리는 사람과 버려지는 사람,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가족인 사람과 가족 아닌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그리고 선과 악, 마침내 삶과 죽음.......  


이런 대칭구도는 현실의 부조리를 일으키고 그것을 치밀한 갈등을 통해 지속시키는 공고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그 극단한 분별이 부질없어지고 마는 시공에서 적멸의 해법이 나타나 이 대칭구도를 뒤흔들고 마침내 무너뜨려버립니다.  


소녀는 시종일관 (누구나 다 아는)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존재이나 스스로 그 경계 지점에 서기도 하고 자기 반대편으로 가로지르기도 하면서 대칭구도를 앙칼지게 쑤시고 가차 없이 베어 갑니다. 마침내 자기의 어떤 이름(유나)의 일부인 나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리의 새 아빠를 찔러 죽이고 그 칼에 찔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기도 죽음으로써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대칭구도를 붕괴시킵니다. 그러나 비참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죽음을 통해 그는 평화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아니 평화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던 소녀의 ‘쿨’하거나 범상치 않은 정신성은 이미 처음부터 도처에 출몰했지만 결정적 형성은 아마도 나리 엄마를 만난 시공에서였을 것입니다.  


.......뒤늦게 나리의 엄마라는 사람이 경찰서로 왔다.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하고 세련되게 화장을 한 여자였다. 나리의 엄마는 울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않고, 모든 일이 그저 조용히 정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여자의 무심한 목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 사람이다.  

저기 있다.

나의 진짜엄마는.

 거리를 떠돌며 내가 정했던 진짜엄마의 조건은 모두 껍데기고 포장이며 환상이고 거짓말이다.......이제야 알겠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너무 쉽고 너무 쉽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못 찾고 있었다. 너무 흔하니까.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울을 보면, 그 속에도 있다.  

.......  


전 남편한테서 난 자기 딸이 현 남편한테 무수히 강간당하고 끝내 죽임으로까지 내몰린 현장에서 오직 자기 생존만을 챙기는 그런 엄마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은 소녀, 바로 그 다음 순간,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깨달음도 벼락 같이 얻게 됩니다.  


더 이상 뭘 찾아야 하나요? 아니, 더 찾을 것은 없습니다. 어디가 더 성장해야 하나요? 아니, 더 성장할 것은 없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성장담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여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참 어른인 소녀의 오도송(悟道頌)이 됩니다. 소녀의 죽음은 독자에게 소녀 시대의 상징적 죽음을 환기시키는 은유가 아닙니다. 소녀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통속한 이분법을 깨뜨리는 관통(貫通) 길을 날렵하고도 토실하게 보여줍니다.  


관통! 이는 우리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 바로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방향이며 성격입니다. 세상이 들이미는 온갖 해악과 폭력을 ‘착하게’, (실제로는 ‘굴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치를 담고 있는 진실. 그것의 예리하고 강인한 움직임. 소녀의 최후 관통은 바로 목숨입니다.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속에서 완성된 답을 얻었으니 과연 통쾌하고 황홀한 관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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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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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만 보고 지나치다가 강상중이란 저자 이름 확인하고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함부로 책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뢰 때문입니다. 

2. 처음 부분은, 진지함에 날카로움과 깊이가  따르지 못한다는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자기 앞에 세운 그의 필법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가 그 두 대가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느릿느릿 읽어 나아가는 동안  저자가 말하듯 저 또한 전형적인 slow starter 라는 사실에 주의하면서 점점 깊은 공감의 바다로 갈앉았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장. 아, 그래, 늙어서 '최강'이 되라, 그렇지! 그 동안 제 인생의 화두였던 두 마디를 이렇게 딱 집어서, 먼저  만천하에 돋을새김을  해주는 선배가 있으니 아직도 세상의 쓸쓸함은 견딜 만하구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 "교란 하는 힘"을 지닌 노인으로 살자.

(2) "뻔뻔하게" 살자. 

두 가지 모두 만만치 않은 내용을 지닌 말입니다.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천하의 의미심장함입니다. 오십대 중반 의자(醫者)인 제게 (1)은  대승적 삶을 정향하는 준엄한 과제입니다. 오랜 우울증 병력이 있는 제게 (2)는 실존적 삶을 정향하는 현실적 과제입니다. 목하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3. 만 원 미만의 돈으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어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책을 집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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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의 함정 -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알바 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갤리온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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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학문의 거대한 흐름에서 뇌과학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계의 큰 스승인 달라이 라마가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한 축이라는 사실은 뇌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뇌과학 연구 덕분에 많은 사실들이  새로이 밝혀지고 있으며 관련 학문으로 영향이 파급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뇌과학 관련 연구들을 접하다 보면 뇌의 위치가 마치 빅뱅 이론의 폭발점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인간 생명과 인간의 삶 전체가 뇌에서 터져 나온 작은 우주처럼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마도 연구 주체 대부분인  서양인들이 지닌 주객 이원론과 기독교 무의식이라는 토양에서 비롯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의 정신을 뇌과학에 기대어 연구할 때 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리고 뇌에 집중해서 정신을 말하는 동안 다른 요소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직 뇌만을 정신의 좌소, 나아가  창조자로 여겼다고 몰아붙일 수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뇌과학은 몸의 다른 부분에 대해 배타적 지위를 뇌에 부여한 게 사실입니다.  정신을 뇌가 빚은, 적어도 뇌에서 빚어진 무엇(being)으로 인식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양인, 특히 지식인 특유의 홀로주체적 사유법, 명사적 어법에 갇힌 탓입니다. 알바 노에는 바로 이 부분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2. 정신(마음)은 뇌의 산물(being)이 아니고 뇌를 포함한 몸 전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doing)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입니다. 상호주체적 이고 동사적인 사유법에 터잡고 있지요. 더 나아가 마지막에 담담히, 그러나 단호하게 마무리 하듯 "우리는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의 일부이다. 우리는 집에, 정겨운 우리 집에 있다."고 함으로써 장(field) 사유에 깃듭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알바 노에가 매우 논쟁적인 자세로 대립각을 세우고 각종 증거와 반론, 그리고 절묘한 비유로 주류 지식판을 뒤흔들지만 읽는 내내 제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이따금 마치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상대방에게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는 듯한 인상마저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양인 동료들을 향한 그의 정념적, 정치적 글쓰기에 공감했기 때문에 정성껏 읽었습니다. 

군데군데 나타나는 촌철살인의 묘사, 은유가 저자의 비범함을 한껏 드러내주는 한편 독자의 읽는 묘미를 더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에필로그 첫머리에 나오는 "우리는 경계가 유동적이고 성분이 변화하는 여러 패턴의 능동적 맞물림이다."라는 표현, 가히 전권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절창(!)입니다. 아, 맞물림! 이거,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번역된 우리말로서도 기막힌 표현 아닌가요....... 

어린아이들은 세계와의 연속성 속에서 사고한다, 정신은 오솔길 내기이다, 주지주의는 인간을 삶에 대한 초보자로 만든다, 생명은 의식의 하한선이다, 보면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보인다, 노련한 선수는 뇌가 할 일을 과제가 대신한다, 그것은 접근의 문제다, 현실이 우리를 정박시킨다, 태초에 상황이 있었다.......기억나는 것만 대충 헤아렸는데, 청량한 소다수 맛이 나는 문장들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 맨 마지막, 주석 달기의 신선함! 13,800원이 제공하는 즐거움 치고는 실로 짜릿합니다. (그야말로) 사족: 더러 번역의 문제가 있긴 하되 옥의 티로 넘길 수 있으나,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가 저자의 정념과 정치의식을 "눈 뜨기의 크고 작음' 수준으로 격하(?)시킨 부분은 동의할 수 없군요.  왜냐하면 이 것은 근본적인 세계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정(精) 일독을 삼가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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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 이론신서 55
심광현 지음 / 문화과학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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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쉽지 않은 책입니다. 각기 쓴 논문/에세이 형식의 글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유연한 흐름을 타고 읽음으로써 난해함을 상보하는 이익이 차단되는가 하면  일반인을 독자로 상정하지않았기 때문인지 거침없이 나타나는(!) 개념과 내용의 불친절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을 잃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넘어가면서 읽다 보면 거듭 나타나는 저자의 사상과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들어오므로 마다마디 어려운 부분들을 미련없이 제끼고 나아갈 배짱(!)이 생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책이지 싶습니다. 

2. 나카자와 신이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렸듯 제 학문 간, 사상 간 가로지르기는 이미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전개되는 쌍방향적 사유, 은유적 소통과 그 너머의 역설적 화해, 그로 말미암은 수평적 통섭(通攝)은 바야흐로 인류의 존망과 연결되는 critical 한 화두입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이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 문화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거대 시스템적 행태의 문제이기 때문에 향유하면 더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차원에서 다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개인과 사회, 사회와 자연 사이의 인간, 문명과 생태계, 유비쿼터스적 전천후 행복과 완벽 독재의 딜레마.......이 모순을 꿰둟고  흐르는 문제적, 그리고 해결적 상상력의 한 복판에 예술을 터 잡게 하는 안목의 적확함에 공감, 동의하면서 결단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물론 독자의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관심사가 각기 다른 반응 스펙트럼을 낳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의 사유 역사가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제압적 서구문명의 형식논리, 단치(單値)논리를 극복하고 모순을 끌어 안아 전체를 사고하는 (은유, 나아가) 역설의 논리, 다치(多値)논리 시대를  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유로우면서도 든든한 연대를 이루어 참으로 사람의 얼굴을 한 위대한 통섭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3. 책의 내용 가운데 한의사로서 제가 눈여겨 본 대목은 기(氣), 천지인(天地人), 주역의 음양상보, 한의학의 흑상(black box) 시스템론 등으로 동서 사상의 통섭을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물론 아직은 선언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의학은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참여할 주체임에 틀림없습니다. 한의학을 어떤 이들은 사이비 의학이라 매도하지만 동아시아 고등 문명을 수천 년 동안 지탱해 온 보건의료 체계임을 인정하는 한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아우라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한의학은 기술과학과 인문과학이 융합되어 있는 사유체계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유를 꿰뚫는 쌍방향 흐름, 역동적 맞물기가 가히 예술적 차원까지 획득함으로써 이 책이 지향하는 바와 명실상부하게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하여 이 책을 읽는 내내 제대로 된 한의사라면 한약과 침으로 병 고치는 기술자를 넘어서 시대의 요구를 담은 고민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9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우수한 인재들이 한의학 주체로 흘러들면서  기본적 인적 토양은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 문제 의식과 실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한의학도 자신들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관심사, 전공,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합니다. 이웃의 통(通) 일독(一讀)을 삼가 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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