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 예술학과 인류학의 창조적 융합을 위하여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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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제 나이 열 아홉 때 운명처럼 한 사유의 단서가 찾아들었습니다. 읽다 버린 일간 신문 쪼가리에 실린 글 한 편이 우연히(!) 눈에 들어 왔습니다. 어떤 사학자가 쓴 칼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에서 변성(變性)과 항성(恒性)이라는 대칭적 논의가 전개된 글이었다는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때 이후 35년 동안 이 대칭성의 사유는 제 삶에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법학을 공부할 때도, 신학을 공부할 때도,  한의학을 공부할 때도 이 흐름은 연속과 불연속의 거듭되는 겹침을 통해   절차탁마 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들뢰즈한테서 때로는 하이젠베르크한테서 때로는 융한테서 때로는 김상일한테서 때로는 김상봉한테서 때로는 황진이한테서 때로는 <충청도 아줌마>한테서 이 도저한 쌍방향 사고, 모순을 끌어안고 역설을 달여내는 사고,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사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가로지르기의 사고를 익히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통시성과 공시성, 다양성과 통일성,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초월과 내재, 발전과 순환, 구조와 운동, 이론과 실천, 형식과 내용, 분석과 종합, 우연과 필연, 당위와 자연, 사건과 해석, 입자와 파동.......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대칭이 존재할 때 그 사이를 요동하며 뒤틀리며 공중제비 하며, 시중(時中)하는 조화, 선택, 양보, 선취, 공존, 희생을 넘나들었습니다.  모호함에 대한 혐오를 참지 못하고  쾌도난마 형식논리를 타고 여러 사람 다치게 하기도 했으며 , 양비론의 누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 20대와 30대를 거친 후 40대에 한의학에 발을 들여놓았지요. 

기대가 컸습니다. 음양론이란 대칭성에 터 잡은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음양론은 음양의 대대(對待)라는 구조 중심의 사고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양성 운운하며 오행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형상(形象)이나 사상(四象)으로 사유틀을 고정하는 흐름이 워낙 강해 예과 1학년 때 이미 "이건 아니지."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의학 사상의 슈퍼텍스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맞은편에  서 있는 <상한론(傷寒論)>이란 텍스트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저 쌍방향사고의 진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여 지금 사람의 생명과 병을 읽는 감각, 약과 침을 쓰는 이치, 우울증 환우와 상담하는  논리 모두가 <상한론>의 사상에 터 잡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엄청나게 넓고 깊은 미지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상한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고통과 깨달음, 질병과 정치, 문화와 과학, 기술과 영성, 의학과 예술을 통섭(通攝)하는 사유와 실천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들뢰즈, 하이젠베르크.......들에 귀 기울이며 <상한론>의 경계를 넘나들겠지요.

2. 이 와중에 접한 책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이었습니다. 각각 독립된 글을 모은 책이어서 깔끔하게 잡아채는 끝맛이 없긴 하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기대로 흥미롭게 읽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좀 더 나아간 논의를  전개한 글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빼고는....... 특유의 섬세한 관찰에서 나오는 언어에 대한 이해, 원시시대의 동굴과 유럽의 광장을 연결한 이야기,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 토러스-뫼비우스 띠-크로스캡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와 코라 이야기 등 모두 다글다글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경우 한약 처방에는 이미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전체 사고를 하는 직관지"(본문 74 쪽)가 발휘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한창 상담의 예술성을 심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식에서도 내용에서도 그리 돼야 하겠지요. 제 상담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은유치유와 역설치유입니다.  '바로 이게 예술성이다' 하고, 나카자와 신이치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든 언어는 은유와 환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태여 문학의 차원에 기대지 않아도 말이나 글을 통한 치유상담은 근본적으로 예술인 셈입니다.  게다가 의자(醫者)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담 내용 자체가 은유가 되게 하면 더 역동적이겠지요. 나아가 병과 가치의 모순을 모두 받아들여 전체 사유를 하게 하면 은유의 절정인 역설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병과 사람이 모두 흘러  통섭(通攝)의 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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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을 권리 - 상처 입은 나를 치유하는 심리학 프레임
일레인 N. 아론 지음, 고빛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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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에곤 쉴레의 문제적 그림을 표지에 넣은 이 심리치유서는 날카로우면서도 친절합니다. '날카롭다' 함은 흔히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콕 집어 환기시키고 정직하게 자기 점검을 하도록 만든다는 뜻입니다. '친절하다' 함은 독자 자신이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안내하고 사소한 데까지 꼼꼼하게  단속한다는 뜻입니다.

2. 이 책은 '못난 나' 라는 개념을 줌심으로 '순위 매기기'와 '관계 맺기'라는 대칭성을 틀 삼아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못난'이란 말은 undervalued를 의역한 것인데 어의를 그대로 따르면 '저평가된', '과소평가된' 이란 뜻이지요. '못난'이란 말은 태생이 그렇다는  뉘앙스를 풍기므로 썩 좋은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직역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순위 매기기'는 ranking의 번역입니다. 이는 권력과 직결되는 개념으로서 수직(차등)적 서열화, 자타의 불연속, 경쟁과 승부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더 적절한 번역어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 역시 아쉬움을 남깁니다. '관계 맺기'는 linking의 번역어입니다. 이는 사랑과 직결 되는 개념으로서 수평(대등)적 소통, 자타의 연속, 공존과 화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이 세계는 ranking 과 linking의 대칭성 안에서 굴러갑니다. 문제는 그 둘 사이의 역동적 균형입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현 세계의 편향을 감안할 때 후자에 대한 강조가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undervalued self 라는 용어 자체가 ranking과 연루된 문제 제기이기 때문입니다. 

3. '못난 나'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여섯 가지 방어기제가 생동감 있게 제시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내면의 비판자, 그리고 보호자-학대자란 두 힘에 이끌려 우리 삶을 망치는가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것이 이 책의 큰 매력입니다. 

우선 그 여섯 가지 방어기제. 보통 이런 유 책들의 교과서적 언급은 수십 가지를 나열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못난 나'라는 문제에 맞추어 최소화 하기, 외부 요인 찾기, 경쟁에서 빠지기, 과도하게 성취하기, 부풀리기, 투사하기의 여섯 가지에 집중합니다. 매우 적절한 판단입니다. 다만 최소화 하기와 경쟁에서 빠지기, 외부 요인 찾기와 투사하기, 과도하게 성취하기와 부풀리기의 짝이  성립하고 각각 어떤 유형의 병리와 연결되는가, 까지 나아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면의 비판자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매우 인상적인 것은 바로 보호자-비판자라는 개념이지요. 이런 형용모순의 표현 자체도 그렇지만 내용면에서 그 동안 다른 이론가나 임상가가 쓰윽 지나쳐버린 것을 돋을새김으로 드러내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를 임상 현장에서 "애지중지 학대"라는 용어로 강조했는데 그게 어떻게 구체적으로 '못난 나'를 더욱 '못나게' 하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4. 읽어가면서 내심 어떤 기대가 있었는데 끝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아쉬움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개인적 영역을 벗어난 너른 지평이 제시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컨대 동조할 때 유의사항을 보면, "자신의 경험으로 화제를 돌리지 않는다." 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표현을 해 올 때 대뜸 "나도 그래." 하는 것처럼 상대를 허망하게 하고 어쩌면 모욕하는-'다들 그러고 사는데 너만 징징대는거 아냐?'-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거기가 끝은 아닙니다. 이 주의는 다만 동조의 단계에 국한되는 덕목일 뿐입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에서 놓여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데는 반드시 사회적 맥락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문제의 보편성에 눈을 뜨고 자신의 고통을 상대화함으로써 치유의 연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자아 또는 영적 자아로 자신의 존재를 확산해 가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이 책은 다음 두 책과 더불어 읽으면 상호 보완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미 제가 소개한 바 있는 책입니다. 하나는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틴 콜드웰의 <몸으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지금까지 제 개인적 독서를 중간 결산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린다면 이 두 책과 오늘의 <사랑받을 권리>를 합쳐 "치유 삼부작"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특별하게도 저자가 모두 여성입니다. 확실히 이 분야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만.^^

<감정 공부>는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을 지닌 바탕 위에 인도의 전통 사상과 위빠사나 수행을 결합하여 깊이 있는 통찰과 실천 양식을 빚어낸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가장 두드러진 책입니다. <몸으로 떠나는 여행>은 중독 문제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 중심의 심리학을 하는 방향성과 관련된 것일 뿐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만큼 불교적 사유가 깊게 녹아 있는데 심지어 원효사상과 근접한 통찰이 보일 정도입니다. 이 책 또한 사회적 함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사랑받을 권리>는 프로이트-융 전승의 흐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구적 개인주의가 책 전반을 관류합니다.

5. 세 책을 마음의 갈래와 관련해 굳이 비교해 본다면, <사랑받을 권리>는 감정 또는 정서에, <감정 공부>는 의지에, <몸으로 떠나는 여행>은 이성 또는 의식에 더 깊은 강조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 비교입니다. 

6. 곳곳에 보석 같은 통찰이 반짝이고 있는 것 또한 무척 유쾌한 보너스. 예컨대, "우리의 문제는 대부분 과거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데서 나온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능동적으로 배워야만 한다." 등.......그리고 극심한 가난, 잦은 이사가 트라우마가 된다는 지적. 특히 이 부분은 새삼스럽게 저를 화들짝 일깨웠습니다. 왜냐하면 오랜동안 제 자신이 깊이 침륜되어 있었던 문제인데 사실 이것에 주의를 깊게 기울이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7. <감정 공부>는 저자의 내공 때문에, <몸으로 떠나는 여행>은 내용의 함축미 때문에 거듭 읽어야 다가갈 수 있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랑받을 권리>는 이런 어려움이 거의 없어 한결^^편합니다. 일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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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1) <몸으로 떠나는 여행>은 크리스틴 콜드웰이 디디에 앙지외를 소화해 낸 흔적을 곳곳에 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틱낫한의 제자인 연유로 불교적 인식론이 전반을 흐르고 있기도 하고. 뚜렷하지는 않지만 원효 사상에도 근접해 있지. 이런 부분을 돋을새김 하면서 내가 깨닫고 문제의식을 가진 punctum으로 풀이(疏)를 펼쳐 볼게.   

 

그중에서 원효 사상을 다시 간단하게 떠올려 볼까? 우리한테 이거 없으면 안 되니까.^^ 원효 사상의 뼈대는 일심(一心)-화쟁(和諍)-무애(無碍)야. 수많은 주석가들이 이 말을 나름대로 이해하여 풀어 놓았지만 역시나 원효의 마음을 맑게 들여다보지는 못한 듯. 드디어 일천삼백 년 만에 원효의 바른 뜻이 나타난다!   

 

 

일심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전체를 한꺼번에 마음 두는 것이다. 그 전체는 불이이불일(不二而不一)의 대칭성 세계지. 불교적 용어로 말하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즉 진여문(眞如門(공(空)))과 생멸문(生滅門(색(色)))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관계로 세계 사건을 이룬다는 거야. 둘로 나누면 이원론이 되고 하나로 합하면 신비주의나 헤겔식 폭력 통합(統合)이 되니까 답 아니지.  

 

화쟁은 그 동시적 이중성이 갈등과 화해라는 상호 간섭의 관계를 맺는 역동적 사건으로 드러난 거야. 마주서 있는 이율배반의 진실은 당연히 갈등-모순을 일으키겠지. 그러나 그 진실은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스스로 부정하고, 서로 간섭해서 화해-모순으로 넘어간다. 이걸 나는 늘 관통과 흡수라고 표현했던 것이고.   

 

 

이 때 화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다만 윤리적인 차원으로 읽어서도 안 되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읽어서는 더욱 안 된다. 화해는 생명 문제거든. 더 근원적이지. 그래서 몸 감각이 빠지면 안 되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몸 사랑 나누기(성교)를 떠올리면 가장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의미 이미지를 지닐 수 있다.   

 

 

무애는 화쟁을 다시 한 번 부정하여 화해(和解)가 정적 상태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해가 구조로, 기득권으로 굳어지는 것을 흔드는 역동적 자발적 파괴지. 불확정, 비결정의 사건 속에 밀어 넣음으로서 동요를 통해서만 진정한 안정을 누린다는 역설의 통(通) 진실을 밝히는 거야.   

 

 

한편으로 보면 자유자재(自由自在)의 높은 경지이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함으로 복귀하는 것이지. 마치 세존께서 회향(回向)하신 것처럼. 마치 예수께서 ‘창녀’와 함께 어울리신 것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면 본디 특별해선 안 되는 거잖아. 참으로 높은 경지는 평범함에 포괄되는 게 맞다. 마치 아무리 위대해도 남성은 여성의 품에 있듯.  

 

결국 이 원효 사상은 무애 춤으로 귀결된다. 무애 춤은 진(眞)과 속(俗)의 경계에서 한 품으로 그 둘을 엮을 때 역동적 화쟁, 즉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고 그 사건이 평범하되 열정적인 파동을 타며 덩실거리는 놀이로 펼쳐지는 극적 표현이다. 따라서 원효의 무애 춤은 요석과의 몸 사랑 나누기에서 나왔지.   

 

 

놀랍게도 크리스틴 콜드웰이 이 진실을 알고 있어. <몸으로 떠나는 여행>의 열쇠 말 세 개가 바로 이거거든. 호흡. 관통과 흡수. 춤. 이 가운데 호흡이 얼른 안 와 닿지? 호흡은 몸 감각의 비밀이야. 그리고 그 자체로 관통과 흡수고. 모든 회복과정에 호흡이 바탕으로 깔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2)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 장에서 몸 심리학의 7가지 전제를 언급한다.   

 

 

제1전제, 부분에는 전체가 들어 있다. 하나가 다치면 모두 영향 받는다. 그래서 성기(性器)는 성기만의 성기 아니다, 라고 말했지. 성기의 침묵은 온 몸과 마음의 침묵이다!  

 

제2전제, 에너지 주고받기가 생명의 요체다. 그걸 이렇게 설명했지. 관통과 흡수의 design, contents가 바로 차별성 있는 각자의 정체성이다.   

 

 

제3전제, 우리에게 있는 에너지는 모두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평가와 해석, 거기서 나온 억압이 모든 병의 근원이다. 어둠과 빛, 모두를 수용하라.  

 

제4전제, 삶의 경험을 적절히 알아차리고 표현해야만 한다. 각성과 고백이 없거나, 거짓인 상태가 늘 문제다. 깨어서 말해야 산다. 

 

제5전제, 생명은 움직임이다. 네 몸을 화석이라 표현했던 거 기억하니? 아기 몸에서 멈춰 서 있다는 말도? 흔들어 깨우고 도닥거려서 키워내야 해.  

 

제6전제, 멈추면 왜곡된다. 단순히 아기 몸 상태에 머무르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성과 의지가 아기 감성과 교류를 차단한 채 자라서 기형이 되거든.   

 

 

제7전제, 모든 경험과 그 표현은 몸의 은유다. 우리의 마음은 몸을 은유로 표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을 떠난 마음은 공허한 거다.   

 

 

ㅇ, 네 마음의 공허는 어디서 왔니, 하고 내가 물었지? 몸에서 후퇴하여 몸 느낌 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관념으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허하다 일러주었지. 아프지만 몸에서 후퇴한 그 순간과 마주서야 한다. 다른 느낌으로 도망가지 말고 그대로 대면해야 한다. 그걸 받아들여야 본디 있어야 할 느낌을 되찾을 수 있어.   

 

 

오늘 무자비하고 도착(倒錯)적인 폭력을 휘둘러 온 자기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인 여성이 찾아왔어. 격분한 상태로 엉겁결에 찌르고 나서 솟구치는 핏줄기를 손으로 막은 채 죽어가는 남편의 눈동자에 어리는 허망함을 목격했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는지 눈물로 고백하더구나. ㅇ아! 

 

자기 남편을 죽이고 긴 세월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온 사람이 자기 몸 느낌 앞에 직면할 수 있다면 너도 용기를 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와락 들었어. 상담 중에 익명 예화로 간단히 네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여성 매우 아파하더라. 자기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며 진심으로 공감해주었어. 

 

ㅇ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 감각, 그 아프고 여린 속살을 다 드러내어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순수 팽창으로서 네 생명을 즐길 수 있다. 똑 이렇게 말하렷다. 

 

“내 몸,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喝!!!

2. 배에 오르기: 중독에서 몸의 역할  

 

 (1) 서두에 시 한 편이 나오네.   

 

 

선하지 않아도 됩니다.

통회하면서, 사막을 뚫고 수백 마일을 가기 위해
무릎으로 걸어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당신의 몸이라는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게 내버려두기만 하면 됩니다.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  

 

도덕과 당위를 내려놓고 생물학적 몸 느낌, 그 부드러운 동물의 사랑을 따르는 게 참 생명 감각이라는 이야기. 이런 주의력은 내가 사람, 특히 마음의 병을 지닌 사람을과 마주할 때 시종일관 유지되는 거야. 의사는 윤리 선생 아니거든. 법관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는 더더욱 아니지.   

 

ㅇ에게 두어 번 말했지. 네가 남성을 볼 때, 몸 이외 기준 또는 요건을 근거로 삼는다는 사실. 저 녀석이 내게 얼마나 섹시한 수컷이냐, 묻지 않고 저 녀석이 어떤 페르소나를 지녔느냐, 먼저 묻는다는 거지. 이는 기본적으로 네 후각이 상처를 입은 탓이다. 코로써 수컷의 몸 냄새를 잘 맡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적 이성에 기대는 거야.   

 

 

그 시각적 이성은 미상불 사회 윤리적으로 획득된 슈퍼에고, 즉 부모자아를 무심코 반영하게 된다. 그리고 네 상처에 대한 병적 반응(reaction)으로 보상적 기준을 장착하고 남성을 조준하지. 결국은 그 기준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이 반복되지만 나쁜 되먹임 구조가 이미 자리 잡았으므로 중독이 풀리지 않는 게지.  

 

이미 겪어서 알겠지만 페르소나는 병이 빚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아. 이렇게 판단하면 거의 틀림없다. 네가 탄복하거나, 욕하게 되는 페르소나는 대개 아파서 형성된 거라고. 대표적인 예가 통속 종교의 집단 페르소나 아니니, 그래서 그들은 환자고....... 네가 나한테 탄복하는 게 있니? 잘 살펴 봐, 그거 내가 아파서 그런 거야.^^  

 

결국 이야기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렇게 된다. 페르소나에 이끌리고 수컷 냄새를 못 맡는 것은 네가 몸 부드러운 암컷이 아니기 때문이야. 흔히 부드럽지 않다면 뻣뻣한 걸 생각하지만 그 반대도 있어. 축 늘어지거나 확 풀어진 상태도 부드럽지 못한 거거든. 두 가지 다 있어, 네겐. 중용적 말랑말랑함(!), 그게 답이야. 

 

 (2) 그러면 중독 현실에서 몸은 무엇인가? 흔히 중독 물질을 복용하는 행태에 초점을 맞추지만 근원적인 것은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경향성이야. 몸을 떠난 마음이 순수 관념으로 마냥 떠돌아다날 수 없으니까 특정 물질이나 어떤 물적 과정에 빙의(!)될 뿐 문제의 핵심은 유체이탈, 심신분리 그 자체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감당할 수 없는 극단적 경험을 할 때 몸과 마음이 함께 있으면 (둘 다) 살아남지 못하겠다 싶어 분리하지. 한 쪽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결국 생존전략으로 마음이 몸을 버리는 거지. 극단적 경험을 할 때 느끼는 것은 감당 못할 몸 감각이거든. 아무리 애써도 헤어날 길 없으니 몸을 포기하는 거야.  

 

 

포기된 몸은 둔해지고 격정 상태의 마음은 의지할 다른 곳을 찾아 헤매게 되지. 자기 몸이 버려지고 둔해지고 죽어가고 그래서 생명 전체가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로서 각성하지 못한 채 자꾸 빠져 들어가는 거야. 어느 순간 각성이 섬광처럼 엄습할 땐 엉뚱한 소릴 하거나, 영악하게 도망가는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반대 방향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극단적 경험이 몸을 자꾸 옥죄면, 즉 투쟁 상황이 계속되면 몸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겠지. 날카롭고 흥분되는 감각은 사실 좋은 것이라도 너무 오래 지속하면 고통으로 변하거든. 그러면 몸은 감각의 내용과 질을 떼어 내버리고 무덤덤하거나 멍해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겠지.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틴 콜드웰은 핵심적 해결책 하나를 슬쩍 떨어뜨리고 간다. “적극적 휴식”이라고 표현한 놀이야. 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놀이 자체에 빠져들면 중독 상태와는 정반대로 마음이 이완되고 몸이 깨어 있게 된다는 거라. 빙고! 몸 느낌 속에서 노다지 노는 생명 감각이야말로 최상의 행복감일 테지.  

 

사실 이 노는 문제, 아주 중요해. 나한테도 끽긴한 화두다. 삶을 놀이로서 즐기는 부분이 너무 약하지 싶어서. 진지한 열정이 놀이의 즐거움을 제압하는 삶으로 경도된 게 아닌가, 돌아보거든. 네가 보긴 어떠니? 내 강의는? 글은? 나와 함께 있을 때 네 느낌은? 같이 논다는 느낌일까, 뭔가 과제를 수행한다는 느낌일까?  

 

너는 어떠니? 삶이 놀이로 받아들여지니? 그러기엔 너무 상처가 많고 무섭고 외롭니? 그렇지, 하긴. 놀다가 상처 받거나, 노는 게 무섭거나, 노는데 외롭다면 놀이가 아니겠지. 그래서 trauma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드는 모양이야. 진지해질수록 상처 받을 가능성은 높아지고.......  

 

 (3) 몸과 마음의 분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 유지, 강화되는가? 세밀한 설명이 이어진다. 네 단계로 나누었어. 참을 수 없는 경험-통제-제거-비동기화의 나선 과정.  

 

 

참을 수 없는 (같은 말이긴 한데 ‘견딜 수 없는’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느낌을 전달해준다고 생각.) 경험은 두려움, 소외감, 무의미(가치)감, 절망감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일으키는 학대, 상실, 사고, 지속적 스트레스 등일 테지. 달리 표현하면 trauma를 일으키는 사건이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싶으면 사건과 그것이 일으키는 감각 자체를 없애지 못하니까 관념으로 감각을 부정함으로써 둔하게 만든다. 이게 통제 단계. 통제보다 조작이란 말이 더 낫다고 봐. 본디 느낌을 버리고 다른 느낌으로 바꾸거나 대칭적 감각이 공존할 때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주된 통제 방식인데, 조작 맞지?  


예컨대 즐거운 감각과 아픈 감각이 같이 있을 경우 아픈 감각만 남기는 거. 네가 그랬어. 사실 이걸 의식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자신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인데 즐거운 감각이 느껴진다면 얼마나 스스로 비참한 생각이 들겠어. 그러니 본능으로라도 조작해야 지탱이 될 테지.  

 

그 다음이 제거. rejection을 제거라고 번역했는데 거부/거절이 조금 더 맞는 번역이 아닐까?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첫째, 가족이 싫어하는 느낌이나 경험을 거부하는 것. 네가 부모에게 막내아이임에도, 오라비에게 동생임에도 아기 느낌을 거부하고 어른 느낌을 지니고 살아 온 것이 바로 그 예.  

 

그 감각을 복원하기 위해 내가 아기 짓으로 마중물 붓는데도 너는 요지부동. 술 취하면 빠끔히 열었다 황급히 닫곤 하지. 왜 아니겠니? 너로 봐선 한평생 그랬는데....... 어디 그뿐이겠어? 그랬다가 또 버림받으면 어쩌나 겁이 와락 나겠지. 공감 백만 제곱이야.^^    

 

실은 나도 아기 짓 하면 자꾸 서늘해져. 아무도 받아준 적 없거든. 하긴 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받아준 적 없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네. 생후 6개월 접어들면서 걸은 아이를 누가 혀 짧은 소리 해가며 안아주고 업어줬겠어. 내버려둬도 저 혼자 크는 아이, 아니 언제나 어른인 아이로 각인되어 있었겠지. ㅇ이 그랬듯.  

 

두 번째 거부는 자신이 살아 있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느낌. 뿌듯함, 으쓱함(우쭐함), 기쁨, 즐거움, 황홀함과 짜릿함(성적인 쾌감),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안온감.......이런 감각이 몸에서 나타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이지. 나는 즐거움 부분이 특히 그런 듯. 앞에서 놀이 이야기하면서 말했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게 아마도 놀이를 거의 다 잃어버려서 그 대체 물질로 택한 것인지도 몰라. 물론 엄마 상실이 야기한 액체자아를 애도하거나 뻣뻣한 ‘척추기립근 자아’를 해방하는 측면이 크지만. 이 점은 ㅇ도 마찬가지이지 싶은데. 하긴 흔쾌히 성(性)을 즐길 수 없다는 면으로 좀 더 날카롭게 경도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술 역시 자기혐오를 강화하는 유력한 방편이야. 사실 술은 궁극적으로 놀이와 즐거움의 감정을 일으키는 세로토닌 활성을 저해하거든. 게다가 기본적으로 처음엔 좋다가 나중에 나빠지고 마는 마약의 속성이 있으니 말이야.  극히 짧은 순간이 지나면 엄마이고 엄마 젖인 술은 그대로 환각이고 망각일 따름.  

 

아무튼 이렇게 거부를 거듭함으로써 몸은 직접적인 체험과 감각에서 더욱 더 멀어지고 우리 삶은 오직 당위적 양자택일로만 영위된다.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 딱 둘. 세계의 눈부신 다양성 한가운데서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몸 느낌을 누리며 살지 못하고 흑백의 황폐함에 사로잡히고 말지.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어.  

 

“.......우리가 자기혐오라는 벌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 위락용 영화를 계속 즐기도록 대형화면의 TV를 감옥 속에 갖다놓은 것과 같다.......”  

 

중독의 와중에 있을 때 우리는 자기가 참된 몸 감각을 대체한 유사 감각으로 유사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세계와 나란히 가지 못해. 그걸 비동기화라 한다. 중독 나선의 마지막 단계. desynchronization을 번역한 건데 탈공시화(脫共時化)가 좀 더 정확할 거야. 내적 경험과 외부 세계가 어긋난다는 뜻이지.   

 

결국은 고립! 그래, 고립될수록 탐닉하게 되지. 왜냐하면 고립은 도저한 외로움과 철저한 공허감을 불러오거든. 고립의 극단에서는 한 인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nothing이 되니까. 그렇게 경계가 무너진 일망무제의 황량함을 견디려면 몸부림치며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야. 그 어둡고 추운 황량함, ㅇ도 익히 아는 바!   

 

그러나 아무리 ‘위락용 영화’에 빠져들어도 그 위락은 감옥 안의 것이므로 참된 위락이 아니다. 우리의 가짜 경계, 상처 받은 피부자아가 만들어낸 대용품일 따름. 참 경계를 되찾아야만 참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참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억눌리고 비틀려지지 않은 몸 감각으로 간절하게 바라고 황홀하게 즐기는 몸 사랑 나누기다.   

 

 (4) 이렇게 우리 삶으로 깊이 들어 와버린 중독은 세월 속에서 어찌 되는가?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되면 풍화되는가? 그야말로 시간이 약인가? 아니란다. 중독은 오히려 우리 연륜과 궤를 같이한단다. 이런! 이럴 수가! 그러나 놀랄 일 전혀 아니지. 네가 그렇고 나도 그렇잖아? 정도 차이뿐. 
 

그러니 세월에 그냥 맡길 일 아니지. 세월과 역동적으로 거래해야 하는 거다. 세월과 더불어 깊어지는 중독의 잠, 시간의 흐름을 밀고 당기며 깨워야 한다. 놔두면 그 관성대로 흘러 결국은 허망하게, 그 허망함조차 깨닫지 못한 채 스러진다. 이리 말할 테지. 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특이점을 업신여겨 날려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리 애써도 20대 몸과 50대 몸은 다르다. 아무리 애써도 5살 때 엄마 느낌과 20살 때 엄마 느낌이 다르듯. 중독이 깊어질수록 둔함은 더욱 깊어지나니. 부질없다 말하지 마라. 그럼 뭐는 부질 있겠나.  

 

 (5) 술에 대한 단상을 보탠다.  

 

내가 나를 버리고 돌아눕는 날

술잔엔 빗물이 고인다 

고독을 동반한 일상들이 술을 권하는 시간
비워져 가는 술병엔

묵은 세월의 먼지들이 자리한다
기억은 있으되 실체가 없음이

굳이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는 아니지만

중독된 고독이 따르는 술잔이라

거부할 수 없음이다 

내가 있고 네가 없음이 슬픔이라면

네가 있고 내가 없음은 무엇일까?

술병은 바람을 안고 어둠 속으로 들고 

나는 너를 안고 추억으로 간다   

 

김경훈의 <중독된 고독> 전문. 술, 아무래도 만만치 않다. 물론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이자 엄마이자 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는 카리스마 있는 야누스거든.^^ 그 없이 사랑과 치유와 예술과 영성과 인생과 우주를 말할 수는 없지. 더러 터무니없이 팽창시키긴 하지만.   

 

술 취해 black out 되어, 황홀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잃는다 해도 그건 대뇌의 일일 뿐이지. 세포 하나하나는 미세하고 떨리는 기억을 모두 간직하거든. 취한 술이 그 다음 아침을 허망한 쑥대밭으로 만들지라도 그건 술만의 행패는 아니야. 인생, 그런 맥락이라면 어차피 허망한 쑥대밭이니까.^^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술의 대칭성에 대한 담론은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사실 그것은 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술을 마주하는 사람의 삶의 정향(定向) 문제다. 시인이 다르고 수도자가 다르다. 심지어 의상이 다르고 원효가 다르다. 난 어때야 할까? 그리고 넌 어때야 할까? 중독이라면 멈추고 놀이라면 간다. 으하하하, 喝!  

 

3. 원-투-스리 왈츠: 중독 패턴의 몸   

 

 

 (1)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중독인 줄 모르고 무디어진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볼 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산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샤워 생각을 한다. 샤워하면서 아침 식사 생각을 한다. 아침 식사하면서 일 교시 수업 생각을 한다....... 요컨대 늘 몸은 현재에 움직이고 마음은 미래에 가 있다. 
 

아니면 눈을 떴을 때도 옛날 그 일 생각. 샤워하면서도 옛날 그 일 생각. 아침 밥 먹으면서도 옛날 그 일 생각....... 요컨대 늘 몸은 현재에 움직이고 마음은 과거에 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 여기서 움직이고 있는 몸의 감각에는 둔하고 멍하다. 이게 바로 중독이다!  


그리고 보면 중독은 개인적인 병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질환 상태지. 이 지경이므로 큰 스승들께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밥 먹을 땐 밥 생각, 똥 눌 땐 똥 생각하는 게 道다. 진실이 이러하거늘 우리 마음은 왜 늘 몸을 떠나는 걸까? 인간인 한 두렵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 두려움을 직면하기 너무나 어려우니까! 
 

우리의 출생 자체가 사고요 trauma다. 그리하여 어려선 사는 게 두렵고 커선 죽는 게 두렵다. 이 존재론적 중독 취약성에다 구체적인 삶에서 서로 주고받는 상처들이 보태지면 꼼짝없이 중독으로 간다.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에 다시금 중독을 이렇게 정의한다.  

 

“중독이란 계속된 욕구 박탈 때문에 어린 시절에 형성된 인간의 고정된 신체반응이다.”
 

 (2) 중독은 다섯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이 요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는군. 내용 자체가 어렵거나 특별하지는 않지? 반복한다, 발달이 정지되어 있다, 만족스럽지 않다, 자체 완성도가 떨어진다, 남 보기 불편하다, 이 다섯 가지. 몇 마디 보태는 것이 필요한 부분만 입을 대 볼까? 
 

발달이 정지되어 있다는 부분은 앞서 연륜을 따라 흐른다는 부분과 맞지 않아 보이지. 여기 부분은 질적인 차원이고 앞부분은 양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면 쉬울 거야. 나이 들면서 생활의 양상이 복잡해질 때 그 모두를 커버하기 위해 중독 행태가 추가된다는 말. 그걸 질적인 성숙이라 할 수는 없을 테지. 
 

만족스럽지 않다, 자체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 둘이 비슷해 보이지? 이런 차이야.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참 몸 감각이 아니어서 그런 거고, 자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대용품이어서 그런 거야. 전자는 가짜니까 찝찝하단 얘기고, 후자는 대용품이라 아무리 해도 함량미달이란 얘기지.  

 

 

 (3) 3장 시작할 때 통시적(diachronic)측면에서 일상의 중독을 말했지. 크리스틴 콜드웰은 공시적(synchronic)측면에서 두 가지를 말해. 하나는, 이성을 동원해서 오로지 생각(사유)에 몰두한다는 것. 느낌이나 행동을 가두고 사유에만 매달려 개념화, 분석, 전망, 합리화, 비판과 재 비판을 거듭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거야.

* 다시 보니 이 용어 설명이 필요할 듯. 통시적(diachronic) - 시간의 순서를 따라 살펴본다는 뜻. 공시적(synchronic) - (시간 흐름과 상관없이) 공간적 지평을 살펴본다는 뜻.  

 

꼭 이렇게 조직적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마주해야 할 대목에서 이성으로 마주하는 습관 역시 여기에 속하지. 이건 내가 몇 번 너한테 지적했던 부분이야. 예컨대 내가 너와 관련한 글을 써놓고 보여주며 느낌을 묻자 ‘신문에다 칼럼 쓰셔도 되겠어요.’ 이렇게 대답했거든. 헐~^^  

 

느낌을 따돌리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는 거라. 특히 자신의 아픔과 마주해야 하는 몸 감각 범주에 드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잽싸게 도망가는 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반응에 익히 공감해. 그래서 그 때마다 내 가슴이 아프고. 그게 나였고 지금도 얼마만큼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예 문맥을 끊거나 바꾸지. 상대방 말을 ‘씹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인데, 스스로 알고 있지? 아무 때나 무조건 그러는 게 아니거든. 패턴을 잘 살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내력을 알게 돼. 물론 이 문제 해결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논할 게 아니다. 나중에.......   

 

 

몸에서 떠나는 다른 방법 하나는 주변 조건에 극단적으로 신경 쓰는 거지.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인, 사회제도, 사건사고, 정치적 이슈 등등. 자신의 직접 경험과 거리가 먼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몸은 소외되는 거야. 독서, 여행, 음악이나 영화 감상 등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자신을 따돌리는 방편이 되지. 요주의!!! 
 

두세 가지 너나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자. 우선 타인. 나는 타인을 자기 파괴적으로 배려하느라 자신의 몸 느낌을 억압함으로써 우울증 중독에 빠졌지. 그럼 너는? 그런 부분이 분명히 없지 않은데 나처럼 우울증에 빠진 않은 거 같진 않다, 그렇지? 뭐야, 그럼? ㅇ 스스로 생각해 봐.  

 

여행 이야기 해 보자. 언젠가 얼핏 했지? 아, 어딜 가는 게, 아, 그 이전에 여행을 떠나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했단 말. 여행은 무엇인가, 내 몸에. 그러고 보니 몸 느낌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니 몸 느낌을 다른 느낌으로 대체하는, 마음의 특정한 행로를 좇아 여행하는 거구나. 이러면?.......  

 

 

그 다음, 사회정치적 관심. 물론 이는 지성인인 한 기본 의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가해진 실존적, 물리적 억압에는 무딘 채로 거대한 억압에 집중하는 일이 중독이 될 가능성은 너무나도 높다. 그 증거? 즉각적이고도 격렬한 분노, 그리고 그 반대편의 싸늘하고도 날카로운 비판. 전자는 극단의 감정, 후자는 극단의 이성. 

 

 (4) 몸 자체는 어떤 식으로 감각을 탈락시킬까? 두 가지. 하나는 숨을 멈추는 것이지. 깊은 호흡이 느낌을 선명하게 한다는 사실을 거꾸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와. 아, 숨을 억누르면 느낌이 둔해지는구나. 두려울 때 숨죽이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 아마도 호흡을 주관하는 자율신경의 연계작용이 차단돼서 그런 걸 거야.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 하나는 당연한 거고, 그래서 실제로 크리스틴 콜드웰이 핵심적 임상 실천 사항으로 꼽는데, 호흡을 회복하여 감각을 회복한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숨을 멈추는 작업도 치유를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 어떤 의미와 기전일까?  

 

내 생각엔 호흡 회복보다 먼저 의도적 호흡 정지가 선행돼야 할 듯. 왜냐하면 무심히 하는 감각 죽이기 행동을 유심히 함으로써 중독 사건을 재발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야. 말하자면 감각 죽이는 시공을 재현함으로써 중독 사건을 불러내는 거지. 각성을 이끌어내는 작업이야.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숨을 멈추는 건 죽는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건 궁극적으로 무디어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몸을 떠난다는 것이지. 작은 죽음을 유심히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큰 죽음, 즉 중독을 극복하는 거. 으, 이 아니 살 떨리는 radical한 동류요법(同類療法)이더냐?  

 

몸 감각이 탈락되는 다른 하나의 유형은 자세가 무너지고 구부정해지는 거. 앞에서 축 처지고 확 풀린 것도 부드럽지 못한 거라 말한 적 있지? 비슷한 맥락이군. 물론 여기선 우울증의 예로 든 것인데 도파민이나 노르아드레날린 부족, 임맥(任脈) 약화와 관련된 증상이라고 풀 수 있겠네. 내 이론상.^^ 
 

다른 면에서 보면 좌우 비대칭, 상하 부조화, 비만, 수척 등과 같이 몸 지형학적 균형이 깨진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성 학대 받은 여성의 하체비만이나 나의 만성적인 저체중이 바로 그 예. 또 몸 발달학적 이지러짐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 ㅇ의 아기 몸이 바로 그 예.   

 

 

 (5) 중독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구사하는 방어 전략은 어떤 게 있나? 3F-Fight, Flee, Freeze. Fight- 오소리, 곰. Flee- 가젤, 들개. Freeze- 토끼, 카멜레온, 주머니쥐, 거북. 너는 오소리 조금에, 가젤 많이, 토끼 웬만큼? 나는 오소리 조금에 거북 많이? 으흐흐흐.......  

 

 (6) 이런 문맥에다 크리스틴 콜드웰은 거의 결론에 해당하는 메가톤 급 통찰을 또 슬쩍 던진다. 불교적 지혜다. 원효와 가깝다. 내용을 매끄럽게 요약하면 이렇지.  

 

☸ 흔히 고통은 제거하고 환희에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 환희(오르가즘)가 그러하듯 고통도 지나간다. 둘 다 무상하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몰아 통제하려 들지 말고 구애(拘碍)없이 함께 흘러가야 행복하다. 내용에 집착하지 마라. 과정 자체를 즐겨라. ☸  

 

이 유장한 철학에 꽃 한 송이 올려놓으니 바로 이 예문이렷다.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그것을 탐닉하는 것만큼 중독적일 수 있다.” 
 

아이스크림에 매이지 마라. 먹고 싶으면 먹어라.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라. 자유로운 선택, 그 몸 감각에 맡겨라. uncertainty의 세계에서 놀아라. 그뿐이다. 喝 !!!  

 

 (7) 크리스틴 콜드웰과 디디에 앙지외의 조우. 

  

“우리의 경계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스스로를 감싸는 기능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우리를 유지시키고 연료가 될 것은 안으로 흡수시켜야 한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막이 강해야 하고 흡수를 위해서는 밖을 향해 기꺼이 열려 있어야 한다.”  

 

쿵! 디디에 앙지외의 국화빵이군. 경계는 서로 다른 두 개체 사이, 또는 자아와 외부 조건 사이에서 융합(결속)과 고립의 극단 아닌 접촉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접촉 사건의 핵심은 투과다. 이렇게 말하지.  

 

“나는 여전히 자신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먹는 달콤한 아이스크림(본문에는 쿠키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고려해서 바꿨어. 잘했지?)이 된다.......내가 투과 상태에 있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잠시 동안 나는 그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달콤한.......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적극적으로 삶을 선택하여야 이루어진다.......투과될 수 있는 상태는 우리 기쁨의 대부분이 머무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의 기쁨과 타인들의 기쁨이 우리 안에 공존한다. 우리의 기쁨은 아이스크림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경험에 기꺼이 투과될 때 찾아온다.”  

 

투과, 뚫리는 거다! 흠씬 받아들이는 거다. 단순히 수동적이기만 한 게 아니지? 왜냐? 빨아 먹으니까! 그래서, 그리하면 내가 그 경험의 “느낌 안에서 삶의 중심이 된다.” 수동과 능동의 절묘한 합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동을 품은 능동,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능동을 품은 관계의 장(場)에서 우리는 삶의 참된 주체가 된다!  

 

어허, 이거야말로 여성 중심으로 보는 몸 사랑 나누기네. 당연하면서도 새삼 놀라운 insight다! 그러니까 더 큰 맥락에서 말하자면 ‘남성’의 관통은 ‘여성’의 흡수(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구만. 관통을 공격당하는 것으로 느끼는 상처에서 놓여날 관음보살의 품이 열렸구나, 더덩실. ㅇ, 득도(得道)?!  

 

ㅇ아! 온 영혼으로 내가 널 다시 낳는다. 너는 그 아픈 아기, 다친 아기에서 성한 어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능동적으로 치유의 흡수를 선택한다. 온 영혼을 부드럽게 활짝 열어 깊은 슬픔을 빨아들인다. 슬픔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그 슬픔으로 움직이고 채워지고 투과되는 몸 느낌 안에서 삶의 주체가 된다!   

 

 

ㅇ아! 온 영혼으로 네가 나를 낳는다. 나는 존재론적 우울감에 휩싸인 아기에서 성한 어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관음보살의 품 안에서 치유의 관통을 선택한다. 온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 깊은 우울을 꿰뚫는다. 우울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그 우울로 움직이고 채워지고 투과되는 몸 느낌 안에서 삶의 주체가 된다!  


4. 몸의 회복: 무빙 사이클  

 

 (1) 루미의 한 마디가 영혼의 창을 세차게 두드린다.  

 

“어째서 오늘 아침에 깨어나지 않는가?”  

 

크리스틴 콜드웰이 제시하는 중독 회복 프로그램(moving cycle)은 각성, 고백, 수용, 행위의 네 단계. moving cycle의 전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중독을 통과하는 것이다. 느낌을 통해 감각을 통해 그 낡은 한계를 뚫고 우리의 집인 몸 안으로 더욱 파고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하나의 귀향(歸鄕) 경험이다!”   

 

 

사실 중독만 그런 게 아니야. 모든 고통은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 말고 다른 치유책이 없지. 잊어서도 피해서도 억눌러서도 쫓아내서도 안 되는 거거든. 왜냐하면 도저(到底)한 현실이며 철저(徹底)한 감각이기 때문이야.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모든 우회는 답이 아니야.  

 

물론 우리 인생이 정답의 행렬인 것은 아니지. 오히려 오답이 더 많을 거야. 심지어 무답(無答)까지. 그래서 누구도 자신 있게 언제나 고통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진 못해. 모두 어느 정도 중독인 채 허둥허둥 비척비척 살아가지. 어제 밤, 술에 절여서 기억을 송두리째 내다버리고 오늘 아침 허망무인지경이 된 내가 그러하듯.  

 

술. 참으로 오랜 세월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사이다. 이 시간 문득 술을 부둥켜안고 살아 온 자신에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냥 명정(酩酊)의 세월 저 사십년 동안 영혼과 육신을 적시며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간 그 소리 자취를 있는 그대로 듣는다. 손바닥을 마주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술 속으로 죽기 살기 걸어들어 갔다고. 술이 나를 가차 없이 투과해 만취 자아가 구축되었다고. 술이 빚은 고통은 바다 같고 술이 빚은 환희는 산 같다고. 세포 하나하나 술 느낌을 받아들인다. 내가 삼킨 술, 술이 삼킨 나. 문득 알아차리고 숨을 멈추듯 문득 알아차리고 술을 멈춘다면.......  

 

 (2) moving cycle 1단계: 각성  

 

술이 온몸을 감은 까닭에 우울과 불안은 잠시 누워 있다. 술이 푸시시 일어나 떠나면 우울과 불안은 연기같이 스르륵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 우울은 물귀신처럼 온 영혼을 끌어내리고 불안은 바람처럼 온 몸을 흔들어댄다. 살아 있으나 죽은 시공(時空). 이때 모든 살갗 세포에 소름을 돋워 산 채 포(脯) 뜨는 날카로운 감각과 접촉한다.  

 

 

너무나 아파서, 그 괴로움 때문에 중독으로 가지. 견딜만하다면 누가 중독에 영혼 팔겠나. 하지만 너무나 아프다는 것은 아픔 자체의 크기라기보다 아픔에 대한 자세 문제. 그 자세가 괴로움을 선택한다. 괴롭기로 한다, 이 말! 아픔은 열락을 품고 있는데 우린 늘 겉에서 맴돌지. 아픔을 꿰뚫고 들어가야 해. 아, 그 아픈 각성이라니!  

 

결국 각성은 용기와 한 묶음이 된다. 용기는 단순히 이성과 의지 문제가 아니지. 감성의 울림과 함성이 없다면 용기는 냉혈의 에너지일 따름. 그런 싸늘한 에너지일 바에야 차라리 따뜻한 중독이 낫지 않겠나. 따라서 온기를 지닌 인간적 각성이려면 자기 어둠과 아픈 감각에 대한 정서적 지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중독? 어둡고 아픈 상태 맞지. 그런데 뭐? 잘못이고 나쁘고 그래서 뜯어고쳐야 할 죄악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건 그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럴만한 자신의 삶이다. 그래, 죄악이라 하자. 그러나 그 누가 죄악에서 온전히 자유롭겠나. 죄악이 현실이고 죄악이 존재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래서 따스한 접근이 맞지 않겠나. 

 

ㅇ아! 자기학대 안 하는 게 올해 화두랬지. 어디에 어떻게 어둠과 아픔이 들어와 있든 조건 없이 지지해주어야 한다. 따스한 지지가 뜨거운 용기의 안내자다. 변화가 요청되는 네 삶에 대해 명징한 각성이 이루어지려면 상처 받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관세음의 손길이 필요하다, 닫힌 몸을 핥아주는 에스키모 어미의 혀가 필요하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가 더 맞다. 생명현상에 대한 통찰이 어찌 이성만으로 이루어지랴. 이런 점에서는 크리스틴 콜드웰도 서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섬세하게 몸 감각, 해석/판단 유보, 감사, 놀이 들을 말함에도 전반에 넘쳐흐르는 이성적 분위기는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고 있거든.   

 

 

아쉬운지고.......  

 

 (3) moving cycle 2단계: 고백  

 

몸을 떠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를 자기 경험에 ‘책임지는 행위’라고 말하지. 즉 더 이상 상처 받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자율적 어른이라는 선언인 셈. 타인에게 상처 받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삶은 나의 것이므로 이 말 맞지.   

 

 

하지만 이 부분 또한 시종일관 진실과 책임을 강조하는 어법에서 서구적 이성의 짙은 체취가 풍긴다. 기본적으로 계약 문화에 터 잡은 개별주의적 책임론이 냉정하게 진실을 지향하는 힘을 지닌 거 맞다. 그러나 따스한 정서적 지지가 더 깊고 넓은 진실을 이끌어낸다는 건 곱으로 맞다.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여 ‘감히’, 또는 ‘능히’ 자기 삶에 대해 거짓말을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수(中手) 이하다. 고수(高手)는 ‘차마’ 거짓말을 못하게 하는 거다. 그게 바로 정서적 지지다. 다만 해석과 판단을 유보하는 정도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다. 지금 처한 현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 쳐줄만하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야지.  

 

그러면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뭔가? 첫째, 자신이 몸 감각에서 떠나 있다는 어둠의 현실을 드러내 놓고 인정함으로써 몸 감각을 되찾는 일에 명실상부한 주체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는 뜻. 둘째, 어둠의 맞은편에 빛의 현실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동시적 이중성, 즉 대칭성을 인정한다는 뜻.  

 

크리스틴 콜드웰의 통찰이 여전히 서구적 한계 안에 있어서 위 두 가지를 좀 더 명확히 한 거야. 그는 책임이란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데 결국은 모든 책임을 환자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서구적 정신치료의 타성처럼 느껴져서 불편하더라. 하여 책임이란 구속적 이미지보다는 주체(성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지.  

 

정신치료에서 진실의 동시적 이중성, 즉 대칭성이 요체(要諦)라는 사실을 크리스틴 콜드웰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물론 내용 곳곳에 그런 함의가 들어 있긴 하지만. 관통과 흡수가 대표적인 예. 그래도 이 점을 돋을새김 하는 게 불가피하다 싶어 일부러 이야기한 거임.  

 

ㅇ아! 아직도 많은 진실이 네 몸속에 웅크리고 있다. 이따금 흘러나오는 신음 같은 소리가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곤 한다. 현실 삶의 조건에 밀려 치유는 뒷전이 된 채 시간은 흐르고, 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은 더욱 아파 오고, 본디 생명 감각을 복원하는 진실어린 고백은 언제나 강이 되어 흐르려나.......   

 

진실의 고백이 지연되거나 거부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경계(피부자아)가 무너져 황량한 공허감에 과도하게 휩싸여 있다’가 그 하나. ‘가짜 내지 대용품 경계가 너무 뻣뻣해서 소통이 안 된다’가 그 둘. 이 두 과도함은 정서적 지지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전달되지 않아서 빗장을 열지 못하는 걸 거야. 
 

정서적 지지를 해주면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원시경계가 복원되지. 마치 봄의 온기가 어린 싹을 틔우듯. 여리지만 싱싱한 생명 감각은 성장이 자신의 숙명이자 환희임을 알아. 자신에게 거룩한 과제가 있다는 걸 안다는 거지. 맑은 문제의식이랄까,  주체적인 생명의지랄까, 뭐 그런....... 

 

 (4) moving cycle 3단계: 수용  

 

고백을 통해 명징하게 들어선 문제적 감각들을 온 몸으로 안아 들여 도닥이고 키워서 사랑의 생명장(生命場)으로 전화해내는 단계다. 문제감각은 본질적으로 격정(emotion)이지. 오로지 감정뿐인 아기가 상처를 입을 때 보이는 반응이 격정이거든. 이를 본디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 가장 먼저 할 일.   

 

격정의 깊은 자리엔 수치심이 있다. 수치심은 존재론적 자기부정이야. 스스로 모독하는 거지. 그래서 수치심은 자기 몸을 무시하고 외면한다.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몸은 전체적으로 감각과 균형을 잃게 되지. 지형학적로 발달학적으로 왜곡된다는 말이지. 크기, 모양, 동작(기능)에서 이울고 서툴러지는 거야. 
 

그리고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비판, 특히 성적인 자학은 몸의 특정 부분을 억압한다. 과도한 긴장, 탈 감각, 통증, 성장 지체, 기능 장애, 염증의 양상으로 나타나지.  커져야 할 곳은 안 큰다, 줄어들어야 할 곳은 안 줄어든다, 동그래져야 할 곳은 안 동그래진다, 맨살 아니어야 할 곳은 맨살이다, 탄력성 있게 움직여야 할 곳이 멍한 채 그냥 있다.......  

 

격정이 앗아가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몸 사건은 바로 호흡. 호흡을 멈춤으로써 몸 감각을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격정을 본디 감정으로 되돌리는 데는 호흡의 복원이 필수적이다. 호흡 속에서 감각이, 감각 속에 호흡이 서로 살리고 살아나면 격정의 독(毒)이 서서히 풀린다.   

 

 

호흡은 생명의 기운이다. 생명의 기운은 영(Spirit, 고대 헤브라이어로 Ruach(루아흐))이다. 영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호흡은 사랑이다. 아, 물론 크리스틴 콜드웰의 논리인데 뭐 그다지 나무랄 일 아니네. 호흡에 관통과 흡수라는 통찰을 적용하면 얼른 공감할 수 있겠지. 
 

호흡을 통해서 격정을 해독(解毒)시키는 걸 크리스틴 콜드웰은 “(격정의) 느낌을 완성으로 승화시켜 떠나보낸다 또는 비운다.”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비우면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을 회복하면 중독이 풀린다. 왜냐하면 중독은 사랑의 상실 또는 실패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게 수용 과정의 고갱이.  

 

 (5) moving cycle 4단계: 행위  

 

앞의 세 단계가 자신의 내부 문제라면 이 행위 단계는 세상과의 관계 문제다. 깨어서 주체성을 회복하고 온몸으로 사랑의 감각을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면 그 삶의 에너지를 세상과 소통하는 데 써야겠지. 자기 팽창으로 타인과 네트워크를 이루며 통섭(通躡)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치유 공동체랄까.......

* 이전에 통섭에서 섭을 攝이라고 썼는데 좀 더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올라간다는 뜻을 지닌 躡으로 바꿨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해서 함께 질적인 도약을 한다는 뜻을 지닐 테니 딱 좋아.^^   

 

 

행위는 결국 사회적 실천일 테지. 녹명(鹿鳴)이란 말 아니?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자기 혼자 허겁지겁 먹지 않고 먼저 청아한 소리를 내어 이웃을 부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지. 고통에서 헤어난 자가 이웃과 더불어 그 행복을 나누지 않는다면 사람 아니잖아. 나도 너도 이 이치 안에서 사는 게 맞다, 그렇지?  

 

 (6) 크리스틴 콜드웰은 치료자가 하는 치유(intention) 5가지, 개입 5가지를 말한다. 뭐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 고로 풀이를 생략함.  

 

 

 (7) 아, 드디어 제1부의 마지막이자 이 책 전체의 지도리인 관통과 흡수! 나한테 수도 없이 들어 온 말이렷다. 원자끼리의 미시적 관계에서부터 우주 전체의 거시적 관계 방식이 바로 관통과 흡수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인간의 숨쉬기, 먹고 싸기, 몸 사랑 나누기, 말 주고받기, 마음 나누기, 이 모두가 그렇고.  

 

관통은 내 경계를 날카롭고 딴딴하게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경계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거다. ‘남성’만 그런 게 아니다. 공감, 이해, 배려, 위로, 격려의 마음도 그래야 한다. 사랑 없는 관통은 공격일 뿐이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관통은 시원하고 짜릿한 애무다. 따라서 그래야 할 때 그리하지 않으면 사랑을 유기(遺棄)하는 거다.   

 

 

흡수는 내 경계를 둥글고 부드럽게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경계 안으로 빨아 들여오는 거다. ‘여성’만 그런 게 아니다. 공감, 이해, 배려, 위로, 격려의 마음도 그래야 한다. 사랑 없는 흡수는 탈취일 뿐이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흡수는 쫄깃하고 황홀한 애무다. 따라서 그래야 할 때 그리하지 않으면 사랑을 유기하는 거다.   

 

 

주체적으로 관통하지 않으면 빨려 들어간다. 주체적으로 흡수하지 않으면 쑤시고 들어온다. 그건 내 삶이 아니다. 끌려 다니는 거다. 거기엔 참 감각이 없다. 가짜 감각에 중독된 거다. 네 스스로 느끼고 있는 문제지? 나도 마찬가지야, 실은. 그 동안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좀 꺼내 볼까.......  

 

난 흡수 감각과 에너지보다 관통 감각과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약해. 그렇지? 왜냐하면 그게 다름 아닌 만성우울증이거든. 넌 물론 전혀 다를 수밖에 없겠지. 흡수 감각에 커다란 trauma가 있으니까. 그럼 관통 감각과 에너지는 어느 정돌까? 나름 자학 경향 없진 않지만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낸 거 보면 분명 대단한 측면 있지. 
 

하지만 다른 인간관계에서 보면 관통도 잘 안 되는 것 같지?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공감해. 그래서 치유가 필요한 거 아니겠어? 관통이 두렵고 겁난다면 얼어붙는 건 당연지사. 깊고도 많은 내 도움, 그리고 네 스스로 애씀이 필요하겠지. 잘 되어가고 있어, Abracadabra!  

 

moving cycle 각 단계마다 관통과 흡수는 어떻게 나타날까?   

 

 

각성 단계. 집중적 주의=관통: 폭넓은 주의=흡수. 크리스틴 콜드웰의 집중적 주의는 내가 말한 남성적 중심시각과 같은 맥락이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지. 나는 이걸 주의력 범주에 넣지 않았지. 집중력이라 하고 주의력과 구분했잖아. 실제로 남자(아이) ADHD 환자 중에 집중력 뛰어난 경우가 드물지 않거든.  

 

 

폭넓은 주의는 여성적 비-중심시각과 같은 맥락이야. 전체를 통째로 빨아들이듯 보는 거지. 난 이것만을 주의력이라 한 거고. 아마도 집중력을 미덕으로 삼는 이 시대의 ‘초일극집중구조(超一極集中構造)’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집중을 주의로 여기지 않는 태도로 나타난 듯. 하지만 둘 다 필요하다는 결과에선 큰 차이가 없겠지?  

 

고백 단계. 고백은 말하기인데 말하면 듣기 마련. 말하는 건 관통이고 듣는 건 흡수야.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들음으로써 자성(自省)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거라. 말함=마음 움직임: 들음=마음 움직여짐의 대칭. 말함도 들음도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서로 넘나들지. 꽉 붙잡고 있지도 않고 확 밀어내지도 않고, 함께 움직임을 주고받지.   

 

 

수용 단계. 수용은 몸 전체로 드러내기지. 건강한 사랑의 주체는 자신의 알몸을 보여서 그 빛을 마주선 주체에게 관통시킨다. 또한 마주선 주체의 빛을 온몸으로 흡수한다. 알몸을 한껏 드러내지 못하고 한껏 받지 못하면 제대로 된 수용이 일어나지 않아. 물론 치유 과정에서 우선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행위 단계. 사회적 삶에서 내가 어떻게 내 생명의 빛을 관통시키고 더 큰 빛을 흡수하여 더욱 풍요로워질 것인가. 내가 세계를 바꾼다. 나는 다만 연주자가 아니다. 나는 세계를 소리 짓는 작곡가다. 나는 다만 길 위를 달리지 않는다. 내가 달리면 길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바꾼 세계가 기어이 나를 바꾼다.  

 

내가 가진 punctum이 세계의 studium을 꿰뚫어 특이점을 형성하고 그 구멍을 통해 세계의 역동적 파동이 밀어닥칠 때 “엉덩이를 들어 올려 춤추며” 한껏 받아들인다. 질펀한 우주 쇼가 벌어진다. 원효의 사자후 이러하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내가 그 하늘을 받칠 기둥이다!”  

 

喝!!!  

 

 (8) 제1부가 끝났다. 제2부는 몸 사용의 구체적 방법론인데 이걸 글로 대신하긴 좀 뭣하다. 어쩌지? 묘수를 짜내야 할 텐데....... 
 

아무튼 여태까지 보낸 편지를 읽고 새길 때, 주의할 것. 소리 내서 읽어야 한다!  코앞에 생생하게 말과 몸으로 전달해도 잘 안 움직인 너였는데 하물며 글이랴. 만일 소리 내서 읽지 않으면 내가 녹음해서 보낼 거야.^^ 자, 가슴에 손 얹고 서약.  

 

“내 몸으로가 아니면 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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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떠나는 여행 - 중독치유와 새 삶을 위한 몸 중심 심리요법
크리스틴 콜드웰 지음, 김정명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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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년에 나온 책인데 저는 뒤늦게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선 자리에서 skim 할 때, 아, 이 책 만만치 않구나, 했습니다. 역시나 읽을수록 곰곰 생각하게 하는 바람에, 적어도 제겐 이 책이 최근 읽은 그 어느 책보다 무게가 있었습니다. 본문만으로 따지면 200쪽도 안 되지만 통독하는데 꽤나 긴 시간이 들었습니다. 한 문단에 해당하는 한 문장이,  한 chapter에 해당하는 한 문단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이 책이 각별한 인연으로 엮인  연유를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은 제가 이 책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야겠습니다.  제 자신과 환우의 구체적 정황을 떠올리며 치유 차원에서 읽었다는 말입니다. 본문과 구체적인 사람을 일치시키며 읽었기 때문에 관통과 흡수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이 책에 담긴 사상과 내공이 가히 압도적인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틱낫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과 치유를 했다고 하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유장하고 해체적인 불교사상에다 여성 특유의 직관과 생명감각을 버무려 넣었습니다. 영어적 표현이 감당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은 어휘가 출몰하는가 하면 고도로 절제된  분위기 가운데서도 화들짝 오감을 깨우는 묘사가 나타나 순식간에 핵심을 꿰뚫기도 합니다.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춤을 추어야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전광석화처럼 온 몸을 관통하는 지적 오르가즘이랄까....... 글쎄요, 물론 저만의 punctum일 수도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이런 순간에서 책(libre)은 텍스트(texte)가  되는 것일 테지요. 살아 움직이는 인연의 꽃을 피워내는 특이점이자 경계 사건입니다. 뜻하지 않은 은총이지요.  

2.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독이란 중독성 물질을 복용하는 식의 행동 양태라기보다 우리 몸이 참다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그 직접경험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말한다. 어느 중독성 행태에서든 그 출발점은 우리가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중독이란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경향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지금 거대한 중독문명 한 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끼들끼들 웃으며 허공에 붕 뜬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중독은 우리가 자기혐오라는 벌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 위락용 영화를 계속 즐기도록 대형화면 TV를 감옥 속에 갖다놓은 것과 같다." 

준열하기 그지없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즐기고, 기대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감각이 실제 느낌이 아니라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래서 우리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어떻게 나선구조 속에서 확대재생산 되는지 그 이치와 과정을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 놓고 있습니다.

나아가 몸을 되찾는 일을 각성, 고백, 수용, 행위의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례까지 들어가며 조근조근 이야기하지만 언어의 깊이는 대단합니다. 부분 부분 모호한 표현이 없지 않으나 번역 문제도 적지 않은 만큼 독자가 행간을 살펴 읽으면 오히려 그래서 더 풍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독과 치유 과정에서 호흡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호흡의 멈춤을 어떻게 치유 과정 안에 위치 지을 수 있을까, 새로운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과정에 걸쳐 관통과 흡수 문제를 매우 감각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30년 이상 제 사색과 강의와 글쓰기를 이끌어 온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3. 요컨대 이 책은 인간인 한 본능적으로 그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중독의 문제를 몸 중심으로 심도 있게 다룬 특별한 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중독하고 무슨 상관이람?" 하시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독은 이미 우리 안에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아니 중독은 우리를 넘어 범람하고 있습니다. 종당 중독은 중독 자체도 넘어서 문명을 깡그리 말아먹을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중독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몸을 되찾는 일(Getting our boddies back: 이 책의 원제목)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몸을 되찾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된 생명감각을 되찾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입니다. 선입견 내려놓고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끝에 이르면 저자의 마지막 말이  소리 없는 벼락이 되어 그대 가슴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계속 걸어라.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쯤 있는지 찾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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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자아
디디에 앙지외 지음, 권정아.안석 옮김 / 인간희극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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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아주 오랜 동안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삶의 뒤집혀 맞물린 뫼비우스적 연장면에서 사십 대 중반에 의학, 우리 사회에선 모두 한의학이라 이름하는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상담치료 하는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남 없이 그 길을 낯설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한의학과 한의사에 씌운 편견의 굴레를 벗기고 나면 그닥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폭넓고 깊게 마음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요.  

그 동안 제가 깊게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우울과 불안, 특히 우울이었습니다. 한의사로서  어떤 치료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차별적 지평을 발견하기 위해 지난 십 년을 꼼짝 않고 그 질문을 궁굴려 왔습니다. 나름대로 한약, 침, 수기(手技), 상담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피부와와 마음을 하나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피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마음의 문제와 마주세워 소통과 통섭(通攝)을 꾀하는 안목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사회, 특히 피부 특화해서 '대박나는' 의사, 한의사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개념, 즉  피부=미용이라는 등식에 대한 저의 비판적 선입견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초저온 공기 요법으로 피부온도를 섭씨 0도로 낮추어 전신의 회복 기전을 급격히 활성화함으로써 각종 질환, 심지어 우울과 불안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확 뚫리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어허! 

그 동안 마음의 문제는 다름아닌 "경계"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몸의 문제 또한 그렇고, 그 둘은 결국 하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찰나에 알아차리게 된 계기였습니다. 피부는 면역의 최전선이고 면역은 나와 나 아닌 존재의 구별과 관련된 문제이니 갈 데 없이 피부는 내남의 "경계" 그 자체이자 의미입니다. 이 의미가 바로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여러 층과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상호작용 아닌 것은 없으므로 부득불 "경계"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이 깨달음의 와중에 눈에 벼락처럼 들어온 책이 바로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입니다. 제목만으로 이미 제게는 천만 마디 말 이상의 울림을 주었습니다. 내용 여하와 상관 없이 크낙한 깨달음으로 제 가슴을 열어젖혀버렸습니다. 책을 대하면서 저자가 정신분석의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빌헬름 라이히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 사람의 피부와 라이히의 근육은 반드시 만나겠구나, 예감은 적중했고, 거기서 사유는 일망무제로 그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책, 어렵습니다. 거침없는 영역 가로지르기와 전문 용어 쓰기, 과감한, 그래서 독자에게는 불친절한  압축과 생략, 게다가 처음부터 이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어서 드러나는 비조직성, 마지막으로 지은이에게 함몰되어 허위적거리는 듯한 번역.......사실 웬만한 프랑스어 학부 전공자 이상의 프랑스어 감수성을 지녔다고 '자뻑'하는 저조차 도무지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문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어렵거나 모호한 경우, 차라리 원어 낱말과 문장을 괄호 속에 넣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눈에 띄거나, 뜻이 잘 들어오거나 하는 부분부터 발췌해 읽으면서 넘어가더라도 좋은 책임은 분명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말고 재독을 거듭하면서 문맥과 행간을 간취하면 책의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할 것입니다. 이런 유의 프랑스 책을  만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번역자들이 치밀하고 농익은 모국어로 다시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납니다.  

3. 지은이의  전복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자아는 피부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피부는 자아다."입니다. 사실 이 말만으로도 전복적입니다. 피부를 그런 맥락으로 읽어 본 예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은이는 주어와 술어 위치를 바꿈으로써 더 한층 날카롭게 나아갑니다. 피부가 자아의 부분집합이 아니고 자아가 피부의 부분집합인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명제로써 한 순간에 피부는 광대한 은유가 됩니다. 피부이자 피부를 넘어선, 현실과 상상을 가로지르는 절묘한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살을 부비는 정밀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반생태적 제국·자본주의 문명의 제약 불가능한 경계 란까지 실로 엄청난 폭량의 은유가 피부라는 경계, 즉 "가장자리"에서 요동치는 사건입니다. 피부는 다만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역동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지은이는 피부의 기능 여덟가지를 말합니다. 지탱하기, 담아주기, 항상성, 의미, 교감, 개별화, 성욕화, 에너지화.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피부의 기능이라기보다 피부라는 사건의 다양한 발현 양식이라 해야 하겠지요. 이런 차이는 지은이 또한 서구적 사유방식, 즉 명사적이고 주객이분법적인 생각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서 왔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가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자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오늘날 서구문화에서 나타나는 관건적 정신정애가 경계선장애이고 보면 지은이의 선언은 현실적 근거에 터 잡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우울증, 불안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이름의 정신장애의 근저에 바로 "경계"의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전천후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밀한 상황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와 우리사회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의 구체적 과정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서구 문화는 본디부터 개별적 인격의 쌍무적 계약 관계를 근간으로 합니다.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 전통과는 사뭇 판이합니다. 그래서 이 책도 예컨대 접촉 금지와 초월을 말하는 대목에서 서구적 이원론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합니다. 전반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유연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근본 원리가 대칭성이라는 사실, 하지만 그 대칭은 스스로 거듭 부정을 통해 서로 비춤으로써 진정한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은이의 사상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을 아주 좋은 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아니 우리 피부감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은이를 넘어서는 우리 독서는 피부의 심오함(폴 발레리)을 "명징한 모호성"으로 흥건하게 말랑말랑하게, 그래서 힘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통찰을 돋을새김으로 가르쳐준 지은이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거듭 하고 있습니다. 

4. 거의 전 생애를 아토피에 시달리며 우울에 젖어 사는 한 제자에게 이 책을 내밀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한참을 흐느껴 울더군요. 그래서 올 겨울 이 책 부둥켜 안고 깨쳐라, 일러주었습니다. 피부-자아(Le Moi- Peau)라는 화두가 삶 자체가 되어버린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치유독서도 시작했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도 삶이 무한히 열린 깨침의 시공간임을 알게 한 많은 벗들과 더불어 이 책으로 또 하나의 경이로움을 열어가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삼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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