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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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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제가 Keep Going인데 왜 번역자는 '그래도'를 덧붙였을까? 사실 이 의문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저자가 북미대륙 원주민 전통의 사유 세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 의문은 든든한 근거를 지니게 됩니다. 영어로 된 것을 읽어 보지 못해서 책 본문 어딘가에 '그래도'란 표현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의 정신 속에는 '그래도'가 없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문제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란 말을 구태여 넣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까닭에 수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또는 그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임을 전제하고 있는 어법이거든요. 그리고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시 전제합니다. 결국 고통 자체와 고통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이중 장벽 때문에 사실은 계속 가라고 할 수 없음에도 가라고 한다는 뜻에서, '그래도' 가라고 한 것이지요. 누구든 이런 맥락에 선뜻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늙은 매'를 화자로 해서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 지평은 인생사, 아니 세계 전체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알아차리는 것에 근본적으로 터 잡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 또는 대칭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구체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한 가치가 결코 완전 분리된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환희만 좇으려 해도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해도 결국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통 자체를 환희로 받아들이는 고행주의나 매저키즘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희는 완전히 쪼개진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개진 하나도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래도'란  수식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저자의 사유를 현저하게 비틀거나, 적어도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번개처럼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접속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빙고! 리듬까지 맞추자면 "그러니"도 좋겠지요. '그래도'가 고통과 환희의 불연속성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면  "그러므로"는 양자의 연속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치상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포함(包含 아닌 包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궁극적인 관계지음입니다.  

요컨대 뭔가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덧붙임 말을 넣으려 했다면 "그러므로"가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므로 계속 가라"는 표현은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이런 책을 왜 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책이 필요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 빠져 있거나, 뭔가 일이 안 풀려 힘을 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 상황 자체 속에 답이 있다, 즉 고통을 통해 환희를 깨닫고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그러므로"야말로 기품 있는 '임팩트'가 아닐까요?   

 '그래도' 계속 가라, 이는 이른바 긍정주의, 즉 '고통은 없다 치고' 가라 하는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계의 전체적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도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래도'와 "그러므로"를 분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따스한 진실을 향해 옛 생각 거적을 훌렁 벗어 던지고 한 번 가보시지요.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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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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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표지 그림이 제 살갗을 날카롭게 찢어놓습니다. 섬뜩하달 수도 있겠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이없달 수도 있겠고....... 비둘기로 보이는 새 한 마리에게, 얼핏 보면 총을 겨눈 것 같지만, 실은 총이 아니라 눈을 겨눈 것 같은....... 아무튼 책의 내용을 짐작하도록 이끄는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2. 저자의 인생행로가 고스란히 투영된 관점, 내용을 지닌 책입니다. 심리학을 떠났다가 심리학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진보적 사회운동 경험이 무르녹은 것이지요. 하여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거의 모든 심리학 책들이 자연인으로서 개인을 화두로 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풍조는 심리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 전반의 주류적 사유 프레임이지요. 이렇게 보면 결국 심리 문제의 해결 또한 그렇게 자연적 개별화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일정 부분 맞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부분은 오류입니다. 언제나 열린 지평을 지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저자는 IMF 경제위기라는 특정 사건을 논의의 기점으로 삼습니다. 엄청난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곡절이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IMF 경제위기를 야기시킨 사회체제와 전략,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절망적 한계, 이후 펼쳐진 우리사회의 추악한 면면들은 어찌 보면 IMF 경제위기라는 상징을 만들어내기 위한 앞뒤 조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사회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외피 안에 발톱을 숨긴 헤게모니 블록의 탐욕 기제가 작동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쩌다 실수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이는 음모론의 제기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저들이 대놓고 도적질하는 꼴을 보면 명약관화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자는 헤게모니 블록의 이런 전략이 만들어낸, 불안을 증폭시키는 심리 코드 아홉 개를 제시합니다.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 이것은 아마도 어떤 연역적 틀이나 패턴을 전제한 연구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삶이 일구어지는 구체적 현실과 정황에서  일일이 찾아낸 것일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박하고 거침없는, 일부러 다듬지 않은 거친, 가령 속어적 표현까지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구어체적 언변으로  우리사회의 어둠을 거의 총망라하여 까밝히고 있읍니다.  기존의 주류 심리학 책들과 전혀 다른, 역동적이고 대승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4.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두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점진적 자살 문제. 임상의 실제에서 미처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그래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던 부분이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미래의 주체들이 형성하는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또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오래 전부터 궁굴려 온 화두입니다. 때마침 저는 그 화두를 깨치기 위해 제 인생행로를 바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제 삶의 모습이 드러날지 자못 궁금합니다.  

5.  21세기 첫 10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사회에 속한 나를 고요히, 그러나 곡진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한 권의 책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심리학자들에게 던진 고언(苦言)에 동의 백만 제곱하고 아무쪼록 저자가 바라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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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性을 다할 수 있고 남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며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는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化育)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大同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與天地參) 궁극의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그리 되는 것입니다. 至誠에서 與天地參에 이르는 길가에 신비주의와 관념론이 더러 꽃으로 피어 우리를 잠시 쉬게 할 수는 있으나 여독이 풀리면 이내 일어서서 다시 걸어야만 합니다. 몸이 지나가지 않는 여정은 다 헛것입니다.   

 

3.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외 생명,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의 근거이자 조건인 생태계 전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무서운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승리하고 저들이 독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비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내리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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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가르침(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誠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낸다는 말입니다.  

 

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明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잃어버린 10년" 운운 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설혹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바꾼 주체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어떻게 그 열매는 독식하려 드는 것인지 그 심사를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明은 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明은 明입니다. 誠은 明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 방향을 잡은 인식 안에서 誠은 誠입니다.  

 

3. 일전 송년 모임에 갔는데 뜻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한 친구와 가벼운 설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서 현직 대통령은 신 대하듯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와 지식은 죄다 일방적 홍보에 의존한, 한 방향으로만 줄을 선 것들이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 하고는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찬 소주 한 잔 하고 정신 좀 차려야겠구만, 자네!”     

 

돌아오면서 그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깊은 좌절감이 느껴졌습니다. 늘 훈계조에다 단정적인 어법으로 자신의 배타적 인식과 실천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하는 사람들에게 誠과 明의 선순환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사람들의 세상을 어떤 지혜와 인내로 살아내야 할지,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에 몸은 흔들리는데, 정신은 명료해지기만 하고, 어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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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철학의 선구적 사상가 원효 살림지식총서 327
김원명 지음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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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 100쪽도 되지 않는 소책자입니다. 당최 여기서 무슨 큰 지식이나 정보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연구자들에게서 뭐 더 나올 것도 없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원효 사상이 우리 상고시대 정치철학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 이거 봐라! 하고 집어든 것입니다. 

2. 저자는 원효철학의 추측적 기원이라는 장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이 어렵고, 불교계는 아예 무관심이긴 하나,  당대의 역사의식과 문제의식 속에서 추측적 기원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승불교적 전통을 신라에서 원효가 고유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꽃피울 수 있는 한국 고유의 지혜 전통 속에 원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혜공이나 대안, 혜숙과 같은 인물들은 바로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였다. 원효의 후반기는 이들과의 교유 영향이 컸다......."(27쪽) 

사실 원효 당시 상황을 보면 토착사상을 불교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대당 유학승 집단을 중심으로 한 왕실 주변의 주류 기득권 세력과 원효를 위시한 "토속적 벌거숭이 승려"들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한승원의 소설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전자의 근거지는 황룡사요, 후자의 근거지는 바로 분황사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바, 원효의 법호가 바로 분황이라는  사실에 터 잡는다면 이런 추정적 정황이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원효가 당(唐) 유학을 두 번 시도했다가 결국은 그 뜻을 접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른바 자주불교의 웅대한 나래를 펼쳐 나아간 것은 명백히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일대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삶 그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생명 감각과 이치 직관으로 외부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상들을 걸러내고 넘어서는 작업은 그 자체로 외래 사상을 자신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삼고 있는 세력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장 요소를 이 책의 저자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군조선의 의사결정 전통인 대감굿, 화백(和白)에서 원효사상의 토착적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라 화백회의가 여기서 온 것이고, 그렇다면 왜 다른 승려들, 특히 왕실비호 세력인 정치 승려 집단의 사상은 여기에서 발원했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집니다. 누구보다 화백회의 한가운데서 놀았던 자들인데 왜 그들은 당나라에서 수입한 외래품 불교를 가감없이 숭상했을까요? 

원효사상의 젖줄을 단순하게 이런 식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경주 김씨 세습으로 굳어진 이후 신라 왕조의 아이덴티티를 냉철하게 살펴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김씨 신라는 그 기원이 김일제라는 흉노족 수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흉노 일족을 거느리고 한(漢)의 건국을 도왔던 자입니다.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자기 세력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부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바로 김알지입니다.  

김씨 신라는 이렇듯 동이족의 단군조선과는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씨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이런 반(反), 적어도 비(非) 동이적 아이덴티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런 진실을 안다면 통일신라 라는 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왕씨 고려는 동이적 아이덴티티를 지닌 집단이 건국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신라계 귀족들이 고려사회를 실질적으로 접수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에 대한 굴종 자세를 보면 신라적 아이덴티티가 부활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씨 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집단의 아이덴티티는 김부식의 그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들이 결국 이씨 조선을 일본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 이른바 주류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 정권의 아이덴티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원효 사상이 동이족의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이것을 순진하게 바로 신라와 연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신라 내부의 정치경제학적 긴장과 모순을 날카롭게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불연속성에 주의하면서 원효사상의 위치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효를 반민족적 매판사상가, 반민중적 국론통일주의자로 몰아버리게 됩니다. 

원효의 일심화쟁(一心和諍)은 결코 북한을 무력으로 쳐서 하든, 붕괴를 기다려서 하든, 흡수통일하는 논거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배집단이 입만 열면 떠드는 국론통일의 수호신으로 원효를 들먹이면 안 됩니다.  원효의 통불교는 제식훈련 하는 군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원효를 왜곡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곡한 원효는 의상과 다름 없습니다. 의상은 왕실불교 수호자입니다. 김씨 신라의 아이덴티티에 입각한 화엄세계를 꿈꾼 자입니다. 그는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들과 전혀 관계 없는 자입니다. 원효를 이런 의상과 한 무덤에 끌어 묻으려 하는 자들이 의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저자의 전망은 이 함정을 어느 만큼 피해갑니다.  

".......화쟁을 국민총화와 남북통일 원리라 해석한 것이 주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라면 2000년대의 오늘날은 남북의 조화로운 공존의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원효의 논리로 볼 때, 둘이라 하기에 우리는 한 민족이자 한 나라다. 또 하나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상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마음에 기초해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면서 궁극적으로는 한 마음의 본원의 바다에 돌아가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승리하는 방식은 아니다......."(85쪽)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선문답식 나가는 말 때문에 다시 멍해지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은 잡은 것 같습니다. 

3. 저자에 따르면 <판비량론>을 포함한 다수의 원효 저작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심지어 인도에까지 전해지고 번역되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무려 천 년 이전의 일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원효의 그 엄청난 저작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 김부식과 같은 무리들이 일부러 폐기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원효를 거의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변죽만 울리는 떠듦으로 시간을 또 다시 잃고 있습니다. 
불자들 조차 '영혼의 은사' 원효는 모른 채 혜능을 읊조리고, 초기불교를 주려끼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덴티티를 지닌 사람들일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21세기의 원효를 기다립니다. 아니 각자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원효이기를 간절히 빕니다. 

4. 책 자체는 skimming 하듯 읽고 치워도 크게 실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 책에서 암시 받은 문제의식이 묵직하게 자리 잡아서인지 책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뭐 더 읽을 일은 아닌 것이 그 미련이란 게 결국 원효가 던지는 질문 때문일 테니까요. 오늘 여기 원효가 섰다면 과연 뭐라 했을까? 어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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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엽서 2012-05-1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라 김씨왕조가 남하한 흉노계통이라는 것은 어떤 사료에 근거한 학설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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