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가난과 “현명한” 무식을 비대칭 대칭 반제국주의 전쟁 병기로 삼은 근저에는 “용감한” 공포 불안을 병기 삼은 토대가 놓여 있다. 사실 이 구도는 불가(佛家) 가르침인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痴)가 근원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밝히 드러났다.
삼독 가운데 성냄(瞋)은 근원 범주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성냄(瞋)은 공포 불안에 앞설 수 없다. 공포 불안이야말로 인간이 느끼는 근원 감정이다. 출생 자체가 공포고, 출생 이후 삶 전 과정이 불안이다. 느낌으로서 의식되는 공포 불안, 더 나아가 병리로서 공포 불안은 인간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과잉 증후다. 특히 병리로서 공포 불안은 자체 음성 되먹임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 특유 감정 상태다. 나머지 정신장애와 정신병은 모두 이 공포 불안 또는 공포 불안 장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공포 불안 장애와 결합했을 때 더 위중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포 불안은 다양한 원인과 과정을 통해 들어온다. 보통 개인과 그를 둘러싼 문화적, 자연적 환경을 얘기하지만, 오늘날 무엇보다 직시해야 할 문제는 바로 정치경제학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 특히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정착형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포 불안이 이미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를 강령으로 하는 절대 살육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조건으로서 공포 불안을 낳는 영원 자궁이다. 목숨 잃는 일보다 더 참담한 위해와 상실은 없다. 공포 불안을 병기로 삼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공포 불안을 병기로 삼는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제국주의가 살포하는 공포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 영혼 팔아 부역하거나 비굴하게 숨지 않고 도리어 그 공포 불안을 직면해 끌어안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제 천명대로 고난받는 “용감한”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용감하게 산다고 해서 공포 불안이 사라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뒤집어 말하면 공포 불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마음 짓이 “용감함”이다. 용감히 나아가면 다양한 위해, 분명한 불이익,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역자는 이미 죽은 자고, 도망자는 현재 죽어가는 자임을 안다면 공포 불안은 더 이상 ‘넘·사·벽’이 아니다. 이치상 공포 불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마음 짓 자체가 공포 불안 장애를 치유하는 핵심 방편이므로 이 반제국주의 전쟁 최종병기가 바로 모든 정신장애를 치유하는 근본 의기(醫器)인 셈이다.
나는 80년대 짱돌 들고 거리에 섰다가 막다른 골목 홀로 백골단과 마주쳤던 공포에서 이명박 정권 때 경찰, 검찰, 법원을 드나들며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한의원이 박살 나 낭인으로 떠돌았던 불안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 박근혜를 거쳐 마침내 김명신에 이르는 실로 오랜 시간 동안 내 천명대로 고난받는 “용감한” 삶을 찾아 헤맸다. 남루하고 초라한 여정이었지만 반제 전사로서 정체성을 간직하려 애썼다. 물론 나는 여전히 공포 불안 한가운데 있다. 더는 얼어붙지도 벌벌 떨지도 않을 수 있을까, 생애 마지막 질문을 위해 공포 불안 공부 길로 되돌아왔다.
그토록 혹독한 공포 불안에 시달렸던 내가 왜 극진히 정성을 기울인 우울증 환자에게 태고부터 드리워져 있었던 공포 불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혹시 내가 내 공포 불안을 직면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지나갔던 탓은 아닐까? 그렇다. 내게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