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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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자기혁명은 겨자씨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이 천국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천국을 경험한 자가 아니다.·······

  예수는 유대인 가정에서 매일 먹는 밀가루 빵을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누룩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는가? 누룩은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 하지만 누룩에 밀가루 반죽이 더해져 시간이 지나면 전체가 부풀어 오른다.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마음도 인간의 삶에 더해진다면 스스로가 변하듯이 삶 전체가 변화할 것이다.

  이것은 곧 삶 속에서의 ‘자기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혁명은 일상을 비범하게 보고 듣는 연습에서 시작한다. 남다르게 볼 수 있고 남다르게 들을 수 있는 지혜로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예수는 천국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천국은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며, 가족과 이웃과 심지어 원수까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바로 여기가 천국이다.(321-322쪽)


상담이나 강연을 할 때 가장 많이 마주하는 반응 가운데 하나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입니다. 이 반응에는 두 가지 다그침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다 아는 걸 가지고 웬 생색이냐?’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대체 어쩌라는 거냐?’입니다. 이 다그침에는 공통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제대로 아는 것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같은 말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무지를 틈타 온갖 영혼의 수탈자들이 달려듭니다. 수탈자들 가운데 가장 끈질기고 사특한 것이 통속종교입니다.


모든 통속종교는 각기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젖줄을 대고 있으나 그것을 왜곡한 교집합 에 터 잡습니다. 그들의 왜곡 기법은 스승의 가르침을 박제 혹은 미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동사적 실천 운동에서 명사적 이론 체제로 만드는 것입니다. 동사에서 명사로 이행, 아니 이탈하는 과정에서 증폭되는 것이 저 도저한 문제적 무지입니다. 무지는 모른다는 소극적 사태가 아닙니다. 잘못된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극단의 사태입니다. 이는 명백한 타락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천국이 그렇습니다.


예수가 말한 천국은 자신의 삶 전체가 변화하는 “자기혁명”을 통해 이웃이 함께 천국을 느끼게 되는 “여정” 자체입니다. 여기 혹은 저기, 이제 혹은 나중에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가 아닙니다. 찰나마다 변화가 일어나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정의와 자비가 형성되는 사건의 파동을 타고 흐르는 숭고와 환희의 일렁임입니다. 오늘 이 땅 어디에서 어떻게 천국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천국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혁명을 통해 이웃과 함께 그 천국을 느끼고 있습니까? 천국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것입니까?


헬 조선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사회를 가리키는 ‘공식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질문 속에나 있으니 그렇다 치고 이 명약관화의 지옥을 살아가는 백성의 태도가 기이하기 그지없습니다. 스톡홀름증후군에 휘말린 눈빛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천국을 입에 담는 것은 아예 미친 짓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더욱 끈질기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어렵디어려운 천국, 결국은 저와 그대의 '말'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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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무렵, 아내가 손톱에 물 들인다며 친정집에서 봉숭아 화분을 하나 가져다 놓았다. 처음에 무심코 지나쳐 몰랐는데 가운데 커다란 대궁을 지닌 것 먼 발치에 피하듯 바깥으로 기운 몸을 지닌 작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무젓가락으로 지지를 해주었다. 가운데 것이 쭉쭉 자라며 꽃을 피우는 동안 기를 못 편 채 안간힘으로 버티던 작은 것이 어느 날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갸오뚱 하는 사이 가운데 것이 급작스럽게 쇠락해갔다. 중심이 속절없이 스러진 뒤 변방은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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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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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말한다.·······

  어머니 마리아의 말에 예수의 대답이 다소 충격적이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여자’라는 의미는 구약성서 <창세기> 2장 23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인 ‘이브’를 상징한다. 아담이 새로 창조된 여인을 ‘여자’라 불렀으며,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새로운 아담이며 마리아는 새로운 이브가 된다.(303-304쪽)


지난 9일 저녁 저는 부산에 있는 한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연하러 내려갔습니다. 도착해보니 강연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칠판도 강대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초청한 교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하던 제 귀에 휑한 강의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려옵니다.


“네 강연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단정한 표정으로 “그냥 시작하지요.” 하고 분위기를 수습한 다음 한 줌 정도의 수강자 앞에서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숱한 의구심이 자맥질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정성으로 준비했고 극진한 의미를 담아 마련한 기회가 허망하게 무너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강연의 주제가 ‘21세기 한국에서 21세기 한의사를 논하다’였습니다. 21세기 한의사를 논하는 자리를 21세기 한의대생들이 왜 외면한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 없습니다. 학생들의 관심사가 교수의 그것과 어긋날 수도 있고, 하필 금요일 오후 늦게라니 물색없다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런 어간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고 좀 불편해도 공동체의식을 지녔다면 분명히 어떤 소통의 채널을 피차 가동시킬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런 토대가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순식간에 들이닥쳤던 이런저런 상념들을 다독거린 뒤 본디 마련했던 강의안을 버리고 흐르는 대로 강연을 풀어갔습니다. 하고자 했던 많은 말들을 하지 못했지만 희망 담은 간곡한 당부까지 잊지 않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가히 장관이라 할 풍경은 강연이 끝난 다음에 펼쳐졌습니다. 학생회장이 미리 마련된 뒤풀이 자리가 있으니 가겠느냐, 물었습니다. 흔쾌히 그러자, 하고 따라가니, 아뿔싸! 제가 강연하던 같은 시간에 강연장에 앉아 있었어야 할 바로 그 학생들 대부분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의구심은 더욱 짙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는 그 상황을 통째로 받아들이고 두어 교수와 대여섯 학생들 사이에서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물론 상황에 대한 해석이 끝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서울에 와서도 그 사건을 어떻게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리뷰 <14.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를 썼습니다. 마무리가 홀가분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감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글이었습니다. 닷새가 지난 지금 그 글을 고쳐 씁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예수를 다시 읽은 뒤 가능해진 일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가 보인 명사적 불연속의 반응은 포도주가 지닌 치명적이고 종말론적 의미에 집중한, 냉엄하고 육중한 경계입니다. 동사적 연속의 반응은 그 경계를 뒤집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경이로우면서도 유쾌한 이적입니다. 잔치집이니만큼 하객들이 마시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조건을 터준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삶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만 의미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만 예수의 관심사가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아직 이르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살리면 매순간이 바로 “나의 때”가 된다는 진실을 증명해보였습니다. 예수의 포도주를 맛본 하객들은 앞의 것보다 더 맛있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혼인잔치는 돌연 천국잔치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를 크로노스로 끌어내는 혁명입니다. 홀연히 그 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네 강연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소리를 듣고 아직 우리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우리의 인연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랬듯 아직 오지 않은 때를 우리 삶의 현실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강연을 진행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입니다. 의구심을 거느린 문제는 정답이 있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지평으로 번져가 한 생각 넘김으로써 해소되는 것입니다. 올 그 때가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파동의 커다란 마루임을 깨닫고 기다리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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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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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말한다.·······

  어머니 마리아의 말에 예수의 대답이 다소 충격적이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여자’라는 의미는 구약성서 <창세기> 2장 23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인 ‘이브’를 상징한다. 아담이 새로 창조된 여인을 ‘여자’라 불렀으며,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새로운 아담이며 마리아는 새로운 이브가 된다.(303-304쪽)


지난 9일 저녁 저는 부산에 있는 한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연하러 내려갔습니다. 도착해보니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칠판도 강대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초청한 교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제가 태평한 표정으로 “그냥 시작하지요?” 하고 분위기를 수습한 다음 한 줌 정도의 수강자 앞에서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문제는 강연이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학생회장이 미리 마련된 뒤풀이 자리가 있으니 가겠느냐, 물었습니다. 흔쾌히 그러자, 하고 따라가니, 아뿔싸! 제가 강연하던 같은 시간에 강연 대상이었던 바로 그 학생들 대부분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왁자한 술판을 가로질러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그 강연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제 강연의 주제가 ‘21세기 한국에서 21세기 한의사를 논하다’였습니다. 21세기 한의사를 논하는 자리를 21세기 한의대생들이 왜 외면한 것일까요? 정성으로 준비했고 극진한 의미를 담아 마련한 기회가 허망하게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루 밤 신세지기로 한 제자 부부 집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구체적인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는 저로서는 한동안 의구심과 분노를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닙니다. 학생들의 관심사가 교수의 그것과 어긋날 수도 있고, 하필 금요일 오후 늦게라니 물색없다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런 어간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고 좀 불편해도 공동체의식을 지녔다면 분명히 어떤 소통의 채널을 피차 가동시킬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런 토대가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비단 대학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공동체의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놀랍게도 지배층입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 전체를 각자도생의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 이 나라 지배층의 정치이며 법입니다. 가짜 공포는 길길이 날뛰어 조장하고 진짜 공포는 잠잠히 방치해서 증폭시키는 것이 저들의 전략이며 전술입니다. 여기에 놀아나는 허다한 자들이 오늘도 뇌까립니다.


“세월호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가 보인 언어적 반응은 포도주가 지닌 치명적이고 종말론적 의미에 집중한, 냉엄하고 육중한 경계입니다. 행위적 반응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경이로우면서도 유쾌한 이적입니다. 잔치집이니만큼 하객들이 마시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조건을 너그럽게 터준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삶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만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이 예수의 관심사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스도로서 삶을 살고자 했는지 생각한다면 고통 받는 이웃이 빨갱이로 몰리는 오늘 여기서 그의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웃이 너와 어찌 상관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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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e0423 2016-09-1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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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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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스스로 제시하고자 한다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긴박하고 중요했던 십자가 처형 과정과 부활의 현장에는, 베드로을 비롯한 모든 남자 제자들이 아닌 한 여인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복음서가 남성주의적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숨어 있는 수제자로 스스로 빛을 발한다.(259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간에 섬광처럼 등장해 모든 사건을 진두지휘한다. 그녀는 예수의 삶과 그리스도교 발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장면, 즉 예수의 처형, 예수의 장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순간을 모두 목격한 유일한 여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때까지 따라다니던 예수의 제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부재는 ‘막달라 마리아’의 등장으로 대치된다.(268쪽)


880번째 2014년 4월 16일인 2016년 9월 11일 오후 광화문 세월호광장 분향소 앞을 지나가던 장년 여인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여긴 무슨 초상집 분위기네?”

“아, 그 왜 세월호 있잖아······.”

“지겨워!”

“내 말이!”


이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유가족 여인 한 분이 웃으며 다가와 노란 리본을 건넵니다. 둘은 불쾌한 듯 손을 내저으면서 황황히 거기를 벗어납니다. 짧지만 극적인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제 감정은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두 여인이 매우 특별히 이상하거나 나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 그들의 언행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인간적 악취는 ‘아니, 저것들이 대체 인간이야?’ 라는 말을 내뱉게 만들고야 맙니다. 미상불 그들도 엄마일 터입니다.


저 보통 아주머니들을 그악한 사이코패스 상태로 만든 것은 입만 열면 적반하장의 공격, 협잡, 훈계를 늘어놓는 가부장적 권력과 ‘찌라시’ 언론입니다.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대통령이 사과하고 보상까지 두둑이 해줬으면 됐지 계속 저러는 걸 보니 빨갱이가 분명하다, 뭐 이런 언어도단에 놀아나도록 세뇌시켰으므로 여간해서는 진실이 따로 있다는 일말의 의문조차 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땅의 여인들은 스스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광화문에 와서 세월호 엄마에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권력에게 새끼를 앗긴 여인이 왜 우는지 몰라서 묻는 것 아닙니다. 누구를, 무엇을 찾는지 몰라서 묻는 것 아닙니다. 이 땅의 여인들이 울고 있는 여인에게 묻는 것은 그 질문이, 그에 대한 답이, 남성가부장 구원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막달라 마리아 선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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