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날 곳은 

비 그친 뒤에도 비를 내리는


그 숲으로 나는 죽었다


끝과 처음이 맞닿는 숲과 숲 사이

나는 숲하는 말이며 


비 닿지 않는 잎과 잎 사이

나는 

서 있는 기다림이며 기다리는 서 있음




[그림/ 김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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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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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현대사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북한)와 민족적 타자(미국)의 문제. 이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혼선을 빚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민족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고,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124쪽)


우리는 이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던 이중의 부정성이라는 문제에서-여전히 이런저런 불안 요인과 염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중의 부정성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남한 특유의 정치 지형(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도 조만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126쪽)


이글은 저자의 논지가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쓴 김태환의 <역자 후기> 일부입니다. 이 내용에 저자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리뷰 닫는 글을 씁니다. 이 글이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 이후 요동치는 대한민국의 광경, 특별히 세월호사건을 목도하고 쓰였다면 또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해볼만합니다. 그러나 초판 1쇄가 나온 이래 40여 쇄가 찍히는 동안 다시 쓰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태환이 남한의 현대사를 이중 부정성 문제로 이해하는 내용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며, 그 전망 또한 긍정성 사회의 도래를 간명하게 안내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내용의 설득력은 문제를 단순화한 데서 오는 편의처럼 다가오고, 전망의 간명함은 추상의 착시처럼 감지됩니다. 이 글이 본격적으로 남한 사회와 그 역사의 성격을 논하려고 내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피로사회』에 대한 ‘축사’로 읽힐 위험성이 다분히 있어 보입니다.


김태환은 남한 사회의 이중 부정성을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과 민족적 타자인 미국의 길항으로 놓습니다. 그런 대립구도 형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실체는 대부분 허구에 가깝습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과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하는 힘의 ‘대결’이 실제로 남한사회에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은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 과정에서 NL로 불리다가 나중에 주사파로 헤게모니 일부가 넘어가기도 한 극소수 ‘운동권’ 진영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남한 사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들 자체의 힘이 아니라 이들을 거대 세력을 부풀리고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이용한 집단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그러니까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 또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하는 자들이 줄곧 남한의 권력을 잡아왔으므로 남한의 이런 이중 부정성 문제는 위장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누락시킨 문제 상정은 안일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 은폐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중 부정성의 문제가 실제 어떤 대결로 일어났던 것은 80년대 NL과 PD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 사회가 식민지인가 아닌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던 운동권 내부 경험이 실재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이 경험을 전거로 들며 남한 사회와 역사를 논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 그럴 힘을 얻지 못한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외부의 힘으로 갑자기 종식되면서 남한 사회가 겪은 정체성 혼란의 진원은 김태환이 말한 민족적 타자인 미국이나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민지 및 신식민지 전략을 구사한 미군정(청)입니다.


미국이 민족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거의 전혀 타자로 인식되어오지 않은 것 또한 명백합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체제 근간을 유지한 채 식민지 부역 세력을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미국적 콘텐츠를 각 분야에 이식하였습니다. 이 전략에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하나, 매판적 본질을 지닌 식민지 부역세력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아탈 뿐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 부정성의 문제를 가만히 앉아서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약점을 거머쥐고 표면에 내세우면 신식민지 전략을 손쉽게 연착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 식민지 부역세력이 자기들의 매판적 본질을 덮기 위해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반공 이데올로기를 생산함으로써 남한 내부를 허위 이데올로기적 타자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남한 사회는 명실상부 민족적 정체성 구성을 위한 이론적·실천적 싸움을 한 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미국의 신식민지 상태로 깊이 침륜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북한을 타자라고 보기에는 남한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너무도 심각한 것 또한 명백합니다. 북한이 정말 이데올로기적 타자라면 남한이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습독재만이 아닙니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것인지 문제 삼아야 합니다. 남한의 부정불의를 덮기 위해 북한을 동원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남한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 문제의 중심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유린하는 남한의 허울뿐인 민주주의와 사실상의 독재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북한은 이 부정성 문제의 일개 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이데올로기적 타자는 이승만 이후 남한의 권력을 독식해온 반민주주의·반공화국 세력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과 북한의 타자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김태환이 말하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의식은 피상적 또는 도식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한 현대사 이중 부정성 문제의 비틀림, 그 분열과 착종의 부조리한 전개에 결정적 이니셔티브를 행사한 것은 물론 군정청을 교두보로 한 미국의 신식민지주의 세력입니다. 일제 식민지에 이어 미국의 신식민지 세력에게까지 부역하면서 남한 현대사를 치욕으로 몰아간 세력이 다름 아닌 남한의 매판독재분단세력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의 모든 권력과 부가 저들의 독과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독과점을 더욱 공고히 영구히 하려고 저들은 제국의 자본에 민족혼을 팔고, 민주공화국을 압살하며, 이 생명공동체의 연속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대선 부정, 세월호사건, 일본군성노예문제 합의, 개성공단 폐쇄 등 일련의 정치적 협잡을 통해 드러나는 두 세력 간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이중 부정성의 문제에서 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브하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서구 사유에 젖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순이나 역설을 다루는 사유의 방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은 모순개념이고 이 모순 사이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구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입니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는 부정이기도 하고 긍정이기도 한 중간,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닌 중간이 존재합니다. 이 중간 상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배중률을 사유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는 서구 사유로는 쉽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사유는 그 중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감수성을 지녔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인정’이 있습니다. ‘인정’이야말로 실재를 관통하는 사유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모순을 그대로 품은 ‘인정’의 세계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는 모순입니다. 전자는 부정이고 후자는 긍정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 사이에 신식민지가 있습니다. 신식민지는 인정의 세계입니다. 인정의 세계에 낯선 서구 사유로는 자기들이 만든 것이면서도 신식민지를 낯설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만 저들이 낳은 사생아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구인들은 영원히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이행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배운 비서구인들도 공부에만 머물면 그리 될 것입니다. 한병철도 김태환도 아직 공부에 머물러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락 기우가 들이닥칩니다.


모든 사유, 모든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현재 삶 자리를 깔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이기도 하고 책무이기도 합니다. 세월호사건, 아이들에게 던져진 한마디 말로 요약되는 오늘 여기, 대한민국이 제 삶 자리입니다. 이 말이 과연 부정성에서 빠져나가는 표지일까요?


“가만있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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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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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전반에 걸쳐 저자는 우울증을 다시 정의하거나 용어 사용의 차별성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기존의 우울증 개념을 일반적인 용례에 따라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우울증이 동질적 긍정성을 기조로 하는 후기근대의 성과사회를 대표하는 질병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우울증에는 그 어떤 부정성, 그러니까 무의식도 초자아도 예속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적 폭력”(111쪽)이 “자본주의적 자기 착취의 관계”(111쪽)를 교묘하게 조장하여 성과주체를 우울증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흠결 없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 타당성은 진실의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입니다. 이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를 전부처럼 논리로 세우는 과정에서 저자는 우울증 개념에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개성을 확장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98-99쪽)


저자가 성과사회 시스템 안에서 우울증이 초래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동원한 개념은 성과사회가 요구하는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좋은 “유연한”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을 자주 바꾸려고 자기 착취를 계속하다가 소진되어 우울증에 걸린다는 논리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착취적 소진이 야기한 우울증을 시스템 차원에서 통찰해낸 것은 분명 그의 탁월함입니다. 그러나 소진을 매개로 하여 걸리는 우울증이라면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진이 자기 착취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긍정의 착취는 우울증이고 부정의 착취는 우울증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자신이 쓰는 우울증이라는 용어는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나타나는 질병으로 국한시킨다고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많은 개인은 물론 세계보건기구나 미국정신의학협회까지 부정의 착취에도 우울증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른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나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형태든 용어 정리만으로도 이 책에 나오는 비판적 서술 대부분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정체성 문제 자체를 거론하겠습니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정체성은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포착한 정체성입니다. 시간성의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단히 바꿀 것인가, 변함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동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바꾸는 쪽으로 치우치면 ‘전환’의 정신장애(전환장애와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키는 쪽으로 치우치면 ‘강박’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 자체는 우울증과 필연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연히 역사적으로 소진이 개입되어서 우울증 문제와 결부되었을 뿐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저자의 통찰에서 소진의 문제가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고, 이를 매개로 하여 ‘전환’의 (정신장애) 문제가 우울증 개념과 결과적으로 연결된 것뿐입니다. 사회현상으로서 ‘전환’에 볼모 잡힌 소진이 몰고 온 우울증이 이 시대를 설명할 특징적인 개념이라는 말과 이 우울증만이 우울증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후자는 제유의 폭력입니다.


우울증이 직접 도출되는 정체성 문제는 공시적synchronic 지평입니다. 나와 남, 나와 세계의 관계적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나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인가, 남과 세계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지워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단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는 쪽으로 치우치면 ‘분열’의 정신장애(정신분열증과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워가는 쪽으로 치우치면 ‘우울’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스스로 자기 경계를 허물고 착취하는 자기부정증후군이 우울증의 본령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의 시스템적 폭력 이전에, 자본주의적 자기착취 관계 이전에 자기부정증후군은 엄존해왔습니다. 이질적 부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과 동질적 긍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이 다르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 다름의 실재입니다. 저자는 면역학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를테면 신경학의 시대가 왔다고 말함으로써 그 다름의 실재성을 극명히 드러내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서구세계의 한복판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앞선 글 <위장된 동질성, 위장된 긍정성>에서 말씀드렸거니와 제3세계에서 이런 구분은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면역학과 신경학, 그러니까 부정성과 긍정성을 구분하는 근대사회와 후기근대사회 또는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의 차이가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와 신식민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략의 차이입니다. 식민지사회의 노골적 이질성·부정성을 은폐하여 동질성·긍정성의 외형을 갖추게 한 것뿐입니다. 강제를 자유로 착각하게 한 것뿐입니다. 저자의 명쾌한 구분과 그에 따른 차이는 그다지 육중한 실재성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오늘 여기가 신식민지 상태인 한 우울증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울증은 말하자면 자기면역질환인 것입니다.


질병 논의의 최종 단계는 치료 문제입니다. 저자가 <우울사회>에서 치료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피로사회>를 언급한 부분에 간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치유적 피로”(82쪽)를 처방으로 제시하면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라고 풀이했습니다. 성과사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울증으로 들어간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성과의 향상을 위해 소진이 되도록 자기를 착취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과사회의 소진적 자기착취를 멈추는 방법이지 우울증 자체에 대한 처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울증의 본령이 바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치료는 지나치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겨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격정을 인정하면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하면 자기를 우선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것이 건강한 삶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되 중심에 세우지 않으면 비로소 자기 인연에 걸맞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저자가 이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임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라기보다 우울증 자체에 대한 통찰이 도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울사회> 에필로그에 증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 그자체가 치료의 시작이라는 독자의 깨달음 넘어 이렇다 할 저자의 전언은 없습니다.


개인 심리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학적 시스템 자체로 구성원 전체에게 내재적 테러를 가하는 성과사회가 우울증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방식으로 우울증을 이해하는 맥락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맥락이 설혹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이 맥락 안에 우울증을 가두는 것은 단순한 폭력을 넘어 참람한 오류입니다. 우울증은 공포·불안과 관련된 병리의 한 축으로 인간의 역사를 관류하여 존재해온 역동적 사태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이해하고 오해하며, 품고 배척한 방식이 달랐던 모든 풍경에 전체적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거기 깃든 보편과 특수를 정확히 간취하여 오늘 여기 문제를 푸는 자산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제가 한병철을 주의 깊게 읽고 수긍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변방의 소시민으로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임상의로서 제 앞에 놓인 구체적 문제를 통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제 삶의 맥락을 이끌고 들어가므로 수긍과 비판 모두가 협애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협애함을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좁더라도 제 눈앞에서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옹골지고 생생한 언어와 행위입니다. 그 언어와 행위를 구하려고 바로 이 순간도 한병철을 이슥한 눈으로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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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5일에 <시작하며> 글을 올린 지 꼭 50일째 되는 날 <마치며> 글을 올립니다. 세월호사건 2주기 개인 애도 기간을 마칩니다. 물론 이는 한낱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삶을 마친 뒤에도 저의 애도는 계속됩니다. 아이들에게 헌정한 이 『중용416』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인간이려고 또 다른 416 글을 쓰고 그것들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이 영속하는 애도는 애도를 넘어 삶이 되고 변혁이 되고 역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중용416

-세월호 아이들에게 헌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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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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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74쪽)


오순절, 그러니까 예수 부활에서 50번째 되는 날은 성령강림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는 필경 구약성서의 희년jubilee 개념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일 개념의 극대치에 해당합니다. 7번의 안식년이 지난 그 이듬해, 그러니까 50번째 해입니다. 해방과 복원의 역설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대변혁의 해입니다. 결국 오순절은 희년 사상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의문은 바로 이런 장엄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대체,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이야기 그 대단원의 막을, 왜 하필 기독교 경전의 내러티브를 언급하는 것으로 내린 것일까요? 그것도,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무기력한 문구로 말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겸손함이 아닙니다. 피로인 듯합니다. 무슨 피로일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철학자의 피로니까요. 궁금함을 접고 성직자 출신 변방 임상의의 피로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오순절의 모임은 “피로한 자들의 사회”입니다. 물론 이들의 피로는 “특별한 의미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피로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데서 오는 깊으면서도 영적인 그 무엇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어법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곡진함의 극한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곡진함의 극한이기에 피로의 극한입니다. 피로의 극한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다름 아닌 하느님나라입니다. 기독교 어법을 넘어서 말하자면, 인간 개체의 배타적 경계가 사라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지평, 곧 드넓은 소통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을 비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비움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러나 차마 괴로워할 수 없는 것인지 알기에 철학은, 인문정신은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 틀릴지라도 ‘그렇다’고 명토 박습니다. 왜냐하면 그 오류를 머금은 선언 속에 인간다운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병철도, 임상의 강용원도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의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들을지라도 그때그때 약속은 결곡하게 맺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피로사회』의 <피로사회> 부분 리뷰는 여기서 맺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를 언급했더니 누군가 그에 대한 석명의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저도 답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그다지 큰 논쟁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에서 제가 절감한 것은 여전히, 큰 세계 가서 공부한 분들의 작은 땅 쟁점에 대한 무감함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요구의 권리가 제게 없음에도 임상의인 제게는 언제든 어디서든 그 문제가 끽긴사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는 질문임을 삼가 밝히고자 합니다. 제 앞에는 늘 아픈,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로에 제가 즉각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로사회, 이 화두, 적어도 제게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로 던져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한병철이 이 책을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질병 이야기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색하며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 질병들에 대한 한병철의 답이 오순절-사회일까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로사회일까요? 세월호 예은 아빠한테 이 말은 무엇일까요?


대체, 철학함doing philosophy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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