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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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의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1:1-2:3에는 신אלהיםElohim의 창조와 안식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레째 날 안식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신의 안식은 창조에 대한 만족, 그러니까 ‘보기에 좋았다’는 거듭되는 표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의 깊은 피로가, 그 안식이 거룩한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말입니다.


성과사회가 부추긴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신의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한병철이 이미 말한 바입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신이 창조를 마치고 그 피로를 거룩한 안식으로 푼 논리는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는 성과 향상을 마치고 보기에 좋아서 거룩한 안식으로 태평히 누리는 깊은 피로가 아닙니다. 성과사회는 탈진 피로만을 가파르게 누적시키는, 보기에 나쁜 성과를 더욱 향상시키도록 여전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깊은 피로, 거룩한 안식인 피로를 말하려면 그것이 단지 탈진 피로의 대립자라는 사실 적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가 어떻게 그 대립자를 삶의 실재로 만들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한트케는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를 신뢰하는 사람, 놀이하는 아이, 오순절의 사람들 정도로 느슨한 주체에다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행위 양식을 제시합니다. 한병철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책의 전반을 통해 ‘주체’가 돋을새김 되지 않고 ‘사회(존재)’가 마치 생략된 주어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런 느낌의 정점에 바로 창조주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병철은 책의 끄트머리 바로 직전에 왜 신의 피로, 그 거룩한 안식을 (뜬금없이) 거론하였을까요? 성과사회 전체가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닐 텐데. 성과사회를 끌고 가는 지배집단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닐 텐데. 성과사회의 희생양으로 탈진 피로에 허덕거리는 소시민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닐 텐데.


한 권의 철학서가 구체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다는 것까지 말할 의무는 없을지 모릅니다.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침 제시만으로도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못내 안타까운 까닭은 너무나 좋은 말이 아득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의 거룩한 안식과 구의역 청년의 치명적 노동 사이에 가로놓인 저 심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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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려 찰나마다 애쓰며, 이 애씀이 어떻게 이 땅의 모든 문제 속으로 농밀하게 배어들 수 있는지 살피며 『중용』을 읽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매판·독재·분단을 본질로 하는 대한민국 통치세력은 저 뜨르르한 반중용을 더욱 결결이 배어들게 하고, 더욱 겹겹이 쟁여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놓고는 손발을 묶어버렸습니다. 공안 총리를 발탁해 416연대를 치고 그 대표를 잡아넣었습니다. 세월호 리본 달았다고 김연아를 빨갱이 취급했습니다. 세월호를 엄폐 인양하도록 정체가 수상한 중국 업체에다 맡겼습니다. 청문회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협잡을 일삼았습니다.


세월호사건의 증거들이 인멸되어가듯 이 땅의 중용도 가뭇없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한 협잡술을 동원하여 통치세력은 대놓고 함부로 반중용합니다. 기민하고 얍삽한 조작으로 중용의 이미지만 전유하여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자기 치부는 물 타기나 치고 달리기hit & run 전술을 써서 상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이대로라면 괄목상대할 세력이 더는 나올 수 없을 듯합니다. 절망적 상황입니다.


절망이 들이닥칠 때, 홀연히 활화산으로 우뚝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민중이라 부릅니다. 민중은 절망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 깨치는 천명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천명의 실천이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중용의 실천 주체이니 그가 곧 군자입니다. 군자, 그러니까 민중군자, 다시 그러니까 평등하게 상호 소통하는 필부필부 집단 군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평범하디평범한 바로 옆 사람과 낮은 연대로 손잡고 이야기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마시며 서로를 깨워 함께 폭발할 화산이 되어갑니다. 함께 폭발할 화산이 되어가자는 자주·민주·통일의 격문檄文, 그러기 위해 결코 놓을 수 없는 그리움, 이 아이들입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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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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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죔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며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개별자들의 공동체·······(70-71쪽)


고립을 깨고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여기 깊은 피로가 탈진의 피로와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탈진의 피로처럼 구체적인 경험으로 구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자 역시 본문에서 깊은 피로의 작용을 반복적으로 말할 뿐 손에 잡히는 내용을 구성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깊은 피로는 탈진 피로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대체 깊은 피로의 깊이란 무엇일까요?


탈진 피로는 말 그대로 에너지가 소진되고 허무감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내몰리는 상태입니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질주를 멈추면 피로가 풀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심해집니다. 병적 상태에 순응하면서 증상을 익숙히 대하다가 치료로 방향을 바꾸면서 일어나는 각성이 불편한 감각을 날카롭게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피로의 양적 강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니고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피로가 입자성에 파동성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경직은 유연으로, 고립은 연대로, 폐쇄는 개방으로, 차별은 우애로, 개체는 공동체로 전환됩니다.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소속이나 친족관계는 해체됩니다. 그 대신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우리’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고립이 극단이듯 ‘우리’의 공동체도 극단입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양 극단을 놓은 중도, 그러니까 정도의 실천 양식입니다. 이것은 양비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화쟁입니다. 화쟁의 고단함이 낳은 야트막한 연대가 바로 무애세상입니다. 무애세상에서는 함께 어깨를 맞댄 나‘들’이 부정不定uncertainty의 삶을 구가합니다. 부정의 삶에는 성과가 부르는 피로가 없습니다. 놀이가 부르는 고단함이 있을 뿐입니다. 고단해서 향 맑을 뿐입니다.


딸이 저와 상담하는 60대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의 흠결 없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고도 상세하게 딸이 처한 의학적 상황을 설명했고 ‘100% 신뢰한다.’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면 이전의 가족관계가 복원된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새로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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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비도야.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시고 군자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莫見乎隱 莫顯乎微.

막현호은 막현호미.  

故 君子愼其獨也.

고 군자신기독야.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중야자천하지대본야 화야자천하지달도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語氣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도 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性과 도道와 교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독자가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과 도와 교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신기독야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신독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중화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중화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중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화는 중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절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중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집요한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러운’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超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위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육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육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일단 각자의 가슴에 각자의 답을 품은 채 고요히 이 땅의 현실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필코 총체적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다가들어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나와 내 공동체의 살아 있는 콘텍스트에서 중용을 묻지 않으면 그것은 참 중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의 질문은 ‘중용이 무엇인가?’가 아니고 ‘무엇이 중용인가?’여야 합니다.


자, 다시 고쳐 질문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중용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에 맞서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한 소통, 그 연대 행동이 다름 아닌 우리의 중용입니다. 이 깨달음을 급격하면서도 간절하게 일으킨 것이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입니다. 아이들의 죽음, 그 진실을 걸고 그 목숨 값을 걸고 우리는 우리의 중용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있지 말고 중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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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3장 본문입니다.

 

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시왈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고 군자지도 암연이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 지원지근 지풍비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 

詩云潛雖伏矣 亦孔之昭. 

시운잠수복의 역공지소. 

故 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可見乎. 

고 군자내성불구 무오어지 군자지소불가급자 기유인지소불가견호. 

詩云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시운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 

故 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고 군자 부동이경 불언이신. 

詩曰奏假無言 時靡有爭. 

시왈주가무언 시미유쟁. 

是故 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시고 군자불상이민권 불서이민위어부월. 

詩曰不顯惟德 百辟其刑之. 

시왈불현유덕 백비기형지. 

是故 君子篤恭而天下平. 

시고 군자독공이천하평. 

詩云予懷明德 不大聲而色.

시운여회명덕 부대성이색.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자왈성색지어이화민 말야. 

詩云德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운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쳤다”고 했으니, 그 문채의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확연하지만 날로 없어진다. 군자의 도는 담담하나 싫어지지 아니하고 간략하지만 세련되었으며 따뜻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심원한 이치가 가까운 데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바람이 저절로 불고 있는 것임을 알며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알면 더불어 덕德의 세계에 들어 갈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잠겨 있어서 비록 숨어 있지만 또한 매우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속으로 돌이켜보아 없는 바의 것은 오직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로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옥루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아니하여도 공경 받으며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신용을 얻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강림을 빌 때에 말이 없었다. 그때 다툼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정치를 하면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힘쓰고, 화를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도끼보다 두려워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아니하는가, 오직 이 덕이여, 모든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는도다.”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스러워서 천하가 화평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명덕明德을 그리워한다. 소리를 크게 하거나 안색으로써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리나 얼굴빛이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말단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고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

 

2. 드디어 『중용』의 마지막 장입니다. 물론 제1장 공부를 맨 뒤로 돌렸으니 사실은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 상으로는 최종 결론인 셈입니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화룡점정의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완전한 중용 실천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나지막이 말함으로써 여백의 결론에 갈음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용이다’라고 위세 떨지 않으며[무성無聲] ‘이렇게 중용했다’라고 생색 내지 않아야[무취無臭] 제대로 된[지至] 중용입니다. 그게 바로 중용의 본령[성性]입니다. 거꾸로, 생명의 본령이 중용입니다. 중용이 아니면 참 생명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묘사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마지막 이 한마디를 예비한 것입니다. 일일이 그 묘사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조망함으로써 간결한 결론에 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스스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용 실천은 한마디로 “평범한 선善”입니다. 그것은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惡이 되고 마는[적연이일망的然而日亡] 소인배의 언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결국은 백성과 나누는 자유자재한 소통임을 강조합니다. 이러저러한 술수[성聲]나 전략[색色]을 동원하여 백성을 엎드리게 하는 것은 소인배의 짓입니다. 군자는 고요한[부동不動] 침묵으로[불언不言] 백성을 새롭게 빚어냅니다[화민化民]. 백성은 공경敬과 신뢰信로 화답합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이것이 대동大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중용 실천의 영원 궤도입니다.

 

3. 그 동안, 때로는 온건한 원칙론으로, 때로는 거침없는 직격탄으로 중용을 지금의 사회정치 상황과 연결하여 읽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쯤이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제33장 말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이 되고 마는 언행 때문에 백성에게 공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소인배가 누구인지, 그래서 우리가 여태 무엇을 주의해 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침묵 속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툼 없는 나날[시미유쟁時靡有爭]을 그리워합니다. 모두 함께 손뼉 치며 행복을 나누는 나날을 꿈꿉니다. 누군가와 맞서는 나날이 평범한 백성에게 얼마나 고단한 시간인 줄 안다면 최고 권력자는 하루라도 빨리 모질고 사나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겪었듯 최고 권력자는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생떼 같은 아이들을 차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도 하구한날 형형색색 옷 갈아입으며 희희낙락했던 그입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의 애원을 무표정으로 외면했던 그입니다. 중동독감이 창궐하는 와중에도 국가원수로서 책임지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던 그입니다. 이미 죽은 벼에 대고 물대포 쇼를 벌였던 그입니다. 일제 부역 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획일화하는 그입니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10억 엔에 팔아넘긴 그입니다. 여전히 국민을 백안시하는 군주의 언행을 되풀이하고 있는 그입니다. 과연 기탄없는無忌憚 그입니다.


대체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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