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3장 본문입니다.
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시왈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고 군자지도 암연이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 지원지근 지풍비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
詩云潛雖伏矣 亦孔之昭.
시운잠수복의 역공지소.
故 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可見乎.
고 군자내성불구 무오어지 군자지소불가급자 기유인지소불가견호.
詩云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시운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
故 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고 군자 부동이경 불언이신.
詩曰奏假無言 時靡有爭.
시왈주가무언 시미유쟁.
是故 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시고 군자불상이민권 불서이민위어부월.
詩曰不顯惟德 百辟其刑之.
시왈불현유덕 백비기형지.
是故 君子篤恭而天下平.
시고 군자독공이천하평.
詩云予懷明德 不大聲而色.
시운여회명덕 부대성이색.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자왈성색지어이화민 말야.
詩云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운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쳤다”고 했으니, 그 문채의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확연하지만 날로 없어진다. 군자의 도는 담담하나 싫어지지 아니하고 간략하지만 세련되었으며 따뜻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심원한 이치가 가까운 데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바람이 저절로 불고 있는 것임을 알며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알면 더불어 덕德의 세계에 들어 갈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잠겨 있어서 비록 숨어 있지만 또한 매우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속으로 돌이켜보아 없는 바의 것은 오직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로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옥루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아니하여도 공경 받으며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신용을 얻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강림을 빌 때에 말이 없었다. 그때 다툼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정치를 하면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힘쓰고, 화를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도끼보다 두려워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아니하는가, 오직 이 덕이여, 모든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는도다.”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스러워서 천하가 화평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명덕明德을 그리워한다. 소리를 크게 하거나 안색으로써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리나 얼굴빛이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말단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고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
2. 드디어 『중용』의 마지막 장입니다. 물론 제1장 공부를 맨 뒤로 돌렸으니 사실은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 상으로는 최종 결론인 셈입니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화룡점정의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완전한 중용 실천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나지막이 말함으로써 여백의 결론에 갈음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용이다’라고 위세 떨지 않으며[무성無聲] ‘이렇게 중용했다’라고 생색 내지 않아야[무취無臭] 제대로 된[지至] 중용입니다. 그게 바로 중용의 본령[성性]입니다. 거꾸로, 생명의 본령이 중용입니다. 중용이 아니면 참 생명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묘사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마지막 이 한마디를 예비한 것입니다. 일일이 그 묘사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조망함으로써 간결한 결론에 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스스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용 실천은 한마디로 “평범한 선善”입니다. 그것은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惡이 되고 마는[적연이일망的然而日亡] 소인배의 언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결국은 백성과 나누는 자유자재한 소통임을 강조합니다. 이러저러한 술수[성聲]나 전략[색色]을 동원하여 백성을 엎드리게 하는 것은 소인배의 짓입니다. 군자는 고요한[부동不動] 침묵으로[불언不言] 백성을 새롭게 빚어냅니다[화민化民]. 백성은 공경敬과 신뢰信로 화답합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이것이 대동大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중용 실천의 영원 궤도입니다.
3. 그 동안, 때로는 온건한 원칙론으로, 때로는 거침없는 직격탄으로 중용을 지금의 사회정치 상황과 연결하여 읽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쯤이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제33장 말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이 되고 마는 언행 때문에 백성에게 공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소인배가 누구인지, 그래서 우리가 여태 무엇을 주의해 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침묵 속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툼 없는 나날[시미유쟁時靡有爭]을 그리워합니다. 모두 함께 손뼉 치며 행복을 나누는 나날을 꿈꿉니다. 누군가와 맞서는 나날이 평범한 백성에게 얼마나 고단한 시간인 줄 안다면 최고 권력자는 하루라도 빨리 모질고 사나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겪었듯 최고 권력자는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생떼 같은 아이들을 차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도 하구한날 형형색색 옷 갈아입으며 희희낙락했던 그입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의 애원을 무표정으로 외면했던 그입니다. 중동독감이 창궐하는 와중에도 국가원수로서 책임지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던 그입니다. 이미 죽은 벼에 대고 물대포 쇼를 벌였던 그입니다. 일제 부역 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획일화하는 그입니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10억 엔에 팔아넘긴 그입니다. 여전히 국민을 백안시하는 군주의 언행을 되풀이하고 있는 그입니다. 과연 기탄없는無忌憚 그입니다.
대체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