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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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48쪽)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다.(49쪽)


마음병 상담 오는 아픈 사람 본인은 물론 그 가까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것은 ‘지금 뭘 해야 합니까?’입니다. 제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렇습니다. ‘지금은 뭘 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뭘 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그들의 바로 그 질문에 드리워진 질병의 내러티브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뭘 그렇게 한 결과 병에 걸렸음에도 자꾸 뭘 (더)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가능하면 빨리, 가능하면 기존의 논리를 통해 병 이전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이 욕망의 작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려고, 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정적 계기”를 정색하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이치상 그 자체로 능동적인 내용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이나 그 가까운 사람들이 여태까지 해온 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픈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을 해석·평가·전망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잘못된 상식 또는 어설픈 인문적 지식을 동원해 오해하며, 윤리적·인격적 흠결 문제로 몰아 비난하며,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고 다그치거나 대체 고쳐지기나 하겠느냐며 절망하는 일, 그 관성 앞에 일단 무조건 멈칫하고 서야 합니다. 멈칫하는 찰나 한 생각 돌이키는 틈이 생깁니다. 틈은 시간을 발효시키고 공간을 주름지게 합니다. 발효는 우연을 치밀하게 파고들고 주름은 전체성을 풍요롭게 드러냅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소비 향락을 재빨리 흡입하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지표인 시대에서 머뭇거림은 다만 강박스펙트럼의 한 가지일 따름입니다. 치료라는 이름의 교정 대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시대정신은 자신의 병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자신의 몰락을 대박으로 규정합니다. 자신의 탈진을 헌신으로 미화합니다. 도착적이거나 분열적인 시대정신의 커튼 뒤에서 정작 고요히 머무르는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천국을 누리는 순수 천사들이 있습니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병과 몰락과 탈진의 절대다수 목숨 값을 향유하는 극소수 존엄이 있습니다. 이들의 과두정이 민주주의를 미끼로 인류의 파멸을 낚고 있습니다.


혁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으므로. 다만, 머뭇거리라고 말합니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간 시대의 새로운 혁명이므로. 루저의 잠시 머뭇거림이 위너의 고요한 머무름에 금을 내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위너의 수탈은 루저의 “즉각 반응”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저가 즉각 성과를 내지 못하고 멈칫거리면 위너의 수탈은 지체됩니다. 위너의 수탈이 지체되는 틈에서 루저의 각성이 촉진됩니다. 루저의 각성은 머뭇거림이 병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동질적 긍정성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자발적 머무름의 주체를 뒤바꿉니다. 머무름의 주체를 뒤바꾸는 것이 혁명입니다. 참 진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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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9장 본문입니다.

 

王天下有三重焉其寡過矣乎.

왕천하유삼중언기과과의호. 

上焉者雖善無徵無徵不信不信民弗從. 

상언자수선무징무징불신불신민부종. 

下焉者雖善不尊不尊不信不信民弗從. 

하언자수선부존부존불신불신민부종. 

故君子之道本諸身徵諸庶民考諸三王而不繆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

聖人而不惑質諸鬼神而無疑知天也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人也.

고군자지도본제신징제서민고제삼왕이불무건제천지이불패질제귀신이무의백세이사

성인이불혹질제귀신이무의지천야백세이사성인이불혹지인야. 

是故君子動而世爲天下道行而世爲天下法言而世爲天下則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시고군자동이세위천하도행이세위천하법언이세위천하즉원지즉유망근지즉불염. 

詩曰在彼無惡在此無射庶幾夙也以永終譽. 

시왈재피무오재차무사서기숙야이영종예. 

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

자미유붕려차이조유예어천하자야.


천하에 왕 노릇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을 갖추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옛 시대의 것은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증거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 삼을 만한 것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중 시대의 것은 비록 좋을지라도 높여지지 아니하니 높여지지 아니하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자신의 몸에서 근본을 삼고 여러 백성에게 징험하는 것이니 이는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 보아도 그릇되지 아니하고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고 백세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서 따져 보아도 의혹스럽지 아니한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행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도가 되고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이 된다.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게 되고 가까이 있으면 싫어하지 않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 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다.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 길이 명예로움을 마치도록”이라 했다. 군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이 명예로움을 천하에 가지게 된 일은 없다.

 

2. 법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 시대, 사회 상황에 맞는 것을 만들어 쓸 뿐입니다. 오래 된 것이라고 해서 성인의 작품 운운하며 신비화할 일도 없고 오늘날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미비점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절대화할 일도 없습니다. 판단 기준은 그 때마다 언제나 백성의 평안과 행복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본말을 뒤집으면 그대로 악법이 됩니다. 악법을 만들지 않기 위한 일련의 사회적 행동이 다름 아닌 정치입니다.


3. 중용의 정치는 군자의 몸, 즉 실천의 진정성을 점검함에서 출발합니다[본제신本諸身]. 자신의 실천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생략한 채 백성을 훈계하려고만 드는 권력자를 군자라고 할 수 도 없고 그의 정치를 중용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실천의 진정성을 돌아본 다음 겸허하게 백성과 쌍방향으로 소통해야 합니다[징제서민徵諸庶民]. 평등한 쌍방향 소통으로 이룩되는 ‘평범한 선’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지요. 중용 정치는 홍보와 훈계를 하지 않습니다. 군자는 자신을 백성 위에 있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자신을 백성 한복판에 있는 ‘중심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천하에 실체, 즉 명사로 존재하는 도리道, 법규法, 준칙則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군자의 실천, 즉 동사적 사건으로만 드러납니다. 실체는 관념이고 의식입니다. 실천은 몸이고 감각입니다. 중용은 결코 관념과 의식이 아닙니다. 중용은 한사코 몸이며 실천입니다. 인능홍도비도홍인人能弘道非道弘人, 그러니까 동사적 실천이 명사적 실체를 담보하는 것이지 명사적 실체가 동사적 실천을 담보하는 게 아닙니다.


5. 지극한 군자의 실천으로 속이 꽉 들어찬 중용은 동시에 온 백성의 것이기도 합니다[원지즉유망근지즉불염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백성은 다만 적용 대상으로 물화될 수 없습니다. 중용의 주체로 존중될 때 백성은 스스로 적용해 갈 것입니다. 군자는 백성과 이렇게 서로주체가 됨으로써 더불어 “길이 영예로움으로 마칠[이영종예以永終譽]” 수 있습니다.


6. 정치는 법을 만들고 법은 정치를 규정합니다. 이 나선의 선순환을 통해 국가가 형성·유지·발전되어갑니다. 대한민국은 태생적 비극 때문에 해방 후 70년 동안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지배세력은 이 악순환의 과정을 이용하여 매판독재반통일의 이익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현대사입니다. 치명적으로 중요함에도 국사 교육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없는 부분이므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나마 이 자리에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제가 항복한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점령하였습니다. 1945년 9월 7일「미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호」는 점령지 내의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모든 권력을 점령군이 장악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 점령군 사령관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우리는 그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대한민국을 구원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점령군 수장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한 장본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점령군은 군정 실시를 위해 군정청을 설치하였습니다. 군정청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통치 기조를 짰습니다. 한국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방침을 바꾸어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소장을 초대 군정장관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의 종전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였음은 물론입니다. 당연히 일본인 고위관료들을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남한 상황 및 행정 각 분야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군정청에 제공함으로써 군정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군정의 이런 기조는 해방 이후 식민 유제와 부역자 청산을 통해 새로운 독립국가가 수립되기를 기대하던 한국인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군정의 법률체계였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의 명령(포고, 명령, 지령)과 군정청 법령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군정이 명시적으로 폐기하지 않은 식민지 법률 모두를 그대로 살려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군정법령 21호」는 지방의 모든 법규와 관례와 식민지 행정조직의 유지를 명하였고, 조선총독이 행하던 모든 권한을 군정장관이 행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임시보안령, 보안법, 집회취체령, 조선불온문서임시취체령 등 대표적인 악법을 그대로 존속시켰습니다.


1946년 3월부터는 군정에 한국인을 본격적으로 참여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식민지관료와 우익세력에게 행정실권을 이양해가는 절차였습니다.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른바 신식민지 통치는 이렇게 철저히 일제 식민지 체제와 부역세력을 근간으로 하여 기조를 잡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독립국가의 물리적 토대가 되는 군대와 경찰 창설 문제입니다. 미군정은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 설치령을 공포하면서 좌익 성향이 강한 국군준비대 해체를 명령했습니다. 이후 자발적으로 생겨났던 군대 조직을 통폐합하면서 만주군·일본군 사관·부사관 출신과 우익을 중심으로 국군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경찰은 창설이 아니라 식민지 경찰 복원이었습니다. 조직에서도 식민지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인력에서도 식민지 경찰 관료를 핵심에 채워 넣었습니다. 경위 이상 고위직의 경우 식민지 경찰 경력자 비율이 80%를 넘었습니다.


결국 이런 기반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을 팔아먹었던 왕족·노론과 식민지 신흥 부역 세력은 그 어떤 단죄도 받지 않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여론에 떠밀려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사실상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식민지 35년 동안 일제의 마름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했던 자들 가운데 오직 2명만이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 5년의 나치 점령 기간을 겪은 프랑스와 비교해보십시오. 드골정부는 99만 여명의 나치 협력자를 투옥하고 이들 중 5700여명은 사형, 2700여명은 종신 강제노동, 22800명은 징역, 1만 여 명에게는 유기한 강제노동이 선고하였습니다. 또한 95000명에게는 부역죄형을 선고하고 7만 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단죄는 특히 가혹했습니다. 900여개의 신문 잡지 가운데 649곳을 폐간하거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로 살아남은 매판세력은 북한 정권과 체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반공을 등에 업고 식민지체제와 본질이 같은 독재체제를 자연스럽게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에는 개발독재의 전선에 섬으로써 국가경제의 역군이라는 영예까지 얻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 통치 집단의 실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법이, 그들의 정치가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고 ‘중심’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들이 국민을 주체로 세우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들의 군대가 국민의 군대가 아니고 정권의 군대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경찰이 국민의 경찰이 아니고 정권의 경찰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언론이 국민의 언론이 아니고 정권의 언론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국민의 종교가 아니고 정권의 종교인 까닭입니다.


그들이 세월호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세월호법 위에 군림하는 시행령을 보위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중동독감을 방치하였습니다. 그들이 중동독감의 책임을 자치단체와 일개 병원에 떠넘겼습니다. 그들이 역사교과서 획일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찬양하기 위하여 유관순을 여자 깡패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일본과 이른바 위안부 합의를 했습니다. 그들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다시 한 번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결국 국민을 패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가슴은 명예 아닌 공포와 절망, 불안과 우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 패악을 용납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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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8장 본문입니다.

 

子曰 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及其身者也.

자왈 우이호자용 천이호자전 생호금지세 반고지도 여차자 재급기신자야. 

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 

비천자 불의례 부제도 불고문. 

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금천하 거동궤 서동문 행동륜.

誰有其位 苟無其德 不敢作禮樂焉. 

수유기위 구무기덕 불감작예악언. 

誰有其德 苟無其位 亦不敢作禮樂焉. 

수유기덕 구무기위 역불감작예악언.

子曰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 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자왈오설하례 기부족징야 오학은례 유송 존언 오학주례 금용지 오종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자기가 쓰이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의 도로 돌아가려고 하면 이와 같은 자는 재해가 그 몸에 미치는 것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논하지 아니하고 법도를 제정하지 아니하며 문자를 고정하지 아니한다. 지금 천하의 수레는 궤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위에서는 윤리가 같다. 비록 그 위치에 있으나 진실로 그에 맞는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비록 그에 맞는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夏의 예를 말할 수 있으나 기杞에서는 증거 삼을 수 없다. 내가 은殷의 예를 배웠으니 송宋은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내가 주周의 예를 배웠으니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를 따른다.”

 

2. 사리에 맞지 않는[우愚] 선택을 하고도 밀어붙이거나[용用], 백성의 눈높이를 좇아가지 못하면서도[천賤] 소통을 거부하거나[전專], 진화를 거듭하면서 달라진 오늘 상황[금지세今之世]에 눈감은 채 한사코 구시대 가치[고지도古之道]를 고집하는 권력자는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 하는 말이기나 한 것처럼 섬뜩합니다. 주제넘고 독선적인 권력자에게 날린 직격탄입니다.

 

3. 국가 규범과 질서를 확립하고 공적인 문화 콘텐츠 기조를 짜는 일은 덕을 갖춘 주권자가 할 일입니다. 대의정치에서는 이런 일이 소수의 선택 받은 자에게 위임되며, 그 정점에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이 있습니다. 전제주의 시절 천자天子라 이름 한 절대 권력자든 오늘날 대통령이든 그 정상의 위치만으로는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덕이라 합니다.

 

『중용』의 맥락에서 말하는 덕은 당연히 중용의 실천력일 것입니다. 중용은 쌍방향 소통으로 온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중용의 깃발로서 천자도 대통령도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중용에 반한다면 천자도 대통령도 무의미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 무의미성은 위임의 철회로 현실화됩니다. 주권자가 직접 집단 중용을 빚어가기 시작했다면 상황은 매우 급박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재앙을 맞는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4. 하례夏禮든, 은례殷禮든, 주례周禮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시중時中하여 오늘 쓰기[금용今用]에 합당한가, 따를만한가[종從], 그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오늘을 사는 백성의 의중과 상관없는 가치는 그것을 진리라 하든, 과학이라 하든, 국위라 하든, 특정 세력이 주려 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주권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미 그 부분에서 위임 한계를 일탈한 이상 위임받은 자는 권한이 정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의 기수, 주권자의 대표단수인 공자가 잘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를 따른다[금용지오종주今用之 吾從周].”

 

5. 여기 주周는 이 땅의 깨어 있는 백성입니다. 그 주권자의 뜻입니다. 그 뜻을 거슬러 지배집단은 강정에 사실상 ‘미군기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례, 그러니까 미국을 등에 업고 매판과 독재를 결합한 이승만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그 뜻을 거슬러 지배집단은 군사조약을 맺어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허용하려 협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례, 그러니까 독립군을 토벌했던 박정희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도록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중동독감을 방치하고 역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10억 엔에 팔아먹은 것일까요?


 

참으로 부끄럽고 슬픕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판 세력의 후손들이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여 이 나라를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옛날 그 식민지 시대가 바로 황금시대일 터. 무조건 따라야 할 진리일 터. 반공 애국의 탈을 쓰고 지금도 현실을 비틀어 과거에 복종시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천은 자주·민주입니다. 숭미모일崇米慕日의 옛 질서는 혁파해야 합니다. 오늘은 오늘의 실천을 할 따름입니다. 그게 군자의 길, 곧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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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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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32쪽)


5월 23일 아침 한겨레신문 김영훈 기자의 <생각 줍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유일 종교이자 이념인 자본주의는 이미 거북이의 등껍질을 떼어버리게 했고, 물고기를 뭍에 오르게 했습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인간의 탐욕, 더 정확히 수탈 체계는 벌써 통제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분주하고 부산한 삶으로 대박치는 사람의 ‘자뻑’ 활동이 힘과 돈을 그러모아 천년왕국의 꿈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온갖 토건을 일으키며 분주히 돌아다닌 CEO 빙의 ‘지도자’ 뒤를 이어 수백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교주 빙의 ‘지도자’가 목하 새로운 경제를 창조한다며 훤화하지만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입니다.


휴먼스피드를 넘어서고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면 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이르는 것은 신의 경지가 아닙니다. 신의 느낌입니다. 전능감입니다. 전능감은 안와전두엽이 망가져 자기성찰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막무가내 자신감입니다. 위너가 지닌 맹독성 독선입니다. 위너의 독선은 기존 가치만을 재생하고 가속화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을 고갈시킵니다. 공동체 전체를 살리려면 쪽박 찬 민중의 “깊은 심심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은 심심함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깊은 심심함의 공간은 낮은 담장 아래 있습니다. “정신적 이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느릿느릿 낮은 담장 아래를 걸어서 육십갑자를 살았습니다. 대한민국 중산층 요건 여섯 가운데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도정이었습니다. 거북이인 거북이로 등껍질 이고 가려 합니다. 물고기인 물고기로 뭍에 오르지 않고 살려 합니다.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새로움, 경이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쓰다듬어봅니다, 제 등껍질을. 가만히 손 흔들어봅니다, 제가 오르지 않은 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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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7장 본문입니다.

 

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대재. 성인지도. 양양호발육만물 준극우천.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 대기인이후행. 

故 曰苟不至德 至道不凝焉. 

고 왈구부지덕 지도불응언.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고 군자 존덕성이도문학 치광대이진정미 극고명이도중용 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 

是故 居上不驕 居下不倍. 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시고 거상불교 거하불배. 국유도 기신 족이흥 국무도 기묵 족이용.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시왈 기명차철 이보기신 기차지위여.


크도다. 성인의 도여. 양양하게 만물을 발육하여 그 높음이 하늘에 닿았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 삼천 가지가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으로 하지 아니하면 지극한 도는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2. 전체적으로 대구對句를 통해 속뜻을 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 장입니다. 하지만 대구가 그리 치밀하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듯한 메시지가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해석이 두루뭉술한 순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대구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문맥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 우선 성인의 도와 예의, 위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인仁과 예禮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군자의 도는 이상형으로서 어떤 실체substance처럼 인식되고 예의, 위의는 실천 과정처럼 인식됩니다. 이는 후대 주희의 체용體用 대비와 맞물리는 것이겠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도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실천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 이런 빛에서 그 아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하지만 어조사 이而를 앞뒤로 해서 배치된 말의 내용이 누가 봐도 상반된 것인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접으로 처리해서 대구를 통한 강조 의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덕성이 존귀하게 되고, 넓고 큰 경지에 이르고, 높고 빛남이 극에 달하고, 이미 갖추어진 옛것을 익히고, 돈후한 것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배우며,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며,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 나아가며, 예법을 지키는 것은 부단한 닦음, 깨어 있는 실천 감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도란 찰나마다 치열한 실천 과정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관념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반적 대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각 이而 뒤에 오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 말은 이미 온고溫故에 무게가 실린 채 그 의미가 정착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접으로 읽은 데서 비롯한 오류입니다.

 

성인의 도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완성된 실체적 존재로 관념화, 박제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 바로 온고이지신입니다. 물론 순 임금과 같은 성인의 이상형이 실존했다는 전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순 임금은 순 임금 자신의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그 예를 본받되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지신知新입니다. 바로 그 지신이 관건입니다. 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늘 묻고[문問] 배우고[학學]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고[진정미盡精微]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고[중용中庸] 세세한 예법 하나까지 지키는[숭례崇禮]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기도 하고 자긍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도를 적확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면서도 자랑하지 않으니 겸손이요, 비록 성인이란 자의식은 한사코 내려놓지만 당당하게 평범함에 깃드니 자긍입니다.

 

5.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거상불교 거하불배居上不驕 居下不倍]”는 말이 바로 겸손과 자긍을 역설의 연금술로 달여 낸 것입니다. 다만 저는 배倍의 뜻을 달리 새깁니다. 윗사람의 교만과 아랫사람의 배반은 썩 어울리는 대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배倍는 비속하다, 더 나아가 비굴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만과 대칭이 될 수 있습니다.

 

6. 국유도國有道 이하 문장 역시 종래의 읽기를 답습하면 전체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리 읽으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제10장에서 말한 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더욱 분발하게, 곧 흥興하게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알고 있음에도 덮어주어, 곧 용容하여 장차 바른 길로 나올 여지를 남겨둔다.”

 

이런 해석은 제6장에 나온 순 임금의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 실천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장이 제26장 말미에 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7. 과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국민을 부하로 여겼습니다. 건설회사 CEO 출신 대통령은 국민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여겼습니다. 현임 대통령은 국민을 무엇으로 여기는 지 궁금합니다. 아무리보아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신민臣民이거나 신도信徒 아닐는지요. 또는 둘의 결합이든지·······.


두루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분명히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에게서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공무원 집단의 우두머리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현임 대통령은 유체이탈 어법으로 국민을 가르치고 꾸짖습니다. 이는 헌법 제1조를 전혀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국민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생각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국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실천, 그러니까 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왔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오히려 물색없을 따름입니다. 마음 다해 발원發願합니다. 각자 대통령인, 아니 각자 국가인 국민이여, 부디 헌법 제1조 제2항을 되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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