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성자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성인야. 

誠之者 擇善而固執 之者也. 

성지자 택선이고집 지자야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 措也. 

유불학 학지 불능불차야. 유불문 문지 부지부 조야.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부조야.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유불행 행지 부독부조야.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과능차도의 수우 필명 수유 필강.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성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성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여러 의미 갈래를 거느려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성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입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성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중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곧 체물이불가유體物而不可遺하고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중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성誠과 애쓰는 성지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성이야 순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마다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 곧 택선이고집지擇善而固執之하는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 곧 박문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하는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성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성입니다.

 

4. 지금은 그도 쉰을 넘기고 유수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가 대학원 다닐 때 제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명문가 출신인 그의 지도교수가 자녀를 어떻게 호방하고 자유롭게 양육하는가를 간결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공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운운. 제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거나 못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에이, 선생님도·······그랬으면 제가 이 말씀 왜 드렸겠어요?”


제자가 당연히 여긴 부분과 제가 당연히 여긴 부분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여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게 세습이야. 이른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그 아이들은 열린 공부 길 위에 이미 서 있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아이들은 공부해라, 공부해라 골 백 번 잔소리해야 하고, 심지어 욕하고 때려야 공부 길로 겨우 들어서. 들어서서도 백배 천배 독하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어.”


물론 여기 공부와 중용은 전혀 다릅니다. 중용은 세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속한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제3장에서 『중용』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시간들을 어렵게 견뎌야 하는 사람일수록 중용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일이 더욱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용의 덕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가족 먹여 살리는 일에 목맬 수밖에 없는,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이 시시각각 강요되는 극단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용은 이들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용이,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라면, 분명 이들보다 더 용이하게, 더 수준 높게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해야 이치상 맞습니다. 공자 당시로 돌아가 말한다면 공자 자신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계층 지성집단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각성하여 중용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고갱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중용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입되고 그 중심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다른 개념의 중용을 신봉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지성집단은 반드시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힘과 돈을 장악하고 있는 제후 집단입니다. 정치경제의 현실은 명실상부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한 평생 이들을 곡진히 계몽하고 설복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공자의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의 실패입니다. 공자에게서 『중용』이 발원된 지 이천오백 여 년, 여전히 제후의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이들은, 아니 이들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의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스스로 각성한 지성집단은 나태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오히려 날 세우고 떠들던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오면서는 입을 닫음으로써 파렴치하게 부역하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제후동맹은 날로 그 반중용적 매판독재분단고착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제후의 가치는 갈수록 난공불락이 되어가고 공자의 수레바퀴는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결국 우리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평범함조차 사치랄 저 민중, 미상불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존의, 생명의 낮은 연대를 형성하는 그 단 하나의 길 말고 달리 생각할 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용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중용 하도록 숙명 지우는 국가를 끌어안고 우리는 목숨 걸고 중용을 해야 합니다. 아, 참으로 독한 실천의 독한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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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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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를 서구와 모든 점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일된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사회의 일반적 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다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6-7쪽)

 

『철학은 뿔이다』(북인더갭, 2016)라는 책이 있습니다. 헤겔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번역가이자 시인인 전대호가 쓴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집어 들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가 김상봉을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필 헤겔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처음 것은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직접 리뷰 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왜 하필 헤겔인가, 하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대호는 자율과 책임을 이행하는 대화적 주체를 철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의 이런 철학과 일치하는 철학이 다름 아닌 헤겔입니다. 헤겔을 방편으로 삼아 그는 자신의 사유를 펼칩니다. 이것을 그는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목소리를 낼 뿐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왜 하필 헤겔인가 하고 품은 의문은 그의 이 결정적 두 문장 사이에 있는 어긋남 또는 모순 때문입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끌어들인 헤겔이 어떻게 내 목소리를 내는 나인가?”

 

이 땅의 잘못된 학문과 교육을 간파하고 이미 자신의 사유 근간을 확립했다는 그의 말에 터할 때, 스스로의 언어로 철학체계를 구축하면 되지 왜 구태여 ‘외부’로 나가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헤겔을 방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하고, 헤겔주의자라고까지 자처하는 것일까요? 전대호의 이런 말하기는 과연 그가 말한바 ‘제자리에서 말하기’가 맞는 것일까요? 그러면 헤겔은 누구를 방편으로 끌어들였으며 누구주의자였을까요?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평범한 철학도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할 때, 대가나 거장에 기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는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왜 그의 ‘외부’가 하필 서양인가입니다. 동아시아 전통도 아니고, 이 땅의 전통도 아니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옹호하는 근대성을 동아시아 전통이나 이 땅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였다면 이는 확실히 그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의 실패에는 다분히 그가 비판하는 ‘외부인 놀이’가 끼어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헤겔보다 천백여 년 앞서, 이 땅의 원효가 이미 근대성의 원리를 장쾌하게 펼쳐놓았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보편적 과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과 그 공동체의 구체적인, 그러니까 특수한 현실입니다. 전대호를 읽으며 일어났던 의문이 한병철을 읽을 때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한병철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쓴 명쾌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읽을 때 다가오는 낯설음은 다만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같은 시기에 첫 출판되었다면 한국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가 한국 사회가 서구 사회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냉전이 사회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사유 현실은 확실히 한국 아닌 서구, 독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거니와 종북 프레임이 이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망치고 있는 현실이 어떻게 근본적이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어도 매판독재분단세력에게 표를 던지는지 궁금합니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신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는 준주변부 한국의 성과사회가 독일의 그것과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세월호사건 뒤였다면 이 서문을 과연 어찌 썼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병철의 저작 『투명사회』, 『심리정치』리뷰 56편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의 글이 워낙 정확명징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주는 행복감은 대단합니다. 『피로사회』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번 리뷰는 제가 좀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질병, 특히 마음병을 논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문학자이고 저는 의자醫者입니다. 배타적 구획은 저 또한 반대하지만, 임상 현실에 처한 저로서는 인문학적 접근의 폐단이 범람하는 현실을 어물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까칠한 자세로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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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6-05-12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대호가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 방점은 `헤겔`보다 `나의`에 찍혀야 합니다. 전대호의 헤겔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헤겔이 아니라 전대호가 이해하고 소화한 헤겔입니다. 헤겔을 소에 비유하자면, 전대호의 헤겔이란 목장의 소나 정육점의 쇠고기가 아니라, 전대호가 이미 씹어서 삼키고 동화해서 이미 그의 몸이 된 헤겔입니다. 그런 헤겔을 방편으로 운용하는 것도 외부인 놀이일가요? 인용하신 두 문장 사이에 어긋남 혹은 모순이 있다는 평가를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bari_che 2016-05-12 14:22   좋아요 8 | URL
탁월한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따릅니다. 쇠고기가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몸이 되면 더 이상 소가 아닙니다. 헤겔이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사상이 되면 더 이상 헤겔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대호는 지금 헤겔을 여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소화가 덜 된 것이라면 아직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소화가 다 되었음에도 헤겔을 붙들고 있다면 이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입니다. 두 경우 모두 논전 아닌 실전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실전에서는 방점의 위치차가 무의미합니다. 막춤 못 추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2016-05-1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자들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그 선배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선배가 말하자면 이정표의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몹시 추상적인 철학의 세계를 탐험하다보면, 우선 철학자 본인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할 필요가 절실해집니다. 그럴 때 이름난 선배들이 위치 확인용으로 매우 요긴합니다. 예컨대 나는 `헤겔과 칸트 사이의 중간쯤에 있다`라는 판단이 서면, 나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죠. 자기 생각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리고 설명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아는 이정표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설명을 풀어나가면 매우 효율적입니다. 더구나 수준이 깊어지면, 그렇게 이정표들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논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요컨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사상을 위해서입니다. 아마 전대호가 헤겔을 언급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일 겁니다.

bari_che 2016-05-19 14:32   좋아요 10 | URL
논점이 비틀어져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논의를 더 계속해야 하나 의문이 들어 고민하다가 다시 추슬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에 나가 공부한 사람들이 그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쓴 글을 여기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읽을 때 드는 괴리감에 대한 언급이 이 이야기의 발단이었습니다. 전대호에 관한 언급은, 끌어들인 헤겔이 과연 전대호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쇠고기 비유를 들어 나의 헤겔과 내 목소리 사이에는 어긋남 또는 모순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여 논점을 더 명료히 했습니다. 소화 흡수가 끝난 쇠고기는 더 이상 소가 아니듯 소화 흡수가 끝난 헤겔은 더 이상 헤겔이 아닐 텐데 계속 헤겔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상 아닌 생계 때문이 아닌가, 다시 물었습니다.

반론하신 분은 제 질문의 구체적 문맥을 넘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 선배 대가에 기대는 것은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고, 동료 철학자들에게 더 잘 설명하려 함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정도 내용이라면 이미 제가 인정한 바입니다. 이런 기댐을 제가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소화 흡수가 다 끝나 내 목소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헤겔이 전대호가 되었다, 따라서 양자 사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으면서 왜 계속 헤겔을 ‘이정표’ 삼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이정표가 필요한 것은 여행자가 길을 모를 때입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직도 헤겔이라는 이정표가 필요한 전대호라면 그의 헤겔은 그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외부 목소리입니다. 정말 헤겔이 전대호임에도 전대호가 여전히 헤겔 이름을 들먹인다면 그 헤겔이라는 이름은 전대호의 신분증명서이거나 훈장일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생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그렇다고 할 때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제 문제의식은 거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효 이야기도 하고 한국 사회 특수성 이야기도 하면서 이 현장의 생명, 이 현장의 삶 문제를 풀기 위해 이 현장의 경험과 언어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추측건대 반론하신 분에게는 아직 이 문제가 절실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반론하신 분의 응원은 전대호 본인에게 그다지 힘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끝으로, 반론하신 분이 말씀하신 ‘깊은 수준’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대호의 책도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골로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에 계속 머무르는 산골에서 신선놀이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공부깨나 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적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들이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의 아이콘입니다. 대승의 길은 아라한의 깊은 산골에서 나와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향입니다. 모름지기 철학자라면 아라한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회향하는 보살, 참 붓다의 숙명을 기꺼이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함에서 마치려면 깊이에 빠져도 되지만, 철학함doing philosophy으로 나아가려면 ‘깊은 수준’의 ‘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휴먼스케일 안에서 휴먼스킬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호사건을 겪은 대한민국에서 철학함이란, 휴먼스킬 됨이란 막춤꾼 되기입니다. 아니 모자랍니다. 막싸움꾼 되기입니다. 저는 아픔과 죽음이 전방위로 들이닥치는 현장을 지키는 임상의입니다. 변방 한의사입니다. 온 영혼에 그득 담은 이 땅의 눈물을 빌어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대호가 부디 옹골찬 막싸움꾼 되기를! _()_
 


1. 제20장 여섯 번째 본문입니다.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재하위불획호상 민불가득이치의.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획호상유도 불신호붕우 불획호상의.  

信乎朋友有道 不順乎 親不信乎朋友矣. 

신호붕우유도 불순호 친불신호붕우의.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순호친유도 반제신불성 불순호친의.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성신유도 불명호선 불성호신의.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의 신임을 얻어서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친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용을 얻지 못한다. 친구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 어버이(의 뜻)에 따르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 보아 성실하지 않으면 어버이(의 뜻)에 따르게 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선善에 밝지 않으면 몸에서 성실하게 되지 않는다.

 

2. 네 번째 문단에서 최상위 정치인에게 길게 다스림의 원칙을 설파한 데 이어 여기서는 백성과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 관료에게 행정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윗사람, 친구, 부모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런 패턴은 제20장 전반全般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실천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찰, 곧 반反하여 적확하지 못하면[불성不誠], 즉 어긋남이 있으면, 벗어나 흐르면 모든 인간관계에 파행이 오게 되고 결국 올바른 행정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관료의 행정적 실천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의 지평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인간관계의 고갱이에는 늘 자기 성찰이 자리하는 법입니다.

 

3. 자기 성찰의 기준은 선善에 밝은가, 아닌가, 입니다. 선은 무엇입니까? 군더더기가 필요하지 않지요, 그대로 중용입니다. 선으로 표현되는 사적 실천이야말로 중용으로 표현되는 공적 실천의 뿌리요, 동력이요, 증거입니다. 사적 부도덕성에 눈감은 채 공적 도덕 성을 입에 담는 것은 사기요 협잡입니다.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허나 그 말은 여기에 쓸 게 아닙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이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는 상식적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현실은 이 문제에서 오류를 범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사적 투명성과 공적 아우라Aura의 일치는 불퇴전의 원칙입니다. 제 자식 사립학교 보내려고 위장 전입한 바로 그 사람이 국민 건강 내팽개치고 돈 놀음 굴종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이보다 명쾌한 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사기/협잡꾼들은 자신들을 선하다고 합니다. 아, 물론 독선獨善이지요. 그들의 독선은 어떤 근거를 지니고 있을까요?

 

최근 전임 국무총리 한 사람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하면서 말했습니다. “진실은 승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자기기만이 독선의 본진입니다. 자기기만은 의도적 무지에 터하고 있습니다. 의도적 무지는 자신의 이익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결단한 영혼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저들의 영혼은 수탈과 동의어입니다. 수탈은 이 땅의 지배세력이 1400년에 걸쳐 유전시켜온 매판독재반통일의 DNA입니다. 매판독재반통일 전략으로 잡은 패권, 그것이 바로 독선의 요새입니다.

 

4. 대한민국 TV드라마에 나오는 악인의 엄마는 파멸 앞에서, 예외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랬다.” 이처럼 그악한 탐욕의 말은 다시없습니다. 이처럼 자기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단세포의 말은 다시없습니다. 대체 잘되는 게 뭘까요? 적어도 의로움은 아닙니다. 적어도 진실함은 아닙니다. 적어도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적어도 거룩함은 아닙니다. 착함, 그러니까 선에 밝음[명호선明乎善]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렇게 풀면 답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랬다.” 그렇습니다. 내 자식만 잘되면 끝이라는 생각에 무슨 가치와 의미를 전제한 해석이 필요하겠습니까. 너만 돈 많이 벌고 권력 누리고 살다 천당 가면 된다, 딱 이 정도면 족합니다. 세월호사건 이젠 그만해라, 멀미난다는 말에 깃든 생각도 여지없이 딱 이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에 어두움[암호선暗乎善]입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면 됩니다.


“나만 잘되면 되나, 나한테 떳떳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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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은 우리의 숙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덤인 만큼이나 우리의 자궁입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우울증은 명징한 울림이 됩니다. 그것은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입니다. 그것은 장엄한 빛의 커튼을 단도직입으로 찢고 엄습해 들어오는 어둠입니다. 100% 순도의 생명을 찰나에 망치는 죽음의 불순물입니다. 100% 순도의 죽음을 찰나에 깨뜨리는 생명의 순물질입니다. 이 도저한 역설을 알아차리고 삶의 물길로 터 내는 사람, 바로 그가 참사람입니다. 붓다이며 예수입니다. 아, 그런데 실은 그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여성입니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이 21세기 시공간에서 우리가 구태여 우울증을 말하고 여성을 말하는 까닭은 태고의 음성이었으나 오래토록 잊고 삶으로써 멸절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4대강이 죽어가듯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4대강을 살려야 국토가 살듯이 아이들을 살려야 우리 미래가 삽니다. 우리 미래인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머니, 그 가없는 여성성을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숭고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절대 우울 한가운데서 어머니, 저 생명의 근원인 여성은 생사를 꿰뚫는, 그러나 뜻밖에도 평범하고 또 평범한 일상을 지속합니다. 이 간절함, 이 사무침, 그래서 오히려 소꿉놀이 같은 도저한 생명 감각.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309-311쪽)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데서 치료를 받아야지, 동네 한의원에서 무슨·······, **대학병원으로 옮겨라. 어머니는 자신의 세계와 딸의 세계를 미분화 (단)일체 상태로 놓아둔 채 4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딸은 단순 소비자였을 뿐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딸이 주체 선언을 하자 어머니는 그 부정否定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게 하려고 ‘제대로 된 데’를 지목한 것입니다. 딸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不定이라는 사실. 부정不定이 생명이라는 사실. 생명은 여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 여성을 복원하기 위해 딸은 혁명 중에 있습니다. 혁명을 통해 딸은 비로소 여성이 됩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됩니다. ‘어머니’가 딸을 해방할 것입니다. 딸은 그의 딸을 해방할 것입니다.


딸은 활짝 웃으며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상담실을 떠났습니다. 딸의 뒷모습에 겹치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시 한 조각이 떠올랐습니다.


  恩

  그이는 지금 잠들었을까 폐지 수레 끌고 건널목에 서 있던 노란 가방을 멘 소년이 건널목을 뛰다 넘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년을 일으켜 안던 안녕을 확인하자 이내 굼뜬 노파로 돌아가 소년에게 천천히 밤빛 양갱을 건네던 노쇠하고 남루한 그 손앞에 주춤거리던 소년은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가 노파의 손을 쳐내며 아이를 안을 때 울음을 터뜨린 소년에겐 말하기 어려운 어떤 미안함이 있는 듯했고 소년에게 답하듯 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 가득한 손을 아래위로 끄덕이며 괜찮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 깨끗한 아이에게 더러운 노파가 건네려던 밤빛 양갱 같은

  밤의 빛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연약한 고귀함이 밤의 빛 속에 떠 있다


_<om의 녹턴> 일부(김선우 『녹턴』에서)



졸저 『안녕, 우울증』에 자성과 보결의 의미를 담아 75편의 리뷰를 적었습니다. 넉 달 보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사회의 어떤 겉모습은 바뀌었다 하겠지만 핵심 실재는 요지부동인 채로입니다. 세월호사건 진실은 표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공동체성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어둠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생명 앞에서 펼쳐지는 도저한 부정不定의 모성을 황급히 소환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밤의 빛 속에 떠 있는’ ‘연약한 고귀함’이 더없이 그립습니다. ‘남루한 그 손앞에’ ‘깨끗한 아이’의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의 쳐내는 손은 공동체 대한민국을 망가뜨리는 분열의 흉기입니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는 ‘더러운 노파’가 깊은 우울증에 잠긴 우리의 구원입니다. 어머니입니다. _()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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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다섯 번째 본문입니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범사예즉립 불예즉폐. 언전정즉불급 사전정즉불곤 행전정즉불구 도전정즉불궁.


무릇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어그러진다. 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착오가 생기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곤란하지 않게 되며 행동하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탈이 없게 되고 방법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  

 

2. 이 문단 또한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다가 느닷없이 예豫와 전정前定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집자가 흩어져 있는 문서 조각fragment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 칼 같은 문헌비평에 의거 빼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이 경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자연스러움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신修身문제를 계속해서 말하였고, 이 문단 바로 뒤에서는 성誠 문제를 언급합니다. 대략 이런 연결의 지도리로 예와 전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사회적 실천의 핵심으로 사적 실천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 예비적 단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꼿꼿한 발걸음 없이 사회적 외양만을 갖추고서는 참된 중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 내함은 수신과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다음 문단의 성과 잡는 것이지요. 

 

예전정豫前定은 끊임없는 실천의 닦음, 즉 수신의 자세를 다른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 알아차리고 챙겨야 적확한, 곧 성誠인 사회적 실천, 즉 중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의미 덩이들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살핀 것이 수신, 예전정, 성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면 간편합니다. 물론 성은 그 자체로 중 또는 중용의 ‘본토’에 깊이 발 들여 놓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연속성을 구태여 예리하게 구분할 실익은 관념 영역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궁극적 실천영역에서는 상호 연속성이 그대로 힘이 됩니다.   

 

3. 예전정은 사회의 동향, 역사의 흐름을 읽고 참여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올바른 결과를 내기 위한 기계적 인과간계의 전제 조건으로 예전정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예전정은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투명한 정신, 옹골찬 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야합과 흥정이 설 땅이 없습니다.

 

국가의 현안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지배층의 야합과 흥정을 백성은 아프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언론도 재벌도 전혀 예전정이 안 된 상태에서 준동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오로지 모든 것을 사익추구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무슨 자기성찰과 현실인식이 있겠습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제 곳간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에게 예전정은 어수룩한 처세일 따름입니다.


참으로 예전정하려면 저 “높으신 분”들은 저자 거리로 나와야 합니다. ‘특별함’의 기득권과 편견을 타고 앉은 채 구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仁은 없습니다, 중용은 없습니다. 지도층입네 하며 자기기만 하는 자리에서 냉큼 내려와 필부필부의 현실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舜임금의 실천인데 누가 감히 여기에 토를 달 것입니까.


4. 팽목항에도 안산 분향소에도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유족의 말도 들으셨고 정중히 조문도 하셨습니다. 물론 이 모두 설정이었습니다. 현장을 파악하고 민심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미지 조작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부풀려 전시하였습니다. 전시된 체험은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높으신 분”의 약속은 휴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인문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체험Erlebnis과 경험Erfahrung을 구별했습니다. 체험은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경험은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야말로 현실에 몸 담그는 것입니다. 현실에 몸 담그는 것은 전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조선의 왕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왕의 미복잠행은 적어도 전시 효과를 노리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험 관광을 계속하고 있는 국가수장에게 국민은 언제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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