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4장 본문입니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군자소기위이행 불원호기외.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 不自得焉.

소부귀행호부귀 소빈천행호빈천 소이적행호이적 소환란행호환란 군자무입이 부자득언.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재상위불릉하 재하위불완상 정기이불구어인즉무원. 

上不怨天 下不尤人. 

상불원천 하불우인.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僥幸. 

고군자거이이사명 소인행험이요행.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자왈 사유사호군자 실제정곡 반구제기신.


군자는 그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고 그 밖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한 처지에서 행하며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한 처지에서 행하며 이적에 처하여서는 이적의 처지에서 행하며 환란에 처하여서는 환란을 당한 처지에서 행하니 군자는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자득하지 아니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아니하며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면 원망할 것이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여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는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의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셨다.


2. 앞 장에서 중용 도량이 사람이고, 그 사람은 평범한 상대방이고, 그런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는 자가 군자임을 말했다면 이 장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득自得하는 자가 군자이고, 그러려면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끝맺음은, 동일하게 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 스스로를 살피는 것으로 기본 평행 구조를 살렸습니다.


사람과 삶의 양대 화두 가운데 하나가 ‘자기 단일성’ 문제입니다. 독립된 존재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이 문제 또한 대칭적 가치가 마주하는 장場을 형성합니다. 불연속적 자율이라는 한 가치와 연속적 의존이라는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치는 어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 하면 병이 되지요. 연속적 의존을 버리면 분열병이 되고 불연속적 자율을 버리면 우울병이 됩니다. 분열병은 남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측면을 포기한 것이고 우울병은 그럼에도 인간은 홀로 가는 생명일 수밖에 없는 측면을 놓친 것입니다.


제13장은 분열병으로 가는 길을 경계했습니다. 남 없이 어찌 살 수 있느냐, 그러니 남 처지에 서 보라,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제14장은 우울병으로 가는 길을 경계합니다. 남 탓, 환경 탓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득함 없이는 참 사람이 아니다,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지만 남이 있어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한 편, 남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남은 끝내 내가 아닙니다. 이 불가항력적 모순을 어찌하면 내 인격 속에, 내 삶 한가운데 공존시킬 것인가, 하는 고뇌가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이 중용은 물론 보편 가치입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주체가 처한 삶의 맥락과 지평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른 역동성을 지닙니다.


공자는 제후적인 가치와 맞서고 있는 사대부입니다. 신라 식으로 말하면 성골, 진골 아닌 육두품인 셈이지요. 제후적인 가치는 분열적입니다. 거기에 맞서지만 현실 벽에 자꾸 가로막히다 보니 공자는 부지불식간에 의존성이란 절망감에 휩싸이는 자신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단호히 세우기 위해 자득의 비수를 꺼내 든 것이지요. 과연 고수의 심리학입니다!


3. 그러면 그 자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거이이사명居易以俟命,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옵니다. 적어도 공자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량주의처럼 보이니까요. 아무튼 공자는 극단적 모험주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극단적 혁명은 불가하다는 의중을 드러낸 셈입니다.


아마도 공자는 진정한 혁명, 즉 정곡正鵠을 맞추는 일은 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 돌이켜 자신의 몸에서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길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예수의 말과 흡사한 울림을 줍니다.


보는 이의 처지에 따라 불멸의 이상을 천명한 것으로도, 사회 동원력을 지니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상 완벽한 대동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한하고도 부분적인 성취는 어찌하든 매한가지인 셈입니다. 방법론적 선택에서 우열과 정오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각기 흐름을 타는 것이지요. 설혹 이 거이이사명居易以俟命만이 옳다 하더라도 무엇이 居易이고 무엇이 행험行險인지는 자신과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구체적 문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중용의 도가 부단한 성찰을 거쳐 나오는 내면의 힘 아니면 안 되는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변혁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사회의 성공과 그 구성원의 인격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성취라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혁명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광경을 수없이 목도해왔습니다. 지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항상 뒷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슈입니다.


4. 우리사회는, 우리 각자는 이제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일까요? 누구나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중동독감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통치세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디 한 번 ‘후흑군자’ 되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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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두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운 벌가벌가 기즉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유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군자지도사 구미능일언.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 朋友 先施之 未能也.

소구호자 이사부 미능야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소구호제 이사형 미능야 소구미호 붕우 선시지 미능야.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부족 불감불면 유여불감진.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부조조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용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성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필부필부의 성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러니까 충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 그러니까 서恕여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 그러니까 거래去來해야 중용입니다.


부부가 성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임금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성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대동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마다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세상에 남이란 없다, 그러니까 사물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어떤 독실한 불교 신자가 큰스님께 말했습니다. “한 젊은 도반이 불심이 돈독함에도 교회 다니는 신혼의 아내 때문에 교회 나간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아직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廓徹大悟크고 철저하게 깨달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가소로운 대화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큰스님이라면 “아마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너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찌 대하는가, 가 곧 나입니다. 내가 대하는 네가 누구인가, 가 곧 나입니다.



이백오십이나 되는 생떼 같은 자식 잃은 부모더러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야말로 세금도둑입니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을 ‘종북’이라 하는 자야말로 종북입니다. 다 죽여 놓고, 진실을 은폐한 채, 부모더러 ‘본디 자리로 돌아가라.’ 하는 자야말로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만 보고 남을 규정하고, 나만 보고 나를 규정하는 저 ‘특별한’ 사이비 군자들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진실을 아는 평범한 필부필부들이여, 부디 가만히 있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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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영어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 언어입니다. man이 남성이자 인간임에 반해 wo-man은 여성이자 제한적 수식어가 달린 부차적 인간쯤으로 상정된 것입니다. 중국인의 생각이 담긴 한자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혼인한 두 사람 사이를 부부夫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남녀男女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가시(지어미)버시(지아비)’라고 합니다. 후자를 ‘연놈’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여성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후반 이후 성리학의 완고한 가부장주의가 우리 사회를 제압하기 이전에 여성의 지위는 다른 문명국가 그 어디와 비교해도 높았습니다. 비단 사회적 지위 문제에 국한시킬 일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 전반에 깃든 여성성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구조와 삶의 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사회정치적 제도와 분위기가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지만 장차 여성성은 우리 사회의 관건적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공동체적 여성성은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성성 문제는 여태까지 다루었던 우리말의 생태학 전반이 흘러드는 바다 같은 위상을 가집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문제에서도 서구의 주류적 방식은 근본적으로 남성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내용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태에 맞는 상담이나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하고 임상적 실천을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지닌 여성성을 확인하고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199-200쪽)


이 서재에서 두 번 박길주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리뷰 『투명사회』(30)-<아름다움, 그 시간의 향기>(2015.6.5)에서 한 번, 페이퍼 <잔 두 개>(2016.3.30)에서 한 번. 45년의 격조를 건너 마침내 오늘(2016.4.29) 아침,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45년 전 그 기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 이미지와 다소 어긋나 보이는 노년어법이 무르녹아 있긴 했지만 이내 친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학생을 가르치던 카랑카랑한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자녀를 키워낸 말랑말랑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셈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던 데는 두 여성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은 선생님의 딸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놓지 않았다면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어머니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제가 확신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거의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페북 활동을 몇 달 동안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친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친인척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연락처를 알아내기에 유리한 공적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님께 여쭌 다음 마침내 전화번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며느리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셨다면 이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게 선생님이심은 누군가에게 어니이심의 손에 이끌려 더 큰 인연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닫으신 분입니다. 닫음은 닫음대로 아픔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박길주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열어주신 분입니다. 엶은 엶대로 통찰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아픔도 한 인연이며 통찰도 한 인연입니다. 어둠도 한 생명이며 빛도 한 생명입니다. 오늘 박길주 선생님의 목소리에 실려 삶의 깊은 결 하나를 다시 보듬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어머니를 읽듯, 어머니에게서 선생님을 읽으니 실로 일심-화쟁-무애가 몸 느낌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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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2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費而隱.

군자지도 비이은.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부부지우 가이여지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부지언 부부지불초 가이능행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불능언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시운 연비려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지도 조단호부부 급기지야 찰호천지.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2.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 『중용』을 최초로 읽었을 때 가장 감동 받았던 문장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으로 중용은 끝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지요.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차별을 단박에 부수는 절창입니다. 명시적 질서와 암시적 흐름을, 거시 구조와 미시 운동을, 천지 거래와 부부 소통을 한 눈에 꿰뚫는 비수입니다. 대칭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우주 이치를 역설로 통합하는 초절정고수의 일식一息입니다.


이 말을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바꾸면 세존의 깨침이 되고 소이불루疎而不漏로 바꾸면 노장의 통찰이 됩니다. 사상의 심오함이나 사유의 자재함에서 공맹孔孟유학 사상이 노석老釋노장과 불교 사상에 못 미친다는 말은 통속적 편견일 뿐입니다. 문명에 직접 발 담그지 않는 언어가 문명을 빚어가는 언어보다 영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세련미가 덜한 표현이 동원력 면에서는 더 우월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중용』의 중용다움은 압도하되 제압하지 않는 ‘평범한’ 어기語氣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설파하는 언어 자체의 중용이 아닐까요? 어눌함에 실린 옹골참!


3. 사실 비費와 은隱의 대칭/모순구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중용』은 우뚝 솟은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영광의 빛 아래서 멈춰 섭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칭/모순구조로 이치를 삼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코 구조만이 아닙니다. 세계는 운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을 위해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동은 찰나마다 대칭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그 역동성을 유지 확산해 갑니다. 비와 은의 대칭/모순구조를 역설로 통합한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와 은의 대칭/모순구조를 깨뜨림으로써만이 역설적 통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허다한 지성들이 구조의 신비에만 주목한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앞서 말씀드린 바, 명사적 독법에 함몰된 교과서적 ‘먹물’들이 반성 없이 답습한 주석의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중용을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읽는 마음결로 여기 “비이은費而隱”을 보면 역시 은을 동사로 읽으면서 그 방향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은밀’이라는 명사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도 아닙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단호한 결단이 전제되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앞장의 둔세불현지이불회遯世不見知而不悔와 같은 맥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중용의 도가 실로 위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최고의 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춤으로써 ‘평범함’에 깃듭니다. 전 우주적 보편성을 가진, 그래서 편재遍在성을 지닌 위대한 덕이 사소한 일상으로 내려올 때 진정한 중용이 이루어집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동사의 의미는 큰 덕을 작은 일의 수행에도 적용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양이 다리를 다쳤다며 들어오자 간디는 동일한 진지함을 유지한 채 양 한 마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납니다. 조국의 독립과 양 한 마리 치료, 이 엄청난 비대칭의 대칭! 간디는 큰 일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 함으로써 위대함과 사소함의 대칭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심을 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심을 다한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비이은費而隱을 명사적 독법으로 읽으면 실천적 의미가 명상 범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야 개인과 사회 모두를 이끄는 실천덕목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중용』은 잘난 인간을 위한 처세훈을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허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망치는 저 오만한 상위 1%의 제후적인 독선에 맞서는 견결한 저항전선이 바로 오늘의 중용입니다. 갑남을녀甲男乙女평범한 사람들의 겸손한 연대로 대동 세상을 일구는 평범무비의 소통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뿐입니다. 


4.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부와 성인을 대비시킨 점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켰다면 아무도 그 자연스러움에 토를 달지 않겠지요. 하필 왜 부부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소통이 모든 인간관계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보편적 진실이라서 오히려 늘 묻히고 말지만 적어도 부부 개념에 앞선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여기 부부 언급은 하등 의아할 게 없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 다시 그 사랑의 핵심은 성적인sexual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성교야말로 인간 존재 자체와 소통의 발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sex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자어 중 이 ‘성性’ 자 만큼 위대한 쓰임새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 성적인 수치심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나 성교를 감춤/드러내지 않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좀 더 내밀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존재와 소통의 시원을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요.

 

다른 것도 매한가지 입니다. 숨 쉬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어나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교는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므로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권력, 돈, 지식처럼 드러낼 경우 아마도 인간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대놓고 성을 권력, 돈, 지식 문제와 결합한다면 가장 잔혹한 억압체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주 하찮게, 아주 조용히 말하지만 부부는, 부부의 성은 중용의 요체이자 뇌관입니다! 그래서 성인도 알 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5. 가만히 보면 이 장에 또 하나의 개념 전복顚覆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과 군자의 구별입니다. 앞장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군자 개념이 성인의 상위 개념입니다. 여기 군자는 중용의 완전성을 전제한 요청적인 개념이고 성인은 부부와 대비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전복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내용을 보면 중용이 일개 부부, 즉 필부필부라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성인조차 알고 행하지 못하는 광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간의 강조점은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런 이의제기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입니다. 제12장 전체 문맥에서 보면 매끄럽지 못한, 불쑥 끼어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

 

군자의 언어를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중용의 실천적 측면, 실사구시 관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마치 장자나 불경의 과장된 초거대담론적 수사를 보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이해가 잘못일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식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지대야 인유유소감.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을 양보 문장으로 봅니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이치를 그렇게 추상화, 신비화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땅(못)에는 물고기가 뜁니다. 천지 일은 그냥 그러합니다. 중용 또한 천지간 일일 뿐입니다. 중용의 최고 경지가 신비 차원까지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고 부부의 성처럼 구태여 드러낼 일이 아닌, 그러나, 아니 그래서 정녕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라고 이 문제, 즉 성을 더 고상하게 알고 행할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용 또한 이와 같습니다. 아니 바로 군자의 도는 필부필부의 성, 그 평범하고 사소한 소통으로 영원 회귀합니다.  


6.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그러니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는 말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기억 하나를 내밀어 보입니다. 어디에도 없었는데 어디에나 있었던 듯, 전능함을 드러낸 우리 국가원수에 대한 기억 말입니다. 아이들이 시시각각 죽어가던 그 일곱 시간 동안 국가원수는 적어도 위기의 국민 앞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몰살시켰습니다. 흔히 이 부재를 무능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전능입니다. 능력 없어 못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죽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편재하는 신의 전능을 능가하는 초절정의 경지입니다. 부재와 전능의 역설, 그 신묘막측한 일치여!



이 신공에 넋을 놓고 있을 일, 아닙니다. 군자의 도, 그러니까 중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패도 국가에 살고 있는 현실에 새삼 소스라치게 놀라 온 몸을 떨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두들겨 깨워야 합니다. 평범한 필부필부의 사소한, 내밀한 소통을 일으키고 옮겨서 이 거대한 오만과 폭력을 종식시킬 차비를 해야 합니다. 천천히 서둘러야 합니다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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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말은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락은 3음보를 띱니다. 한 호흡에 세 번 나누어 읽는 것이 3음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의 전통적인 운율이 되었습니다. 3음보의 특징은 단연 유희성입니다. 즉 놀이로 세상과 삶을 인식하는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지나치게 엄숙한 무엇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인생관과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보면 산 넘으면 저 세상이고, 심지어 살아서 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에서 해방하면 오히려 인생이 즐거워지며 짐스럽지 않게 되는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인생관은 삶과 죽음을 절대 경계로 나누어 경직되게 의미를 부여하는 서구적 생사관, 즉 삶이 격절로 끝나고 나면 비가역의 시공인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서구인들처럼 생각하면 현생에 덜 집착할 것 같지만 문명을 보면 그들의 문명은 현생이 극대화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웅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 2000년이 지나도 물이 흐르는 석조 수로, 1만 개 이상의 인공 섬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 그들이 현재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식했는지 실로 감탄하게 합니다. 그들의 문명이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서구문명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이치라 하겠습니다.

  의학과 상담의 세계도 그러합니다. 병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공격과 정복의 목적의지를 숨기지 않는 것이 서구 의학과 상담이론입니다. 그 엄숙주의가 외과 수술로, 분석과 평가와 교정의 상담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치료는 노동이 되고 과업이 되며 거룩한 전투가 됩니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3음보는 끝없는 넘실거림에 몸을 내맡기는 놀이로서 상담과 치유를 인식하도록 이끕니다. 공격하지 않고 달랩니다. 정복하지 않고 보듬습니다. 완결하지 않고 여백을 남깁니다. 왜냐하면 삶도, 슬픔도, 치료도 모두 한바탕 놀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198-199쪽)


우리의 통념은 일(노동) 뒤에 놀이(휴식)가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본디 놀이와 놀이 사이에 일이 있습니다. 밤과 밤사이에 낮이 있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진지할지라도 엄숙 떨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덧없을지라도 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탐욕과 불안, 그리고 어리석음의 포로가 됩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일과 놀이는 각각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일은 전투적 강박으로 미끄러집니다. 놀이는 향락적 중독으로 미끄러집니다.


시방 인간이 봉착한 생멸의 문제는 일과 놀이의 순서를 뒤집어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놀이 혁명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자본의 극한 토건, 공화제의 침몰, 지구 생태의 파괴, 이들 모두는 과잉된 일, 과잉된 일이 부른 과잉된 놀이가 원인입니다. 삶 전체를 놀이판으로 깔고 그 사이 사이에 일을 놓으면 일은 필경 놀이로 배어들 것입니다. 일이 놀이로 배어들면 인간은 마침내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것입니다.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여백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말 조증 상태를 걱정하며 찾아왔던 제자는 결국 강제로 병원에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치료 받으며 살아온 삶 전체 흐름을 살펴보면 주위 사람, 특히 가족이 병의 원인을 제공하고 악화시킨 다음, 급기야 강제격리라는 폭력적 치료(?)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직접 개입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의 배우자는 저를 찾아와 가족의 이름으로, 보호자의 권리로 내린 결정을 통보하고 혼란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병의 본질과 치료의 정도를 의학적으로 곡진히 피력했으나 그는 자신의 인문학을 근거로 대며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리를 떴습니다. 몇 시간 뒤 그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서구정신의학과 어설픈 인문적 지식, 그리고 가부장적 남성문화가 합작 기획해낸 아프고 슬픈 의료서사입니다. 그들은 엄숙하고 단호했습니다. 병의 증상은 적이므로 없애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은 처리 대상이므로 과정에 대한 질문은 필요 없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가족으로서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저들의 이성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이 서사의 심연에는 그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지난 주말 늦은 밤부터 별안간 시작된 드라마 같은 실제 사건이 가파른 허망함으로 종결된 지금, 홀로 한의원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삶의 이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풍경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무디면서도 가벼운 삶으로 혁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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