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말은 관사나 전치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관사나 전치사는 각 단어의 개별성, 독립성, 자율성, 차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체계의 소산입니다. 그 언어체계는 다시 사람과 사물의 개별성, 독립성, 자율성, 차이성에 터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사나 전치사가 발달한 서구 언어는 이른바 ‘존재 중심 세계관’을 반영하며, 그렇지 않은 우리말은 이른바 ‘관계 중심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이런 특성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을 섞는다.’는 표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서구인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해 말합니다. 차이를 확인하는 존재 중심 사회는 생명의 공통 기반이 전제되지 않으므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일 뿐입니다. 둘 사이는 ‘계약’이 가로놓이고 쌍무적 이행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에 반해 일치를 확인하는 관계 중심 사회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두레’ 개념이 네트워크를 이루며 연속과 융화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서구의 삶이 계약의 삶인 것은 상담에도 통용됩니다. 계약 당사자끼리 인격과 정서를 교류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로 필요한 것만 주고받으면 그만이지요. 반면 우리의 삶은 두레의 삶입니다. 공감과 공유의 삶입니다. 각 부분은 서로 긴밀한 생명적 연결 관계에 있고, 다시 전체 속에서 통합된다는 사실이 공유하는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상담도 그러합니다. 두레 치료가 일어납니다. 치료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194-195쪽)


지난 주말 늦은 밤, 마흔 일곱 먹은 제자가 조증 상태를 걱정하며 황급히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일요일 늦은 아침 약속을 잡았습니다. 일요일 새벽 가능하면 더 빨리 뵙고 싶다는 문자가 날아들었습니다. 서둘러 빨래를 해서 널어놓고 한의원으로 향했습니다. 보자마자 그는 울음부터 터뜨렸습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끝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억억거리며 줄줄이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주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며 울자 그들은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왜 과거를 그리 집요하게 붙잡고 있니? 제발 내려놓고 행복한 삶을 선택해라.”


“너와 같은 상처가 없으면 아무도 널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니?”


심지어 남편을 포함한 두어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왜 우니? 이게 울(어서 해결될) 일이니?”


물론 이들은 마음의 병을 상식적인 이해 수준에서 이해하고 그에 터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반응에는 불연속선이 두 개 쳐져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보다 아픈 사람과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사이의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감정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절연반응인 것입니다. 이것은 차가운 이성을 토대로 거래하는 개별자가 보이는 기본적 태도입니다. 치유공동체는 이들에게 별나라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픈 사람과 아픔 사이의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아픈 사람에게 그리 대하듯 아픈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단칼에 잘라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들 하는데 왜 너만 못하느냐는 다그침입니다. 마음병은 아픈 사람이 붙잡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꼼짝 못하고 사로잡혀서 생기는 것입니다. 놓고 싶으면 놓을 수 있는 것 따위 때문에 대체 그 누구의 일상이 무너지며 목숨 줄이 끊어질 것입니까. 한 걸음만 물러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이치에 무지하고도 서슴없이 아픈 사람을 공격해대는 이 비인간에서 우리 각자는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다시 정색하고 곰씹어보겠습니다.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스무 해 넘게 살 섞으며 살아온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남편인 것입니까.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인문학 공부를 함께한 선배, 심지어 선생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도인 것입니까. 사실 이런 풍경은 이미 낯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익숙한 민낯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국어 감수성을 잃어버린 식민의 세월 속에서 마침내 인간다움의 감각까지 풍화되어버린 탓이 아닐까요?


그 제자는 잠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뭔가 챙겨가며 정리를 해보겠다고 하기에 애쓰지 말고 그냥 멍 때리다 오라 일러주었습니다. 뭐라도 감정이 일어나면 그렇다, 그렇다 느끼기만 하다 오라 당부했습니다. 마흔 일곱 살짜리 제자 곁에 다팔다팔 걸어가는 일곱 살짜리 상처 입은 그의 영혼을 보며 제 두 눈에 노을이 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제8장 본문입니다.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자왈 회지위인야 택호중용 득일선즉권권복응이불실지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공자의 제자인 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골라서 실천하는 것이니 하나의 착한 것이라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꼭 붙잡고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2. 중용이 군자에게 주어진 자격증이 아니고 찰나마다 결단해야 하는 “고름[택擇]”의 문제임은 앞 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더 거론할 일은 없으나 연상되는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지요.


한국 불교 논쟁사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입니다. 보조국사 이래 내려온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성철선사가 돈오돈수頓悟頓修로써 이의 제기를 하면서 태풍처럼 일세를 몰아친 논쟁이었습니다. 단박에 깨치더라도 그 뒤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전자에 대해 단박에 깨쳤는데 뭘 더 닦을 게 있겠느냐는 반론이 후자지요.


후일담이 여전합니다. 둘 다 맞다, 는 포용론이 있는가 하면 각기 다른 용처가 있다는 현실론도 있습니다. 문제 제기를 한 성철선사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 논쟁이 과하게 전개되었다는 말도 들립니다. 어쨌거나 단박에 깨친 경험도 없고 성실히 닦은 세월도 없는 중생이 여기에 입 댈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깨친다는 것과 닦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 맥락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미흡한 논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논쟁 자체에 가담하기에 앞서 논쟁의 전후 연관성을 살펴 중생에게 빛이 될 수 있는 현실 지평을 열어 놓지 않은 채 ‘그들만의’ 논쟁으로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중생제도와 절연된 논쟁이 어떤 의미에서 부처의 길인지 문득 의문을 품게 됩니다.


중생의 처지에서 보면 깨침의 높은 경지에 오른 분들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행위를 하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리 생각한다고 일축하면 더는 말을 하지 않겠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도 안 하는 행동을 생불生佛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깨침이 무엇은 열고 무엇은 닫는지 황당해지지요.


사회 동원력을 갖춘 큰 스님이 거대한 사회 부조리를 보고도 관념적 거대담론으로 호도하는 일은 또 어찌 이해해야 될까요?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깨친 자의 길이라면 그 깨침으로 관여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이원론이 과연 선불교, 아니 붓다의 근본 철학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수 중생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 다만 미망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장場이 스님들과 전혀 다르다는 측면을 십분 고려해야 마땅합니다. 스님들한테 누가 와서 돈을 달랍니까, 새끼를 키워 달랍니까, 부모를 봉양하랍니까? 그런 고단한 삶에서 벗어난 산중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이, 닦음이 중생의 삶보다 어떤 의미에서 윗길일지 정말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설마 그 걸 몰라 그러겠냐고 되묻기에는 이른바 큰 스님들의 언행에 너무도 ‘어이 상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중용을 논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꼭 이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기에 돈점논쟁을 예시하여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음양이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고담준론이 하늘을 찌르더라도 삼시 세 끼 밥 먹어야 하고, 돈 있어야 아이 학교도 보내는 게 엄연한 현실 삶인데, 그 이야기에서 한사코 멀어지기만 하는 중용이 과연 참된 중용일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소시민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이 모여 사회적 삶이 되고 문명이 되어 가는 법인데, 거기에 뿌리 닿지 않은 지혜를 어찌 중용이라 하겠습니까?


3. 안회는 사소한[일一] 선善, 즉 중용의 결단일지라도 소중히 여겨 삼가 받들어[권권拳拳] 가슴에 새겨서[복응服膺] 잃지 않았습니다. 한 일一 자를 ‘사소한’ 으로 읽은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닐 터. 이는 대뜸 중용의 ‘평범함’과 상통합니다.


이리 읽으면 안회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독법에서 안회의 겸손함, 그리고 예의 ‘평범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견지한 중용 독법에서 보면 이게 더 어울리겠지요. 나아가 중용이 그 때 그 때의 결단, 선택에 따른 역동적 실천이라는 사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4. 그러면 대체 무엇은 작으며 무엇은 클까요?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좀 더 결곡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으로 국가가 목숨을 앗은 사람은 304명입니다. 그 가운데 250명, 그러니까 대부분이 만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입니다. 이런 질문을 차례로 던져보겠습니다.


“만일 그 250명이 어른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만일 그 250명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또는 사립학교 또는 특목고 학생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만일 그 250명이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모인 대표 학생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구태여 답을 적시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상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SNS에서 어떤 시민은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그 중에 국회의원 아이 한 명만 있었어도 모두 살렸을 것이다.”


아이들이고, 더구나 지방도시 가난한 지역의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고, 더더구나 그 부모들 가운데 내로라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들의 생명 가치를 ‘작은’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이 ‘작은’ 것을 희생시켜 ‘큰’ 것을, 그러니까 정권을 보위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으므로 실행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의 뜨르르한 어느 교회 목사는 대놓고 그런 취지로 설교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 떨리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사건이 있습니다.


  “호송열차를 타고 방금 도착한 사람들이 가스실에 빽빽이 들어찬 뒤 죽임을 당했다. 특수부대는 매일같이 하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기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의사가 불려오고 주사를 놓아 소녀를 소생시킨다.·······그 순간, 죽음의 시설을 담당하는 SS대원들 중 한 명인 무스펠트가 다가온다. 의사가 그를 한쪽으로 불러 사건을 설명한다. 무스펠트는 망설이다 결정한다. ‘안 된다. 소녀는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다.’ 결국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불러 소녀의 목덜미를 쳐서 죽인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위 내용은 그가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63-65쪽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두 번 죽임당하는 이 소녀 이야기는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 감정은 같은 또래 소녀와 소년 250명의 죽음을 지켜보던 2014년 4월 16일, 그 때의 것과 그대로 포개집니다.


우리는 정색하며 다시 묻습니다.


“이 국가는 저 어린 국민 250명을 왜 죽였는가?”


물론 국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건 자체를 부정합니다.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그 배는 국가보호장비로 등록된 배였습니다. 국정원의 지시 감독을 받았습니다. 명백한 국가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나치의 대답으로 우리 국가의 대답 일부를 대신합니다.


“안 된다. 소녀와 소년들은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열일곱 살이다.”


이것이 죽인 이유라면 실로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하찮은, 사소한 생명이어서 대놓고 죽였다는 표면적 판단의 심층에 오히려 더 큰, 위험한, 무거운 증거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데 어른 보다 이 아이들이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분명한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침묵하지 않았던 저 2008년 촛불소녀들 말입니다. 그 때 국가는 그 소녀들이 분별력이 없어 낭설에 휘둘리는 것이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움직였다고 마녀사냥을 자행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세월호사건,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들도 ‘철없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국가는 다시 뒤집어씌웠습니다(세월호청문회에서 해양경찰이 한 말). 그 때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잘됐다는 식의 대응입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므로 침묵하지 않고 자기들이 한 짓을 증언·고발할 것이기 때문에 죽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은폐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합니다. 이 아이들의 죽음이 위대한 것으로 길이 남으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마저 바다에 빠뜨리고서야 어찌 우리 어른이 ‘큰’ 사람일 것입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7장 본문입니다.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網[罟]獲陷穽之中而莫之知抗[辟]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

자왈 인개왈여지 구이납제망[고]획함정지중이막지지항[피]야. 인개왈여지 택호중용이불은기월수야.


이기동 역해 본문은 망網이 아니라 그물이란 뜻의 '고罟'이며, 항抗이 아니라 '피辟’뜻이 避와 같아 '피'로 읽어야 한다고 함. 본문 비평은 능력 밖이고 뜻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번역은 이기동을 따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몰아서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에 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골라서 한 달도 지킬 수 없다.”

 

2.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의 지혜는 앞에서 말한 소지小知, 즉 내남을 구별하여 세상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자, 승자 부류의 기능적 지식을 뜻합니다. 권력, 돈, 종교(지식)를 독점하는 데 필요한 극단적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지식이지요. 대부분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획득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 또한 불공정한 틀 속에서 영위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를테면 확신범인 셈입니다.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그래서 그물, 덫, 함정으로 몰리는 일조차 강함과 이김의 기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런 망상은 권력, 돈, 종교를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데서 극치를 이룹니다. 힘없고 돈 없고 종교 없으면 사람의 격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사람들을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권력, 돈, 종교를 누릴 때 한껏 고양되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이고,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고·······.

 

하지만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소통을 거절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은 더불어 살 때만, 관통과 흡수가 일어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지해 ‘멀쩡한 사람 산 채로 포 뜨는’ 짓의 대가는 그물이고 덫이고 함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파멸을 면한 증거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생명의 진수를 몰랐으니 돌이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지요. 자신들이 누리는 그것만이 최고, 최상이라 착각한 대가로 존재의 숭고함에서 끝내 왕따 당한 것입니다. 대롱으로 본 하늘 밖에 흐드러진 별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지옥’에 가서 흘낏이나마 보고 나서야 땅을 치게 될 것입니다.

 

3. 어찌어찌 중용을 고르기는 했는데 한 달도 못 지키는 주제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답니다. 아, 물론 중용이 어렵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지혜롭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사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른다[택擇]”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용은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말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선택하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중용을 선택한 군자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길게 얘기할 것 없겠지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그물, 덫, 함정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을 거절하는 삶, 독식하는 삶, 군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일이 중용이며, 길이 견디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군자는 찰나마다 결단하는 용기를 요구 받습니다. 중용은 군자에게 어느 순간 주어진 자격증이 결코 아닙니다. 군자는 중용을 “지켜내야[수守]” 이루어지는 길고 긴 과정 자체입니다. 중용 없이 군자 없는 것이지 군자 없이 중용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한 삶을 지키는 만큼이 바로 그 사람됨입니다.

 

4. 소지小知의 끝이 파멸이란 사실과 선택한 대지大知를 지키는 것, 선택하지 않은 바를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붙여놓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자의 현실적 힘이 후자의 것을 늘 제압해 왔다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권력, 돈, 종교의 매혹에서 자유로운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얼마나 살겠다고 소통을 들먹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운위하느냐, 다 부질없다,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럴수록 중용은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또 그럴수록 중용을 관념 세계로 밀어내는 경향은 짙어지고·······그렇습니다. 이쯤에서 공자의 인간적 고뇌가 물결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칼날 같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지표 삼아 내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그 선택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딜 것인가?



5. 환갑 나이 된 한 남자 사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나 크게 성공했다 말할 수도 없고 온통 실패다 말할 수도 없는 어름에 놓여 있습니다.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 원 이상, 자동차 2000cc 급 중형차, 통장잔고 1억 이상,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등을 기준으로 하는 한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등을 기준으로 하는 미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그나마 부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주 일요일 아침 일어나 면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입니다. 면도하면 자신과 가족의 경계 밖으로 나가 공적·사회정치적 삶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으로 갈 것입니다. 면도하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의 경계 안에서 사적·개인적 행복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 뒷산에 잠시 올랐다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조용한 음식점으로 갈 것입니다. 고민이랄 것도 없고 선택이랄 것도 없이 갈 길이 이미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군자든 소인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딱 이런 남자 사람이 매번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그 고민은 매번 힘겹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의지의 소산이고, 그 의지는 숭고의 결을 따라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한, 그가 순간마다 하는 선택은 지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인연 속에서 그는 그만의 군자이니 말입니다. 그의 인연 속에서 그는 그만의 중용을 실천할 것이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말은 영어처럼 관계대명사 같은 것을 써서 복합 문장을 길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면 길이가 늘어난다기보다는 뚱뚱해진다는 느낌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우리말이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분위기가 아닌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리고 가치가 다른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함으로써 다른 느낌이 나게 하는 음상音相 또한 우리말의 그런 특징을 잘 나타내줍니다. ‘졸졸’과 ‘쫄쫄’, ‘줄줄’의 미묘한 차이를 다른 언어 사용자가 간파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나아가 ‘짜릿하다’와 ‘쩌릿하다’처럼 심지어 반대에 가까운 느낌까지 나타나면 절묘함은 극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우리말이 지니는 직관과 감성 우위적인 분위기는 우리의 현실 삶의 양식과 직결된 것입니다. 한과 흥이 어우러진 정념이 시공을 꿰뚫는 우리의 공통된 생활 정조입니다. 중국인의 눈에 비친 저 옛날 ‘음주와 가무’의 상징이 오늘날에도 엄청난 소주 소비와 불야성을 이루는 노래방 문화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관과 감성을 통한 난장亂場 식 소통에 능한 우리에게 서구적인 논리, 분석, 그리고 지성으로 접근하는 주지주의 상담 방식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과 이성에 터 잡은 의지적 행위를 앞세워 ‘다그치는’ 분위기는 누가 뭐래도 낯섭니다. 우리는 정념을 정념으로 결 잡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그야말로 생태적 상담치료가 가능합니다.(193-194쪽)


흔히 사람들은, 심지어 의사조차도 마음의 병 앓는 이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야단칩니다. 아픈 이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으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음의 병 앓는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빠져드는 반추rumination 사고는 주체가 특정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사고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과 그 느낌을 소환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기계적·자동적 촉매 반응입니다. 실제로는 사고 아닌 감정의 점화 작용입니다. 이를 사고 작용이라고 전제하고 대뜸 이성적·논리적으로 교정하려 드는 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 정서적 지지부터 보내는 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정서적 지지는 감정이나 느낌 차원의 인정, 그러니까 공감empathy입니다. 공감을 전제로 이성은 성찰의 이성이 됩니다. 성찰의 이성으로 화쟁을 빚어갑니다. 화쟁의 훈습으로 성찰은 이성을 발효시킵니다. 발효된 이성은 전체로서 진실, 그 비대칭의 대칭성을 증득합니다. 비대칭의 대칭성을 증득한 이성은 스스로를 깨뜨리고 넘어갑니다. 그 너머는 또 다시 감성의 대지가 펼쳐집니다. 그 광활한 감성으로 걸림 없이無碍 매이지 않고不羈 살아가는 길에 아픈 사람이 발 디디면 치유는 삼가 스스로 물러납니다. 이것이 치유의 일생이자 그 수사학입니다.


스스로 생각이 지나치게 번다하고, 방대하며, 광범위하다고 자책하는 사람에게 조분조분 물어보면 실제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버전만 바꾼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번다하거나 방대하다고 여깁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허황한 생각을 하면서 광범위하다고 여깁니다. 나름대로 방어를 하거나 증상을 악화시키는 병리 반응이어서 파편 형태로 출몰하므로 상호관계 규명이나 체계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관념의 공시성과 실천의 통시성을 유기적으로 고려하지 못하므로 휴먼스킬을 확보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이럴 때도 치유는 아픈 사람이 겪고 있는 상황을 십분 공감하면서 곁을 지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나서서 정리해 가르치고 야단치면서 지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답을 제시하려 덤비지 말고 반드시 진솔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한테 질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신뢰를 표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 스스로 결을 감지하고 손끝으로 휴먼스킬을 더듬어갈 때 치유는 삼가 스스로 물러납니다. 이것이 치유의 품이자 그 예학입니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찰리 채플린의 말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아픈 사람이 아니라 고치려고 섣불리 덤비는 사람입니다. 이성적 생각보다 함께하는 느낌이 고수의 치유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제6장 본문입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자왈 순기대지야여. 순 호문이호찰이언 은악이양선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기사위이순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2. 제4장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지나쳐서 중용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과 분리합니다. 그렇게 갈라야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이 수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소인이고, 그 지혜는 소지小知입니다.

 

제6장은 군자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제시합니다. 대뜸, 그가 대지大知를 실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함으로써 세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이 소지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소지가 나와 남을 분리·차별하여 ‘홀로 주체성’을 확보한다면 대지는 나와 남을 하나로 묶어 ‘서로 주체성’을 펼칩니다. 홀로 주체일 때 남은 다루는 사물이지만 서로 주체일 때 남은 소통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대지는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묻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상실을 통해 오히려 참된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성으로 시작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동성이야말로 서로 주체를 이룩하는 상호능동성, 즉 소통을 낳는 모태입니다. 이 역설이 바로 중용의 요체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 아래 섭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립니다. 답하는 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은 변두리로 물러섭니다. 자신의 지혜는 답하는 자의 지혜에 ‘깃들’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우리사회의 권력자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지요.

 

묻는 것은, 그리고 ‘보는’ 것과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는 자의 눈에 의존합니다. 기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은 불가합니다. 보는 자는 소통을 거절하는 자입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사물 위에 섭니다. 고개를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보이는 사물을 변두리에 세우고 자신이 중심에 섭니다. 자신의 지혜로 보이는 사물을 제압합니다.

 

저는 한의사로서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의 병을 상담/대화를 통해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서양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한국 문화에 맞는 상담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양 이론에 따르면 의사와 환자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사는 고치는 주체이고 환자는 고침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요.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말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로 보면 의사는 듣기 위해 말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사는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흔히 한의사는 척 보면 알아야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처럼 ‘잘 보는’ 한의사를 “용하다.”고 합니다. 한의사 스스로도 대부분 망진望診사람의 몸 상태를 눈으로 살펴보고 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중용의 맥락에서 살피건대  묻는 것을 선두에 세우는 진단이 더 윗길입니다. 환자의 삶과 인격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러난 병이나 고친다면 의사는 그저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의 관심은 병을 넘어 사람 자체에 닿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대지임을 안다면 의사는 더 이상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주체로서 소통을 이룰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때 비로소 치유연대가 결성됩니다. 이 치유연대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그게 곧 대동大同 세상인 것이지요.

 

순임금은 대지로써 대동을 이룩했습니다. 대지의 길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건하게 듣는 자가 대지의 기수입니다. 우리사회의 지배층은 지금 당장 눈 감고 입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하여. 


3. 임금 된 자가 백성 아래 서서 물으니 백성이 ‘평범한 말’로 답합니다. 저자거리에 흘러 다니는 ‘쌍스러운’ 언어를 날 것인 채로 드러내겠지요. 사는 게 어찌 고달픈지, 정치판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어디가 아픈지, 물가는 얼마나 뛰는지, 자식 놈은 무슨 속을 썩이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물었고, 들은 다음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대동의 정치를 펼쳐낸 것이 순舜이 한 일입니다. 국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권력자도 하지 않는 일을 전제군주가 했으니 가히 군자의 도요, 그래서 중용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중용의 뜻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이 ‘평범함’에 깃들어 함께 ‘평범함’으로 통합되는 사건이 바로 순의 중용인 것입니다. 결국 ‘특별함’은 사라집니다. 순이 ‘평범함’에 승복하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높여 ‘특별하다’ 할 것입니까?

 

순, 스스로 ‘특별함’을 버린 마음의 흐름, 몸의 실천이 중용입니다. 중용은 선험적 전제로 존재하는being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중용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바야흐로 형성되는becoming 운동입니다. 이럼에도 기라성 같은 주석가들은 중용을 만고불변의 실체적 진리로 규정하여 높은 곳에 모시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현실과 단절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로 끌고 감으로써 오히려 명상적 시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중용은 명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용은 ‘웰 빙’의 포로가 아닙니다. 중용은 도저한 현실 삶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결단이며 용기입니다.

 

중용은 어지럽고 더러운 정치판을 혁파하는 에너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으로 인격을 사는 천민적 자본 판에 비수를 들이미는 기개로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열반을 긍정심리학에게 내어준 종교집단에 채찍을 드는 의분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중용의 언어는 예의 바르며 중용의 실천은 정중해야 한다는 통속 유교의 고정관념에서 중용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그 알량한 ‘싸가지론’에 묶인 중용은 주희와 그 아류로서 족합니다. 물론 이 나라는 여전히 노론의 텃밭이지만 인제부터 분명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4. 본문비평textual critic의 직관에 따른다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라는 구절은 후대에 가필한 느낌을 줍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그 위상이 군더더기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질박 명쾌한 제시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후대의 통속적인 중용 이해에 터 잡은듯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치는 국민윤리 교과서 한 구절처럼 보이는군요. 격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도 앞에 나온 “묻기를 좋아하시고·······” 하는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또한  확실히 있습니다.

 

5.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제 느낌을 뒤로 물리고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앞부분과 격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핏 보면 정확한 대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헌데 악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윤리의식이나 법 감정과 어울리지 않지요. 악을 명백히 밝혀 제거하는 것이 선과의 대칭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쾌한 선택일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여 선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이상이 아니던가요?

 

선으로 충만한 세상,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입니다. 영원히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현실의 경세치용에 그대로 적용하면 독선이 됩니다. 선하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소통의 폐기!

 

순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감추는 차원에 놓아둔 것은 영원한 실체로서 선이 없듯이 영원한 실체로서 악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구분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선이 이른바 ‘특별함’이 되지 않고 ‘평범함’이 되려면 악을 자신과 구분하여 떼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의 대지입니다.

 

백성에게 묻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판단할 때, 그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내는 악은 따스하고 너그럽게 ‘묻어주면’ 언제라도 선으로 꽃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의 그 마음을 알고서는 ‘차마’ 악을 되풀이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소통이고, 이게 대동이 아닌가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상당히 많은 경우 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버려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공시共時적 지평에서는 악으로 규정될지라도 시간적, 통시通時적 맥락에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의 넉넉함, 너그러움이 또한 중용입니다. 

 

6.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썼다는 것은 대칭/대립하는 두 가치/견해를 시중時中으로 조절하여 원만한 소통, 거래를 이루게 했다는 뜻일 터이니 길게 재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양비론兩非論의 비겁함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양측의 단점 또는 악을 모두 비판하는 게 매우 정당해 보이지만 양비론은 두 가지 발톱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평함을 과시함으로써 도덕성을 확보하고 현실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기회주의가 그 하나입니다. 더 나쁜 발톱은 바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힘 있는 쪽을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양비론의 눈속임은 이른바 산술적 가운데를 중용이라 오해하게 합니다.

 

제가 “두 끝을·······” 운운하는 이 부분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의 중용이라 보기보다는 후대 통속적 중용가의 양비론적 혐의가 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순의 수준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긴 하지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7. 요컨대 순의 중용은 특별함을 버리고 평범함을 함께 나누는 “평등”의 사회정치적 원리이자 실천입니다. 인간이 민주적 정치를 만들어가는 유구한 과정에서 꾼 숭고한 두 꿈, 자유와 평등 가운데 동아시아 생태학은 중용을 통해 평등을 공들여 키운 듯합니다.


고대에 이미 이런 육중한 지향이 나타난 것과는 판이하게 오늘날 동아시아 정치는 불평등 모델의 각축장 같은 느낌을 줍니다. 중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 모두 그 지배집단은 21세기 정치세력치고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매판 지배집단은 식민지 상황을 그대로 다시 구현해냅니다. 그들은 불평등의 내외적 중첩구조 속으로 국민을 대놓고 밀어 넣습니다. 수탈은 가속화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중용』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입니다. 『중용』의 인문학은 평등의 정치학입니다.


평등의 정치학은 대한민국에서 특히 지난한 과제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OECD 국가 중 제2위입니다. 지하경제 상대 규모와 지배층 재산 해외 이탈 등 제반 불투명성을 고려하면 제1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노인층 빈곤율이 제1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이 노인층이 매판정권의 절대 지지기반입니다. 세월호사건 유족한테 세금 퍼주려 담뱃값 올렸다는 주장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합니다.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매판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갈수록 평등의 정치학은 불가능한 꿈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의 ‘신앙’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