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고전은 고전인 까닭이 있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떠서’, 마치 그것을 읽지 않으면 크게 뒤쳐지기라도 할 듯 요란 떨지만, 묵묵한 고전에서 날로 새로운 깨우침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세월의 더께 때문에 고전은 날로 가벼워져 묻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오늘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 있는 어떤 시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텍스트가 있을지라도 고전은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으로 떠받들리는 찰나 그것은 이미 고전이 아닙니다. 경전이 만들어내는 믿음에는 거짓의 독버섯이 무성합니다. 거짓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진실을 마주하려면 경전을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합니다. 경전을 베는 마음 고갱이에는 의문이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문은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통이 빚어낸 눈물입니다. 그 눈물 없이는 당최 고전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절체절명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건과 급격하게 마주쳤습니다. 꽃 같은 아이들 이백오십 명의 생명이 시시각각 죽어가는 것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국가는 온통 거짓과 조작, 그리고 다양한 폭력을 동원해 국민을 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날들이 흐른 지금까지 진실 규명은커녕 아무런 실질적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희희낙락 살아가는 자들의 훤화 소리만 낭자하게 흩어지고 있습니다.


대체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왜 죽였을까? 이 사건을 단순 사고로 눙치고 이렇게 넘어가야 할까?


이 의문 앞에서 저는 아프디아프게 『중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가 야기한 이른바 촛불정국 때 저는 중학생인 딸과 함께 ‘왜?’라는 의문 속에서 『중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세상은 더욱 두려움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침묵을 깨뜨린 아이들의 죽음이 저에게 다시 『중용』 읽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질문하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그 때 그 아이들의 의문이 지금 이 아이들의 의문의 죽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권력이 그 아이들에게 ‘종북’ 딱지를 붙였듯, 지금 이 권력 또한 이 아이들을, 부모들을 ‘종북’으로 몰아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를 이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갑절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두렵기 ‘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하려 합니다. 바다 속 아이들은 이보다 더 두려웠을 테니 말입니다. 두려움의 연대로 인문의 새벽을 열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또 이런 비극은 일어날 테니 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고전 하나 들어 올려 아이들에게 헌정하는 일이 불가피한 때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중용 헌정의 길로 삼가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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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딸아이와 『중용』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촛불 정국과 맞물리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2010년에 알라딘 서재에 내용을 다시 다듬어 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사건을 맞닥뜨리자 『중용』을 현실 정치의 구체적 콘텍스트에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하여 기본적인 해석은 유지하되 전체 맥락을 세월호사건과 연결하는 것으로 대폭 수정하였습니다. 탈고한 뒤 출판사들과 접촉하였습니다. 책을 내주겠다는 반응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출간을 포기하고 알라딘 서재에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연재가 끝나는 날까지를 제 애도기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중용416

-세월호 아이들에게 헌정하다-







차 례


들어가기에 앞서

제1강 들어가며

제2강 제2장-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3강 제3장-백성은 화산이다

제4강 제4장-특별함이 도를 망친다

제5강 제5장-패도 천하에 중용 설 자리 없다

제6강 제6장-중용은 평등이다

제7강 제7장-중용은 선택의 문제다

제8강 제8장-사소한 것이 위대하다

제9강 제9장-평범해서 어렵다

제10강 제10장-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제11강 제11장-군자는 스타가 아니다

제12강 제12장-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제13강 제13장-네가 있어 내가 있다

제14강 제14장-내 삶은 내 몫이다

제15강 제15장-강이 되어 흐른다

제16강 제16장-바른 길 가되 자랑하지 않는다

제17강 제20장(1)-생명의 연대 속에 중용이 있다

제18강 제20장(2)-하늘은 그대 안에 있다

제19강 제20장(3)-중용은 영원한 과정이다

제20강 제20장(4)-수신으로 열어 수신으로 닫는다

제21강 제20장(5)-현실에서 통찰한다

제22강 제20장(6)-자신에게 떳떳하면 세상에도 떳떳하다

제23강 제20장(7)-중용은 독한 실천이다

제24강 제21장-참된 인식은 실천을 품고 있다

제25강 제22장-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란다

제26강 제23장-곡진함이 세상을 바꾼다

제27강 제24장-실천으로 꿰뚫어 본다

제28강 제25장-함께 흘러 생명이 된다

제29강 제26장(1)-온전히 채우면 온전히 비워진다

제30강 제26장(2)-만물은 하나다

제31강 제26장(3)-맑고 순수한 소통이여, 영원하라!

제32강 제27장-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이다

제33강 제28장-오늘은 오늘의 실천을 한다

제34강 제29장-군자는 명예를 백성의 가슴 속에 둔다

제35강 제30장-군자는 백성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제36강 제31장-군자는 백성과 공경을 주고받는다

제37강 제32장-진실의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리다

제38강 제33장-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제39강 제1장-우리는 우리의 중용을 말한다

제40강 나오며

나온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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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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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아픈 사람이 상담자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저 자기 가슴 속에 있는 고통을 털어놓아 치료 받는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로 한정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는 찰나부터 관계 문제, 공동체 문제, 사회 문제, 정치 문제, 영성 문제가 됩니다. 물론 아픈 이가 치유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치유 내용과 방식은 이미 그 범위를 넘어서는 맥락과 지평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확대된 삶의 차원으로 아픈 이가 인도될 때 치료는 온전해집니다.(184쪽)


20대 총선이 경천동지할 결과를 내며 끝났습니다. 가장 많이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본질과 모순된 언어를 전유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애국 애민’을 전유한 매판매국 집단이 바로 그들입니다. ‘민주주의’를 전유한 독재 세력이 바로 그들입니다. ‘통일’을 전유한 분단고착 세력이 바로 그들입니다. 권력 이전에 말을 장악하여 승승장구했던 바로 그들입니다.


저들은 오랫동안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시민을 기만하며 권력과 부를 누려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망명한 북한군 대좌(계급을 속인 것은 분명하고, 군인이 아니라는 설도 유력.) 이야기를 선거에 맞추어 발표했습니다. 탈북을 기획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해댔습니다. 그래도 참패했습니다.


말은 말한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좀 더 정확히는 말한 사람이 자기가 한 말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말이 거짓이면 거짓으로 귀결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짓말로 점철된 이 땅 권력자의 얼굴, 그 개인적인 삶, 그가 이끄는 집단, 그가 통치하는 국가를 보십시오. 말이 진실이면 진실로 귀결됩니다. 저들을 심판한 시민들을 보십시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서구 정신의학과 임상심리학의 주류는 아픈 사람의 진실 전체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성적 분석으로 도출된 일부의 진실에 아픈 사람을 우겨넣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책임을 아픈 사람 개인에게 돌립니다. 그의 가족, 그가 속한 사회, 그를 통치하는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학이 전유한 거짓 언어 체계가 빚어내는 거짓 치료입니다.


대화 또는 상담, 그러니까 말로 마음병을 치료할 경우 이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땅의 치료자 대부분은 여기에 무지합니다. 알고도 무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치료자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성향이 보수, 아니 수구적이니 말입니다. 그들의 염두에는 개인만 있을 뿐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에는 공동체 책임을 묻는 정치경제학 비판이 없습니다.


이번 총선의 심판에는 세월호사건 심판이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건 자체의 진실 규명은 심판의 대전제입니다. 사건 자체의 진실은 정치경제학적 맥락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밝혀내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치료를 시행해야 합니다. 이 치료를 생략한 그 어떤 치료도 결국은 거짓입니다. 내일 모레면 732번째 2014년 4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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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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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증은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은 인간이 삶의 환경 조건과 함께 주고받는 상호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우리 삶의 전체 과정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삶의 전체 과정은 복잡다단한 이야기로 구성되면서 우리의 인격과 특성을 드러내주는데, 바로 이 이야기 가운데 우울증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이 이야기이듯 우울증도 이야기입니다. 치료 또한 이야기임은 자명합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우울증 치료는 알맹이를 버린 껍데기일 따름입니다.

  우울증은 이야기인 병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우울증도 처음 발생해 이어지고 접히며 뒤틀리다가 갈등의 절정에서 꺾여 스러지는 곡절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이 곡절은 말해지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겪은 사람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숙명 때문에 이 곡절은 안에서 봉인된 신음입니다. 겪은 사람 스스로 그 봉인을 뜯고 입을 대는 순간부터 근본적인 치유의 가능성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말해지는 순간 그 이야기는 역설로서 생명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해진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 역설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생명은 미분화의 정적을 깨고 역동적인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주보는 두 이야기가 서로 흔들고 떨며 엉키다가 마침내 뒤바뀝니다. 그 절정에서 급기야 함께 공중제비를 돌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서로를 비결정 상태로 놓아버리는 자유의 세계로 비상합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경청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실제적인 치료가 일어납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대칭을 통해 은유적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은유적 소통은 단순히 정서적 공감을 주고받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병의 감염(!)이 오갑니다. 치료의 감염도 오갑니다. 감염을 주고받음으로써 두 사람은 생명 공유의 타원을 만들어갑니다. 다르지만 쪼갤 수 없고, 같지만 포갤 수 없는 ‘가족적 유사성’이 두 사람을 엮어 생명연대가 형성됩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인격과 삶을 함께 도약시키는 통섭이 이루어집니다.

  이야기는 말과 침묵의 절속絶續(단절과 연속이 교차함)을 통해 마음을 드러내는 생명 활동입니다. 말 자체는 이성과 의식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경계에서는 감성과 무의식이 솟아오릅니다. 이를테면 무한을 끌어내는 유한한 끌개인 셈입니다. 이런 절묘한 본질은 아마도 말과 말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 즉 침묵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그 침묵이 있어서 말은 말이 됩니다. 그 침묵 속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연대와 통섭이 일어납니다. 결국 말은 침묵이라는 너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 하는 겁니다.

  말은 이렇게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는 역설적 동력으로 부정의 감정 에너지를 해독解毒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독하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렇다고 말함self reference으로써 격정 상태에 있는 부정적 에너지의 독성을 중화하기 시작합니다. 말의 긍정 에너지를 인정함으로써 긍정주의 상술에 동조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은 긍정과 부정의 대칭을 넘어선 더 큰 ‘그러함’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더 큰 ‘그러함’의 대지는 바로 여성성의 땅입니다. 여성은 자신의 속에 다른 생명을 담아내는 어머니로서 근본적인 존재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 그 생명 자체의 ‘그러함’을 용인하지 않으면 자신이 담아내는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와 존재론적 은유를 따라 여성은 말의 화신입니다. 여성의 우울증 치료에서 이야기하기를 빼놓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언어적 존재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남성보다 말을 조리 있게 잘 합니다. 구사하는 어휘 수도 많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 좌뇌와 우뇌를 함께 쓰기 때문에 극단적인 긍정과 부정의 편향을 극복하기가 쉽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이 여성의 정서적 보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을 하는 경우도 그렇고, 듣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남성에게 말은 행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이지만, 여성에게 말은 정서적 보상으로 마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최대한’입니다. 우울증이 자기모독에 뿌리를 내린 병임을 감안할 때 말을 통한 치유 연대의 형성은 여성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상담치료가 설 자리입니다.(175-178쪽)


태초에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비대칭적 대칭의 세계 진실을 드러내려고 남성을 낳았습니다.

남성은 일극집중의 욕망으로 비대칭적 대칭의 세계 진실을 접기 시작하였습니다.

접힌 비대칭적 대칭의 세계 진실로 도로 펴기 위해 여성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의 폄은 심판이자 치유입니다.

심판이자 치유인 길은 양육의 길입니다.

양육은 일이자 놀이로서 태초부터 있었던 여성의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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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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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하나를 더 말씀드리면 우리가 왜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수천 만 명이 복용하고 있는 항우울제가 과연 치료제냐 하는 근본 질문입니다. 앞선 모든 의문을 덮고 그 약의 존재 이유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어떤 차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항우울제는 근본 치료제가 아닙니다. 증상 완화제입니다. 증상 완화가 치료가 아닌 이유는 유사 자극에도 증상이 즉각 다시 점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을 처방하고 손을 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173-174쪽)


30년 다 된 기억 하나를 떠올립니다. 혼자 살고 있는 가리봉 벌방에 날마다 제자들이 와 먹고 자고 하던 시절, 느릿느릿하지만 나이에 비해 음식 솜씨가 좋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구의 생일이었는지 맛난 음식을 준비하느라 식재료들을 사서 냉장고에 넣는 중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터라 냉장고가 마치 장난감처럼 작았습니다. 차곡차곡 집어넣다가 여의치 않자 마지막 순간 그 아이가 무심코 택한 방식이 기발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살짝만 연 뒤 마지막 물건을 대강 억지로 밀어 넣은 다음 그것이 채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냉장고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연히 두세 번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손으로 가리키며 갑자기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음은 순식간에 번져갔습니다. 한 동안 우리 모두가 배를 움켜잡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어댔습니다.


현대 서구의학은, 특정 외과 수술 포함한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이 아이의 냉장고 문 닫기와 같습니다. 문제의 근원에 유장하게 개입하지 않습니다. 드러나는 증상을 기민하게 억제한 다음, 그 효과를 기계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아픈 사람을 약물에 종속시킵니다. 거의 모든 질병에 전천후로 뿌려지는 소염·진통·해열·항생제가 그 웅변적 증거입니다. 증상 자체를 질병으로, 그것의 제압을 의학으로 여기는 관점의 소산입니다. 증상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질병이라기보다 질병을 알리는 신호거나, 자체적 방어 또는 치유 반응입니다. 그것을 억압 또는 제거하는 일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표면적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 질병이 형성되는 이면적 과정을 읽어내야 합니다. 과정을 살핀다는 것은 질병의 서사에 귀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서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질병의 전체성으로 육박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질병의 전체성을 외면한 그 어떤 의학도 오류입니다.


증상 억제제인 약물은 질병의 서사를 틀어막는 도구입니다. 치료의 미명으로 아픈 사람을 진실에서 격리시키는 수단입니다. 현대 서구의학의 이런 폭력성은 현대 서구문명의 가감 없는 한 단면입니다. 그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준)주변부에 속하는 대한민국 상황은 중첩적으로 부조리합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이 나라 집권세력이 오히려 더 증상 억제적 약물 방식으로 통치합니다. 정치적 불의를 덮기 위해 아이들 250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면서 극한의 우울과 분노에 시달리는 유족에게 보상금 던져주고 ‘시체 팔이’ 딱지를 붙여 고립시키는 세월호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2016년 4월 11일, 725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 우리의 현주소를 말해줍니다. “서울 한복판에 어느 국회의원 후보가 ‘종북, 동성애, 세월호 척결’이라고 현수막을 내걸어 놓은 것을 보고 이제 대한민국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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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7 0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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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4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