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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우울증, 미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고전적인 오해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병자’라는 모멸적 개념 안에 우울증을 우겨넣고 깎아내리거나 쉬쉬합니다. 이런 인습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막상 주위에서 이런 왜곡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설혹 우울증을 미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울증에 대한 인식은 달라져야 합니다. 나날이 우울증 환자는 늘어가고 자살을 포함해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엄청난 데도 그 옛날 동네 아이들이 지나가던 ‘미친’ 사람한테 돌 던지던 식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사회임을 폭로하는 참혹한 상황입니다. 우울증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아픈 것입니다.(86-87쪽)
‘미치다’는 말은 모두 알다시피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상태가 비정상go mad이라는 것이 하나이고, 도달하다reach가 다른 하나입니다. 얼핏 보면 둘은 전혀 상관없는 말처럼 보입니다. 어원학적 사실을 일단 제쳐놓고, 인문적 추론과 직관을 동원해 사유하면 두 말은 같은 연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는 비대칭적 편향偏向,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가 통하는 영역만을 인정하는, 그러니까 그것과 모순되는 영역을 분리·단절시키는, 그러니까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거기 도달해서는 안 되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체계입니다. 이 언어 세계에서는 대칭성의 땅에 미치는reach 것이 곧 미친go mad 것입니다.
언어 기반 세계는 전체 세계의 반쪽, 아니 현저히 그 이하입니다. 언어 기반 세계는 현저히 반쪽 이상에 미치는reach, 하여 전체 세계에 미치는reach 것을 가로막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넘어가는 사유와 실천을 미친go mad 것으로 매도합니다. 이론상으로는 논리의 문제이지만 현실적로는 억압과 착취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정확히 전복되어 있습니다. 통속한 언어 기반 세계가 미친go mad 것이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상이라 하는, 그러니까 미치지go mad 않았다고 하는 것이 미친go mad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미치지go mad 않은 것은 전체 세계에 미치지reach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미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일단 언어 기반 세계의 논리를 전제로 한 발언입니다. 언어 기반 세계가 미친go mad 것이라 규정하는 ‘경지’는 모순의 공존을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이른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적어도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 상태입니다. 모든 인간을 열광mania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언어 기반 세계에서 보면 우울증이 정신분열증이나 양극성장애와 진배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순의 공존을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열광을 강요하는 세계가 금지하는 것에 마음이 잠겨 있어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수탈의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우울증은 언어 기반 세계의 정치경제학입니다.
언어 너머, 그러니까 대칭성을 아우르는 세계에서 보면 우울증은 숭고에 채 미치지reach 못하고 그 길목에 쓰러져 누운 안타까운 상태입니다. 병이지만, 아니 병이기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아래로 평평해진 희생입니다. 우울증을 보살펴 일으킨다면 우리는 비대칭과 대칭의 비대칭적 대칭성이라는 전체 진실에 미칠reach 수 있을 것입니다.
질긴 우울증을 앓는 40대 후반 남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미친병이라는 인식을 고수했습니다. 외부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벽을 쳤습니다. 긴 세월 동안 그는 어떤 치료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울증이라는 굳센 기조로 말미암아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서 마침내 그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긴 통짜 상담을 했습니다. 상담 뒤 그는 머나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세상의 지붕 위에 앉았다 왔다고 했습니다.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