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너무 진지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 병·······

  돌아보면 저는 또래들이 어울려서 하는 놀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령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비석치기는 대개 구경하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치는 내내 뭐 하나 잘하는 놀이가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에도 각종 구기운동을 포함해 놀이를 하는 데는 거의 백치에 가까웠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향은 놀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인지 도식 탓인 듯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노는 시간에 죽어라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겉으로 보기에 공부 행위에 근접하는 ‘책상놀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화목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 억압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 누군가를 정당하면서도 자애롭게 보살피고 싶은 욕망, 계속해서 파괴되는 무질서한 가정생활에 대한 반감들이 담긴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행동이 제 주된 ‘유사 놀이’였습니다.

  결국 놀이를 통해 확보했어야 할 삶에 대한 유희적 감수성은 둔해지고 진지함에 압도되는 엄숙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요.·······놀이를 낯설어하는 과잉된 진지함, 이 엄숙주의는 우울증이 삶의 기조로 자리 잡는데 인과관계를 주고받으며 짝패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하며 잡은 큰 화두가 바로 ‘어찌하면 삶을 놀이로서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즐거움과 쾌감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버거운 과제로 떠맡은 어린 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원 없이 깔깔거리고 손뼉 치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니는 삶에 어찌 우울증이 깃들겠습니까. 설혹 우울함이 온다 해도 가치로 뿌리내릴 테지요. 관계의 미학, 그 배려와 양보, 그리고 눈부신 희생으로 자라나겠지요. 이를 엄숙함으로 받들지라도 놀이와 하나 된 것이 아닌 한 가식일 따름입니다. 아, 부디 엄숙주의는 가라!(80-81쪽)


대략 나이 육십 즈음인 사람들은 그 부모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자식을 슬하에서 떠나보냅니다. 장례식장과 혼례식장에 드나들 일이 잦습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서로 다른 두 상념의 경계를 가로지르기 마련입니다. 장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혼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기쁜 것만도 아닙니다. 예식이라고 해서 마냥 엄숙한 것만은 아닙니다. 술잔이 오가는 식사 자리라고 해서 마냥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것만도 아닙니다. 만감 교차 그 자체입니다.


나오는 음식은 장례식에 육개장, 혼례식에 갈비탕이라는 차이를 빼면 거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육개장과 갈비탕의 차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는 알 수 없거니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차이는 기원의 동시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상징적인 지표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손님, 그러니까 제3자에게 두 예식의 차이는 육개장과 갈비탕 정도로 귀결됩니다. 슬픔과 기쁨, 종말과 시작, 죽음과 삶의 차이란 ‘손님’ 눈으로 보면 이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엄숙한 의례와 질탕한 연희, 진지한 노동과 즐거운 놀이가 전후좌우로 엮이면서 영위됩니다. 영유아 때는 놀이로만 살아갑니다. 놀이가 노동입니다. 학습이 시작되면서 놀이와 노동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가지면 놀이와 노동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직업을 떠난 마지막 도정에서 인간은 다시 놀이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놀이와 노동은 삶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의 두 요소입니다. 놀이만이라면 삶은 광기입니다. 노동만이라면 삶은 우울 장애입니다.


놀이는 재미를 낳습니다. 재미는 삶을 달굽니다. 달구어진 삶은 삶을 부풀게 합니다. 부풀어진 삶은 삶을 높이 띄웁니다. 노동은 의미를 낳습니다. 의미는 삶을 식힙니다. 식혀진 삶은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든든해진 삶은 삶을 나지막이 가라앉힙니다. 뜨고 가라앉는 유연한 역동의 흐름이 탱탱한 균형미를 빚어낼 때 비로소 삶은 건강해집니다. 우리는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적요를 향하지 않습니다. 떠도 미치지 않고 가라앉아도 우울하지 않는 참된 자유를 원합니다.


지난 달 중순 <416가족의 밤> 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근처 식당에서 유족 몇 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다가 누군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일동은 구김 없이 웃음 밭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식탁에는 서너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풍경의 변방에서 작지만 포근한 안도의 힘으로 혼자 막걸리 잔을 기울였습니다. 아, 피눈물로 새끼를 가슴에 묻은 저들도 흔연히 웃어야 한다. 살아내야 하니까. 살아내야 덜 미안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격정의 늪에 빠진 병·······

  모든 정신·······장애의 근저에는 과잉 각성된 감정, 즉 격정激情·emotionalism이 존재합니다.·······생애 초기에 우리는 감정으로서만 존재합니다.·······그러므로 이때 받는 상처는 오직 감정의 상처입니다. 결국 감정의 상처는 존재 전체의 상처가 되어버립니다. 존재 전체의 상처로 군림하면서 차후 인생의 정신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반갑지 않은 친구를 우리는 ‘격정’이라 부릅니다.

  이 격정이 우울증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우울증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람, 곧 사랑의 상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에게는 관계의 문제가 아킬레스건이 됩니다. 관계 가치에 매몰되는 것이지요. 관계 가치의 요체는 진정성입니다. 자기 부정의 다른 이름인 이 진정성이 또 하나의 격정이 되어 관계의 모든 부분을 제압해버립니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격정으로서의 진정성에 함몰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관계·······과정에서 정치적 대립과 타협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도저한 정치성, 그 치밀하고 냉정한 거래가 전제하고 있는 수완의 세계를 진정성만으로는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 사실을 직시하는 게 우울증 치료의·······길입니다.” (77-79쪽)


10세 이전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는 사별, 어머니와는 생이별을 한 40대 후반 남자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나 대부분 방치되거나 학대받았습니다.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직업 전선을 떠돌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그는 세상 바꾸겠다는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심어린 삶의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백전백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산한 삶의 벌판에서 술이 주는 위안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동굴 속 위안은 얼마 못가 광기가 되어 뛰쳐나왔습니다. 병원에서 치료 받고 나온 뒤 삶을 바꾸어야겠다 싶어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화해한 뒤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상담 받는 동안에도 변함없는 진정성을 보였습니다. 그 진정성이 실제 삶의 주된 동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증거를 남기곤 하던 어느 날, 상담치료비를 뒤로 미루고 책 한 권을 빌어간 상태에서 갑자기 소식을 끊었습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그 또한 진정성을 가득 담은 편지였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주운 크레파스로 썼다는 편지를 받아들고 저는 한참 먹먹함에 잠겨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한 약속은 다시 깨졌고 그는 또 다시 소식을 끊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지닌 진정성이 그나마 삶의 작은 동력이 되기를 빌면서 말입니다. 상담치료비는 차치하고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책 한 권만 달랑 돌아왔습니다. 물론 저는 돌아온 책에 그의 여전한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을 확인하면 할수록 제 마음은 슬프고 아픕니다. 그가 진정성이라는 격정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너무나도 선연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 지난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자가 아직도 제 영혼의 한가운데 똬리 틀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이라는 격정은 순수함의 경계를 넘어 순진함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순진함은 셈을 놓칩니다. 셈을 놓친 삶은 거듭되는 패배로 말미암아 무능에 빠집니다. 무능은 무책임으로 귀결됩니다. 무책임의 끝은·······. 그 끝에 이르지 않으려면 진정성의 사람은 대칭의 반대편 끝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름 아닌 전략성! 그러니까 이것은 진심어림과 마주한 계산력, 바로 그것입니다. 계산은 냉정한 것입니다. 냉정해야 정확합니다. 정확한 계산을 흩뜨리는 사회에서 수탈이 일어납니다. 수탈하는 사람은 자기 계산을 정확히 해 놓고 빼앗기는 사람에게 진심을 먹이로 던져주어 입을 막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정성의 정치경제학입니다. 수탈당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과도한 진정성은 이미 그 자체로 뒤집어씌워진 병명, 아니 죄명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에 번지고 있는 ‘애국’이라는 것의 실체입니다. “사람, 곧 사랑의 상실”이 가져다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슬프고 아픈 진정성의 본질이 또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우울증’이라 부릅니다. ‘애국’이 뒤집어씌워진 사람이든 ‘우울증’이 뒤집어씌워진 사람이든 격정으로서 진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고 정확한 계산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탈당하지 않는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가려면 진정성과 전략성, 그러니까 진심과 계산의 밀고 당기는 팽팽한 균형이 필수적이라는 진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빌어간 책에 대한 계산은 정확하게 했으나 아직 상담치료비에 대한 계산을 정확하게 하지 않은 그 분을 저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포기하는 것은 제 영혼 한가운데 똬리 틀고 앉은 격정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포기하면 그 분 또한 그 자리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결정적 대면에서 눈빛이 꺾이는 병·······

  삶은 기회의 문제입니다. 기회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결단의 문제입니다. 결단은 결정적 대면에서 내리는 순간 판단의 문제입니다. 이런 순간순간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빚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울증 환자는 눈빛이 꺾입니다. 현실은 가차 없이 꺾인 눈빛을 밟고 지나갑니다.

  현실이 비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은 각기 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이치이므로 오히려 거기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차후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순간순간 눈빛을 꺾지 않는 일은 생명인 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순간집중력으로·······자기 생명의 경계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내면의 힘을 복원해주는 것이 우울증 치료의 요체입니다. 자기 생명의 경계를 체득해야 남의 생명의 경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남의 생명의 경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비로소 자기 생명의 경계를 아낌없이 허물 수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자기 몸이 없는데 어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붓다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 이로움을 모르는데 어찌 남의 이로움을 알 것입니까? 우울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벗이여, 부디 결정적 대면에서 눈빛을 꺾지 마소서.(75-76쪽)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이라니? 돈이 없어? 집이 없어?·······남편 의사겠다, 대체 뭐가 문제야?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니 그렇지!”


40대 전업주부 한 분이 우울증 때문에 치료받는다고 하자 친정어머니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 열이면 아홉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뭘 그리 많은 것을 가지셨습니까?”


그 분은 대답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가 대신 답변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죄다 돈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딱 하나, 돈입니다. 돈을 마음의 근거로 삼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어머니는 딸에게 어떤 종교 단체 기도 모임을 추천해주셨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돈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우울증 아닙니다, 교만해서 미처 몰랐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뭐 이런 것일까요? 이런 논리라면 신이 돈을 주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려 마땅합니다. 더 나아가 결국 돈의 있고 없음이 신의 사랑, 그러니까 구원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참담한 신앙, 참으로 참람한 신성모독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그런 종교행위에 발 디디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돈에 기대어 “눈빛을 꺾지” 않겠다는 생각은 비단 이렇게 종교하고만 결탁한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갑중의 갑이지요. 가난한 동네 노인들은 힘세 보이기 때문에 1번 찍는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수재들은 같은 이유에서 ‘일베’로 달려간다고 합니다. 언론, 학문, 교육, 문화 등 사회 전 부문이 돈과 야합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돈이 모든 사회적인간의 근본과 수준과 질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러나 돈만으로 살리는 눈빛이 사람의 눈빛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의 눈빛이 아닌 눈빛을 한 사이비 인종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미래는 더 비관적입니다. 어찌 할까요.


돈에 기대어 눈빛을 살리는 자들은 그대로 놓아둡시다. 바로 그 눈빛이 저주로 저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기대어 눈빛을 살려냅시다. 나는 네게 기대고, 너는 내게 기대어 눈빛 꺾지 않는 기개를 함께 단련해갑시다. 너와 나의 연대로 너와 나의 순서를 하나로 만듭시다. 나의 사랑이 너며, 너의 이로움이 나도록 합시다.


바로 이 숭고한 공존이 하느님나라이며 불국정토입니다. 하느님나라, 불국정토는 이렇게 오늘 너와 나의 우울로 피워낸 들 백합이며 우담바라입니다. 희망은 내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옳고 그름의 문제에 예민한 병·······

  우울증 환자가 지니는 자기 부정은 그것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맞은편에 관념적인 높은 도덕성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그나마 견디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자기 모멸감이 깊어질수록 이상의 수준도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점점 타협이 어려워지지요. 삶의 수완이 그의 눈에는 타락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현실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 실수하고 패배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도덕성은 큰 이념에 터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에 약하지요. 현실은 이와 달리 작은 것에 더 가혹할 수 있고, 큰 것에 더 관대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힘은 자연Sein이고, 도덕은 당위Sollen이기 때문입니다.(72-73쪽)


큰일에서 불의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방법은 작은 일에 끼어 있는 의로움을 들춰내어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큰일에서 의로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살해하는 방법은 작은 일에 끼어 있는 불의를 들춰내어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의한 자들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승리해 왔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런 협잡의 재롱잔치판입니다. 대놓고 함부로 구사하는 전략전술이 딱 유치원 수준인데 너무나도 잘 먹히니 말입니다. 나라 팔아먹어도 1번만 찍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고향이 대구라서 그런다는 대답을 돌려보내는 사람들이 난공불락의 기득권 패거리를 짓고 버티니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참 기막힌 나랍니다.


이런 나라에서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이기고 보는 무도한 양아치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겨서 힘과 돈을 쥐면 모든 불의를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고 난 뒤 그렇게 옳고 그름을 뒤집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 기막힌 나랍니다.


이런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지는 사람이 곧 불의한 사람입니다. 종북이고 좌빨이고 시체팔이고 세금도둑이고 떼쟁이고 혼이 비정상인 사람입니다. 시민이 능동적으로 의로움을 각성하기 전에 국가가 먼저 불의를 형성하고 도리어 죄를 뒤집어씌우는 이것은 권력을 들어 시민에게 우울증을 형벌로 가하는 상황입니다. 참 기막힌 나랍니다.


우울증을 형벌로 받은 시민은 그러면 어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죄 없으니 벌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무죄를 석명하려 애쓰면 안 됩니다. 프레임에 말려든 석명은 변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변명은 비참합니다. 시민은 그러므로 더불어 손잡고 놉니다. 노래하며 웃으며 함께 저들의 의로움 코스프레를 지나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요구도 거절도 못하는 병·······

  ·······타인들은 제게 와서·······속을 털어놓습니다. 저는 늘 듣는 처지에 놓이지요. 말하지는 못하고 듣기만 하는 이 일방적인 관계에 예외는 거의 없었습니다.·······요구와 거절 모두에 어수룩한 사람이 앞에 있으니 안심하고 풀어놓으라고 알려주는 몸 감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상담자, 조정자 위치에 서는 일·······그 과정 자체가 제 삶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일상에서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거침없이 하고 거절도 칼 같이 해야 하는데, 그게 영 서투르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은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 받는 지경에 이르고야 맙니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제 마음을 붉은 핏물 뚝뚝 떨어뜨리며 남에게 꺼내놓은 적이·······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울며불며 자기치유의 생생한 언어를 토해낼 때 저는 제 이야기를 옆집 대추나무에 대추 열린 이야기 하듯 함으로써 제 고통을 박제로 만든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통으로 지금 이 순간 힘겨운 벗이여, 혹 그대도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받기를 거듭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구와 거절의 미학을 화두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 받는 파괴적 희생이 성찰을 거쳐 거룩한 가치로 다시 태어날 그날까지 부디 정진하소서.(71-72쪽)


일레인 N. 아론은 그의 저서 『사랑받을 권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감한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은 환경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한다든가, 확고한 자기만의 내면세계에 빠져 산다든가, 다른 사람에 비해 홀로 충전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한다든가, 카페인이나 고통에 매우 민감하다든가, 쉽게 깜짝 놀란다든가, 소음이나 무질서한 환경·마감 기한·삶의 변화를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에 비해 창의적이고, 세심하며, 협력적이고, 인과관계를 잘 파악한다.”(141쪽)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조건과 그 변화를 빠르고 정확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에도 뛰어납니다. 이들은 소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관계에서 쉽게 상처받고 흔히 차별당합니다. 아래 사항을 솔직하게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말을 해도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해야 할 때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본다.

□ 여러 사람 중에 누가 더 예쁜가, 부자인가, 좋은 차를 가졌는가, 머리 좋은가 비교한다.

□ 다른 사람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 객관적으로 상대방과 대등한데도 내가 열등하다고 느낀다.

□ 비판 받으면 누가 그랬든 하루 내내 기분이 나쁘다.

□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선뜻 나서 발표하지 못한다.

□ 고개를 수그리거나 어깨를 구부리는 자세를 취한다.

□ 음식에 문제가 있어도 식당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냥 넘어간다.

□ 나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더라도 존경받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 어디선가 ‘문제가 있구먼.’ 하는 말이 들리면 얼른 자신부터 살핀다.

□ 나 자신의 경계와 권리를 어떻게 지키는지 잘 모르겠다.

□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부터 염두에 둔다.

□ 그럴만한 객관적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혹시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 배우자(연인),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질투나 불안을 느낀다.

□ 방금 한 말, 외모, 가족, 과거, 연애하는 상대방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곤 한다.

□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까봐 무리한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짓을 계속해도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한다.

□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망설이게 된다.


일레인 N. 아론의 같은 책 117-119쪽에 나오는 설문을 조금 쉽게 고쳐 보여드린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다, 10개. 자주 그렇다, 2개. 이런 결과 이상이 나오는 사람은 자기비하의 사람이라 합니다. 타고난 민감성의 사람은 살면서 입은 다양한 트라우마 때문에 대부분 자기비하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비하의 사람이 당당한 요구, 칼 같은 거절 둘 다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남이 달라면 맥없이 주고, 돌려달라는 소리는 끝내 못합니다. 이 불균형은 삶의 전반을 제압하고 규정합니다.


민감성의 사람이 자기비하의 사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삶의 야전에서 백전백패하는 것은 다만 개인의 불행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손실입니다. 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면 그런 개인들을 일깨우고 돌보아 사회 전체의 안녕을 북돋우는 일에 힘쓸 것입니다. 만일 반대로 한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사회라면 그런 개인들을 열악한 삶에 묶어두고 수탈하여 소수 상위 계층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소비할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후자임은 췌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놓고 보면 참으로 귀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임에도 이른바 ‘루저loser’로 낙인찍고, ‘저성과자’로 몰아 도태시키는 국가권력의 협잡 현장을 목하 경험하고 있습니다.


민감성의 사람을 세대로 번역하면 청년, 청소년, 아동, 영유아입니다. 청년, 청소년, 아동, 영유아는 그 사회의 미래입니다. 지금 이 불의한 국가권력은 이 민감성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를 총체적으로 착취하여 일본과 같은 노인지배사회를 구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신호탄으로 250명의 청소년을 대량 학살하였습니다. 보육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 혼이 비정상인 상태로 만들려고 교과서 획일화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청년 일자리 마련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청년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민감성의 사람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사람에 속합니까? 이렇게 계속 차별하고 착취해도 되겠습니까? 민감성의 사람에 속합니까? 이렇게 계속 차별받고 착취당해도 되겠습니까?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계속 자신을 기만해도 되겠습니까? 그대와 나, 누구든 대한민국에서 오늘 불의한 흐름에 맞서 “요구와 거절의 미학을 화두로 잡”을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난 1500년 동안 이 땅의 주류로 군림해온 매판세력, 아니면 그 마름.


대체 얼마나 어떻게 더 죽어나가야 우리가 생명의 존엄을 요구하고, 살해의 권세를 거절할 것입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