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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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요구도 거절도 못하는 병·······

  ·······타인들은 제게 와서·······속을 털어놓습니다. 저는 늘 듣는 처지에 놓이지요. 말하지는 못하고 듣기만 하는 이 일방적인 관계에 예외는 거의 없었습니다.·······요구와 거절 모두에 어수룩한 사람이 앞에 있으니 안심하고 풀어놓으라고 알려주는 몸 감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상담자, 조정자 위치에 서는 일·······그 과정 자체가 제 삶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일상에서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거침없이 하고 거절도 칼 같이 해야 하는데, 그게 영 서투르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은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 받는 지경에 이르고야 맙니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제 마음을 붉은 핏물 뚝뚝 떨어뜨리며 남에게 꺼내놓은 적이·······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울며불며 자기치유의 생생한 언어를 토해낼 때 저는 제 이야기를 옆집 대추나무에 대추 열린 이야기 하듯 함으로써 제 고통을 박제로 만든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통으로 지금 이 순간 힘겨운 벗이여, 혹 그대도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받기를 거듭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구와 거절의 미학을 화두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들어주고 퍼주다가 상처 받는 파괴적 희생이 성찰을 거쳐 거룩한 가치로 다시 태어날 그날까지 부디 정진하소서.(71-72쪽)


일레인 N. 아론은 그의 저서 『사랑받을 권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감한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은 환경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한다든가, 확고한 자기만의 내면세계에 빠져 산다든가, 다른 사람에 비해 홀로 충전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한다든가, 카페인이나 고통에 매우 민감하다든가, 쉽게 깜짝 놀란다든가, 소음이나 무질서한 환경·마감 기한·삶의 변화를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에 비해 창의적이고, 세심하며, 협력적이고, 인과관계를 잘 파악한다.”(141쪽)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조건과 그 변화를 빠르고 정확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에도 뛰어납니다. 이들은 소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관계에서 쉽게 상처받고 흔히 차별당합니다. 아래 사항을 솔직하게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말을 해도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해야 할 때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본다.

□ 여러 사람 중에 누가 더 예쁜가, 부자인가, 좋은 차를 가졌는가, 머리 좋은가 비교한다.

□ 다른 사람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 객관적으로 상대방과 대등한데도 내가 열등하다고 느낀다.

□ 비판 받으면 누가 그랬든 하루 내내 기분이 나쁘다.

□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선뜻 나서 발표하지 못한다.

□ 고개를 수그리거나 어깨를 구부리는 자세를 취한다.

□ 음식에 문제가 있어도 식당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냥 넘어간다.

□ 나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더라도 존경받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 어디선가 ‘문제가 있구먼.’ 하는 말이 들리면 얼른 자신부터 살핀다.

□ 나 자신의 경계와 권리를 어떻게 지키는지 잘 모르겠다.

□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부터 염두에 둔다.

□ 그럴만한 객관적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혹시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 배우자(연인),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질투나 불안을 느낀다.

□ 방금 한 말, 외모, 가족, 과거, 연애하는 상대방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곤 한다.

□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까봐 무리한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짓을 계속해도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한다.

□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망설이게 된다.


일레인 N. 아론의 같은 책 117-119쪽에 나오는 설문을 조금 쉽게 고쳐 보여드린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다, 10개. 자주 그렇다, 2개. 이런 결과 이상이 나오는 사람은 자기비하의 사람이라 합니다. 타고난 민감성의 사람은 살면서 입은 다양한 트라우마 때문에 대부분 자기비하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비하의 사람이 당당한 요구, 칼 같은 거절 둘 다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남이 달라면 맥없이 주고, 돌려달라는 소리는 끝내 못합니다. 이 불균형은 삶의 전반을 제압하고 규정합니다.


민감성의 사람이 자기비하의 사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삶의 야전에서 백전백패하는 것은 다만 개인의 불행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손실입니다. 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면 그런 개인들을 일깨우고 돌보아 사회 전체의 안녕을 북돋우는 일에 힘쓸 것입니다. 만일 반대로 한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사회라면 그런 개인들을 열악한 삶에 묶어두고 수탈하여 소수 상위 계층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소비할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후자임은 췌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놓고 보면 참으로 귀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임에도 이른바 ‘루저loser’로 낙인찍고, ‘저성과자’로 몰아 도태시키는 국가권력의 협잡 현장을 목하 경험하고 있습니다.


민감성의 사람을 세대로 번역하면 청년, 청소년, 아동, 영유아입니다. 청년, 청소년, 아동, 영유아는 그 사회의 미래입니다. 지금 이 불의한 국가권력은 이 민감성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를 총체적으로 착취하여 일본과 같은 노인지배사회를 구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신호탄으로 250명의 청소년을 대량 학살하였습니다. 보육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 혼이 비정상인 상태로 만들려고 교과서 획일화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청년 일자리 마련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청년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민감성의 사람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사람에 속합니까? 이렇게 계속 차별하고 착취해도 되겠습니까? 민감성의 사람에 속합니까? 이렇게 계속 차별받고 착취당해도 되겠습니까?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계속 자신을 기만해도 되겠습니까? 그대와 나, 누구든 대한민국에서 오늘 불의한 흐름에 맞서 “요구와 거절의 미학을 화두로 잡”을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난 1500년 동안 이 땅의 주류로 군림해온 매판세력, 아니면 그 마름.


대체 얼마나 어떻게 더 죽어나가야 우리가 생명의 존엄을 요구하고, 살해의 권세를 거절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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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췌언의 여지 없이. 감기 걸린 아내, 이불 한 장 더 덮어주고 소녀상 앞으로 왔다. 오는 내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나 같은 소시민, 알량한 지식분자의 애환은 그렇다. 아내한테도 소녀상한테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바로 그것. 소시민, 소심하게 소녀상 가까이 와보니 역시나 춥다. 잠시 휴식 취하는 시간이라, 혼자 자리 지키는 청년 만나 감기 한약 건네주고 황황히 돌아서 나왔다. 여전히 춥다. 여전히 부끄럽다. 여전히 식민지다.



아마, 이 소녀, 영하 273도에도 늠연하지 싶다. 청년들 옆에서.



잠시 쉬러 자리 뜬 청년들의 온기 시그널. 그 어떤 대가의 설치미술보다 아름다운, 아니 거룩한 자.국.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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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20도에 이르는 혹한에 소녀상 지키며 일인시위를 하는 청년.

이 땅의 희망과 절망을 한 몸에 짊어진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답다.

건너 편 큰 기와집을 흐르는 안온한 일상은 이 청년에게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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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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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의 삶을 지옥에서 출발하는 병·······

  어린 시절부터 남들도 그러겠지 하며 지녀 온 오랜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깬 직후 시간을 지옥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감이 엄습해 오면서 순간적으로 기분이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이 현상이 내인성우울증의 진단 지표 증상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흘려보낸 세월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당연한 것처럼 견디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하루의 삶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 동안의 인고가 너무도 안타깝게 여겨지더군요. 요즘도 드문드문 이런 아침이 찾아와 안부를 전합니다만, 저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그 인사를 받고는 합니다.·······

  물론 마음에 진 짐은 여전히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삶이 장밋빛인 것도 아닙니다. 허나 마음의 짐 없이 장밋빛 인생을 살아야만 천국 같은 아침을 맞는다면 그 누가 있어 세상의 온 아침이 생기로울 것입니까? 다들 짐을 지고 갑니다. 다들 회색빛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 명멸하는 숱한 평가와 상념들이 생명의 본질은 아닌 것이지요.

  지나온 지옥 아침의 시절, 아마도 이런 깨달음을 선취하며 견디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줘 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은 지옥이 아니기를 바라기보다는 여실한 생명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평범한 일상 속을 변함없이 걸어야 하는 벗이여, 부디 어떤 조건에서든 생기로운 아침 맞으시기를 바랍니다.(68-69쪽)


『안녕, 우울증』을 읽고 상담하러 오신 분들 가운데 이 ‘아침지옥’ 부분에 대한 공감을 말씀하시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무치는 경험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건강한 사람에게라도 이른 아침은 활력 넘치는 시간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 체온과 혈당 수치가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평소 저체온 상태인데다 대부분 수면의 질이 낮으므로 아침지옥 상태는 필연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스물네 시간이 턱 괴고 앉아 물끄러미 자신을 건너다보며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아득하겠습니까. “아이고, 또 하루 살아야 하는구나!” 실제 이런 말이 어린 소년이었던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너무 여러 번 들은 기억이 납니다. 만일 이 말을 어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실로 잔망스럽다고 나무랐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아침지옥은 꿈속에서 보는 시퍼런 물처럼 더욱 스산하고 기괴한 마음 풍경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아침지옥이 우울증의 유력한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40대 중반 한의대에 들어간 뒤였습니다. 한의대 6년은 다만 의학 공부 기간이 아니었고 생활기조로 자리 잡은 우울증과 우울증이 신체화한 질병인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스스로 고친 치료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치료가 끝난 직후 들이닥친 국가폭력 때문에 아침지옥은 심각한 불안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시절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견뎠는데 선연한 각성 상태에서 겪은 아침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의원을 빼앗기고 낭인으로 떠도는 동안 아침지옥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습니다. 한의원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고 파산 지경에 이르자 아침지옥은 극에 달했습니다.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처절한 패배를 철저히 수용했습니다.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사실상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기적은 이 사회적 죽음 뒤에 찾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의 지평선 위로 고요가 말갛게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아침지옥은 없습니다.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아침실재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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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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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함(죄책감)이 사무치는 병·······

  제게는·······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습니다. 저는 이 딸아이에게 깊은 미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늦게 낳았기 때문에 젊은 아비처럼 열정적으로 기르지 못한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에서 기인된 잘못된 판단과 무지로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지요.

  첫돌이 막 지난 아기를 급작스럽게 생면부지 남의 손에 맡긴 일·······그리고 생후 3주 만에 발견한 사경斜頸torticollis이란 병을 치료하는 잘못된-인용 시 첨가- 긴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외상trauma이 아이에게 남긴 흔적을 목하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 치유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은 무거운 돌덩어리를 안고 갑니다.·······지울 수 없는 미안함으로 온 영혼이 떨려옵니다.(66-67쪽)


말과 행동을 통해 빚어내는 사회관계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우울장애를 깊숙이 파고들어 심리와 일상에서 평화가 쩍쩍 갈라지기만 하는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흐느끼며 훌쩍이며 그가 엮어낸 삶의 이야기들은 그다지 충격적인 것도 없고 그다지 비통한 것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늘 하는 말, 늘 하는 행동의 표면에 돋아 있는 미세한 가시들이 끊임없이 찔러대어 상처 위에 상처가, 또 그 위에 상처가 덧붙으면서 그는 만성적인 불안·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부모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그의 나약한 정신력과 잘못된 인격을 거론하며 책망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남성가부장적 공격에 대해 같은 여성임에도 도리어 방조로 일관하는 어머니가 결정적 장면에서 그에게 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히고는 했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엄마 또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맞습니다. 그런 엄마 어디 또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자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미안함(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부모니까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신드롬에 속수무책 이용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나 오늘 우리사회처럼 ‘닥치고’ ‘대박 나는’ 것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현실에서는 아주 익숙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생명이 자식-생명을 애틋하게 여기고 늘 뭔가 덜 해주었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는 정도와 방향입니다.


제가 딸아이한테 가지고 있는 “미안함(죄책감)”이 때로는 잘난 척으로 읽히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가까이서 저를 지켜본 제자들은 ‘선생님께서 미안해하신다면 저희들은 뭐가 됩니까?’ 식으로 반응합니다. 이러면서까지 제가 미안함(죄책감) 문제를 왜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 말입니다. 부모의 부재와 상실이 교차·반복되는 생애 초기의 상처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귀속적 근거가 전혀 없는 미안함(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왔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딸아이한테 미안한 일을 했느냐, 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질렀느냐, 여부와 무관하게 미안함(죄책감)은 언제나 날래게 깊숙이 영혼을 찔러 들어오는 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엄마와 존재론적 미분화 상태에 있는 영유아기 아이에게 자기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엄마입니다. 이를테면 영유아기는 ‘I am you.' 시대인 것입니다. 이때에 버림받은 아이는 버림받은 순간 이후 급격히 감각된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를 부정하면 존재의 기원·근본이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그 자기부정은 엄마의 감정을 전유합니다. 이른바 존재론적 미안함. 존재론적 미안함은 “지울 수 없는 미안함”으로 온 영혼을 떨려오게 만듭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한 번 저의 “지울 수 없는 미안함”을 우뚝! 직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딸아이를 생각합니다. 실로 육십갑자 돌아서야 존재론적 미안함 저 밑동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비 영혼에 한 소식 당도한 이때, 딸아이 삶에 새로운 빛 닿아 비로소 담담한 풍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를 찾아온 그 젊은이에게도 존재론적 미안함이 묵직하게 섬뜩하게 똬리 틀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나 같은 엄마 또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라는 말이 버림의 선언임을 그 어머니가 깨닫지 못하는 한,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부디 그 젊은이가 고통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론적 미안함을 직면하는 길 찾아가도록 두 손 모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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