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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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똑하고 착해서 걸리는 병·······

  꽤 오래 전에 만난 젊은 여성 우울증 환자 한 분이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그 분은 몸에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못나서 부모님께도, 형제들한테도 너무나 미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은 전혀 못나지 않았습니다.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서 스스로 또는 가족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착해서입니다.

  착하면 왜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할까요? 일상에서 착한 것은 도덕이나 윤리교과서에서와 달리 약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 공부 잘한다, 수완이 좋다는 것과 연결된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을 너무나 깊은 의미로 바라본다는 것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결국 삶의 정교한 스킬과 거리가 먼 유형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은 “영특하고 착하다”며 늘 등을 토닥여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늘 인간의 역학관계에서 밀리고 끌려 다니기만 할 뿐입니다. 양보, 배려, 희생, 침묵, 초월, 결백, 도덕적 감수성, 거절 결핍 등의 가치들이 덕목으로 자리 잡습니다. 드디어 생활의 기조로 만성적 우울증이 정착됩니다.·······

  똑똑하고 착한 것은 너무 깊고 약한 것입니다. 이 세상과 불화하는 까닭입니다. 이 근본적 불화를 우울증이라 부를 때 우울증은 결국 소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자와 강자만이 긍정 가치인 지금 여기에서 ‘똑똑하고 착한’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그 존재를 지탱해야 할까요?(62-64쪽)


우리가 쉽고 간단하게 우울증이라 부르지만 내밀하게 또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서구(의학적) 개념 틀에 쏙 들어가는 단일 질병이 아닙니다. 질병 인지 모멘트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 가벼운 우울정서의 지속에서 정신병적 우울상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복잡다기한 원인이 뒤엉킨 일종의 증후군syndrome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분류 기준상 정반대인 질병과 일치하는 증상들도 지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실제 임상에서 똑같은 환우를 볼 기능성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각각의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증상들의 교집합이 많음에도 결국 그 핵심은 우울증이 아닌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증상들이 매우 단순하고, 그래서 아주 전형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이런 전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똑똑하고 착한 것”입니다.


우울증 앓는 사람이 “똑똑하고 착한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똑똑해서 착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참으로 똑똑한 사람은 착합니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착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착하지 않으면 참으로 똑똑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똑똑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꿈꾸지 않는 것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미를 민감하고도 깊게 추적합니다. 의미 추적은 상상력 없이 불가능합니다. 우울증의 사람은 상상력의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상상력의 사람이어서 아픈 것입니다.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트위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은 늘 악의를 동반한다.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 자체가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으로 정확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상력에서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가 나온다는 진실은 곧 바로 똑똑해서 착하다는 이치와 일치를 이룹니다. 진정 똑똑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를 지닌having, 아니 사는doing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공적 어젠다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핍박당하는 사람,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착취하고 악의에 찬 사람과 불화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나쳐 병든 사람이 바로 우울증 앓는 사람입니다.


목하 대한민국은 한줌의 무리, 그러니까 늘 악의를 동반한 채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으로 매판하고 독재하며 분단을 고착시키는 권력집단과 그 마름들이 절대다수의 건강한 상상력의 사람들을 죄다 너무나도 상상력의 사람인, 우울증 환자로 몰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250명의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중동독감을 방치·확산시켜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역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돈 몇 푼에 덮었습니다. 급기야 행정부 수반이 수천만 시민을 노예 노동으로 내몰기 위해 거리 서명에 나서 입법부를 겁박하고 있습니다.


그대여,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까. 손을 내밀어 우울증을 앓는 이웃과 함께 하십시오. 아픔의 연대는 이내 치유의 연대가 될 것입니다. 치유 연대는 우울을 통째 내다버리지 않습니다. 건강한 우울을 보존합니다. 건강한 우울로 상상합니다. 그 상상으로 우리 생명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선의를 한껏 고양시킵니다. 자주, 민주, 통일을 꿈꿉니다. 백전백패합니다. 백전백패 양의 축적이 최후 일승 질의 전환을 낳습니다.


문득 작가 커트 보니것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한 단어만 바꾸겠습니다.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시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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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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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마음병의 침전물·······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닙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고갱이, 가장 무거운 지점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병입니다. 적어도 자기 생명을 각성하는 존재인 인간인 한 그 지점에 침해를 당한 병이 바로 우울증이기 때문에 우울증은 성찰적 생명의 가장 심층에 자리한 병입니다. 어쩌면 모든 병의 침전물이 바로 우울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렇게 깊은 병이 그토록 쉽게 걸릴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 생명은 관계적 소통으로써 발현되는데, 우울증은 바로 이 관계적 소통의 핵심 기전에 문제가 생긴 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관계적 소통, 즉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알아차리고, 바꾸고, 심지어 버리고, 거꾸로 확장도 합니다.

  이 역동성이 차단될 때 관계적 소통에서 상처 입은 무력한 생명이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생존 전략이 바로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규정하여 상처를 정당화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 자기 부정의 도상에 주저앉은 병이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은 쉽게 걸리지만 뼈골을 파고드는 가혹한 병입니다.(61쪽)


이제는 삼척동자조차 입에 올리는 우울증은 회자될수록 오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서양식 명칭 자체도 그렇거니와 정신과 양의사서껀 얄팍한 쪼가리 정보의 백화점인 대중매체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오해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우울증은 기분mood의 문제다.”


기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분이라는 표층은 마음의 심층과 절연된, 그러니까 훌러덩 벗겨내면 그만인 껍데기가 아닙니다. 기분에 스며있는 마음 생명의 요체를 포착하지 못하면 그저 프로작 의지해 한 생을 허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분만 조작하겠다는 프로작은 결국 기분도 아작낼 것입니다.


기분은 마음 생명의 최전선입니다. 본진의 전령입니다. 우울한 기분은 생명의 깊은 위기를 전해주는 파발입니다. 우울한 기분만 걷어내어skimming 우울증 치료하겠다고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반생명적 협잡입니다. 이 또한 서구 진통제의학의 한 지류입니다. 진통에 중독되게 하여 생명에서 생명다움을 수탈하는 책략입니다.


우울한 기분을 대뜸 걷어내지 않고 느긋이 품어 안으면 마음 생명의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치료가 시작됩니다. 참된 치료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이야기로 끝납니다. 이야기가 치료입니다. 이야기가 생명입니다. 아니, 생명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거세하는 화학합성약물은 살인병기입니다.


지난 주말, 살인병기가 주류로 자리 잡은 우울증 판에 오아시스 같은 소식을 들고 60대 중반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네 차례 상담 받고나서 한 동안 뜸했던 분입니다. 아무 소용없다면서 안 가겠다 버티던 어느 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순간, 그것이 상담 효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약을 다시 잡고 달려왔습니다. 거듭 고개를 숙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 분은 오랫동안 학대를 내면화하면서 살아온 결과 간헐적 격분증후군에 시달렸는데 최근 어떤 결정적 시점에서 격분을 제어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제어는 지난날의 무조건적 억압과 다릅니다. 자기부정에 따른 전략 부재 상태의 억압과 격분 사이를 널뛰듯 넘나들다가 중도의 진실 한 자락을 붙잡은 것입니다.


상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는 고통을 스스로 드러내어 말하는 그 자체의 치유력입니다. ‘비상한’ 말에 대하여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상담을 청한 사람이 상담에 응한 사람의 말과 몸짓을 새겨 넣는mirroring 것의 치유력입니다. 찰나적인 느낌과 흉내의 각인 치유력을 서구 정신의학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변화는 기분전환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까 중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중도는 존재의 심연에 닿아 있는 진실을 포착하는 문제입니다. 생명의 가치와 고통의 의미를 묻는 문제입니다. 서구 정신의학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프로작에 생명의 가치와 고통의 의미 문제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실로 한 생각 크게 돌이킬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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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에 목마른 병·······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의 무의식에는 세상 사람이 온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거나 그러리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 즉 버림받은 존재성 위에 자리한 자기 부정, 또 그래서 생긴 진정성 애착이 빚은 감정 상태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온정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치유는 뭉클한 온정과 가혹한 비정非情 사이, 건강해서 너무나 담담한, 심지어 서늘한 거래去來를 통해 일어납니다.(59)

 

어제, 2016115일에는 진료를 조금 일찍 끝내고 <416가족의 밤>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참석했다기보다 낌새도 없이 스며들었다가 흔적도 없이 빠져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 눈에는 변호사 권영국, 배우 권효해, 그리고 416연대 박래군이 들어왔지만 그들의 눈에는 제가 들어갔을 리 없습니다. 한 쪽 구석에서 경매, 공연을 지켜보았습니다. 분위기는 매우 흥겨웠고 온기로 가득 찼습니다. 약간의 돈으로 기억하기 위한물품을 구매하였습니다. 저녁 먹기 위해 들어간 근처 식당에는 유족 몇 분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그 분들의 농담과 웃음소리가 제 마음을 톡톡 두드리며 지나갔습니다. 막걸리 한 잔 시원히 들이켜서 속을 쓸어주자 이내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그저 장사치의 마음으로 만들었을 데면스런 음식을 먹고 그저 뜨내기손님의 마음으로 담담히 일어났습니다. 오늘, 삶은 또 그렇게 뭉클한 온정과 가혹한 비정非情 사이에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흔히 동반되는 질환 가운데 하나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몸이 차서 생기는 매우 귀찮고 성가신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몸이 찬 것은 그 마음이 시린 데서 연유합니다. 곡절이 무엇이든 우울증 환자의 마음 온도는 매우 낮습니다. 그 근본에는 물론 자기부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린 마음에 휩싸여 오도카니 앉아 있는 차가운 몸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것이 바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입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의 주된 증상은 연거푸 들이닥치는 재채기와 말갛고 싸늘하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입니다. 둘 다 몸을 따스하게 해주기 위한 방어 작용입니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 서로 맞물리면서 온정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온정은 궁극의 해결이 아닙니다. 온정에 대한 목마름이 격화된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비정非情과 당당히 마주설 수 있습니다.

 

   

비정은 강고한 실재입니다. 비정은 국가로, 국가가 제정한 법으로, 법이 부여한 힘으로, 힘에 따른 살해로 우울을 광범위하게 생산·분배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대놓고 자행하고 함부로 부인하여 비정의 실재를 지웁니다. 거꾸로 안보, 청년 일자리, 국민 행복 따위의 속임수를 써서 온정의 가짜 실재를 띄웁니다. 비겁한 저널리즘은 보도를 가장한 홍보·계도, 통속한 드라마, 이른바 먹방을 비롯한 각종 잡담 프로그램으로 비정의 실재를 지웁니다. 거꾸로 해피엔딩, 힐링, 웰빙 따위의 속임수를 써서 온정의 가짜 실재를 띄웁니다. 우리는 그 동안 대통령선거부정-세월호사건-중동독감대란-역사교과서획일화책동-일본군성노예문제야합으로 이어지는 실재 비정의 공격에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내상을 입었습니다. 내상이 더 깊어져 치명적으로 되기 전에 치유에 나서야 합니다. 답은 하나뿐입니다. “서늘한 거래去來”! 저들 살인집단이든 됐다, 그만하자.’ 집단이든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온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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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다만 하나의 정신적 장애가 아닙니다. 인류에게 드리워진 가장 짙고도 넓은 멸절의 그림자입니다. 사신死神의 전령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자기 파괴의 길을 뫼비우스 띠로 비틀어만 준다면 붓다가 말씀하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 예수가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공존과 평화의 지평을 열 수 있습니다. 인류 최후의 과학이자, 종교입니다.(55쪽)


지금 서울 중랑구청에서는 한의대 의료봉사 단체가 두 달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무료진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봉사 구조를 처음 만들었고 후배들이 14년째 이어왔습니다. 오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잠시 돌아보고 오느라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젊은 여성 승객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5살 무렵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었답니다. 그 상처에 눌려 고통 받던 오빠는 2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요. 며칠 전 퇴근해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숨져 있었답니다. 외롭고 무서워 집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요금이 4만원을 넘어서고 있는데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마침 걱정하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기에 그 친구 집에 데려다주었지요. 일어서다가 그는 손을 내밀며, ‘제 아빠가 좀 돼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명함 한 장을 건넸습니다.”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 저는 기사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아빠가 되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게도 그렇게 생긴 딸이 여럿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제게는 환자로 만나 딸이 된 젊은 여성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부모와 아이들까지 돌보며 메타가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맺어준 낮은 연대입니다. 죽음의 비탈길로 내려가다 우연히 잡은 손에서 시절인연이 피어난 셈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따위가 결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비수를 찔러 넣는 가혹한 질병입니다.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자멸할지도 모릅니다. 우울증에 대한 도저한 알아차림은 이제 불가피합니다. 죽음으로 무심코 이끌려가는 자신을 어느 찰나 알아차리고, 단도직입 스스로 육박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삶 너머가 죽음이듯, 죽음 너머가 삶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에서 비로소 죽음 너머 삶의 실체가 바로 타자, 그러니까 ‘너’라는 구체적인 진실이 나옵니다. 우울증을 꿰뚫지 않으면 결코 증득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엄밀 과학 예서 더는 없습니다. 경이 종교 예서 더는 없습니다.


극진함으로 손 모읍니다. 부디 그 아픈 젊은이가 택시 기사 분에게 연락하기를! 부디 그 택시 기사 분의 딸이 되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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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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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존재로서 자신을 알아차린 의사가 주의를 기울이는 상대방, 즉 마주선 주체 또한 마음의 존재입니다.·······약이라는 물질로 고장 난 일부(부품)를 고치면 원상 복귀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닙니다. 설혹 뇌를 약물로 조정해서 어떤 정신 상태가 개선된다 해도 그것으로 마음을 치료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뇌가 마음이라는 소통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음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당연히 소화관도 참여합니다. 따라서 우울증을 고치기 위해 뇌 안의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는 것이 동시에 소화관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에 눈감는 행태는 결코 마음을 서로주체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뇌를 포함한 온 몸, 세포 하나하나, 피부, 충수돌기 등 하찮아 보이는 작은 부분 모두가 참여하여 외부 조건과 어울려 일으키는 상호 소통 사건이므로 전천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살아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부분만을 떼어서 대상으로 고정하는 찰나 마음이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은 몸 안팎을 가로지르는, 그래서 세포 하나보다 더 미세한 동시에 몸 전체보다 더 광범위한 생명 현상입니다. 따라서 마음 존재를 파악하려면 쌍방향 사유가 불가피합니다. 대칭성을 동시에 끌어안고 역동적으로 맞물리게 하는, 상호 경계(가장자리)에서 스스로 흔들리는 자유혼이 필수적입니다.(53-54쪽)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


『몰락의 에티카』 한 대목(659쪽)입니다.


사랑이 꼭 연인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닌 한, 두 당사자가 의자醫者와 환자라고 해서 사랑을 말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은 사랑에 관하여 시절인연의 가능성 안에 놓여 있으니 말입니다. 의자가 환자를 사랑으로 대할 때 환자의 전체를 보게 되고, 욕망으로 대할 때 환자의 부분을 보게 됩니다. 환자의 부분을 본다는 것은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것은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태 구조가 바로 서구 정신의학입니다. 서구 정신의학은 ‘환유’의 의학입니다. 환유하는 의자의 욕망은 끝내 환자를 ‘아니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부분적 사실의 영역에 유폐시킵니다. 이것은 분별의 셈법differential calculus, 그러니까 미분법의 의학입니다. 잘디잘게 쪼개서 정신을 치료하겠다는 발상의 일극구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병입니다. 자신의 삶과 단절된 병적 반응reaction으로 하는 의학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과 연속된 건강한 감응response으로 하는 의자는 환자를 보고 ‘나는 너다’라고 말합니다. ‘결핍을 맞바꾸는 것’을 통해 반야(통합)의 셈법integral calculus, 그러니까 적분법의 의학을 합니다. 적분법을 들여놓지 않는 서구 정신의학은 환자를 파멸시키다 시키다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지점까지 왔습니다. 오직 혁명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반성 없는 흐름’에 혁명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혁명은 ‘숭고한 단절’입니다. ‘숭고한 단절’은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서구 정신의학에 사랑이 깃들 리 없습니다. 사랑은 프로작으로 뇌를 조종하려는 마음과 서로 형용 모순을 일으킵니다. 프로작으로 뇌를 조종하려는 마음은 기계를 향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기계를 향하는 마음은 종당 기계가 되고 맙니다. 기계는 주체가 아닙니다. 주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복원된 주체만이 타자, 그러니까 또 다른 주체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서로주체가 결핍을 맞바꾸며 전체 인간을 완성해갑니다. 전체 인간으로 구성되어 가는 과정이 참된 정신의학입니다. 참된 정신의학은 오직 “자유혼”만이 빚어낼 수 있는 은유의 향연입니다.


혁명이 완수되면 사랑만 가득 찬 세상이 올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꿈꾸었던, 아니 그것을 꿈꾸었기 때문에 지난 모든 거룩한 종교 혁명과 통속한 정치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혁명의 목표는 욕망 일극집중구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혁명의 목적은 사랑과 욕망의 비대칭적 대칭구조의 역동적 균형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욕망, 너와 나, 흡수와 관통은 온전히 쪼개지지도 온전히 포개지지도 않는 평범한 선형 관계를 지속합니다. 비범한 특이점은 예외적으로만 형성됩니다. 구태여 도식적 내러티브를 만들어 말한다면 온전히 포개지는 특이점을 향하여 온전히 쪼개려는 힘과 맞서 부단히 싸우며 나아가는 과정이 인간의 삶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 혁명에 대한 절망을 말하는 것은 온전히 쪼개려는 힘이 너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년 그 힘은 백전백승해왔습니다. 전체인 시민은 부분, 그러니까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들', '잘못된 역사 교육 받아 비정상 혼을 지닌 종북', '몸 팔아먹은 위안부'로 축소되어 백전백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헤어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참으로 아득합니다. 분명한 것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하나입니다. 각자 자신을 부분으로 인식하지 말고 전체로 인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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