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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똑똑하고 착해서 걸리는 병·······
꽤 오래 전에 만난 젊은 여성 우울증 환자 한 분이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그 분은 몸에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못나서 부모님께도, 형제들한테도 너무나 미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은 전혀 못나지 않았습니다.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서 스스로 또는 가족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착해서입니다.
착하면 왜 잘난 것을 드러내지 못할까요? 일상에서 착한 것은 도덕이나 윤리교과서에서와 달리 약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 공부 잘한다, 수완이 좋다는 것과 연결된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을 너무나 깊은 의미로 바라본다는 것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결국 삶의 정교한 스킬과 거리가 먼 유형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은 “영특하고 착하다”며 늘 등을 토닥여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늘 인간의 역학관계에서 밀리고 끌려 다니기만 할 뿐입니다. 양보, 배려, 희생, 침묵, 초월, 결백, 도덕적 감수성, 거절 결핍 등의 가치들이 덕목으로 자리 잡습니다. 드디어 생활의 기조로 만성적 우울증이 정착됩니다.·······
똑똑하고 착한 것은 너무 깊고 약한 것입니다. 이 세상과 불화하는 까닭입니다. 이 근본적 불화를 우울증이라 부를 때 우울증은 결국 소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자와 강자만이 긍정 가치인 지금 여기에서 ‘똑똑하고 착한’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그 존재를 지탱해야 할까요?(62-64쪽)
우리가 쉽고 간단하게 우울증이라 부르지만 내밀하게 또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서구(의학적) 개념 틀에 쏙 들어가는 단일 질병이 아닙니다. 질병 인지 모멘트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 가벼운 우울정서의 지속에서 정신병적 우울상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복잡다기한 원인이 뒤엉킨 일종의 증후군syndrome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분류 기준상 정반대인 질병과 일치하는 증상들도 지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실제 임상에서 똑같은 환우를 볼 기능성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각각의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증상들의 교집합이 많음에도 결국 그 핵심은 우울증이 아닌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증상들이 매우 단순하고, 그래서 아주 전형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이런 전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똑똑하고 착한 것”입니다.
우울증 앓는 사람이 “똑똑하고 착한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똑똑해서 착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참으로 똑똑한 사람은 착합니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착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착하지 않으면 참으로 똑똑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똑똑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꿈꾸지 않는 것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미를 민감하고도 깊게 추적합니다. 의미 추적은 상상력 없이 불가능합니다. 우울증의 사람은 상상력의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상상력의 사람이어서 아픈 것입니다.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트위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은 늘 악의를 동반한다.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 자체가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으로 정확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상력에서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가 나온다는 진실은 곧 바로 똑똑해서 착하다는 이치와 일치를 이룹니다. 진정 똑똑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배려와 선의를 지닌having, 아니 사는doing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공적 어젠다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핍박당하는 사람,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착취하고 악의에 찬 사람과 불화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나쳐 병든 사람이 바로 우울증 앓는 사람입니다.
목하 대한민국은 한줌의 무리, 그러니까 늘 악의를 동반한 채 빈약하고 저열한 상상력으로 매판하고 독재하며 분단을 고착시키는 권력집단과 그 마름들이 절대다수의 건강한 상상력의 사람들을 죄다 너무나도 상상력의 사람인, 우울증 환자로 몰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250명의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중동독감을 방치·확산시켜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역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돈 몇 푼에 덮었습니다. 급기야 행정부 수반이 수천만 시민을 노예 노동으로 내몰기 위해 거리 서명에 나서 입법부를 겁박하고 있습니다.
그대여,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까. 손을 내밀어 우울증을 앓는 이웃과 함께 하십시오. 아픔의 연대는 이내 치유의 연대가 될 것입니다. 치유 연대는 우울을 통째 내다버리지 않습니다. 건강한 우울을 보존합니다. 건강한 우울로 상상합니다. 그 상상으로 우리 생명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선의를 한껏 고양시킵니다. 자주, 민주, 통일을 꿈꿉니다. 백전백패합니다. 백전백패 양의 축적이 최후 일승 질의 전환을 낳습니다.
문득 작가 커트 보니것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한 단어만 바꾸겠습니다.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시민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