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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뇌는 전통 한의학에서 하찮은, 적어도 기이한 존재(이른바 기항지부)로 밀려나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심장이 뇌와 본질이 같은 기관으로 밝혀지면서 심장-대뇌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전통 한의학의 심장 이해가 일정 정도 근거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내세울 것은 못 됩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현대 서양의 뇌 환원주의 경향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 한의학의 이런 한계는 자연스럽게 ‘한의학적 상담’이란 개념이 생겨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구조와 사건에 대해 깊고 넓게 살피고 그 병리적 현상들을 언어로써 풀어내는 치료 방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중국 문화가 말에 서양처럼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지니는 왜곡과 한계를 꿰뚫어 봄과 동시에 지나쳐서 경시하는 데까지 나가 버린 것입니다.
도덕경 첫머리에 저 유명한 절창이 있습니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절창인 꼭 그만큼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으면 말의 행간에 있는 침묵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아, 물론 이 구절은 정반대의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 이해를 따릅니다.)(49-50쪽)
10년 전 어느 날, 제 글을 읽고 어떤 여성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글에서 영혼의 같은 결이 느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고 방송 일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얼마 뒤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제 말에서 글과는 전혀 다른 결을 느꼈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합니다. 단 몇 마디 나눈 첫 대화 이후 다시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이 기억은 이따금씩 저를 다시 찾아오곤 했습니다. 추정컨대 방송인으로서 글과 말의 일치를 당연히 여겼던 그 분은 결곡한 글과 달리 전화기를 타고 성큼 들어서는 동네 아저씨 같은 말투에 뭐랄까 실망스럽고 당황스러운 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방송은 쓰인 글대로 말하는 작업이므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담은 글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예측 불가능한 발화를 따라 그 때 그 때 다른 빛으로 감응합니다. 글과 말의 불일치는 결 다름이 아니고 빛 다름입니다. 글은 상대적으로 결이 돋을새김 됩니다. 독자를 예상한다 해도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상대적으로 빛이 돋을새김 됩니다. 듣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은 육중합니다. 빛은 경쾌합니다.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며 상담하는 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곰곰 생각에 잠깁니다. 어느 쪽이 더 나았을까? 앞으로는 어떨까?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이대로 갈만하다.’ 입니다. 고통에 찬 사람들과 마주하는 현실 상담은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의 빛깔을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겨우 마치고 도박에 미친 남편을 부양하며 악에 받쳐 살아가는 60대 여성에게 얼마나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면 화병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어머니한테 매 맞다 맞다 칼 들고 덤벼들었던 10대 소년한테 어떤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면 간헐적 격분장애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10년 전 그 분과 빗겨간 인연이 아쉽지만 저는 글과 말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는 이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 안고 갑니다. 동네 아저씨 입에서 나오곤 하는 육두문자도 마다하지 않으며 갑니다. 말의 치유력을 낱낱이 경험하며 휘적휘적 갑니다.
말의 치유력은 발화자의 기품과 내용의 적실함 이전, 그러니까 발화 자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발화는 막힌 것을 뚫는다는, 접힌 것을 편다는, 닫힌 것을 연다는, 끊긴 것을 잇는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발화는 몸과 조건 세계가 마주하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음 사건입니다. 발화는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지는 소통 운동입니다. 말은, 그러므로, 반드시, 해야 맛입니다. 그 말맛의 진실은 본디 여여如如한 것이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의 반전反轉 해석에서 각별히 드러납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이 부분 해석에 숱한 견해와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저는 이 부분 또한 의학적 견지에서 해석을 시도하겠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비상한 도가 된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비상한 이름이 된다.’
제 뜻은 단순 명쾌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 비상한, 즉 더 이상 아픔이 아닌 아픔, 치유의 도상에 놓인 아픔이 된다는 말입니다. 표현된 아픔과 표현되지 못한 아픔이 얼마나 크게 다른가, 에 대해 이미·······알고 있는 바입니다.(『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153-154쪽)
말의 비상한extraordinary 치유력은 마치 호흡의 치유력과도 같은 이치를 따릅니다. 무심코 하는 호흡은 짧고 얕습니다. 이 자체가 병입니다. 자기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순간, 호흡은 길고 깊어집니다. 이 자체가 치유입니다. 말은 문제를 길고 깊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문제를 길고 깊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비상함의 요체입니다. 그렇게 해결은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색하고 말씀드립니다. 말은 해야 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