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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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의 존재로서 자신을 알아차린 의사가 주의를 기울이는 상대방, 즉 마주선 주체 또한 마음의 존재입니다.·······약이라는 물질로 고장 난 일부(부품)를 고치면 원상 복귀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닙니다. 설혹 뇌를 약물로 조정해서 어떤 정신 상태가 개선된다 해도 그것으로 마음을 치료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뇌가 마음이라는 소통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음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당연히 소화관도 참여합니다. 따라서 우울증을 고치기 위해 뇌 안의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는 것이 동시에 소화관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에 눈감는 행태는 결코 마음을 서로주체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뇌를 포함한 온 몸, 세포 하나하나, 피부, 충수돌기 등 하찮아 보이는 작은 부분 모두가 참여하여 외부 조건과 어울려 일으키는 상호 소통 사건이므로 전천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살아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부분만을 떼어서 대상으로 고정하는 찰나 마음이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은 몸 안팎을 가로지르는, 그래서 세포 하나보다 더 미세한 동시에 몸 전체보다 더 광범위한 생명 현상입니다. 따라서 마음 존재를 파악하려면 쌍방향 사유가 불가피합니다. 대칭성을 동시에 끌어안고 역동적으로 맞물리게 하는, 상호 경계(가장자리)에서 스스로 흔들리는 자유혼이 필수적입니다.(53-54쪽)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


『몰락의 에티카』 한 대목(659쪽)입니다.


사랑이 꼭 연인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닌 한, 두 당사자가 의자醫者와 환자라고 해서 사랑을 말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은 사랑에 관하여 시절인연의 가능성 안에 놓여 있으니 말입니다. 의자가 환자를 사랑으로 대할 때 환자의 전체를 보게 되고, 욕망으로 대할 때 환자의 부분을 보게 됩니다. 환자의 부분을 본다는 것은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것은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태 구조가 바로 서구 정신의학입니다. 서구 정신의학은 ‘환유’의 의학입니다. 환유하는 의자의 욕망은 끝내 환자를 ‘아니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부분적 사실의 영역에 유폐시킵니다. 이것은 분별의 셈법differential calculus, 그러니까 미분법의 의학입니다. 잘디잘게 쪼개서 정신을 치료하겠다는 발상의 일극구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병입니다. 자신의 삶과 단절된 병적 반응reaction으로 하는 의학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과 연속된 건강한 감응response으로 하는 의자는 환자를 보고 ‘나는 너다’라고 말합니다. ‘결핍을 맞바꾸는 것’을 통해 반야(통합)의 셈법integral calculus, 그러니까 적분법의 의학을 합니다. 적분법을 들여놓지 않는 서구 정신의학은 환자를 파멸시키다 시키다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지점까지 왔습니다. 오직 혁명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반성 없는 흐름’에 혁명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혁명은 ‘숭고한 단절’입니다. ‘숭고한 단절’은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서구 정신의학에 사랑이 깃들 리 없습니다. 사랑은 프로작으로 뇌를 조종하려는 마음과 서로 형용 모순을 일으킵니다. 프로작으로 뇌를 조종하려는 마음은 기계를 향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기계를 향하는 마음은 종당 기계가 되고 맙니다. 기계는 주체가 아닙니다. 주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복원된 주체만이 타자, 그러니까 또 다른 주체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서로주체가 결핍을 맞바꾸며 전체 인간을 완성해갑니다. 전체 인간으로 구성되어 가는 과정이 참된 정신의학입니다. 참된 정신의학은 오직 “자유혼”만이 빚어낼 수 있는 은유의 향연입니다.


혁명이 완수되면 사랑만 가득 찬 세상이 올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꿈꾸었던, 아니 그것을 꿈꾸었기 때문에 지난 모든 거룩한 종교 혁명과 통속한 정치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혁명의 목표는 욕망 일극집중구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혁명의 목적은 사랑과 욕망의 비대칭적 대칭구조의 역동적 균형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욕망, 너와 나, 흡수와 관통은 온전히 쪼개지지도 온전히 포개지지도 않는 평범한 선형 관계를 지속합니다. 비범한 특이점은 예외적으로만 형성됩니다. 구태여 도식적 내러티브를 만들어 말한다면 온전히 포개지는 특이점을 향하여 온전히 쪼개려는 힘과 맞서 부단히 싸우며 나아가는 과정이 인간의 삶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 혁명에 대한 절망을 말하는 것은 온전히 쪼개려는 힘이 너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년 그 힘은 백전백승해왔습니다. 전체인 시민은 부분, 그러니까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들', '잘못된 역사 교육 받아 비정상 혼을 지닌 종북', '몸 팔아먹은 위안부'로 축소되어 백전백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헤어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참으로 아득합니다. 분명한 것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하나입니다. 각자 자신을 부분으로 인식하지 말고 전체로 인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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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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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마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산다는 것은 자신이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는 마주선 마음 존재에 먼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말을 엮고, 인격을 엮고, 삶을 엮습니다. 함께 도약합니다. 통섭입니다. 결국 마음의 존재로서 산다는 것은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것입니다.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의학의 주체는 환자 앞에 경청하는 존재로 섭니다. 병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말부터 앞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환자 자신, 그 마음을 듣는, 그래서 그 인격과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병을 확인하고 약부터, 그리고 끝내 약이나 처방하는 자는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병을 통해 사람과 삶을 만나 더 평화롭고 행복한 길을 함께 가도록 돕는 자만이 의사입니다.(51-52쪽)


남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듣는 척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대본대로 대화의 모양새를 갖추고 쇼를 했다면 그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그가 공인이라면 어찌 다루어야 할까요? 그가 최고 헌법기관이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오는 아침 대한민국 정부수반의 기자회견을 보고 드는 상념들입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이거늘······.


오직 자기 할 말만 하겠다는 것은 자기 말을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말은 말의 형태를 띤 폭력일 따름입니다. 이 사실을 본인만 모릅니다. 그 무지로 말미암아 자기가 늘 옳다는 오만은 극단을 향해 치닫습니다. 극단의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파멸의 총구가 본인을 넘어 말 공동체 전체를 겨냥한다는 데 있습니다. 폭력범 하나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말초적인 것입니다. 준엄한 관심사는 공동체 전체의 생사입니다. 공동체 전체에 들이닥치는 파멸의 파발 소리, 들리시나요. 아직 들리지 않는다면 귀를 활짝 열고 들어야 합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 아닌가요.


이른바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과 의사라는 이름으로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전자는 권력의 허영 때문이고, 후자는 전문지식의 허영 때문이라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폭력이라는 본질은 동일합니다. 저 또한 이런 함정 속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가곤 합니다. 척 보면 알고, 아는 게 옳고, 옳으니 치료하겠다는 단순무식한 관성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알아도 치료 못하는 것 또한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이 모든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해야 합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입니다.


사실 어떤 대화 공동체든 거의 반드시 혼자 자기 말만 하려 드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평범한 술자리에서조차 어떤 한 사람 목소리만 들리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요. 오늘 저녁 약속된 술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물론 그런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침묵은 폭력에 대한 비겁한 동조니까 말입니다. 듣고서 말을 제대로 내야 법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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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벽두 두 개의 막 글이 대한민국의 민낯을 전시하고 있다. 하나는 반기문이 김종필에게 보낸 편지다. 낯 뜨거운 찬사와 극존칭은 차치하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인물인 자가 모국어 초보 맞춤법을 모르고 있다니. 다른 하나는 한상진·안철수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고 쓴 방명록이다. 초등학생 필치를 방불케 하는 막 글씨와 진정성 없는 수사는 차치하자. 서울대 출신에다 바른 정치하겠다 나선 자들이 모국어 초보 맞춤법을 모르고 있다니. 대체 이 자들을 누가 여기까지 올려놓았을까. 실로 참담한 모국어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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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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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는 전통 한의학에서 하찮은, 적어도 기이한 존재(이른바 기항지부)로 밀려나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심장이 뇌와 본질이 같은 기관으로 밝혀지면서 심장-대뇌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전통 한의학의 심장 이해가 일정 정도 근거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내세울 것은 못 됩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현대 서양의 뇌 환원주의 경향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 한의학의 이런 한계는 자연스럽게 ‘한의학적 상담’이란 개념이 생겨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구조와 사건에 대해 깊고 넓게 살피고 그 병리적 현상들을 언어로써 풀어내는 치료 방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중국 문화가 말에 서양처럼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지니는 왜곡과 한계를 꿰뚫어 봄과 동시에 지나쳐서 경시하는 데까지 나가 버린 것입니다.

  도덕경 첫머리에 저 유명한 절창이 있습니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절창인 꼭 그만큼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으면 말의 행간에 있는 침묵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아, 물론 이 구절은 정반대의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 이해를 따릅니다.)(49-50쪽)


10년 전 어느 날, 제 글을 읽고 어떤 여성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글에서 영혼의 같은 결이 느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고 방송 일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얼마 뒤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제 말에서 글과는 전혀 다른 결을 느꼈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합니다. 단 몇 마디 나눈 첫 대화 이후 다시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이 기억은 이따금씩 저를 다시 찾아오곤 했습니다. 추정컨대 방송인으로서 글과 말의 일치를 당연히 여겼던 그 분은 결곡한 글과 달리 전화기를 타고 성큼 들어서는 동네 아저씨 같은 말투에 뭐랄까 실망스럽고 당황스러운 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방송은 쓰인 글대로 말하는 작업이므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담은 글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예측 불가능한 발화를 따라 그 때 그 때 다른 빛으로 감응합니다. 글과 말의 불일치는 결 다름이 아니고 빛 다름입니다. 글은 상대적으로 결이 돋을새김 됩니다. 독자를 예상한다 해도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상대적으로 빛이 돋을새김 됩니다. 듣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은 육중합니다. 빛은 경쾌합니다.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며 상담하는 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곰곰 생각에 잠깁니다. 어느 쪽이 더 나았을까? 앞으로는 어떨까?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이대로 갈만하다.’ 입니다. 고통에 찬 사람들과 마주하는 현실 상담은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의 빛깔을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겨우 마치고 도박에 미친 남편을 부양하며 악에 받쳐 살아가는 60대 여성에게 얼마나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면 화병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어머니한테 매 맞다 맞다 칼 들고 덤벼들었던 10대 소년한테 어떤 정갈하고 절제미 넘치는 말을 구사하면 간헐적 격분장애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10년 전 그 분과 빗겨간 인연이 아쉽지만 저는 글과 말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는 이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 안고 갑니다. 동네 아저씨 입에서 나오곤 하는 육두문자도 마다하지 않으며 갑니다. 말의 치유력을 낱낱이 경험하며 휘적휘적 갑니다.


말의 치유력은 발화자의 기품과 내용의 적실함 이전, 그러니까 발화 자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발화는 막힌 것을 뚫는다는, 접힌 것을 편다는, 닫힌 것을 연다는, 끊긴 것을 잇는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발화는 몸과 조건 세계가 마주하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음 사건입니다. 발화는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지는 소통 운동입니다. 말은, 그러므로, 반드시, 해야 맛입니다. 그 말맛의 진실은 본디 여여如如한 것이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의 반전反轉 해석에서 각별히 드러납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이 부분 해석에 숱한 견해와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저는 이 부분 또한 의학적 견지에서 해석을 시도하겠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비상한 도가 된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비상한 이름이 된다.’

제 뜻은 단순 명쾌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 비상한, 즉 더 이상 아픔이 아닌 아픔, 치유의 도상에 놓인 아픔이 된다는 말입니다. 표현된 아픔과 표현되지 못한 아픔이 얼마나 크게 다른가, 에 대해 이미·······알고 있는 바입니다.(『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153-154쪽)


말의 비상한extraordinary 치유력은 마치 호흡의 치유력과도 같은 이치를 따릅니다. 무심코 하는 호흡은 짧고 얕습니다. 이 자체가 병입니다. 자기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순간, 호흡은 길고 깊어집니다. 이 자체가 치유입니다. 말은 문제를 길고 깊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문제를 길고 깊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비상함의 요체입니다. 그렇게 해결은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색하고 말씀드립니다. 말은 해야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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