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사람의 생명 현상은·······몸 전체와 삶의 외부 조건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관통하는 운동이 마음입니다. 이 역동적이고 복잡계적인 사건으로서의 생명 현상을 무엇은 몸이고, 무엇은 마음이라고 갈라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무계합니다. 그러다 보니 몸 치료는 약으로, 마음 치료는 정신요법으로 한다는 이분법의 한계를 목도하게 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면서 급기야 현대 정신의학의 주관심사는 뇌신경의 문제로 이동하는 추세를 확립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질환을 뇌신경의 문제로 환원할 경우 당연히 치료 방법은 뇌신경을 조절하는 약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약회사가 의학에 공격적으로 개입합니다. 개입이 아니라 유도하고 심지어 왜곡할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 정신은 뇌의 산물이 되고, 정신 치료도 뇌 치료가 되니 몸과 마음을 그토록 철저하게 분리했던 이원론이 몸, 아니 뇌 일원론으로 붕괴되는 모순에 빠지고야 맙니다. 결국 정신의학은 뇌 의학으로 찌그러지고, 정신의 문제 중 많은 부분은 심리학의 문제로 귀속하게 됩니다.(43쪽)


오가다 한의원 대기실에 늘 틀어져 있는 TV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은 <인간극장>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홀로 두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뇌성마비 아버지 이야기 그리는 것을 잠깐 보았습니다.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기술과 실행 능력을 지녔으나 뇌성마비라는 몸 상태만을 근거로 판단한 사회가 그에게 취업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만큼은 혀를 끌끌 차지만 실제 자기 삶으로 돌아오면 우리 대부분이 마찬가지 행태를 보입니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잘못 말입니다.


일상에서 빚어지는 이런 잘못은 사회 전반의 체계적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심지어 고도한 논리, 근거에 터하여 사유하는 학문·사상 세계에서마저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어쩌면 더욱 강고하고 집요합니다. 서양 문명의 기초인 형식논리학이 낳고 키운 유구한 환원주의가 그것이고, 일극집중구조가 그것입니다. 마음이 뇌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의학의 흐름도 그 문명의 평범한 일부입니다. 전부라고 굳게 믿는 것이 치명적 결함입니다만 일정 정도 진실을 확보하고 있음 또한 명백합니다. 저들의 신앙은 무엇보다 권력과 돈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힘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심각한 고민의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정신의학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어둠의 핵심은 인공화학합성약물입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의학을 방패로 삼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만들어내는 인공화학합성약물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진실을 비틀고 인간 생명, 특히 마음에 해악을 끼칩니다. 하나는, 질병을 연구하여 약물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약물 개발이 질병을 만들어낸다는 어이없는 사실입니다. 의학논문이 제약회사의 입맛대로 그 내용을 구성하는가 하면 제약회사의 이해득실에 따라 특정 질병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기존 질병의 진단 기준이 완화되거나 강화되기도 합니다. 일반인들은 이런 진행 과정을 거꾸로 생각하거나 아예 알 수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물은 천문학적 리베이트를 매개로 의사의 손을 거쳐 이렇게 만들어진 환자에게로 투입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약물들이 거의 대부분, 좀 더 정확히는 본질적으로 치료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강제로 증상만을 억제·완화시키는 물질입니다. 이런 약물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진통제일 뿐입니다. 이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인 항우울제 프로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나마 억제·완화 효과조차 없는 경우도 항다반사입니다만 문제는 효과를 낸다 하더라도 근본 치료가 안 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 이 약물에 의존하여 생명력의 설정치set point가 낮아진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사실은 근본 치료를 계속 저지하는 상태이므로 마음 속 이야기가 봉인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한테조차 주변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의 이름으로 인간 정신을 분리·파괴하는 반인간적 공격을 당하는데도 저항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사육되는 환자 현실에서 그 누구의 그 어떤 각성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이 약물들이 종당 독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공화학합성약물, 특히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차단제blocker는 인간의 생체 진동수를 떨어뜨립니다. 생체 진동수는 가장 직접적으로 체온과 연결되므로 그것이 저하되면 체온이 떨어집니다. 체온 저하는 온갖 질병의 요인이 됩니다.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저체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는 중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아는 한, 몸의 온도와 마음의 온도는 별개의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마음의 온도가 낮아진 것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예컨대 차단제인 SSRI(선택적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가 결국은 독이 된다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진실에 눈 돌릴 수 없는 서양 정신의학의 뇌-환원주의 약물요법은 그 자체로 타락의 증언입니다. 정색하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뇌는 마음이지만 마음은 뇌가 아닙니다. 뇌를 약물로 조종해 마음병을 고치겠다는 발상은 집 온돌을 고쳐 집 주인 딸 상사병을 고치겠다는 발상과 동일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신의학이 이렇게까지 영락해버리는 동안 그 주체들의 각성과 저항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참으로 정신없는 자들의 업이 세상을 정신없는 판으로 망가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정신 차려야 할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의 핵심은 자긍심의 파괴, 자기모독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을 죄로 여깁니다. 언제나 남부터 배려합니다. 양보하고, 희생합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다 퍼주지만, 제 것을 달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 시대에서 먹잇감으로 이미 굳게 자리 매겨져 있습니다. ‘슈퍼모델 신드롬’이 횡행하는 이 ‘유명인 문화celebrity culture’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양육강식, 승자독식의 이 정글 자본주의 속에서 그가 무슨 떡고물인들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잘난 사람을 더 잘나게 만드는 정책을 개혁이라고 우기는 정치에 보대끼며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부서져 내릴까요?

  그리고 보면 우울증이란, 적어도 이 시대에는 절대다수의 숙명적인 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대80이니 10대90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1대99가 맞는 듯합니다. 99%가 서로 못나서 미안해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너무나 확실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1%가 통치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우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비우라는 말의 전제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절대다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신을 돌려주어야 진정한 비움의 세상이 도래합니다.

  ·······우울증의 영혼 속에는 이미 자율 자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무의미성 속에 잠겨 있습니다. 죽음으로서의 연명이라는 형용모순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모든 마음의 병 가운데서 오직 우울증만이 희생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명이라는 것도 필경 이 희생적 우울증 환자들의 목숨 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녕 인류가 이 문명을 지구에서 길이 보전하고자 한다면 버려지는 자들의 슬픔을 함께 짐으로써 상생의 환희를 일구어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버려진 자가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기적을 축복으로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39-41쪽)


세월호사건-중동독감사태-역사교과서 획일화-일본군성노예범죄 문제 야합으로 이어지는 현 정권의 현란 무쌍한 고의적 실정은 실로 점입가경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허언과 훈계입니다. 발을 뗐다 하면 독재 회귀와 영구집권의 길입니다. 요즘은 일본군성노예범죄 야합을 두고 자화자찬 놀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피해자 몰래 가해자에게 무릎 꿇어놓고도 적반하장의 윽박지르기를 자행합니다. 정권의 마름 노릇을 하는 이른바 엄마부대의 광기가 가히 가관입니다. 일본군성노예범죄 피해자 할머니들한테 ‘강한 나라 만들기 위해 희생하라.’ 강요했다니 말입니다. 대체 어떤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까. 그 강한 나라는 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대체 무슨 희생을 더 하라는 말입니까. 정말 희생이 필요하다면 여태까지 희생 없이 무임승차한 엄마부대가 희생해야 할 차례 아닙니까. 엄마부대 대표라는 주 아무개는 자기 딸이 일본군성노예범죄 피해자였더라도 일본을 용서했을 것이라 했답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의 진정한 조국이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는 엄마도, 여성도,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물건들이 한국사회를 멸망의 비탈길로 밀고 있습니다. 망하면 저들은 떠나겠지요, 저들의 조국으로. 참담무인지경입니다.


저들이 기왕에 희생을 입에 담았으니 희생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희생은 건강한 자발성에서 나온 것일 때에만 가치로 자리매길 수 있습니다. 강요된 것은, 그러니까 희생되는 것은 살해당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강요된 희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직접적·명시적 강요에 따른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희생의 강요는 범죄에 해당합니다. 수탈, 그러니까 강도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런 짓을 할 권리를 지닌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한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될 약속이며 규범입니다. 오늘 여기 그 근간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국가가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놓고. 더군다나 나라 팔아먹은 매판세력의 상속자들이 권력을 잡고 남용하여 식민지 치하 성노예범죄에 희생된 여성들을 다시 한 번 팔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청와대 2016신년인사회에는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대형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 짓을 웃으며 자행합니다. 이 1%의 떼강도가 국가 전체, 그러니까 99%를 희생양으로 잡고 곳간을 채웁니다. 국가 공동空洞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의 희생은 간접적·암시적 강요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울증이라 부르는 바로 그 병리 상태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스스로 눈빛을 거두고 희생, 그러니까 죽음을 삶 깊숙이 들여놓습니다. 스스로. 스스로 말입니다. 정색하고 묻습니다. 우울증 앓는 사람의 이 자발성이 과연 진짜 자발성일까요? 물론 아무도 희생 자체를 강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신!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희생하면 착하다고 칭찬해줍니다. 거부할 수 없는, 거절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훨씬 더 교묘하고 사악한 강요입니다. 이것의 결과를 우리는 편하게 병이라 부릅니다. 쟤, 우울증이라나 봐! 개인 문제로 환원시킵니다. 성격 탓, 정신력 탓으로 돌립니다. 죄의식 없이 그들을 착취합니다. 그들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내 행복의 감수성을 갈고닦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행복감의 가속도를 높여주면서 그들은 시나브로 죽어갑니다. 그들의 주검을 ‘사뿐히 즈려밟고’ 행복한 사람은 안철수를 정치하며, 백종원을 먹고, 황정민을 봅니다. 여행과 시와 음악의 기품 있는 정서로 배어듭니다. 행복한 사람의 행복은 결코 행복한 사람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까맣게 모른 채 피둥피둥 살다가 도살됩니다. 인간이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게 행복을 준 희생의 사람을.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리미 2016-01-0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는 글입니다. 이미 비어버린 사람에게 자신을 비우라는 힐링처방은 아무 소용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죠. 내 행복은 남의 목숨값이다!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bari_che 2016-01-08 10:4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내 행복이 남의 목숨값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더욱 더 행복을 수탈하는 모범을 지배층이 앞장서서 보여주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희생을 강요받아 이미 비어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손 잡는 슬픔의 연대만이 이런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연대는 잊지 않음에서 출발합니다.

2016-01-09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것으로 세계를 사물화한 이 문명·······은 심지어 마음조차 뇌에 가두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뇌를 포함한 우리 몸 전체가 삶의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사건·운동doing이지 뇌의 산물being이 아닙니다. 몸 문명이 내다버린 마음은 무한히 생성하고 변화하는 자유로서의 생명 현상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복원은 자유의 복원입니다.·······

  몸 문명이 함부로 다룬 마음 문제 가운데 가장 소홀히 여긴 부분이 마음의 병을 인식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의 병을 미친 것으로 몰아버리는 인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정신병자라는 용어 자체가 욕설로 쓰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치료 또한 약으로 뇌신경을 조절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정신과의사가 정신을 치료한다기보다는 뇌라는 몸의 일부를 치료하는 존재임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몸 문명이 심신이원론에 터 잡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마음을 몸의 하부단위로 여긴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38쪽)


18세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소년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경멸감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특정 동물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저를 자기 자신의 탐욕을 투입하면 행복이 튀어나오는 자판기로 여깁니다.”


소년은 현재 정신과 양약을 하루에 네 알 씩 먹고 있습니다. 조현병(정신분열증), 발작Seizure, 양극성장애, ADHD, 행동장애 등의 증상을 억제하는 약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진단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복·과다 처방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심지어 상충되는 약물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간취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가 소년을 대하는 자세와 정신과 양의사가 소년을 대하는 자세가 두 가지 점에서 일치한다는 바로 그것. 소년의 마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가 그 하나입니다. 소년의 뇌에 뭔가를 입력하면 기계적으로 뭔가가 출력된다, 가 다른 하나입니다.


소년은 기본적으로 영특합니다. 휴머니스트 자질을 지녔습니다. 이런 아들을 정신장애 상태로 몰아넣고도 자기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하는 어머니도, 그 곡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학합성약물이나 ‘집어넣는’ 의사도 소년의 마음 진경을 들여다볼 생각이 도통 없습니다.


소년의 삶과 고통, 그리고 치유 과정에 소년 자신은 빠져 있습니다. 소년의 내러티브에 소년은 없습니다. 어머니와 의사는 ‘따로 또 같이’ 소년의 마음을 몸, 그러니까 뇌에 묶어 사물화해 놓고 그것을 착취합니다. 사랑과 양육의 이름으로. 의학과 치료의 이름으로.


소년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돈으로 그의 날개를 묶어 놓습니다. 소년은 정신과 의사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로 그의 날개를 묶어 놓습니다.


소년은 어머니가 밥을 해주지 않아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왔다며 배가 고프다고 했습니다. 저는 자주 가는 소박한 백반 집으로 소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진짜 ‘엄마 밥’이라 감격하며 맛있게 먹는 소년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습니다. 정녕 이 시대가 마음의 시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날선 각성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습니다. 소년을 보내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용마산 머리 위에 오리온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싸늘한 밤공기가 등을 떠밀었습니다. 옳지, 따뜻한 골목 카페에서 등 기대고 앉아 맛난 술 한 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흔히 받는 질문입니다.

  “한의사가 정말 우울증을 고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는 많은 뉘앙스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한의학과 한의사에 대한 경시, 우울증은 양의에서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정신질환이라는 고정관념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겠지요.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양의사가 정말 ‘화병火病’을 고칠 수 있습니까?”(34쪽)


40대 여성 한 분의 우울증을 상담과 한약으로 치료하는 중입니다. 친정어머니가 계속해서 다른 의사, 그러니까 양의사를 알아보고 그리로 옮길 것을 종용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의사가 무슨 우울증 치료냐? 게다가 상담은 또 뭐고·······.” 물론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닙니다. 사기꾼이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환불해주지 않을 경우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하겠다며 한의원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 여성은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분명히 감지하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치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디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많은 한의사들이 허약한 사람 약점 잡아 보약이나 팔아먹는 장사꾼 아니면, 삐었을 때 발목에 침이나 놓아주는 쟁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취급당해도 싼 자들이 없지 않으니 민망한 노릇입니다만, 사실은 일제식민지와 미군정을 거치면서 양의사의 변방 개념으로 자리 매겨진 것이 근본 원인입니다. 이 문제는 법률의 개정과 보건의료체계의 개혁을 통해 반드시 국가 차원에서 바로잡아야 할 중대 사안입니다. 지금처럼 매판세력이 지배하는 한 난망합니다. 그러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의학이 구한 말 이 땅에 상륙하여 식민화가 시작된 이래 엘리트층이 지속적으로 그 의학의 추종 세력이 되면서 수천 년 내려온 자주적인 국민보건의료 전승은 주변부 담론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식민지 의식은 제국 본토보다 더욱 극단화되기 마련입니다. 이 땅의 양의사들은 심지어 “한의사들이 열등감으로 아무리 우리를 흉내 내도 결코 의사가 될 수는 없다.”고까지 막말을 합니다. 이런 흐름이 일반 시민에게까지 내재화되어 한의사가 무슨 우울증을 고치냐는 반응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심리상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나 서양의학은 보편의학이 아닙니다. 하나의 의학 패러다임일 뿐입니다. 서양의학만 과학인 것이 아닙니다. 이 또한 하나의 과학 패러다임일 뿐입니다. 근거 없는 오만으로 양의사들 중 다수가 아무리 폄훼해도 한의학이 수천 년 동안 조선문명을 지탱해온 기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의학을 미신이라 하는 그들이 도리어 서양의학이 하나의 변종 종교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서양 정신의학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폴 몰로니는 『가짜 힐링』에서 다음과 같이 냉엄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은 그 근간에서 과학적으로 (어쩌면 윤리적으로도) 이미 파산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모습의 정신의학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사회적 권력의 끄나풀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거대한 음모의 산물이다.”


‘음모의 산물’에 신앙을 바치는 것이 수천 년 전승을 존중하는 것보다 얼마나 쉬웠는지 100년 남짓한 시간에 이토록 상전벽해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이명박 이후 매판세력의 준동이 더욱 어지러워진 나라 상황 전체의 빛에서 살펴보면 서양 정신의학 종사자들이 우리 마음의 식민화에 충실히 부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프로이트든 프로작이든 서양 이론의 침대에 마음을 묶고 거기에 맞추어 다리를 늘이거나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스 의료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듯 신식민지 상태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미국 정신의학 협회는 종주국다운 작업을 하나 했습니다. 1996년 화병火病을 문화관련 질환으로 DSM(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에 등재하고 이름을 한국어 기원 로마자로 Hwabyeong이라 표기했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그들을 추종하는 한국의 정신과 양의사들이 화병 치료를 자기 영역 밖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체 이 병을 어떻게 치료할까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우울증 치료하는 한의사에게 적어도 이런 궁금해 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지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요구와 거절을 못함

이것은 거래 정서로서 ‘뻔뻔함’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뻔뻔함이란·······당당하게 거래하는, 밀고 당기는 타협에서 밀리지 않는 힘과 자세를 가리킵니다.·······‘봉’ 노릇 하지 않는 내면의 힘이지요.·······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자기 파괴의 비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요구가·······대등한 소통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거절이········상호 자율적 개체로서 사는 힘을 북돋우기도 한다는 사실을·······(감지해야 뻔뻔해집니다.-인용 시 문맥상 첨가-)(21-22쪽)


20대 후반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본디 우울증이 있는데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잠적해버려 창졸간에 마음과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고 합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저는 20대 초반, 1년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무남독녀 외동딸인 제가 친척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홀로 장례를 포함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홀연히 초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저를 다독이며 헌신적으로 수습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중단했던 제 학업도 다시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논문을 쓰는 과정까지 희생에 가까운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도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주셔서 결혼을 약속하고 집까지 마련했습니다. 제 삶이 이렇게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안정을 찾자 비로소 그는 미루었던 군복무를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제대하면 결혼식을 올리자 하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습니다. 이 가벼운 발걸음이 나중에 너무나 무거운 변화를 몰고 돌아올 줄 그 때는 몰랐습니다.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전혀 알 지 못합니다. 제대하자마자 저와 그의 부모님 앞에서 그는 돌연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더 이상은 이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질문 하나로 남은 그 선하고 슬픈 눈망울이 8년 지난 지금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대의 남자친구는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사는 동안 서서히 영혼이, 그 내면의 힘이 소진되어갔을 것입니다. 자기 요구와 거절을 봉인하고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몰두함으로써 그의 실존은 공동空洞이 되고, 존재는 형해形骸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無에 묻혀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 찰나 그는 가차 없이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찾도록 놓아주십시오. 그 놓음이 기다림일지 포기일지는 천천히 그대가 결정하십시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여자 친구를 보살피는 동안 자기 자신의 우울증이 한 없이 깊은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는 사실을 아마도 여자 친구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어떤 경로를 통해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결별의 방식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 그 결단은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남자 친구 희생 덕분에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그 여성이라면 그가 최선을 다해 내린 결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 뒤 어찌 되었는지 알 지 못합니다. 상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그 여성의 눈망울만큼은 적어도 비관적이지 않았으니 두 사람 다 잘 견뎌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남에게 자기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말하고, 남이 자기 자신에게 해오는 요구를 당당히 거절하는 정서적 에너지, 그 건강한 뻔뻔함은 인간 존재를 지키는 처음 힘이자 마지막 힘입니다. 뻔뻔하게 소통해야 제대로 된 평등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제대로 된 평등 소통이 이루어져야 각자는 옹골찬 자율 개체로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구와 거절이 시드는 곳에 우울증이 무성히 자랍니다. 우울증이 무성히 자라나는 사회는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사회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사회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거절이 압살당하고 있습니다. “가만있으라.”고 질타만 하는 통치가 백전백승하고 있습니다. 병신년 벽두에 화두 하나 듭니다.


“오늘 이 국민의 가만있음, 그러니까 숨죽임은 과연 기다림인가, 포기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