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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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타협하는 수완을 발휘하지 못함

이것은 현실적인 거래 기술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현실에서 타협과 수완이란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목입니다.·······주제넘은 도덕성과 진정성이란 허상, 남달리 올바르고 깨끗하다는 자의식에 발목이 잡혀 앞에서는 늘 큰 이상론으로 자기 위상을 세우고 뒤로는 작은 실행의 착오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식의 삶·······타협과 수완이라는 삶의 전략적 측면을 오래 내버려 두어 거칠어진 묵정밭으로 남기는 삶은 결국 자기 자신과 이웃을 파리하게 만들고야 만다는 사실·······올바름이 까칠함으로, 순수함이 순진함으로, 착함이 약함으로 귀결된 다음에야 (오는-인용 시 문맥상 첨가-) 뼈저린 각성·······.(20-21쪽)


제가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은 10대의 10년뿐이었습니다. 이 10년 동안 아버지의 불우한 삶에 휩쓸리면서 저는 뼈저린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 한가운데 절대빈곤이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한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시간들이 촘촘히 박힌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번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늘 무엇인가 새로운 기획을 하곤 했습니다. 기획들은 백발백중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기획들이 지나치게 이상적·도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구체적 타협을 이루어내는 수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원인은 서로 부추기며 작동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숱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제 삶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의 삶이 제게서 재현되는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일정 부분 재현된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저 자신과 아내, 그리고 딸아이가 고통 받은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일정 부분 극복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저 자신과 아내, 그리고 딸아이가 고통에서 벗어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모순이 공존하는 삶의 시간들은 아직도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타협과 수완이 얼마만큼 어떻게 발휘되면 모두 고통 없이 살 수 있을지 아마도 죽는 그 순간까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모르는 채 극진히 간절히 살아갈 따름입니다.


냉엄한 현실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므로 타협이 불가피합니다. 타협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므로 수완을 불가결의 요건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인간의 보편적 조건입니다. 타협과 수완의 생산성은 한 인간의 자기신뢰의 토대입니다. 한 인간에게 자기신뢰는 삶을 지속하게 하는 근원적 동력입니다. 그 동력을 상실한 상태에 우리가 붙이는 이름이 다름 아닌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다만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둔 고통입니다. 결핍되면 이 준엄한 고통의 소인일 수 있는 타협은 그러므로 협잡이 아닙니다. 수완은 그러므로 술수가 아닙니다.


타협과 수완은 건강한 거래 기술입니다. 거래는 관계의 본질입니다. 관계로서 인간은 각기 타당한 서로 다른 요구를 지니고 상대방과 마주합니다. 서로 다르므로 밀고 당깁니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아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는 더욱 거래에 능해야 합니다. 권력은 이런 국가적 거래를 위해 위임된 힘입니다. 대한민국 권력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자기 국민에게 고통을 가하는 병적인 거래를 외국과 해놓고도 도리어 그 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위안부 타결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신식민지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고통 받은 국민에게 다시 고통을 주는 권력은 회수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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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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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지 못함

이것은 건강한 인생 거래의 주체로서 지녀야 할 회색 정체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회색 정체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넓고 좁음 사이, 높고 낮음 사이, 부드럽고 뻣뻣함 사이, 받아들임과 내침 사이, 거둠과 버림 사이에 유장한 균형, 어른다운 절제, 아름다운 화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순의 대립적 불연속만 있을 뿐 공존적 연속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역량이 두 극단 사이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0쪽)


거의 10년 다 돼가는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오릅니다. 어떤 방송작가와 우울증 때문에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하여 누구보다 예민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병명만을 말하고 약 처방을 해줄 뿐 어떤 양의사도 그가 지닌 우울증의 기전과 특성을 명확히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남다른 감수성은 이 점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리저리 길을 찾다가 웬 변방 한의사가 우울증 상담 치료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작가답게 실팍한 묘사들을 통해 살아온 이야기와 마음의 풍경들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시간 남짓 경청했습니다. 이야기를 일단 매듭지으며 그는 맑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눈에 대고 딱 한 마디 했습니다.


“평범하지 못함!”


제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중심시각을 확 풀어버렸습니다. 극히 기민하게 내면으로 잠겨들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손뼉을 딱! 하고 쳤습니다.


“정확하시네요!”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왜 양의사들이 그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사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서양의학에는 이런 어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의학 너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 그러니까 비범하다는 것과 다릅니다.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은 평범함에 간직된 건강의 진실을 전제하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평범함에 간직된 건강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양극단의 기계적 교차가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동적 중도中道가 끊임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중도의 역동성은 화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화쟁은 곡진한 소통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곡진한 소통은 평등을 전제합니다. 평등은 평범함에 터합니다. 평범함은 죽어도 지켜야 하는 무엇, 죽어도 버려야 하는 무엇을 지니지 않기에 언제나 변화를 받아 안는 삶의 기조입니다. 언제나 변화를 받아 안는 삶의 기조는 다름 아닌 무상無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울증에 침륜되면 흐물흐물한 마비 상태에 처합니다.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일 수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초적 양극단이 그 사이에 깊은 슬픔과 절망의 심연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오가지 못합니다. 괴괴합니다. 변화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오직 극단은 각각의 극단에서 칼을 물고 대치할 따름입니다.


우울증의 이런 내밀한 진실을 가리고 싶은 서양의학은 화학합성약물을 들이밉니다. 같은 원리가 작동됩니다. 세월호사건의 정치적 진실을 감추고 싶은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은 보상금을 들이밉니다. 이른바 위안부 문제 타결로 식민지 본질을 위장하고 싶은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도 보상금을 들이밉니다. 똑같은 협잡입니다.


정답이 없지 않습니다. 분명코 있습니다. 오직 하나.


“평범함에 깃들라!”


우울증, 지나갑니다. 권력, 지나갑니다. 돈, 지나갑니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흐름에 맡겨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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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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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우울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울증은 땅거미가 황혼녘의 누리를 덮듯이 우리 사회 전반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사회 어떤 계층, 어떤 부류의 사람도 우울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만 깜짝 놀라다가 곧 잊어버리는 습관을 되풀이할 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도, 사회적 여론이나 국가적 관심사로 발전시키지도 않습니다.(11-12쪽)


경기도 안산. 그중에서도 고잔1동, 와동, 선부3동. 세월호사건 때 죽임을 당한 250명 아이들 가운데 무려 204명이 이 세 동네 아이들입니다. 사건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거리에서는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주민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자기 아이가 죽지 않았어도 슬픔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동네는 그 자체로 우울증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 동네들에 희망이 번져가고 있다 합니다. 스스로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힘으로, 유족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물경 39개의 ‘희망 씨앗’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있는 동안 권력은 외면과 기만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무리 권력의 속성이라고는 하나 도를 넘은 협잡입니다.


어디 안산뿐이겠습니까. 불의한 권력과 부도덕한 언론이 짜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시간들을 거짓과 조작으로 엮어 생중계를 해댔으니 가히 온 국민이, 온 나라가 우울증에 휘말렸을 것임은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의당 국가가, 통치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가하고 발뺌하고 외려 비아냥댔습니다.


국가 우울증 상태로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고 경제는 침체일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미 쇠락이 시작되었던 골목상권은 빠른 속도로 형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서둘러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 참담한 죽음들은 시나브로 잊히고 있습니다. 국가는 안도하고 노예사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 말고는 다 죽습니다. 정녕 살고자 한다면 그들이 파놓은 각자도생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저 ‘고와선(고잔동·와동·선부동)’ 자생 공동체 운동을 귀감으로 삼아 함께 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녕 살고자 한다면 위대한 영웅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도움을 청하고 일어나 손을 잡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연대해야 합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 사회는 의료인 한 사람이 우울증 앓는 한 사람을 치료하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울증은 실로 공공 현상입니다. 그 치료는 그러므로 공공 어젠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 어젠다의 핵심은 정치 과정입니다. 정치적 치료 없이 세월호사건, 나아가 국가 우울증 상태의 치료는 없습니다. 권력이 한사코 거부한다면 그 권력을 침몰시켜야 합니다.


싸움은 힘겨울 것입니다. 오래 갈 것입니다. 힘겹고 지루한 싸움에서 이기려면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치지 않으려면 기억을 공유해야 합니다. 기억을 공유하려면 자꾸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러티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을 끊임없이 확산시켜야 합니다. 그 내러티브가 공공의 텍스트가 되는 순간 싸움은 끝납니다. 이름 없이 빛 없이 견디고 감내해야 합니다.


이 글이 끝날 무렵 오랫동안 우울과 불안 문제로 상담을 하고 있는 청년이 제게 올 것입니다. 저는 그와 다양한 내러티브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이야기도 거기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시민으로 태어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여기서 자유롭다 믿는 자, 그는 아마 가금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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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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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어머니와 생이별한 지 50년도 훨씬 넘어 이제는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제게 삶이란 언제 어느 때에도 늘 변방이었습니다. 심지어 저 자신에게서도 변방이었습니다. 어머니 사랑이 누락된 인간은 숙명적으로 거기 그렇게 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도 타자에 대한 사랑도 실은 어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방의 사람에게 결핍과 상실로 말미암은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고통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변방의 사람에게는 중심의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인식론적 특권이 축복으로 주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감지하는 인식능력입니다. 변화는 언제나 변방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세계의 본령이므로 변방의 사람은 세계의 본령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니 그 자신이 변화입니다.


이 숭고한 축복은 참혹한 고통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칭이 건강한 균형을 유지할 때 변방은 중심을 부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건강하게 균형 잡힌 변방 사람은 중심이 텅 비어 있다는 진실을 꿰뚫어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균형을 잃어 아픈 변방 사람은 중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픈 이의 눈에는 중심이 가득차고 견고한 실체로 보입니다. 그는 다급하고 엄숙하게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겁먹은 개가 크게 짖는 이치에 닿아 있습니다.


고백컨대 저 또한 오랜 세월 겁먹은 개처럼 살아왔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안녕, 우울증』의 부제입니다. 여기 변방의 한의사와 여성우울증의 중심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심메트리는 ‘쏘다’라는 겁먹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졸지에 병색이 짙어져버렸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쏘다’를 ‘감싸다’로 바꿉니다. 중심은 텅 비어 있으므로. 감싸는 것이야말로 변방 사람의 진정한, 유일한 행동이므로.


변방 사람으로서 텅 빈 중심을 감싼 저 장엄 스승 예수 나신 날, 오늘. 오늘 저는 예수의 울음을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웃음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의 울음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의 울음 감수성은 인간의 고통에 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세상의 변방에서 일어납니다. 고통이 일어나는 변방이기에 거기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울음은 변화의 신호입니다. 변혁의 격문입니다. 혁명의 선포입니다. 제게도 작은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50여년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곧 바로 눈시울이 젖어들던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꽃별이 된 아이들 250명을 생각하면 어머니 생각할 때보다 더 빨리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예수의 울음을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울음 대신 자본의 웃음만이 낭자한 이 땅의 교회를 직시합니다. 시민의 울음을 외면하고 자신의 웃음만 향락하는 권력을 직시합니다. 가만히 제 깜냥의 이 말을 어루만져봅니다.


-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감싸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아스라이 들리던 노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크게 울려 퍼집니다.


"아프다, 구주 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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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깨나 밴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남이 쓴 책을 읽는 것이다. 몇 줄 눈으로 훑으면 대강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앞 부분만 들추어보고는 밀어둔 책이 책상 위에 쌓이기 마련이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마지못해 집어 읽어보면, 어허! 하는 구석이 나온다. 인사동 어느 뒷골목 어느 건물 뒷벽에 널린 시래기를 문득 발견하듯. 더 큰 진실도 그렇지 않은가.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비아냥거렸던 나사렛에서 예수가 나셨으니 말이다. 오늘 성탄 전야. 예수를 궁금해 하며 나사렛으로 가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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