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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안녕, 우울증?
안녕, 우울증!
그렇습니다. 『안녕, 우울증』이라는 책 이름에는, 맞이하는 “안녕, 우울증?”과 떠나보내는 “안녕, 우울증!”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칭하는 두 풍경을 품은 이 중의법에 『안녕, 우울증』의 요체가 녹아 있습니다.
「안녕, 우울증?」
이 책이 나올 때와는 사뭇 달리, 이제는 우울증에 관해 몇 마디 말쯤 못하는 사람 거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울증을 마냥 남 일이라고만 생각하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등공신은 통속한 상업언론입니다. 저들에게 팔린 범 치유집단, 그러니까 정신과 의사에서 연예인까지 부박한 쪼가리 지식 들고 나와 멘토, 힐러 놀이 한 무리가 이등공신입니다. 이 통속화가 나쁘기만 할 리 없음은 물론입니다. 문제는 이 통속화가 우울증의 본령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저 통속한 자들이 우울증을 맞이하는 근본 태도는 무엇일까요? “안녕, 우울증?”일까요? 아닙니다.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우울증, 치워!” 다른 하나는 “우울증, 따위!”
“우울증, 치워!”는 “안녕, 우울증?”과 달리 우울증을 사물로 바라본 것입니다. 눈을 맞추는 상대방이 아닙니다. 우울증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우고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우울증, 슬픔인 거 맞습니다. 기쁨으로만 살겠다는 것은 미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어둠인 거 맞습니다. 빛만으로 살겠다는 것은 생명이기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하여 『안녕, 우울증』은 우울증을 2인칭으로 대우합니다. 『안녕, 우울증』은 우울증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우울증, 따위!”는 “안녕, 우울증?”과 달리 우울증을 하찮게 본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 운운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꼬드김에 말려 약만 먹으면 쉽게 낫는다는 마케팅 처방을 퍼뜨립니다. 긍정의 힘을 믿으면 문제없다고 전도합니다. 강아지를 키우면 좋다고 싸구려 위로를 건넵니다. 마냥 엉터리일 리 없음은 물론입니다. 문제는 이런 정도로 해결될 우울증이라면 처음부터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가능한 한 빨리 쉽게 치우면 되는 하찮은 물건 따위가 아닙니다. 그가 다가오면 이렇게 맞아야만 합니다. “안녕, 우울증?”
「안녕, 우울증!」
우울증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울증을 우울증인 채로 모셔놓겠다는 것과 다릅니다. 우울증은 명백히 질병입니다. 질병은 치유가 불가피합니다. 우울증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의 관건적 중요성은 치유의 성격과 방향이 이 태도에서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치유의 성격과 방향은 치유의 한계, 그리고 그 이후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우울증이 끝내 다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면 어찌 할 것입니까. 가령 어떤 사람에게 우울증이 다 치유되었다 믿고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찌 할 것입니까. 우울증을 치유하는 것이 삶에서 우울이라는 근본 범주를 완전히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면 우울증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하찮은 물건을 치워버리는 마음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안녕, 우울증?”은 “안녕, 우울증!”과 맞은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로 만날 숙명 속에 있습니다.
“안녕, 우울증!” 하며 우울증을 일단(!) 떠나보낼 때, 우리는, 그러므로 “안녕, 우울증?” 할 때를 떠올립니다. 아파서 소중한. 불편해서 반가운. 도저한 역설. 역설의 울림은 “안녕, 우울증!”이라 할 때, 메아리가 됩니다. 홀가분해서 그리운. 상처이기에 감사한. 다시 찾아오면 반가울 것입니다. 흔쾌히 “안녕, 우울증?” 인사합니다. 영영 떠났으면 아쉬울 것 없습니다. 흔쾌히 또 한 번 “안녕, 우울증!” 인사합니다. 우울증이 떠난 자리에는 삶에게 천명으로 주어진 우울, 그러니까 아프지만 괴롭지 않은 기품이 날듯 묵직이 앉아 있을 터이므로.
『안녕, 우울증』
그렇습니다. 이 책은 5년 전, 제가 쓴 것입니다. 주해annotation 리뷰가 그렇듯 또 한 번 생경한 놀이를 해보려 합니다. 자기 자신이 쓴 책에 스스로 입대는.
두 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월호사건. 그 이후 달라진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시민, 그 중에서 마음 어루만지는 의자醫者로서 이 책을 다시 쓴다면 무슨 내용을 담을까? 그 고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연. 이 책은 이를테면 ‘워스트셀러’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책을 어디선가 읽고 저를 찾아오시는 마음 아픈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 가운데 이 책의 불친절함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문제 때문에 출판이 거절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런 짓을 하려 함이 아닙니다. 인연에 대한 모심의 자세를 배우고자 함입니다.
책을 다시 쓰는 마음으로, 참회의 심정으로 발맘발맘 가보겠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