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어머니와 생이별한 지 50년도 훨씬 넘어 이제는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제게 삶이란 언제 어느 때에도 늘 변방이었습니다. 심지어 저 자신에게서도 변방이었습니다. 어머니 사랑이 누락된 인간은 숙명적으로 거기 그렇게 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도 타자에 대한 사랑도 실은 어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방의 사람에게 결핍과 상실로 말미암은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고통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변방의 사람에게는 중심의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인식론적 특권이 축복으로 주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감지하는 인식능력입니다. 변화는 언제나 변방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세계의 본령이므로 변방의 사람은 세계의 본령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니 그 자신이 변화입니다.


이 숭고한 축복은 참혹한 고통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칭이 건강한 균형을 유지할 때 변방은 중심을 부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건강하게 균형 잡힌 변방 사람은 중심이 텅 비어 있다는 진실을 꿰뚫어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균형을 잃어 아픈 변방 사람은 중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픈 이의 눈에는 중심이 가득차고 견고한 실체로 보입니다. 그는 다급하고 엄숙하게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겁먹은 개가 크게 짖는 이치에 닿아 있습니다.


고백컨대 저 또한 오랜 세월 겁먹은 개처럼 살아왔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안녕, 우울증』의 부제입니다. 여기 변방의 한의사와 여성우울증의 중심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심메트리는 ‘쏘다’라는 겁먹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졸지에 병색이 짙어져버렸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쏘다’를 ‘감싸다’로 바꿉니다. 중심은 텅 비어 있으므로. 감싸는 것이야말로 변방 사람의 진정한, 유일한 행동이므로.


변방 사람으로서 텅 빈 중심을 감싼 저 장엄 스승 예수 나신 날, 오늘. 오늘 저는 예수의 울음을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웃음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의 울음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의 울음 감수성은 인간의 고통에 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세상의 변방에서 일어납니다. 고통이 일어나는 변방이기에 거기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울음은 변화의 신호입니다. 변혁의 격문입니다. 혁명의 선포입니다. 제게도 작은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50여년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곧 바로 눈시울이 젖어들던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꽃별이 된 아이들 250명을 생각하면 어머니 생각할 때보다 더 빨리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예수의 울음을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울음 대신 자본의 웃음만이 낭자한 이 땅의 교회를 직시합니다. 시민의 울음을 외면하고 자신의 웃음만 향락하는 권력을 직시합니다. 가만히 제 깜냥의 이 말을 어루만져봅니다.


-변방의 남성 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감싸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아스라이 들리던 노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크게 울려 퍼집니다.


"아프다, 구주 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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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깨나 밴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남이 쓴 책을 읽는 것이다. 몇 줄 눈으로 훑으면 대강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앞 부분만 들추어보고는 밀어둔 책이 책상 위에 쌓이기 마련이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마지못해 집어 읽어보면, 어허! 하는 구석이 나온다. 인사동 어느 뒷골목 어느 건물 뒷벽에 널린 시래기를 문득 발견하듯. 더 큰 진실도 그렇지 않은가.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비아냥거렸던 나사렛에서 예수가 나셨으니 말이다. 오늘 성탄 전야. 예수를 궁금해 하며 나사렛으로 가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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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안녕, 우울증?

안녕, 우울증!


그렇습니다. 『안녕, 우울증』이라는 책 이름에는, 맞이하는 “안녕, 우울증?”과 떠나보내는 “안녕, 우울증!”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칭하는 두 풍경을 품은 이 중의법에 『안녕, 우울증』의 요체가 녹아 있습니다.


「안녕, 우울증?」


이 책이 나올 때와는 사뭇 달리, 이제는 우울증에 관해 몇 마디 말쯤 못하는 사람 거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울증을 마냥 남 일이라고만 생각하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등공신은 통속한 상업언론입니다. 저들에게 팔린 범 치유집단, 그러니까 정신과 의사에서 연예인까지 부박한 쪼가리 지식 들고 나와 멘토, 힐러 놀이 한 무리가 이등공신입니다. 이 통속화가 나쁘기만 할 리 없음은 물론입니다. 문제는 이 통속화가 우울증의 본령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저 통속한 자들이 우울증을 맞이하는 근본 태도는 무엇일까요? “안녕, 우울증?”일까요? 아닙니다.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우울증, 치워!” 다른 하나는 “우울증, 따위!”


“우울증, 치워!”는 “안녕, 우울증?”과 달리 우울증을 사물로 바라본 것입니다. 눈을 맞추는 상대방이 아닙니다. 우울증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우고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우울증, 슬픔인 거 맞습니다. 기쁨으로만 살겠다는 것은 미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어둠인 거 맞습니다. 빛만으로 살겠다는 것은 생명이기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하여 『안녕, 우울증』은 우울증을 2인칭으로 대우합니다. 『안녕, 우울증』은 우울증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우울증, 따위!”는 “안녕, 우울증?”과 달리 우울증을 하찮게 본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 운운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꼬드김에 말려 약만 먹으면 쉽게 낫는다는 마케팅 처방을 퍼뜨립니다. 긍정의 힘을 믿으면 문제없다고 전도합니다. 강아지를 키우면 좋다고 싸구려 위로를 건넵니다. 마냥 엉터리일 리 없음은 물론입니다. 문제는 이런 정도로 해결될 우울증이라면 처음부터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가능한 한 빨리 쉽게 치우면 되는 하찮은 물건 따위가 아닙니다. 그가 다가오면 이렇게 맞아야만 합니다. “안녕, 우울증?


「안녕, 우울증!」


우울증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울증을 우울증인 채로 모셔놓겠다는 것과 다릅니다. 우울증은 명백히 질병입니다. 질병은 치유가 불가피합니다. 우울증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의 관건적 중요성은 치유의 성격과 방향이 이 태도에서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치유의 성격과 방향은 치유의 한계, 그리고 그 이후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우울증이 끝내 다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면 어찌 할 것입니까. 가령 어떤 사람에게 우울증이 다 치유되었다 믿고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찌 할 것입니까. 우울증을 치유하는 것이 삶에서 우울이라는 근본 범주를 완전히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면 우울증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하찮은 물건을 치워버리는 마음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안녕, 우울증?”은 “안녕, 우울증!”과 맞은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로 만날 숙명 속에 있습니다.


안녕, 우울증!” 하며 우울증을 일단(!) 떠나보낼 때, 우리는, 그러므로 “안녕, 우울증?” 할 때를 떠올립니다. 아파서 소중한. 불편해서 반가운. 도저한 역설. 역설의 울림은 “안녕, 우울증!”이라 할 때, 메아리가 됩니다. 홀가분해서 그리운. 상처이기에 감사한. 다시 찾아오면 반가울 것입니다. 흔쾌히 “안녕, 우울증?” 인사합니다. 영영 떠났으면 아쉬울 것 없습니다. 흔쾌히 또 한 번 “안녕, 우울증!” 인사합니다. 우울증이 떠난 자리에는 삶에게 천명으로 주어진 우울, 그러니까 아프지만 괴롭지 않은 기품이 날듯 묵직이 앉아 있을 터이므로.


『안녕, 우울증』


그렇습니다. 이 책은 5년 전, 제가 쓴 것입니다. 주해annotation 리뷰가 그렇듯 또 한 번 생경한 놀이를 해보려 합니다. 자기 자신이 쓴 책에 스스로 입대는.


두 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월호사건. 그 이후 달라진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시민, 그 중에서 마음 어루만지는 의자醫者로서 이 책을 다시 쓴다면 무슨 내용을 담을까? 그 고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연. 이 책은 이를테면 ‘워스트셀러’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책을 어디선가 읽고 저를 찾아오시는 마음 아픈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 가운데 이 책의 불친절함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문제 때문에 출판이 거절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런 짓을 하려 함이 아닙니다. 인연에 대한 모심의 자세를 배우고자 함입니다. 


책을 다시 쓰는 마음으로, 참회의 심정으로 발맘발맘 가보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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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 읽는데 

눈물이 떨어진다.

시 둘 읽는데

눈물이 번져간다.


시집을 덮는다.


얼마나 울면

몇 번이나 덮으면

이 시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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