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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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존재하는 것은 신과 씨름하는 것이다.(338쪽)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339-340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32장에는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 에서의 굶주림을 약점 잡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취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족을 먼저 보낸 뒤 홀로 얍복 강변에 머무르다 야곱은 하느님의 공격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힙니다. (환도 뼈를 부러뜨렸다는 것이 통속한 해석이지만 실제로는 생식 능력을 파괴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원의에 충실한 이해입니다. 구약성서 전통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것은 한 인간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야곱이 이 치명적 상실과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마침내 그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의 인정은 야곱(발뒤꿈치)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하느님이 싸운다/다스린다/보존한다)로 바꾸어주는 선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축복사건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진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통속주의 이해는 축복을 개인 기복의 차원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 내러티브에 가한 모욕입니다.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 이야기의 고갱이는 축복 자체가 아닙니다. 기복은 더욱 아닙니다. 축복은 방편이고 변화가 요체입니다. 변화의 기축에는 죽음과 맞먹는 상실이 존재합니다. 축복의 대칭 지점에 놓인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주목하지 않으면 변화가 요체라는 진실도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자칭하는 모든 자들이 이 진실을 놓쳤기에 결국 하느님은 스스로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겟세마네동산 기도에 이은 골고다언덕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것, 십자가를 지고 올라 마침내 거기 달린 것은 얍복 강변 야곱의 씨름을 하느님 스스로 재현·완수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 관건의 한 이치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돕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진실은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서야 자신의 존재 방식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절정의 반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운 사건! 하느님이 인간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인간이 몸의 존재로서 겪는 도저한 상실과 부정, 공포와 절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처 입힌 하느님과 상처 입은 하느님이 만났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은 비로소 쌍방향으로 열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전지전능하고 일방적으로 아가페를 베푸는 존재가 아님으로써 참다운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 사람의 말을 듣기도 하고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씨름 이야기 코다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과 야곱의 문답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발뒤꿈치, 곧 탐욕·계략입니다.) 이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이 싸운다, 곧 탐욕·계략을 공격한다. 하느님이 다스린다, 곧 탐욕·계략을 무너뜨리고 공존·연대를 이룬다. 하느님이 보존한다, 곧 길이 공존·연대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명이다. (무능, 곧 백전백패다.) 하느님이 야곱과 이름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이 모를 리 없고 야곱이 모를 리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서로 존재 방식을 달리 하겠다는 상호 혁명의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나사렛 청년으로 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야곱,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차례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탐욕·계략을 쳐서 부러뜨려야 합니다. 야곱임을 기꺼이 부정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내 안에 스스로 있는 “신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웰빙과 힐링이 만연한 오늘날 모든 멘토는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통속한 멘토, 심지어 승려 등 종교 지도자조차 그것을 개인적 기쁨과 안녕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런 따위의 행복은 당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중독 상태일 따름입니다. 인간 생명은 연계된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타자를 듣기 위해 안으로 열리고 자기를 말하기 위해 밖으로 열리는 쌍방향 교감이 누락된 채, 홀로 느끼는 행복은 탐욕·계략의 속임수에 놀아난 부작용입니다. 부작용으로서 행복은 반드시 누군가의 것을 수탈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전을 들고 자본이라는 ‘이름’을 지닌 하느님은 이 수탈을 성공이며 공공선이라 꼬드깁니다. 우리사회 지배층과 그 마름들은 이미 이 꼬드김에 다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 제 손으로 죽인 아이들의 영혼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사코 야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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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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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오만이다.(334쪽)


2014년 5월 11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해서 빈축을 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무슨 누구 책임, 이런 식으로 수습하지 말고 온 나라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애통해하고 눈물 흘리고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우리나라도 선진국의 꿈을 가지고, 이번에 (하나님이) 추락시킨 실종된, 침몰한 세월호와 함께·······다시 한 번 일어나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참으로 천박하고 허접한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몰하려는 대한민국 건져내 선진국 만드시려고 아이들 250명을 침몰시켜 죽이셨다는 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왜 하필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민주국가를 침몰시킨 권력의 주구 수천 명이 아니고 죄 없는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왜 하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자식 250명을 잃은 부모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강자를 위해 약자를,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이 따위 논리가 하나님의 논리라면 대체 그 아들, 아니 그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킨 논리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이 땅의 통속 기독교는 죽임당한 250명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야 마땅합니다. 만일 이를 신성모독이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침몰시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더 참람한 신성모독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침몰시키신 것은 김삼환류 인간들의 논리와 상식인 듯합니다. 그 대신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천하 이치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저 “오만”을 건져 올리신 듯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하나님의 뜻’을 읊조리는 맹랑한 주둥이는 필경 우주의 기운으로 혼을 정화하는 가금 신을 예찬하는 부리와 동급일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믿음·······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7-178쪽)


아우슈비츠에 끌려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신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느끼는 사람의 삶의 실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전도”라는 이름으로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전투적 통속 기독교의 전도폭력은 이미 사회문제 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 광화문 대로에서 세월호사건 유족을 종북이라 떠들어대며 그 고통을 모독하고 그 의미를 강탈한 기독교 종파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만한 언행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그냥 오물입니다.


고통, 무엇보다 인간에 의해 의도된 고통의 의미는 ‘하나님’에게 물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묻는 순간, 의도한 인간을 은닉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는 대놓고 그 책임을 묻는 식으로 해결하지 말자고 두둔했습니다. 누구에게 화살이 돌아갈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권력의 주구들이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이런 범죄은닉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은닉할수록 진실은 자명해집니다. 그 진실에서 고통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눈물 흘리며 청문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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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병은 언제나 돌봄을 받는 것이거나 최소한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픔을 가하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고통과 질병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자아는 모든 고통들 속에서 파괴된다. 고통이 의식에서 그 자신을 고립시키고 의식의 나머지를 흡수하는 통증이라면, 진정한 차이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고통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주목을 받아 울 수 있는 고통과 그 자신의 쓸모없음 속에 남겨지는 고통 사이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분명히 여러 고통들 중에서 질병은 훨씬 자주 응답을 받는 고통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들리는 울음은 억압된다.(333-334쪽)



지금 세월호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매판독재 권력과 막장 언론은 유족의 고통을 “자신의 쓸모없음 속에 남겨지는 고통”으로 남기기 위해, “주목을 받아 울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날조하고 위증하고 왜곡하고 침묵합니다. 적어도 유족에게 대한민국은 “강제수용소”입니다. 그들의 “울음은 억압된” 흐느낌입니다. 생때같은 새끼들이 살해되는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유족에게 또 다시 대한민국은 “의도된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의도된 고통을 국민에게 주는 대한민국이 어찌 국가이겠습니까. 국가가 아닌 사적권력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겠습니까. 유족의 고통이 “응답을 받는 고통”이게 하려면 감응하는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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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쓸모가 없어진다. 고통은 현재의 상태 그것일 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고통이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해된다면, 같은 이야기 안에서 다른 고통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는 제유적인 여집합-‘환유적인 과다함’으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이 있다. 각각의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이다. 각각의 고통 받는 개인은 다른 고통들에 대한 목격자로서 그 전체로 부름 받는다.(333쪽)


세월호사건과 관련해 어느 정신과 의사와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의사는 유족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정부 수반의 심리 상태를 이런 내용의 말로 설명했습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너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런 정도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이니 그 분석에 공감하는 것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의 고통보다 제 고통을 크게 여기는 심리가 흔하다 못해 보편적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상담치료를 하다보면 거의 모든 경우 이런 상황과 마주칩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은 자기만 아프다거나, 자기가 가장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열이면 열 똑같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내속을 누가 알겠어요.”


비교한다는 것은 환원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합니다. 누구의 고통이 누구의 고통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자 왜곡입니다. 내 고통이 남의 것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적 자기연민입니다.


모두의 고통은 각각 “다른”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을 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는 다시 “더 커다란 전체”를 전제합니다. 서로 다른 고통은 서로에게 은유의 당사자입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와 제유-제유Synecdoche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의미하는 비유로,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문장에서 ‘빵’이 ‘식량’을 의미하는 것 따위가 이에 해당함.-관계에 함께 섭니다. 제유 관계에 함께 설 때 각각의 고통은 서로 여집합의 일부가 됩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이치에 터하여 다른 고통을 같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은 연속의 계기입니다. 연속은 단절의 계기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원효 성사의 화쟁입니다. 화쟁은 모두 다르다皆非와 모두 같다皆是 중 어느 하나를 누락시키지 않습니다. 전체 진실, 곧 일심一心 안에서 화쟁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사 교과서 획일화 관련 민중시위 주도 혐의를 받고 수배 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무력으로 체포당하는 대신 자진 출두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내막이야 또 다를 테지만 이 문제 귀결의 중심에는 불교 화쟁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원효의 화쟁정신을 이 시대 문제를 푸는 열쇠로 삼고 있습니다. 표방과 달리 그들은 화쟁을 오독했습니다. 그들은 입쟁을 잘못함으로써 파쟁을 그르쳤습니다.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수탈자의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이 더 크다는 비교(!)에 결과함으로써 ‘다른 고통 같은 이야기’의 기본을 도륙해버렸습니다. 사회철학의 부재는 차치하고 원효의 근본조차 부정한 실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오늘도, 자기만 아프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는 한 분의 이야기를 고요히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는 제가 혼신의 힘으로 듣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를 깊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만큼 아픈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나요?”


제가 어떤 말을 해주니 그의 눈시울이 금세 젖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나라를 지금 꼴로 망치지는 않았을 사람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우리가, 이 슬프고 아픈 백성이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저들의 눈시울이 젖어들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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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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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은·······표면적으로는 그들을 돕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의료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질병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화학요법은 지옥이었다. 화학요법은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을 증오했다. 나는 화학요법을 받을 때마다 울었다. 그것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약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들리는 목소리는 일종의 고문을 겪은 사람이다.·······화학요법을 받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자아는 돌봄이라는 마음의 메시지와 고통이라는 몸이 메시지 간의 충돌로 파괴된다.(322-324쪽)


몸의 병에 관해서든 마음의 병에 관해서든 문진을 할 때, 저는 여느 의사와 다른 질문을 하나 합니다.


“사고 당하신 적 있습니까?”


없다는 답변이 돌아오면 반드시 하나 더 묻습니다.


“수술 받으신 적 있습니까?”


병력을 확인하려는 목적은 부차적입니다. 수술도 사고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른 기본적 증상이 있습니다. 공격을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술도 공격입니다. 수술을 포함한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지 않는 치료를 부가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외과의사와 환자는 수술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돕기 위해 고안된 제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돌봄”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것이 “고통”이며 “고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의료계가 장구한 세월 동안 주입해온 교리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수술에 국한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화학요법에 대한 증언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화학요법은 지옥이었다. 화학요법은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을 증오했다. 나는 화학요법을 받을 때마다 울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정도의 이야기가 예외적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암과 관련된 모든 화학요법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서양의학의 거의 모든 치료가 본질적으로 화학요법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요합니다. 화학합성 양방약물은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로든 지옥을, 다른 질병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의학은 이제 증오에 찬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술과 화학요법을 금하는 쪽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합니다. 불가피하게 할 경우에는 치료 절차를 개선하고 사전·사후의 보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선 수술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무릎 관련 수술은 가장 흔한 외과수술 중 하나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상된 무릎 연골 등을 복원·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습니다. 관련 의학비용도 천문학적 숫자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수술이 거의 무용하다고 합니다. 핀란드 헬싱키대학 연구팀은 무릎 연골에 이상이 생긴 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1년 뒤 회복 정도를 비교했습니다. 한 그룹에는 실제로 수술을 하였으나 다른 한 그룹에는 수술을 한 것처럼 하고 아무런 의학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그룹을 1년 뒤에 비교했습니다.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의 89%가 수술과 회복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였고 수술을 받지 않은 쪽도 83%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술 만족도는 실제 수술을 받은 쪽이 77%, 수술을 받지 않은 쪽이 70%였습니다. 이 정도 차이를 과연 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화학합성 양방약물 또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9월 한 의학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병원의 82%, 약국의 70%가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금지된 감기약을 처방·판매하였습니다. 이 감기약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등 표준제조기준>이 열거한 디엘염산메칠에페드린, 아세틸시스테인, 옥소메마진, 구연산옥솔라민 등 28개 금지 성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분들은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빈맥, 경련, 의식 저하, 심지어 사망과 같은 치명적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약 가운데 극소수만이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투여하지 말라는 명확한 표시를 하였고, 대부분은 복용시켜도 무방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모호한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채 지금도 진행 중일 것입니다.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수술이나 화학합성 양방약물 처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당하는 피해는 돈이나 부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자아는 돌봄이라는 마음의 메시지와 고통이라는 몸이 메시지 간의 충돌로 파괴된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의 충돌로 자아가 분리·파괴된다는 말입니다. 몸은 지옥으로 가는데 마음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저 참혹한 어긋남. 참혹한 어긋남을 이용해 돈을 빨아들이는 잔혹한 의료산업. 산업이 된 의료에 돈과 함께 빼앗기는 의료민중의 목숨. 이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민중이 나서서 파괴의료를 혁파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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