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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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사회적 본질·······고통은·······존재론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조건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지역적 세계들에서·······문화적 구체화-‘정교’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를 거친, 실천적이고, 그러므로 고유한-‘진기한’으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 경험의 형태다.(319쪽)


일반적으로 사회란 말은 개인의 상대어, 즉 개체에 대한 전체 개념으로 씁니다. 이 문맥에서는 오히려 보편에 대한 특수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의 인간이 특별한 개인이 아닌 보편 인간이므로 사회는 결국 각기 고유한 지역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특수성과 전체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편 인간에게 고통은 “존재론적·······조건”입니다. 태어나 자라고 늙다가 죽는 모든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는 인간적 고통은 남녀, 인종, 문화, 빈부에 따른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하여 고통은 천명이고, 천명은 저항이고, 저항은 숭고라고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숭고는 모든 개체 인간에게서 패배로 마감됩니다. 패배하는 개체 인간은 울면서 서로 얼싸안습니다. 울면서 얼싸안은 개체 인간들 경계에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울음과 웃음이 어우러진 전체 인간, 그러니까 공동체로서 인간만이 숭고의 패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숭고의 패배를 넘어서기 위해 얼싸안는 일, 그러니까 사회적 실천이 일어나야 하는 공동체는 각기 다른 “문화적 구체화를 거친, 실천적이고, 그러므로 고유한 경험”으로서 고통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국가의 형태로 공식화된 고유한 단위 사회는 각기 특수한 정치적 지형을 따라 다양한 고통을 노정시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정치·경제·학문·교육·종교·문화·예술 각 분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자주민주통일 지향의 시민이 겪는 고통을 고유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러니까 장준하·박종철·문익환이 겪은, 그러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세월호사건 유족이 겪고 있는, 그러니까 저와 그대가 겪어야 할 고통의 “사회적 본질”입니다. 공동체적 본질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이 문제는 치명적 중대성과 혁명적 시급성을 띠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 획일화 문제가 현안인 상황에 맞게 교육 문제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지난 11월 27일 이 리뷰44 <고통의 양육: 양육프레임>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말씀드린 바,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사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참담한 일입니다. 이들은 식민지와 독재 권력에 부역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학교를 세우거나 인수하였습니다. 사립중고등학교로는 대표적인 예가 김문희(김무성 누나)의 용문학원, 나채성(나경원 아버지)의 홍신학원, 김석원의 성남학원, 민덕기의 풍문학원 등입니다. 대학으로는 방일영 일가의 연세대학교, 김성수 일가의 고려 대학교, 이병철 일가의 성균관대학교, 조영식 일가의 경희대학교 등입니다.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예언했듯 식민교육의 노예화를 그 부역집단이 알아서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해왔던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 공교육을 깡그리 무너뜨렸습니다.


저도 이런 치욕스런 상황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제 딸도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치욕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교육적 고통입니다. 교육은 다만 사회의 비교적 주변부에 위치한 한 부문이 아닙니다. 교육은 사회의 근본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는 관건적 부문입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신문과 방송을 장악한 것도 거기에 교육적 속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 저들의 지배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존재하는 한, 이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국가는 오직 저들의 사익추구를 위한 기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 부모가 죽을힘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저들의 수탈에 자발적으로 공범이자 피해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여기서 그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저 혼자, 그대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그대가 손을 잡지 않으면 그 무엇도 어떻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고통이 클수록 손을 굳게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통은 사회적 실천입니다. 사회적 실천으로야 패배를 건너갑니다. 이 순간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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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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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인용자-)·······경험의 살아지는 흐름에 대한 (일상화된 혹은 재앙적인) 저항 과정의 결과·······다. 고통을 겪기 위해서는, 사람은 위협을 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위협에 저항해야 한다. 위협에 대한 인식은 이미 약한 형태의 저항이다. 경험의 살아온 흐름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은 저항의 한 형태다. 이야기에서, 경험의 흐름은 숙고되고 되돌려진다. 자아-이야기를 통한 저항은 몸-자아를 재형성시킨다.(318쪽)


지난 1월 21일 『고통』(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리뷰 <통증이 너희를 구원하리라>에서 고통과 통증 문제를 비교적 소상하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맨 마지막 문단을 가져와보겠습니다.


“바야흐로 고통을 직시할 때가 왔습니다. 고통은 많은 경우, 아니 본질적으로 병이 아닙니다.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무조건 없애려 하는 것은 의학이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을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역설을 모르는 한 의학은 반생명적 살인기술일 뿐입니다. 고통을 북돋우는 과정에서는 불편함을 견디는 전인격적 감응response 문제가 개입합니다. 전인격적 감응은 결코 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려면 몸의 아픔, 그러니까 통증의 위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통증은 일차적·근본적·범주적입니다. 무통의 전략과 편의의 전술로 승승장구하는 자본의 의학에 맞서 몸의 아픔을 화두로 들어야 합니다. 그게 괴로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바른 마음입니다.”


고통, 좀 더 정확히는 통증을 의학적 측면에서 자연치유반응으로 인식하고 전인격적인 감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자연치유반응은 병의 “위협을 인식”하고 “그 위협에 저항”하는, 그러니까 병의 “흐름에 대한 저항”입니다. 위협을 인식하니까 저항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니까 아픈 것입니다. 아프니까 불편한 것입니다. 아프고 불편한 것을 제거하면 생명의 위협을 인식하고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아프고 불편한 것을 전인격적으로 감응하는 일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 예의이며 경외입니다. 무통주의와 편의주의에 사로잡힌 현대문명은 정확히 이 진실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좀 더 근원의 지점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저항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 현상은 열역학 제2법칙, 그러니까 엔트로피 법칙을 거슬러 올라가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그러니까 해체적 열평형 상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 “경험의 살아지는 흐름”입니다. 생명체로서 살기 위한 활동은 바로 이 흐름에 맞서 구성적 열 순환 상태를 만들어가는 저항운동입니다.


저항의 내러티브를 통해 “경험의 흐름은 숙고되고 되돌려”집니다. 생명은 찰나마다 “재형성”됩니다. 흐름이 숙고되고 되돌려지는, 그러니까 가역적인 운동은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고립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재형성, 어림도 없습니다. 되돌리고 다시 빚는 일은 끊임없이 생명 사건을 개방계로 열어가는 행동입니다. 개방계로 열어가는 행동이 소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도상에 두는 것입니다. 광활함으로 가는 저항의 고통은, 그러므로 숭고 그 자체입니다. 숭고는 필연의 이치로 고통, 정확히는 통증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지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만큼 아픈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흔히 산고産苦라 하지만 틀린 말입니다. 산통産痛이 맞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괴롭게 여기는 엄마는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일이야말로 전형적인 숙고입니다. 되돌림입니다. 재형성입니다. 아기를 낳는 일이야말로 숭고의 본진입니다.


이렇게 고통, 정확히 통증은 질병과 의학의 문제를 넘어 생명 전체를 관통하는 실재입니다. 통증은 천명입니다. 천명은 저항을 지시합니다. 무통은 저주입니다. 순응은 파멸입니다. 대한민국, 목하 무통과 순응에 깊이 잠겨가고 있습니다. 벗이여, 제발 아프시라! 그대여, 부디 저항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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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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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은 고통에 의해 시작되고, 고통은 자기 자신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 윤리적인지는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며, 이야기는 상처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나의 메타-이야기는 상처 그 자체, 고통으로 되돌아간다.(317쪽)


치유상담을 하던 중, 세월호 아이들 모두가 제 하느님이라 하니 어떤 분이 묻습니다.


“그 아이들이 거룩한 존재인가요?”


제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구약성서 욥기는 죄 없는, 하느님의 사람 욥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2천 년 동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문제를 풀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의 의로운 하느님 개념이 프레임을 틀어쥐고 있는 한, 심지어 지젝처럼 현란한 무신론으로 깨뜨려 나가도 찰지고 후련한 타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답은 너무 지당해서 의외인 곳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등하불명.


신약성서 4대 복음이 죄 없는, 하느님인 사람 예수의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통속한 기독교는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교만한 표정을 짓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그들의 해석과는 전혀 무관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서양 지성 전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그들이 알 리 없습니다.


예수로 사람이 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악을 쳐서 의를 세우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욥의 고통과 분리되어 있던 하느님은 예수가 됨으로써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의 극한에서 죽음까지 경험합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의 무지무능을 명백히 증명해 보입니다. 악의 실재와 그 승리를 명백히 증명해 보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존재의 실체입니다. 하느님다운 행동 방식입니다.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신앙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렇다, 하면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처럼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사는 길입니다.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처럼 사는 사람이 하느님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그렇게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다, 하면 다른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백발백중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인가요? 아닙니다. 근거 없이 전제한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만 없을 따름입니다. 고통당하고 죽임당하는 하느님은 엄존합니다. 그 하느님은 오직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이 질문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과 삶에서 일어나고 스러짐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삶과 삶으로 번져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이 영성을 지닌 주체가 성령입니다.


성령은 오늘 여기서 죄 없는 사람으로 고통당함으로, 죽어감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악에게 백전백패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오늘 여기서 죄 없는 사람으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이웃과 함께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악에게 백전백패하는 죄 없는 이웃과 함께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은 고통으로 고통을 건너갑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건너갑니다. 패배로 패배를 건너갑니다. 도저한 부정으로 처절히 부정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신약성서는 부활이라 이름 합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 부활도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과 삶에서 일어나고 스러짐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삶과 삶으로 번져감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약속입니다. 부활은 기억입니다. 부활은 증언입니다. 부활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숭고한 부활의 도상에서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은 비로소 장엄한 실재를 드러냅니다.


오늘도 우리는 250꽃별 성령들과 함께 하느님인 사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상처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상처 그 자체, 고통으로 되돌아”갑니다. 고통이 누락된 ‘하나님’ 믿는 무리의 조롱을 견디며 죽음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갑니다. 이 발소리가 하느님 음성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만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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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이야기는 중단된 시간으로부터 그 자신의 시간을·······창조한다.·······

  오직 소통하는 몸만이 중단을 되찾을 수 있데, 그것만이 그 자신의 우연적인 취약성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소통하는 몸은 이러한 우연성을 자신의 욕망의 조건으로 만들어서 이 취약성을 공유하는 다른 삶들에게 다가간다.(311-312쪽)


대니얼 고틀립이 쓴『샘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저자 자신의 경험담입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데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소변 처리하는 기계를 몸에 부착하고 생활합니다. 어느 날 외모 때문에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십대 소녀와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아뿔싸! 하필 그 때에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소변이 새어나와 바지를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순간적 판단으로 이 “우연적인 취약성”을 어린 소녀와 “공유”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도전입니다. 몸의 외적 조건을 문제 삼는 소녀에게 치료자인 의사가 몸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목격한 소녀가 벌떡 일어섭니다. 상담이 끝장난 것일까 하는 순간, 소녀가 의사에게로 다가옵니다. 소녀는 가만히 의사를 안아줍니다. 상담은 끝장난 것이 아니라 끝난 것입니다!


수만 마디 웅변보다 더 진한 감동, 더 탁월한 치유 효과를 가져 온 이 침묵의 증시證示는 너와 나의 경계를 단박에 허물어 낮은 생명 연대를 이룩한 전형에 해당합니다.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무는 단도직입의 방법은 너와 나의 차이를 없애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차이를 없애는 단도직입의 방법은 너와 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비밀을 드러내는 단도직입의 방법은 너와나의 “우연적인 취약성을·······공유”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필연적인 경강성을 공유하는 것은 어떨까요? 거기서는 감동 아닌 야합이, 치유 아닌 이익이 발생합니다. 높은 살생 카르텔이 형성됩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첨예한 대칭, 그러니까 낮은 생명 연대와 높은 살생 카르텔의 극렬한 마주침이 일어나는 소용돌이입니다. 생명 연대가 살생 연대를 이기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 골리앗은 크고 강합니다. 탈취한 통치권이 무소불위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국가보호장비 선박에 250명 아이들을 가두어 실황중계까지 해가며 죽였습니다. 아이들 장례비 줄이라 지시한 바로 그 정부 수장의 그 해 공식 의상만 122벌이었습니다. 70줄 노인에게 물대포를 직사해서 죽음 직전으로 몰아넣고도 시위대를 IS에 비유했습니다. 스스로 추산한 비무장 시민 시위대 13000명을 제압하기 위해 경찰은 무장 병력을 225개 중대 20000여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골리앗에게는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살인까지 서슴지 않으며 감추려 하지만 종당 다윗의 물맷돌을 맞고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릴 것입니다. 정치적 부정은 물론 온갖 음란하고 추악한 부도덕을 드러내며 자멸할 것입니다. 이제 낮은 생명 연대는 높은 살해 카르텔의 최후를 보기 위해 므깃도 언덕으로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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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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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함께 사고하는 것의·······교훈은 일단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 생성되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점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302쪽)


직선적 시간관을 지닌 서구 통념으로 보면 이야기를 통한 상담치료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이 상담을 단계로 나누어 평가하면서 종말론적 결과를 향해 전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진은 이야기에 담긴 상처를 과거의 것으로 퇴출시키고자 하는 기계주의 의도의 소산입니다. 오로지 투명한 오늘에 집중하여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한 긍정주의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이야기의 시간을 그렇게 흐르도록 조작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한 아픈 사람은 “그 이야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머무름으로 상처는 발효됩니다. 발효는 아픈 사람이 새로이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야기 안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그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 넣는 것입니다. 성찰의 이야기를 엮어 넣는 것은 “그 이야기를 점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치유이며 성장입니다. 치유와 성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에서 계속 살면서 그 이야기 내용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 머무르는 동안 상처가 발효될 때 나는 열기와 냄새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깊은 맛을 내는 삶을 살기 위해 넘겨야 할 고비입니다. 한창 고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여성이 답답함을 호소해왔습니다.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지금 견디지 못하고 뚜껑을 열어버리면 발효는 중단되고 부패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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