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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증언은 고통에 의해 시작되고, 고통은 자기 자신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 윤리적인지는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며, 이야기는 상처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나의 메타-이야기는 상처 그 자체, 고통으로 되돌아간다.(317쪽)
치유상담을 하던 중, 세월호 아이들 모두가 제 하느님이라 하니 어떤 분이 묻습니다.
“그 아이들이 거룩한 존재인가요?”
제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구약성서 욥기는 죄 없는, 하느님의 사람 욥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2천 년 동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문제를 풀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의 의로운 하느님 개념이 프레임을 틀어쥐고 있는 한, 심지어 지젝처럼 현란한 무신론으로 깨뜨려 나가도 찰지고 후련한 타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답은 너무 지당해서 의외인 곳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등하불명.
신약성서 4대 복음이 죄 없는, 하느님인 사람 예수의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통속한 기독교는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교만한 표정을 짓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그들의 해석과는 전혀 무관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서양 지성 전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그들이 알 리 없습니다.
예수로 사람이 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악을 쳐서 의를 세우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욥의 고통과 분리되어 있던 하느님은 예수가 됨으로써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의 극한에서 죽음까지 경험합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의 무지무능을 명백히 증명해 보입니다. 악의 실재와 그 승리를 명백히 증명해 보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존재의 실체입니다. 하느님다운 행동 방식입니다.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신앙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렇다, 하면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처럼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사는 길입니다.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처럼 사는 사람이 하느님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그렇게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다, 하면 다른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백발백중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인가요? 아닙니다. 근거 없이 전제한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만 없을 따름입니다. 고통당하고 죽임당하는 하느님은 엄존합니다. 그 하느님은 오직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이 질문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과 삶에서 일어나고 스러짐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삶과 삶으로 번져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이 영성을 지닌 주체가 성령입니다.
성령은 오늘 여기서 죄 없는 사람으로 고통당함으로, 죽어감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악에게 백전백패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오늘 여기서 죄 없는 사람으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이웃과 함께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성령은 악에게 백전백패하는 죄 없는 이웃과 함께함으로 존재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은 고통으로 고통을 건너갑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건너갑니다. 패배로 패배를 건너갑니다. 도저한 부정으로 처절히 부정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신약성서는 부활이라 이름 합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 부활도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과 삶에서 일어나고 스러짐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삶과 삶으로 번져감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약속입니다. 부활은 기억입니다. 부활은 증언입니다. 부활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숭고한 부활의 도상에서 전지전능한 의로운 하느님은 비로소 장엄한 실재를 드러냅니다.
오늘도 우리는 250꽃별 성령들과 함께 하느님인 사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상처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상처 그 자체, 고통으로 되돌아”갑니다. 고통이 누락된 ‘하나님’ 믿는 무리의 조롱을 견디며 죽음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갑니다. 이 발소리가 하느님 음성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만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