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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여의 관계는 필요에 대한 상호인정에서 출발한다.·······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당신의 넘침은 다른 누군가의 모자람을 보완해줄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자람 역시 그 사람에 의해, 혹은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슷하게 채워지기 때문에, 그 상호교환을 틀 짓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상호성이다.·······누군가의 넘침은 너무 자주 고통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고통을 넘침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서 자선의 한 축이다.
다른 한 축은 모든 사람에게 모자람이 있다는·······신념이다.·······빈곤층을 위한 의료는 의사-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첨가함- 그 자신의 “부서짐”에 대한 해결책이다. 자기 자신을 “부서진” 존재로 보는 것은·······급진적이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자기 자신의 모자람을 믿는다면, 그 모자람을 채우는 것은 필요의 문제다. “자선”은 타인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필요의 넘침이 된다.
·······진정한 봉사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자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의 넘침으로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다. 이를 의료에 적용시킨다면·······자기 자신이 시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종으로서의 의사의 이미지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는 적절한 이상이다. 우리가 시중을 드는 것은 시중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은·······윤리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우리 각각이 타자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우리가 소통하는 몸일 수 있다면-더 이상 공감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공감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더 이상·······돌봄을 받는 수동적인 환자가 아니다.·······
고통의 교육학 의미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284-287쪽)
우울증을 전 지구적 문제라고 전제할 경우 이는 비단 인간 생명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지나친 진화와 번성이 몰고 온 지구 생태계 전반의 위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과 인간의 우울증 사이엔 분명한 함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침없는 진화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 잔혹한 문명의 혜택을 독점, 향유하는 헤게모니 블록은 자기 단일성의 미망에 빠진 분열증 집단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 광포한 분열증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울증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반성 불능의 자기단일성에 집착하는 분열증 집단의 먹잇감에게 씌워진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이 먹잇감이 다른 존재, 즉 자기 포식자에 대한 공감, 배려, 보살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잠식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영혼은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투명한 통찰력을 지녔으나 따스합니다. 그들의 감각은 눈부시나 각질이 말랑말랑합니다. 하여 이 잔인한 문명 안에서의 삶은 백전백패입니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패배를 온 영혼에 지닌 존재들이 저 승리자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죽어가면서 자연을 향한 분열증 집단의 돌진을 막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이라는 천형을 덮어쓰고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분열증적 자기단일성으로 승리한 문명의 적자, 저 비정한 ‘1%’가 끝내 이 선한 영혼, ‘등경(등잔걸이)를 말 아래 두는’ 생명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은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분열증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핀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인류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이고 총력을 기울여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복원한다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오래토록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웅숭깊은 문명비판이 구원의 무지개로 뜨기를.
제가 쓴『안녕, 우울증』의 제42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인류문명에 대하여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인간은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 진실인 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넘침”입니다. 그 넘침이 고통 밖에서 “모자람”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그 “모자람을 보완해”줍니다.
우리는 그 동안 반쪽의 진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뭔가 결핍되어 있으니 치료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그 뭔가를 채워주는 것이다,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치료란 치료자가 아픈 사람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도리어 그 치료자에게 “필요의 넘침이 된다.”는 맞은편 진실을 간과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그렇습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아닙니다. 환자도 의사의,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환자도 의사를,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을 돌봅니다. 우리 모두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인간 세상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진실에 눈감았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에 눈감은 것은 아픈 사람들의 아픔을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픈 사람들이 모자란, 요즘 말로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자람이 바로 자기 자신들의 수탈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수탈당하는 고통 속에서 피워낸 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발길 때문에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파국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공멸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길, 오늘 여기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사제의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강정마을 주민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밀양 송전탑 할매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아픔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습니다. 아픔이 가르쳐 깨닫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은 없습니다. 할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