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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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야기와 함께 사고하는 것의·······교훈은 일단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 생성되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점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302쪽)


직선적 시간관을 지닌 서구 통념으로 보면 이야기를 통한 상담치료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이 상담을 단계로 나누어 평가하면서 종말론적 결과를 향해 전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진은 이야기에 담긴 상처를 과거의 것으로 퇴출시키고자 하는 기계주의 의도의 소산입니다. 오로지 투명한 오늘에 집중하여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한 긍정주의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이야기의 시간을 그렇게 흐르도록 조작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한 아픈 사람은 “그 이야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머무름으로 상처는 발효됩니다. 발효는 아픈 사람이 새로이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야기 안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그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 넣는 것입니다. 성찰의 이야기를 엮어 넣는 것은 “그 이야기를 점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치유이며 성장입니다. 치유와 성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에서 계속 살면서 그 이야기 내용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 머무르는 동안 상처가 발효될 때 나는 열기와 냄새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깊은 맛을 내는 삶을 살기 위해 넘겨야 할 고비입니다. 한창 고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여성이 답답함을 호소해왔습니다.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지금 견디지 못하고 뚜껑을 열어버리면 발효는 중단되고 부패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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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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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그리고 구술문화에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이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말해질 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다.·······그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에서 청자가 무엇이 되는가이다. 반복은 생성의 매개체다.(301쪽)


논어 첫머리의 저 유명한 문장,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어왔으나 미진한 바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등하불명燈下不明의 문장입니다. 오늘 여기 아서 프랭크는 논어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 자리에서 그 어떤 해석가도 지니지 못했던 시선으로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를 관통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해석은 이렇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익숙하지만 모호하고 모자란 해석입니다. 도올 김용옥은 ‘때때로’를 ‘때에 맞추어timely’로 이해합니다. 익힘習은 때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가끔이란 의미도 가능한 ‘때때로’보다는 설득력을 더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런 이해 또한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도올은, 익힘習은 배움學과 병치된 독립된 개념이라 하면서, 배움學은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 하고, 익힘習은 실천의 세계라고 합니다. 학습學習의 내용은 육예六藝이니 같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두 행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올의 이 구분은 어린아이가 서書, 수數는 할 수 있지만 사射·어御는 할 수 없다고 하거나, ‘배움의 익힘’과 ‘배우고 익힘’이라는 표현을 혼용함으로써 어지러워지고 맙니다. 구분을 엄밀히 하고 ‘때에 맞추어’ 하자면 배움 또한 그러할 것인데 하필 익힘에만 적용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결국 배움과 익힘의 관계를 깊이 따지지 않아서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런 잘못으로 지之는 투명 글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배우고 그 (배우기)를 수시로 (반복하여)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익힘입니다. 반복은 그저 배우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의 익힘을 통해 배우기가 몸에 새겨집니다. 몸에 새겨진 바는 인격을 빚어갑니다. 반복은 나선형 전진이며 집장集藏입니다.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말해질 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다.·······그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에서 청자가 무엇이 되는가이다. 반복은 생성의 매개체다.


반복은 “무엇이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반복은 “생성”의 문제입니다.


상담으로 마음병을 치유하다보면 반드시 이 반복의 문제와 마주칩니다. 마음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아프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기적처럼 빨리 낫기를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더는 이야기하기 싫어 정나미가 똑 떨어질 때, 여태까지 한 이야기를 두 곱 더 반복하면 길이 열립니다. 병이 생성되듯 치유도 생성되는 것입니다. 생성되려면 반복 또 반복해야 합니다. 반복을 축복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견딤의 터널을 지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598번의 반복을 견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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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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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윤리가 독특한 활동이 되는 것은 임상 의료의 조우를 넘어서는 영역·······환자됨patienthood 바깥에 있는·······아픈 동안에 어떻게 좋은 삶을 사는가 (하는 문제에서-인용자 덧붙임-)다.·······

  ·······전문가-환자 관계가 두 인격체의 관계로 될 때, 의료는 또 다른 측면을 갖는다.

  ·······“제게 필요한 용기를 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의학적 정보나 치료에 대한 요청이 아니다.·······의학적 전문지식은 최소한만 관련된다.·······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인간으로서의 그가 인간으로서의 그녀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바꿈-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296-297쪽)


드라마에서 연기만 하다가 각종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거기에 출연하면서부터 TV 탤런트들은 드라마 밖에서도 ‘탤런트’적 얼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중견급 이상 연기자들에게 어느 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여졌습니다. 후배 탤런트, 방송인들의 선생님을 넘어 그들은 이제 사회 전체의 어른이나 멘토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요리 전문가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방장에서 셰프로, 셰프에서 선생님으로 호칭이 바뀌면서 요리 전문가가 사회의 어른이나 멘토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탤런트가 그러하듯 요리사도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개적 프로그램에 나와 반말을 서슴없이 하는 높으신 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야의 누구든 걸맞은 지식과 덕망을 갖추면 선생님 소리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그런 이치와 전혀 다른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를 경전 삼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만 선생님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정작 선생님 노릇을 결곡히 하여 선생님 대접을 제대로 받아야 할 사람들은 한낱 자본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의사, 아니 의자醫者 집단입니다.


사회가 분화되기 이전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도, 영적 인도, 그리고 치료적 계도는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공동체 유지·발전에 필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일들에는 가르쳐 이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양 전통에서 의사를 가리키는 doctor는 docere, 즉 ‘가르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의사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습적 호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사를 누가 어른으로 멘토로 존경한단 말입니까. 의사에게 누가 “임상 의료의 조우를 넘어서는 영역·······환자됨patienthood 바깥에 있는” 일을 묻겠습니까. 의사에게 누가 “아픈 동안에 어떻게 좋은 삶을 사는가,” 묻겠습니까. 의사에게 누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겠습니까. 특히나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입니다.


어제 수능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대에 있는 이른바 극상위권 소수 아이들이 의대에 진학할 것입니다. 의대 6년 동안 공부하고 이어 전문의 과정을 통과해 전문의가 되면 중산층 이상의 삶이 보장됩니다. 의대 진학 이전에 그랬듯 진학 이후에도 이들을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으로 이끄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이 없는 의사에게 “전문가-환자 관계가 두 인격체의 관계로 될” 기회는 없습니다. 두 인격체의 관계로 서지 못하는 의사에게 환자가 “제게 필요한 용기를 주실 수 있나요?” 라고 물을 기회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는 전문지식 장사만으로 그 삶의 영역을 국한시켜야만 합니다. 인문과 사회 분야에 대해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아닌 선생님으로, 그저 형해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라도 서둘러 의대는 의대생에게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전문 지식에 걸맞은 인간적 소양과 기품을 지닐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성장한 의사만이 아픈 동안에도 어떻게 좋은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픈 사람들과 함께 깊이 논의할熟論 수 있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현실이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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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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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도덕적 가치는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와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도덕적인 방향의 재정립이 없는 정치적 변화는 관료주의를 더하기만 한다.(290쪽)


도덕은 인간의 문제입니다. 정치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도덕은 내면에 주의합니다. 정치는 외형에 주의합니다.


도덕은 인문 지평을 세웁니다. 정치는 사회 맥락을 조정합니다.


도덕은 숭고를 증폭시킵니다. 정치는 비장悲壯을 감축시킵니다.


도덕의 규범은 ‘차마’입니다. 정치의 규범은 ‘감히’입니다.


도덕은 정치의 최대한입니다. 정치는 도덕의 최소한입니다.


도덕은 정치의 원천입니다. 정치는 도덕의 사해四海입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의자醫者로서 흔히 마주하는 한계는 일반적으로 그 아픈 사람의 삶의 조건 자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병의 원인을 제공한 가족, 특히 어머니나 배우자 바뀌지 않는 한, 아픈 사람 홀로 마음 바뀌어서 될 문제가 아님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현실적으로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족 문제가 이러할진대, 원인 제공을 사회, 국가가 했다면 더더구나 속수무책이 됩니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망할 때면 체 게바라가 총을 든 까닭에 대해 생각합니다.


정치적 치유가 불가피한 만큼 정치 또한 부질없는 장난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기운으로 혼을 다스리는 영검한 통치자가 나와 창조와 개혁을 주도하는데도 사람은 떼로 죽어나가고 삶은 피폐해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말입니다.


도덕적인 방향의 재정립이 없는 정치적 변화는 관료주의를 더하기만 한다.


아, 참으로 적중하는 말입니다. 인간적 돌이킴이 전무한 채, 인생의 성공만을 구가해온 한 줌 집단이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벌이는 토건정치의 무쌍한 변화는 오로지 기득권자들의 독선적, 형식적, 획일적, 억압적, 비민주적인 행동 양식이나 사고방식만을 강화할 따름입니다. 인간 아닌 주체가 행하는 정치 놀음이 인간을 말살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설마 이따위를 보고 도덕적 가치더러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라 말한 것은 아닐 테지요. 도덕적 가치와 상호보완적이어야 하는 것일 때의 정치는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여야 합니다. 지금 정치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가치와 상호보완적이려면 지금 정치는 파현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현이 치유입니다. 그 과정에서 도덕의 정신은 온전히 대승이 될 것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입쟁立諍, 그러니까 싸움의 이치와 자세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도덕적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도.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를 세우기 위해서도. 나사렛 청년 예수가 이 말을 한 까닭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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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의 관계는 필요에 대한 상호인정에서 출발한다.·······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당신의 넘침은 다른 누군가의 모자람을 보완해줄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자람 역시 그 사람에 의해, 혹은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슷하게 채워지기 때문에, 그 상호교환을 틀 짓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상호성이다.·······누군가의 넘침은 너무 자주 고통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고통을 넘침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서 자선의 한 축이다.

  다른 한 축은 모든 사람에게 모자람이 있다는·······신념이다.·······빈곤층을 위한 의료는 의사-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첨가함- 그 자신의 “부서짐”에 대한 해결책이다. 자기 자신을 “부서진” 존재로 보는 것은·······급진적이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자기 자신의 모자람을 믿는다면, 그 모자람을 채우는 것은 필요의 문제다. “자선”은 타인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필요의 넘침이 된다.

  ·······진정한 봉사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자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의 넘침으로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다. 이를 의료에 적용시킨다면·······자기 자신이 시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종으로서의 의사의 이미지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는 적절한 이상이다. 우리가 시중을 드는 것은 시중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은·······윤리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우리 각각이 타자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우리가 소통하는 몸일 수 있다면-더 이상 공감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공감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더 이상·······돌봄을 받는 수동적인 환자가 아니다.·······

  고통의 교육학 의미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284-287쪽)



  우울증을 전 지구적 문제라고 전제할 경우 이는 비단 인간 생명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지나친 진화와 번성이 몰고 온 지구 생태계 전반의 위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과 인간의 우울증 사이엔 분명한 함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침없는 진화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 잔혹한 문명의 혜택을 독점, 향유하는 헤게모니 블록은 자기 단일성의 미망에 빠진 분열증 집단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 광포한 분열증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울증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반성 불능의 자기단일성에 집착하는 분열증 집단의 먹잇감에게 씌워진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이 먹잇감이 다른 존재, 즉 자기 포식자에 대한 공감, 배려, 보살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잠식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영혼은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투명한 통찰력을 지녔으나 따스합니다. 그들의 감각은 눈부시나 각질이 말랑말랑합니다. 하여 이 잔인한 문명 안에서의 삶은 백전백패입니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패배를 온 영혼에 지닌 존재들이 저 승리자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죽어가면서 자연을 향한 분열증 집단의 돌진을 막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이라는 천형을 덮어쓰고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분열증적 자기단일성으로 승리한 문명의 적자, 저 비정한 ‘1%’가 끝내 이 선한 영혼, ‘등경(등잔걸이)를 말 아래 두는’ 생명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은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분열증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핀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인류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이고 총력을 기울여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복원한다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오래토록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웅숭깊은 문명비판이 구원의 무지개로 뜨기를.


제가 쓴『안녕, 우울증』의 제42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인류문명에 대하여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인간은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 진실인 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넘침”입니다. 그 넘침이 고통 밖에서 “모자람”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그 “모자람을 보완해”줍니다.


우리는 그 동안 반쪽의 진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뭔가 결핍되어 있으니 치료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그 뭔가를 채워주는 것이다,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치료란 치료자가 아픈 사람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도리어 그 치료자에게 “필요의 넘침이 된다.”는 맞은편 진실을 간과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그렇습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아닙니다. 환자도 의사의,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환자도 의사를,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을 돌봅니다. 우리 모두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인간 세상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진실에 눈감았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에 눈감은 것은 아픈 사람들의 아픔을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픈 사람들이 모자란, 요즘 말로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자람이 바로 자기 자신들의 수탈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수탈당하는 고통 속에서 피워낸 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발길 때문에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파국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공멸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길, 오늘 여기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사제의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강정마을 주민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밀양 송전탑 할매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아픔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습니다. 아픔이 가르쳐 깨닫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은 없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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