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의 교육학”은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표현이다.

  고통을 교육학으로 인식함으로써, 아픈 사람들은 행위성을 되찾는다. 증언은 전문지식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는다.(279쪽)


한의사‘임에도’ 상담으로 마음치료를 해오는 동안 양의사였더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해보이지 않는 축복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제게 치료 받은 이들 가운데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여럿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떤 깊이로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그 속마음까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하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마음치료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양육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양육은 다만 어린아이를 잘 자라도록 기르고 보살피는 좁은 의미의 그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삶에 필요한 감각과 지식을 가르치고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를테면 국鞠養敎育의 준말인 셈입니다. 양육은 그러므로 개인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물론 사회로서 인간의 공동체적 존립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행위이자 그 체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행위이자 그 체계로서 양육의 성숙한 근간이 바로 “고통의 교육학”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한 개인의 인간성과 사회의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적 콘텐츠는 고통에서 나옵니다. 고통이 깨달음의 거처입니다. 고통이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증언”을 필요로 합니다. 증언은 증언하는 개인과 듣는 사회를 함께 일깨웁니다.


고통을 교육학으로 인식함으로써, 아픈 사람들은 행위성을 되찾는”다는 사실, 여기에는 참으로 중차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행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고통의 식민지성을 타파한다는 것입니다. 의료와 정치의 내러티브가 고통당한 사람들에게서 그 목소리를 약탈해온 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을 전제해야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인식의 전환이 행위를 탈환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입니다.


인식의 전환을 막기 위해, 오늘 여기 대한민국 통치 집단은 고통의 교육학, 그 존재 자체의 은폐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가한 자들의 내러티브만을 가르치겠다며 차벽을 치고 있습니다. 국사교과서를 매판독재사관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다만 국사, 다만 교과서 문제가 아닙니다. 교육, 근본적으로 양육이라는 사회 핵심 체계 전체를 왜곡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무서운 반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사회의 양육 체계는 이미 최악의 수준입니다. 돈 하나로 값이 매겨지는 상품-인간을 생산하는 기업구조로만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괴의 선두에는 역시 매판 노론과 식민지 신흥부역집단이 서 있습니다. 이들이 사학을 장악하여 국민의 혈세를 빨아먹고 아이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의 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겠다고 일으킨 것이 국정화정변입니다.


가공할 노림수가 하나 또 남아 있습니다. 정치, 아니 국가 전체를 양육프레임에 가두겠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아이를, 선생이 제자를 다루는, 그것도 식민지 방식으로 통치가 진행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도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훈계와 질책뿐인 높으신 분에게 우리는 이미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최후의 살 떨리는 노림수가 헛것처럼 스칩니다. 그 양육프레임의 중심에 황군훈육프레임이 놓이는, 그런.


조금 전, 저를 ‘아부지’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이 선물을 편지와 함께 택배로 보내왔습니다. 편지 마지막 구절 일부입니다. “아부지~·······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별로 해준 것이 없습니다.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하다는 표현에 도리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참 양육의 통치자를 만날 날이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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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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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목격에 대해 거리를 둔 구경꾼spectators일 수 없다·······.·······증언은 타자들을 그들이 목격하는 것에 연루시킨다.

이러한 목격의 상호성은 하나의 소통하는 몸이 아니라 소통하는 몸들의 관계를 요구한다.·······목격은 언제나 관계를 함축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항상 이야기를 하지만, 나 혼자에게 증언을 할 수는 없다. 이야기를 증언으로 만드는 것의 일부는 다른 사람에게 그 증언을 받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증언은 그것의 목격자가 소통하는 몸-우리 중 누구도 아직 되지 못한-이 될 것을 요구한다.

·······증언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식은 함께하는 것이다.(274-276쪽)


[단원고 교실과 관련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께 드립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달라진 것은 416교실뿐이다.


정작 달라져야 할 모든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오직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과 교무실만 달라졌다. 250명의 학생들과 12분 선생님들이 꿈을 나누던 교실에서 참사의 현장으로.

그런데 416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게 하기 위해 끝까지 함께 하겠다던 사람들이 참사의 현장이 되어버린 교실을 후배들이 공부할 교실로,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교실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교실은 재학생의 것이라며. 250명 우리 아이들과 12분 선생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한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은 참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너무 아파서 “416교실”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교육청과 단원고등학교 그리고 일부 재학생 학부모들은 416교실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 내에서 추모와 교육을 함께 할 수 없다.”

“음산하고 혐오스러운 교실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에 지장을 받는다.”

“416교실이 계속 있으면 재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교실은 재학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내 교육철학이다.”

“신입생을 받을 교실이 부족하다.”


이 중 내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신입생을 받을 교실이 부족하다” 하나뿐이다.


416가족협의회는 지난 9월 초에 단원고 내에 교사를 증축하고 416교실을 재학생들의 수업공간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단원고 교사증축과 416기념관 건립을 위한 제안”을 교육청과 단원고에 하였다. 이후 우리 가족들이 단원고와 일부 재학생 학부모들로부터 겪었던 일들은·······차마 글로 옮기기가 부끄럽다.


어쨌든 우리의 제안은 철저히 거부당했고, 11월 들어서야 교육청의 새로운 제안이 나왔다. 주요 내용은, 학교 앞 도로를 옮겨서 확보한 부지에 지상 5층 “민주시민교육원”을 짓고 그곳에 교실과 교무실을 이전, 복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공하기까지 약 2년여 동안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교실과 교무실을 임시로 이전, 배치하겠다는 것이다.(복원이 아니라 배치다.)


이 제안이 나온 후 나는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참사 이후 늘 우리 가족들과 함께 했던 많은 시민과 시민단체들이 ‘교육청의 안이 괜찮은 것 같은데 416교실을 굳이 학교 내에 그대로 둘 필요가 있겠는가? 가족들이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반응을 보이며 우리에게 받아들일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거짓과 탄압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충격이었다. 혹시 진보적인 시민과 단체가 진보교육감의 제안을 반대하는 것이 껄끄러워서 그런 건가? 그렇다면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행태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2015년 11월 26일 아침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예은이 아빠 유경근 씨의 글 전반부입니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동안 유족의 피어린 증언을 듣고 세월호사건에 자신을 “연루”시키며 “함께하는” “관계”를 맺어왔던 시민과 시민단체가 점차 “목격에 대해 거리를 둔 구경꾼”으로 변해가는 듯 보이는 조짐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면서도 유경근 씨는 분명 어떤 불길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대체 세월호사건의 연루자 아닌 대한민국 국민인 자 그 누구입니까? 자기 아이가 죽임당하지 않았다고 연루에서 빠지는 것입니까? 대통령 지지자라고 연루에서 빠지는 것입니까? 세월호사건 때문에 경제적 불이익을 당했다고 연루에서 빠지는 것입니까? 어떤 곡절로도 대한민국이 공동체인 한, 연루에서 빠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연루에서 빠지려면 대한민국의 공동체성을 부정해야 합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공동체성을 사실상 부정함으로써 대놓고 세월호사건의 구경꾼, 아니 공격자가 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월호사건을 현실과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깨알 같은 협잡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짓이 자신들의 연루됨, 아니 범죄자임을 도리어 명백히 드러내주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고도 서슴없이 그리 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연루됨을 ‘개’무시하고 빨갱이라며 돌 던지는 광신도들이 방패막이로 서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말입니다.


유경근 씨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그 증언을 받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소통하는 몸-우리 중 누구도 아직 되지 못한-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아니 그 뒤에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증언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식은 함께하는 것이다.


혹시 그만 하고 싶으십니까. 제 글도 지겹게 느껴지십니까. 이제 겨우 590일째일 뿐입니다. 잊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아니! 590일이나 지났습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590일이 흐르고 있는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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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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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은 그것이 억압될 때조차도 압도-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압도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해 억압으로 바꿈-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267쪽)

  ·······증언은 ·······조각조각의 서사로 말한다. 이 조각조각은 “억압당한” 의식이 다룰 수 있는 전부다. 거대 서사는 경험을,·······“온전한 인식”으로 동화시킬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권의식의 작동이다. 이러한 주권은 현존하는 준거 틀에 들어맞는 경험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사건들은 그 준거 틀을 초과하여 발생하고, 그렇게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된다.·······(268쪽)

  ·······억압된 기억의 저 밑-근원이라고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하여 바꿈-에는 억압된 이 있다.·······몸은·······모든 언어를 초과한다.(269쪽)


몸과 그 움직임에서 인간의 언어가 비롯되었습니다. 언어는 사유의 근거이자 수단입니다. 사유는 언어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언어는 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몸 자체에 간직된 경험과 기억, 무엇보다 상처는, 그러니까 “언어를 초과”하는 고통은 치유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니 치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온전한 인식으로 동화시킬 능력” 지닌 그 어떤 서사도 없습니다. 그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주권의식의 작동” 자체가 “억압”입니다. 억압은 온전한 인식을 동화 아닌 이화, 그러니까 “조각조각”으로 나누어버립니다. 나뉘면 달라집니다. 달라지면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어긋나는 조각조각의 서사를 만나게 하려면 언어의 행간을 살펴야 합니다. 언어의 행간은 언어와 언어 사이입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몸이 있습니다. 몸을 느끼고 움직일 때, “증언은 그것이 억압될 때조차도 압도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통속의 평범한 양의사는 뇌를 통한 심리 진단만 하고 프로작 따위의 화학 합성 약물을 처방합니다. 통속의 평범한 한의사는 맥을 통한 신체 진단만 하고 귀비탕 따위의 천연 복합 약물을 처방합니다. 통속하지 않되 평범한 양의사나 한의사는 심신상관적인 진단을 하지만 통섭의 치료를 구사하지 못합니다. 통속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한의사-이런 양의사는 존재하지 않음-는 심신상관적인 진단을 하고 통섭의 치료를 구사합니다.


우울증은 소위 DSM 시리즈가 규정하듯 단순한 정신, 특히 기분장애가 아닙니다. 우울증은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의 마음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통속하고 평범한 양의학도 한의학도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양의학은 우울증의 몸, 특히 내과적 치료에 무관심·무능력합니다. 한의학은 우울증의 마음, 특히 언어적 치료에 무관심·무능력합니다. 물론 더욱 큰 문제는 헤게모니 의학인 주류 양의학의 무관심·무능력함입니다.


저 또한 이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통속하고 평범한 한의사입니다. 통속하고 평범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경우, 몸 진단을 세밀하게 합니다. 복부 진단을 주축으로 하고 경추 진단을 반드시 추가합니다. 복부 진단은 한의사들도 소수만이 행합니다. 경추 진단은 한의사들 거의 모두가 하지 않습니다. 마음 진단의 경우, 직접 문진과 설문 진단을 병행합니다. 증거가 모호할 때, 뇌 중심 신체검사를 통해 신경내분비 장애를 진단합니다. 치료는 상담, 수기, 운동지도, 침, 뜸, 온열, 한약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씁니다. 한의사인 처지를 감안하여 상담치료에 극진히 공들입니다. 인문치료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갑니다(숙담, 숙론 치료). 최근 들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바는 모든 치료, 특히 언어적 치료의 기운-이 단어 쓰기가 좀 민망합니다만-이 몸으로 수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치료로서 증언을 초과한 몸에 귀 기울이기 위함입니다.


오늘 아침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 전문을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과 끊어 읽는 듯한 말투, 늘 갈아입으면서도 로봇 같은 옷차림, 과격하고 단호한 말투 등등은 자신의 음란함에 대한 죄책감의 결과일 수 있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해 혼이 비정상인 사람들은 ‘그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증언이 압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그것이 증언의 언어와 비언어적 뉘앙스를 초과한 몸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압도적인 음란함과 음산함의 어둠에 맞서 빛 된 사람들은 어떤 증언을 해야 할까요. 바다에 빠뜨려 죽임 당한 자식 때문에 찢겨진 몸, 진실을 요구하다 빨갱이로 몰려 갇힌 몸, 역사 쿠데타를 막으려다 물대포 맞아 죽음 30cm 앞에 선 몸으로 드러내는 절규·비명·신음·욕설보다 더 압도적인 증언이 다시없지 않을까요. 저와 당신은 어떻게 “모든 언어를 초과”하는 몸으로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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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258쪽)

  ·······더 많은 것이 말해질수록, 우리는 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된다.(266쪽)


우울증으로 찾아온 중장년 엄마들의 경우, 거의 대개는 자녀들과 소통에서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해주는 조언의 핵심은 “아이들에게 진심어린 질문을 던지세요.”입니다. 참으로 알고 싶어 하는,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형태만 의문문이고 실제로는 억압적 청유, 심지어 지시일 경우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깔아놓고도 아이들 탓하는 부모가 아이들의 입을 닫게 합니다. 아이들을 침묵에서 해방하려면 부모의 진심을 공평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이치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두루 적용됩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이 침묵하는 이유는 여럿 있을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공격적인 고통 엄습할 때, 극도의 두려움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깊은 절망에 사로잡힐 때, 한사코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 참아 견뎌야 한다고 믿을 때, 그리고 공동체가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어떤 경우든 침묵의 대가는 고립입니다. 고통은 증폭됩니다. 침묵하는 본인은 그 침묵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침묵 자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됨은 물론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만들어냅니다. 그 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말하게 해야만 합니다.


더 많은 것이 말해질수록,·······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인간이 되어갑니다. 증폭되는 고통을 겪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침묵이 괴괴할수록, 그 침묵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여타의 구성원이 의식하지 못할수록 공동체는 공동체성을 상실해갑니다. 대한민국 노인들이 침묵 속에 죽어갑니다(노인 자살률 OECD 1위). 저들이 침묵을 깨게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침묵 속에 죽어갑니다(청소년 자살률 OECD 1위). 저들을 침묵에서 해방해야 합니다. 세월호사건 유족이 침묵을 강요당한 채 더 큰 고통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갑니다. 저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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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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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귀감의 예를 필요로 한다. 자기 신화의 영웅적인 면모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데, 그것은 상처입음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257쪽)


찢어진 마음만큼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_메나헴 멘델


585번 찢어진 마음, "상처입음"으로 오늘이 여기 멈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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