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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적인 몸의 욕망은 생산적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이기를 추구하는 것, 존재의 한 방식으로서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것이 이 타자를 그 사람 자신의 우연성에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무엇이 그를 고통에 처하게 할 것인지는 자신의 자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만큼이나 우연적이다. 소통하는 몸은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체현된 우연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소통하는 몸은·······은혜를 공유하고자 한다.·······
·······은혜는 몸이 소통하는 몸으로서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이다. 이 은혜의 본질은 그것이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자아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246-248쪽)
작년쯤인가, 스포츠 계통 월드스타들한테 성공의 비결을 물은 데 대한 답변을 두고 누군가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타이거 우즈는 타고난 재능이란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고 노력만이 길이다, 라고 답했답니다. 김연아는 타고난 재능, 노력, 운을 모두 거론하면서, 특별한 길이 따로 있지 않다, 라고 답했답니다. 글쓴이는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라는 정치철학적 화두를 거론하면서 일반인들이 끌리는 우즈 식 발언의 매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김연아의 말이 더 이치에 맞고 진정성 있지 않느냐, 대략 이런 정도 내용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듯합니다. 기억을 되살리며 새삼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로 정곡을 찌르는 통찰이 담긴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운運을, 위 인용문에서는 우연과 은혜라는 두 말로 표현합니다.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을 인간적 관점에서 드러낸 우연은 운과 거의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좀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면 은총인데, 운과 우연에 비해 수직적 관계, 그러니까 하향성이 함축된 불가 예측·통제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서구, 특히 기독교적 어법일 것입니다. 만일 수평적 관계라면 적어도 드넓은 일방성이 듬뿍 담긴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셋 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생산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이 “생산적”인 결과의 본질은 시너지입니다. 시너지는 공동체적 진실을 지닙니다. 그 공동체적 진실은 구성원들이 “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을 “공유”함으로써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거두는 시너지는 총량이 있습니다. 많이 누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타인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감수성을 더 많이 키워야 합니다. 인간이려면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사회는 운도 자기 능력이라 우기는,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이 자기만의 능력에서 결과했다고 굳게 믿는 자들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명박 이후 두드러지게 이런 뻔뻔함이 사회 상층부에 미만해 있습니다. 저들의 정치는 우연성을 거부합니다. 자기 필연성을 고집합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감사 없이 요구만 합니다. 저들의 정치가 “생산적”일 리 없습니다. 소비적입니다. 기생적입니다. 수탈적입니다. 매판독재세력뿐 아니라 통칭 진보나 야당의 핵심에도 이런 자들이 준동합니다. 기회주의적 독선에 빠져 트로이 목마 짓만 거듭하고 있는 정상급 한 인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아를 공유하는 것”에 무관심한 난사람입니다.
우연과 은혜를 내팽개친, 그런, 난사람들이 시방 우리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