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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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말을 할 수 없었다.”·······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 때는 이다. 인간의 약함은 그와 같은 그 때는 이다. 분노했을 때·······, 목소리는 실패할 수 있다.·······윤리적 행동은··············그러한 실패를 회상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실패를 제공하면서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다.·······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위해·······분노를 사용한다.·······발견한 목소리는 기억에 대한·······책임을 충족시킨다.(255-256쪽)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후회 없는 삶을 살자, 하는 말이 이 맞는 말에 대한 맞는 응답일까요? 아닙니다. 후회라는 말은 오목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볼록한 표현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입니다. 후회 없는 삶은 깨달음 없는 삶입니다. 깨달음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 때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한 실패를 회상하고”서야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이제는 깨닫습니다. “인간의 약함은 그와 같은 그 때는”입니다. 인간의 강함은 타인에게 “그 실패를 제공하면서” 함께 공동체를 빚어 나아갈 ‘이제는’ 입니다. 공동체를 “발견한 목소리는 기억에 대한·······책임을 충족”시킵니다.


‘그 때는’ ‘이제는’ 사이가 너무 멀면 마음병을 얻습니다. 생각마다 행동마다 후회만 후렴처럼 따라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달음이 미루어진 이런 후회들은 자책감의 우물로 빠져 들어갑니다. 자책감의 우물 바닥에는 자기부정이란 괴물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자기부정의 괴물에 잡아먹힌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의 ‘그 때는’ ‘이제는’ 사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때는 실패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깨닫고 성공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데 깨달음이 계속 미루어지고만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더 미룰 수는 없습니다. 또 다시 어떤 식민지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매판독재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부정선거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제노사이드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또 다시 어떤 역사 쿠데타를 겪어야만 깨달을 것입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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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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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인 몸의 욕망은 생산적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이기를 추구하는 것, 존재의 한 방식으로서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것이 이 타자를 그 사람 자신의 우연성에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무엇이 그를 고통에 처하게 할 것인지는 자신의 자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만큼이나 우연적이다. 소통하는 몸은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체현된 우연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소통하는 몸은·······은혜를 공유하고자 한다.·······

  ·······은혜는 몸이 소통하는 몸으로서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이다. 이 은혜의 본질은 그것이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자아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246-248쪽)


작년쯤인가, 스포츠 계통 월드스타들한테 성공의 비결을 물은 데 대한 답변을 두고 누군가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타이거 우즈는 타고난 재능이란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고 노력만이 길이다, 라고 답했답니다. 김연아는 타고난 재능, 노력, 운을 모두 거론하면서, 특별한 길이 따로 있지 않다, 라고 답했답니다. 글쓴이는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라는 정치철학적 화두를 거론하면서 일반인들이 끌리는 우즈 식 발언의 매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김연아의 말이 더 이치에 맞고 진정성 있지 않느냐, 대략 이런 정도 내용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듯합니다. 기억을 되살리며 새삼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로 정곡을 찌르는 통찰이 담긴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운運을, 위 인용문에서는 우연과 은혜라는 두 말로 표현합니다.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을 인간적 관점에서 드러낸 우연은 운과 거의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좀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면 은총인데, 운과 우연에 비해 수직적 관계, 그러니까 하향성이 함축된 불가 예측·통제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서구, 특히 기독교적 어법일 것입니다. 만일 수평적 관계라면 적어도 드넓은 일방성이 듬뿍 담긴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셋 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생산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이 “생산적”인 결과의 본질은 시너지입니다. 시너지는 공동체적 진실을 지닙니다. 그 공동체적 진실은 구성원들이 “우연성에 대해 열려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이항적인 능력,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능력”을 “공유”함으로써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거두는 시너지는 총량이 있습니다. 많이 누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타인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감수성을 더 많이 키워야 합니다. 인간이려면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사회는 운도 자기 능력이라 우기는, 자기가 누리는 모든 것이 자기만의 능력에서 결과했다고 굳게 믿는 자들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명박 이후 두드러지게 이런 뻔뻔함이 사회 상층부에 미만해 있습니다. 저들의 정치는 우연성을 거부합니다. 자기 필연성을 고집합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감사 없이 요구만 합니다. 저들의 정치가 “생산적”일 리 없습니다. 소비적입니다. 기생적입니다. 수탈적입니다. 매판독재세력뿐 아니라 통칭 진보나 야당의 핵심에도 이런 자들이 준동합니다. 기회주의적 독선에 빠져 트로이 목마 짓만 거듭하고 있는 정상급 한 인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아를 공유하는 것”에 무관심한 난사람입니다.


우연과 은혜를 내팽개친, 그런, 난사람들이 시방 우리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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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 저 끝까지 내려갔다. 그 바닥은 단단하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통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바닥만이 단단하다는 것이다.(246쪽)


얼마 전 고등학생 하나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이른바 목동 맘이 키운 목동 키드입니다. 실은 몇 년 전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전교1등이었던 아이가 어느 순간 공부를 내려놓았습니다. 당연히 꼴등짜리 '쓰레기'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어머니는 폭력과 회유를 번갈아 행하며 도로 올라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사실은 그 목적을 위해 아이를 제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 번 상담하던 중 그 내용의 요약을 문서로 요구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의도에 부역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감으로 그 아이가 훗날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상담 첫날 나눈 대화 한 토막 때문입니다.


“너 지금 바닥인 거 맞니?”

“예.”

“다시 올라올 거니?”

“아뇨!”

“왜?”

“여기서 이전 나와 다른 나를 찾을 거예요.”

“그러면 됐다. 그 바닥이 네 ‘바닥’이다.”


분명히 바닥입니다. 하지만 도로 올라올 것이 아니라면 바닥이 아닙니다. 도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전 기준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다른데 어찌 꼭대기와 바닥이라는 수직관계가 있을 것입니까. 바닥은 그 바닥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것이기에 삶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차원을 바꾸는 “단단”한 “오직” 하나의 근거, 그것이 그 아이의 바닥이었습니다.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 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문태준의 <조춘早春> 전문입니다. 수직의 영역을 지녔던 그대가 오직 수평의 물, 그러니까 바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물의 유골인 나와도 결별입니다. 결별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 바닥입니다. 자기가 처한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결별 여부입니다. 결별은 깨침입니다. 깨침은 바닥에서만 일어납니다. 바닥에 닿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다시, 문태준입니다.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전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을 굽혀야만 합니다. 몸을 굽히지 않으면, 옛 자신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을 주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은 바닥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사코 높이 올라가려고만 하는 이 세상에서 몸을 굽혀 바닥에 닿으려는 것은 바보짓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보로 살라 가르치는 큰 스승 없으니 저 같은 무명의 의자라도 나서서 이리 주절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 꽃별들이 물 되어 바닥에 누워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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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필멸을 공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공통적인 필멸을 드러내는 것이다.·······“내가 한 때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직면했다면, 내게 두려워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내게 다시 한 번 권력을 행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237쪽)


가수 윤선애의 노래 <하산> 후반부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입니다. 필멸하기 때문에 삶이 간절해집니다. 간절하게 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필멸의 존재들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은 하나하나 특별합니다. 하나하나 특별하므로 서로서로 각별합니다. 서로서로 각별한 존재는 서로서로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드러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맞서야 할 것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필멸에 대한 두려움을 복원하려고 은폐를 통치 프레임으로 세웁니다. 은폐는 각별한 존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갈라진 각별한 존재는 서로의 특별함을 공격합니다. 특별함이 파괴된 존재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뿔뿔이 흩어진 존재들이 나뒹구는 세상이 아름다울 리 없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누가 간절함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간절함 잃은 세상은 필멸공포 초일극의 질곡 아래 신음할 것입니다.


시인 김소연은 신문 글 <청맹과니>에서 11.14집회를 철저히 은폐하는 권력과 그 주구인 관제 언론이 촉발시키는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집회가 왜 열렸는지, 집회의 중요한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지 않는 언론들이 무서웠다. 집회에 참가한 농부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게 됐다는 사실도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가 왜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그 절박한 이유를 꼭 알고 싶다.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정보에 차벽을 치는 언론이 무섭다. 광장에 차벽을 치고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는 공권력만큼이나 무섭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이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티브이와 신문이라는 사실이, 이미 그런 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무서워진다.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은 은밀하게 필멸로 스며들 것입니다. 차벽을 부수고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순간, 두려움의 에너지는 혁명의 타격으로 전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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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사회적 진단보다 의학적 진단을 선호한다. 의학적 진단은 치료를 승인하는 반면, 사회적 진단은 그 사회체제가 자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의 전제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변화를 요구한다.(223쪽)


서구 전통에서는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을 3대 신성학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정점은 신학입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공식 업무 중에 가운을 입습니다. 신을 대리한다는 상징적 표시입니다. 신성을 담는다는 것은 불변한다는 것입니다. 3대 신성학문의 패러다임은 일단 확립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이 기본적으로 체계의 단단함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할만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근본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대로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과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근본성radicality은 급진성radicality과 같은 말입니다. 문제의 근본을 참으로 깨달았다면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가가 그러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은 협잡의 산물임이 분명합니다.


협잡의 근원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치상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권력과 돈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우리 현실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에 눈멀고 권력의 개 노릇하는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가 대박 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제, 법관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말씀드리기로 하고 의사 이야기만 부연하려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 정확히는 양의사 집단은 가히 최고의 주류 집단입니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단 한 번도 핍박받지 않고 특권을 누려온 매판독재세력의 고급 부역 집단입니다. 대부분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바뀌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세상 아래서 더 많은 권력으로 환자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돈으로 호사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들에게 치료란 바로 그 탐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득권체제를 유지하고 확산하기 위한 관리 방식이자 재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지금, 집권 세력은 의료 민영화나 중독법 등을 통해 의사와 아픈 사람들을 장악하듯, 역사교과서 단일화를 통해 교사와 아이들을 장악하려 합니다. 교육과 의료는 시민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길러내는 과정으로서 양육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집권 세력은 이 문제의 결정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독수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 소용돌이는 분명 의학계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의학적 진단에 매몰되어 매판독재 세력의 주구 노릇하는 죄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됩니다. 가운을 벗고 시민으로 문제 한가운데 서야 합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도적떼가 무슨 짓을 하는지, 그 짓으로 망가진 사회를 어찌 변화시켜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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