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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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되찾기reclaiming·······그것의 정치적 차원·······.(144쪽)

·······되찾기는 질병 이야기가 중단을 통해 발화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목소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말해준다.(141쪽)

·······의학·······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체계·······이 체계는 환자에게 특정한 정체성, 즉 의학이 환자를 위해 유지하는 정체성이 될 것을 “강요”-요청으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하여 바꿈-한다. 진단은 이러한 정체성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의학의 이데올로기적 작업은 환자가 이 진단적 정체성을 적절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가 이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그/그녀는 자기 자신을 권력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로 배열하는 것이다.·······되찾기는·······대항 텍스트적 현실이다.(145쪽)


정치적 약자는 생물학적 약자입니다. 생물학적 약자는 병들기 쉬운 생명체입니다. 병들기 쉬운 생명체는 때 이르게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때 이르게 죽어가는 존재가 생기는 것은 수탈 정치 때문입니다. 수탈 정치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되찾기”가 시작됩니다. 되찾기는 “대항 텍스트적 현실”입니다. 대항 텍스트적 현실은 정치적 약자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의무이자 권리인 것이 천명입니다. 바야흐로 천명의 시간이 박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때와 인간의 도모는 서로 북돋웁니다天時人事兩相催. 인간이 “자기 자신을 권력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로 배열하는 것”을 스스로 깨뜨리지 않는 한 대항 텍스트적 현실은 오지 않습니다. 대항 텍스트적 현실을 열려면 빼앗긴 사람이 지금의 “정체성을 적절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여기는지 물어야 합니다. 질문이 바르면 바른 답의 기운이 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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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힐링일 수 있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아닌 한 그 힐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정치적 트라우마에는 사회정치적 힐링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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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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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는 부정을 거부하고 사회적 압력에 저항한다.(140쪽)


국사교과서를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의 패거리 영웅담으로 단일화시키려는 자들의 준동을 지켜보는 요즘 오백여 일 전 날들의 고통스런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곤 합니다. 그 때도 저들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을 단순 사고로 “부정”하였습니다. 그 때도 저들은 진실을 지키려는 시민에게 종북 딱지를 붙여 고립시키는 “사회적 압력”을 조작·유포시켰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들은 단지 정치를 잘못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병적 집착과 거짓으로 자신마저 속이면서 권력과 돈에 탐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인문학적 훈육과 사회 의학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부정을 거부하고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진실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알기에 진실인 것을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이 진실은 당신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당신은 그 진실 없이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고, 당신의 몸이 이미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140쪽)


단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가 이 나라 최고 통치자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의 도입부가 아닙니까. 단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항일의병장의 후손으로 육십년을 가난과 불우로 살아온 제가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김용주의 아들로 육십오 년을 떵떵거리며 살아온 김무성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의 도입부가 아닙니까. 저들은 “불편”하기 때문에 한사코 “진실”을 엄폐하려 합니다. 그러는 한 저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협잡질을 계속해도 저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고,” 저들의 “몸이 이미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자기기만을 되풀이하는 그 이상으로 우리는 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야기는 기억입니다. 기억의 본질은 이러합니다.


기억은 책임이다. 왜냐하면 기억이 말해짐에 따라 그것은 목격이 되고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의 의식에 이르기 때문이다.”(141쪽)


기억의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공동체의 의식”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국사교과서입니다. “내가 그것을 살아냈기 때문”에 진실인 수많은 고통의 이야기가 모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변화무쌍한 고요, 안정된 동요, 그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저항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새끼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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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하다는 것은 특별하다는 것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허무에 씻겨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무는 무한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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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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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이 당신이 원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정하고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검토에는 애도가 따를 것이다.(139쪽)


법과 제도를 갖춘 통치구조인 국가가 없을 때, 이익을 둘러싼 제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가 없을 때, 모든 개인의 삶은 각자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국가가 있고 정치가 있는 한, 각자도생 상태는 공적 폭력의 결과입니다.


앞서 저는 제 삶 육십년을 개인적 애도와 애정의 역설로 갈무리하였습니다. 눈치 채셨다시피 여기에는 치명적 누락이 있습니다. 국가와 정치의 전자기장을 들어낸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왜 지난 육십년이 애도로 칠갑한 세월이었는지 국가와 정치의 전자기장 안에서 소략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6.25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이 전쟁 흉내나 내며 놀던 시절, 증조부가 항일의병장으로 전사한 뒤 몰락해버린 잔반가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조부가 누군지 알면서도 열렬한 박정희 숭배자로 살았습니다. 어느 선거 때인가 스무 명도 안 되는 전국 홍보지도위원으로 임명되어 VIP 누구 바로 옆자리에서 술 마셨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되풀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삶에 어울리지 않게 남은 가족은 절대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경제의 기적이 그 숭배자 가족인 우리에게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굶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나마 뭐라도 먹는 날은 대부분 간장 국물에 끓인 우동국수였습니다. 그 가난 때문에 저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부터 제도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하는 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검정고시를 통해 극적으로 되살린 공부 길은 이후 방황과 파탄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정치는 물론 거기 견마지로를 다한 아버지마저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제 무릎 꺾는 일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제 좌절된 삶의 어느 길목에서 참담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어렵사리 쉰 넘은 나이에 한의사가 되고 나서도 얼굴 없는 공적 공격을 계속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공격으로 생겨난 폐허 위에 다시 벽돌 한 장씩 쌓아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국가와 정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왜 잘못되었을까요?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이 국가와 정치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살아온 대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제 삶을 횡단으로 살피면 끊임없는 지평 확대의 행로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단으로 살피면 국가와 정치의 왜곡 때문에 무수한 비틀거림과 삐뚤거림으로 어지러웠습니다. 방랑하듯 인연 맺은 법학의 사회과학적 마인드와 신학의 인문학적 마인드가 지금 제 상담 언어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은퇴를 코앞에 둔 시점에야 겨우 한의원 열고 앞으로도 많은 날 국가와 정치의 부조리 속에서 생존을 걱정해야만 합니다.


다 잘되었습니다皆是. 다 잘못되었습니다皆非. 다 잘된 제 삶에 애정을 표합니다. 다 잘못된 삶에 애도를 표합니다. 삶은 역설입니다. 역설인 삶의 비대칭적 대칭성을 깨달으면 부정과 긍정의 아귀다툼, 그러니까 우울증과 긍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느지막이 걸어서 육십년을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육십년, 애도로 칠갑한 세월의 틈새에서 지극한 애정으로 다독이며 견뎌왔습니다. 이제 안타까운 애정을 넘어 애도의 광활함, 그러니까 애도의 연대를 향하여 살아가겠습니다. 이제 제 삶과 인연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 애도의 인문학이 번져가도록 하겠습니다. 250위 꽃별 성령들의 가피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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