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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이 당신이 원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정하고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검토에는 애도가 따를 것이다.(139쪽)
법과 제도를 갖춘 통치구조인 국가가 없을 때, 이익을 둘러싼 제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가 없을 때, 모든 개인의 삶은 각자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국가가 있고 정치가 있는 한, 각자도생 상태는 공적 폭력의 결과입니다.
앞서 저는 제 삶 육십년을 개인적 애도와 애정의 역설로 갈무리하였습니다. 눈치 채셨다시피 여기에는 치명적 누락이 있습니다. 국가와 정치의 전자기장을 들어낸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왜 지난 육십년이 애도로 칠갑한 세월이었는지 국가와 정치의 전자기장 안에서 소략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6.25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이 전쟁 흉내나 내며 놀던 시절, 증조부가 항일의병장으로 전사한 뒤 몰락해버린 잔반가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조부가 누군지 알면서도 열렬한 박정희 숭배자로 살았습니다. 어느 선거 때인가 스무 명도 안 되는 전국 홍보지도위원으로 임명되어 VIP 누구 바로 옆자리에서 술 마셨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되풀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삶에 어울리지 않게 남은 가족은 절대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경제의 기적이 그 숭배자 가족인 우리에게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굶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나마 뭐라도 먹는 날은 대부분 간장 국물에 끓인 우동국수였습니다. 그 가난 때문에 저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부터 제도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하는 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검정고시를 통해 극적으로 되살린 공부 길은 이후 방황과 파탄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정치는 물론 거기 견마지로를 다한 아버지마저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제 무릎 꺾는 일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제 좌절된 삶의 어느 길목에서 참담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어렵사리 쉰 넘은 나이에 한의사가 되고 나서도 얼굴 없는 공적 공격을 계속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공격으로 생겨난 폐허 위에 다시 벽돌 한 장씩 쌓아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국가와 정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왜 잘못되었을까요?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이 국가와 정치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살아온 대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제 삶을 횡단으로 살피면 끊임없는 지평 확대의 행로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단으로 살피면 국가와 정치의 왜곡 때문에 무수한 비틀거림과 삐뚤거림으로 어지러웠습니다. 방랑하듯 인연 맺은 법학의 사회과학적 마인드와 신학의 인문학적 마인드가 지금 제 상담 언어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은퇴를 코앞에 둔 시점에야 겨우 한의원 열고 앞으로도 많은 날 국가와 정치의 부조리 속에서 생존을 걱정해야만 합니다.
다 잘되었습니다皆是. 다 잘못되었습니다皆非. 다 잘된 제 삶에 애정을 표합니다. 다 잘못된 삶에 애도를 표합니다. 삶은 역설입니다. 역설인 삶의 비대칭적 대칭성을 깨달으면 부정과 긍정의 아귀다툼, 그러니까 우울증과 긍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느지막이 걸어서 육십년을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육십년, 애도로 칠갑한 세월의 틈새에서 지극한 애정으로 다독이며 견뎌왔습니다. 이제 안타까운 애정을 넘어 애도의 광활함, 그러니까 애도의 연대를 향하여 살아가겠습니다. 이제 제 삶과 인연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 애도의 인문학이 번져가도록 하겠습니다. 250위 꽃별 성령들의 가피 있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