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최종적인 요구란 없다. 욕망은 언제나 더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몸은, 특히 아픈 몸은 욕망하기를 중단한다. 욕망에 관한 몸의 문제는 욕망을 결여lack하게 된 몸과 욕망을 생산하는productive 몸 사이의 연속체를 생성하는 것이다.·······
······질병은 어떻게 욕망을 생산하는 몸이 되는지에 대해 새로운 성찰을 야기할 수 있다.·······
욕망이 성찰적으로 되어갈수록,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에 대해 증대하는 책임을 가정하는 것이 시작된다.·······고통의 공동체는 다른 몸을 위해 몸이 되고자 하는 윤리적 선택에 기반한 생산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스토리텔러·······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아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증언은 당신이 아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자신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공통성commonality으로서의 아픔을 공유하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98-101쪽)
치명적인 질병은 “커다란 승인permission과 같다.”·······(99쪽)
인간은 욕망하는 인간입니다. “욕망하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사건이 바로 질병입니다. 질병을 통과하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삶의 한가운데서 경험하면서 인간은 “새로운 성찰”의 지복을 받습니다. 새로운 성찰은 “결여”와 “생산”을 가로지르는 여행입니다. 여행하는 인간은 반대편에 다다랐을 때에도 같은 가방을 든 같은 사람, 그러니까 “연속체”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정체성을 띠게 됩니다. 같은 가방은 이제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됩니다. 삶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던 근본적인 전제들은 바뀌어 있습니다.(6. 여행하는 인간homo viatro에서 인용한 본문을 인용자가 적절히 바꿈.) 바야흐로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에 대해 증대하는 책임을 가정하는 것이 시작”됩니다. “다른 몸을 위해 몸이 되고자 하는 윤리적 선택에 기반한 생산적 욕망”으로 나아갑니다. 생산적 욕망. 참으로 급진적 변혁의 표현입니다. 절제 또는 제거라는 소극적 윤리로는 인간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각성이 담겨 있습니다. 개별화된 개인의 깨달음으로는 인간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욕망은 불가피하며 개별적 절제 또는 제거로는 불가능하다 할 때 단 하나의 길은 “가장 근본적인 공통성commonality으로서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뿐입니다. 공유는 다만 함께 지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함께 지니려면 함께 만들어야生産 합니다. 함께 만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나누어 널리 번지고 흘러가는 동안 욕망은 휴먼스케일 안에 머뭅니다. 휴먼스케일 안에 머무는 욕망은 “최종적인 요구란 없다. 욕망은 언제나 더 원하는 것이다.”라는 써늘한 지적 앞에서 담담하고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담담하고 당당해진 공동체적 삶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살아감입니다. 이 살아감은 고통의 “커다란 승인permission”에서 온 광활함과 영성의 결론입니다. 이 결론이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의 길이며 나사렛 예수의 길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오늘 날 이 길에서 이탈한 것은 위대한 가르침의 겉모습만 취했기 때문입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가르침의 핵심은 행위 자체의 공동체성, 그러니까 연대성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통속한 그 종교들이 준동하는 여기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어떻게 고통의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지, 어떻게 공동체의 고통이 증폭되어 가는지, 어떻게 결국 고통 받는 인간들만이 파괴되어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겪은 질병이 “치명적”이지 않아서 커다란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까. 이인제 말마따나 6천만을 죽여도 격하당하지 않는 모택동 같은 자의 통치를 받은 뒤에야 길이 열리는 것입니까. 아이들 250명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으니 더 죽이고 나서야 공동체다운 공동체가 서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