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몸은 발화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불러일으킨다.·······이야기들을 듣는 데 있어 문제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말하는 몸을 듣는 것이다.·······몸은 이야기에 특정한 형태와 방향을 부여한다.(80쪽)


새누리당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회 위원장에 김을동이 앉혀진 것을 두고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새누리당이 김을동을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에 앉혔다는 것은 까다로운 논의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이다. 지극히 섬세하지만 명백한 문제를 놓고, 반지성주의와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가.”


이 짧은 글에는 김을동이란 인물을 상징으로 하는 새누리당 “이야기에 특정한 형태와 방향을 부여한” “”의 실상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암시가 구태여 입 댈 것은 아니라서 저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김을동이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일으킨 역사쿠데타의 얼굴마담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서사적 교차가 결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김을동이 유명한 연기자 출신이라는 데서 맥락을 이루는 서사입니다. 저들이 ‘올바른’ 교과서라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지만 실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이 ‘개선’이라고 목청을 돋우지만 실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존엄’이 세월호사건에서 손수 시범을 보인 바가 살아 있는 경전이 되어 역사쿠데타 세력의 행동강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놓고 기만하는 배짱입니다.


다른 하나는 김을동이 김좌진 장군의 후손으로 회자되는 기묘한 서사입니다. 그 통속한 이야기가 사실이면 사실인 대로 거짓이면 거짓인 대로 그 서사는 우리 현대사의 불쾌한 스캔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일독립투쟁 영웅의 후손이 독립군 토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를 미화하는 일에 앞장선다, 또는 독립군 토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를 미화하는 일에 앞장서면서 자기 선조가 항일독립투쟁 영웅이라 주장한다, 이 둘 모두 말 안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기든 아니든 대놓고 이런 분열적 상황조차 이용해먹는 상술입니다.


이 두 서사의 교집합은 진실의 왜곡입니다. 그 왜곡을 엄폐하는 것이 바로 반공주의입니다. 반공주의는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고 거기 부역한 자들이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동원한 야비한 술수입니다. 매판과 독재, 그리고 분단 고착 세력을 지키는 살인병기입니다.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식민의 삶을 살았으므로 부역행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대다수 민중의 죄책감을 약점으로 잡고, 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 전쟁을 통해 얻은 공포심·적대감을 극대화함으로써 반공주의는 초대박 상품으로 굳게 자리 잡았습니다.


반공주의의 축복을 받으며 애국을 전유한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은 이제 유체이탈어법으로 일가를 창립했습니다. “이야기들 속에서 말하는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데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반대의 유체이탈어법도 있습니다. 몸을 이탈시키고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 다 몸과 이야기의 분리, 몸과 마음의 분열입니다. 몸을 떠난 이야기는 허구이며, 몸을 떠난 마음은 허깨비입니다. 허구는 이야기가 아니고 허깨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기 원합니다.


국정교과서 문제는 다만 교과서 문제가 아닙니다. 교과서 이야기의 몸, 그 몸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몸은 바로 자주독립입니다. 민주주의입니다. 민족통일입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 놓고 외출한 혼을 하루 빨리 되찾아야 합니다. 250명 말고 새끼들이 얼마나 더 죽어나가고서야, 그 몸의 말을 얼마나 더 틀어막고서야 우리가 인간 구실을 할 것입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어려운 의무들 중 하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듣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이다.·······타자를 위해 들음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듣는다는 것·······이야기에서 목격의 순간은 요구의 상호성을 확고히 하는데, 이 때 각각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77-78쪽)


2015년 10월 18일 오후 광화문에서 단원고 명예3학년 9반 정다혜의 아버지가 딸아이 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슬펐습니다.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절망감으로 아뜩해졌습니다. 홀로 술을 마시며 제 영혼이 뒤척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밤늦도록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았습니다. 저 또한 한 딸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딸을 추억하던 그 아버지의 음성이 여태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듣기는 어려운 일”임을 통감합니다. 어려워도 들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어려운 의무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타자를 위해 들음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는 그 “때 각각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인간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혜를 죽이고 다혜 아버지도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은 오늘도 귀를 막고 있습니다. 저들은 듣는 인간homo auditus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기가 떠들 때만 귀를 열어 자기 말만 듣습니다. 자기만의 말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도착 귀鬼들입니다. 저들은 이제 역사를 죽이자고 떠드는 자기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사나무 칼’이 필요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분은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74-75쪽)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여기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요청에 극진히 감응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경청傾聽합니다.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짓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전제와 분석틀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경청敬聽합니다.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야기 자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경청하고 또 경청함으로써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때,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하나 탄생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아픈 이야기를. 그것도 슬픈 이야기를. 그 사이 제가 겪은 가장 근본적radical이고 급진적radical인 변화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먼저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하면 감성은 활짝 펴지고 이성은 고요히 접힙니다. 이야기를 흠뻑 들을 수 있습니다. 감염이 스며들고 경험이 번져옵니다. 진실에 닿습니다. ‘사흘’ 뒤 이야기와 저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꽃피기 시작합니다. ‘사흘’은 감응 발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사흘’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제가 이야기로 아픔과 슬픔 전해온 사람을 치유한 적은 없습니다.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무슨 말이든 남의 말을 들을 때 무조건 무장해제하고 듣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습관이 때때로 제게 크고 작은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일상의 삶은 대부분 손익을 다투는 거래입니다. 그 거래에서 ‘사흘’이 필요한 상대방은 많지 않습니다. 상담실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물론 맞지만 저 같은 어수룩한 사람한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는 손해가 그나마 돈 따위면 견딜만합니다. 더러 인격과 인연에 끼쳐오는 손해는 참으로 쓰디씁니다. 삶의 이런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운명이라 하면 너무 남루해집니다. 저는 이것을 천명이라 부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얼버무리는 듯이 한 개인적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이었다.(71-72쪽)


“그 어떤 시인도 자신이 쓴 시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어디서 읽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저는 이 말의 제 버전 때문에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떤 상담의도 자신이 상담 중에 한 말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상담에서는 당연히 제 삶과 인격이 말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제 진실에 터하여 말하는 것은 불퇴의 원칙입니다. 원칙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자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살아내지 못한 이야기를 짐짓 체득한 표정으로 건네기도 합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런 괴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흔들리면서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연유를 저자가 차분하게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중용』제6장에는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악은 감추고 선은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을 척결하지 않고 감추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악을 너그럽게 묻어주어 언젠가 선으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두기 위함이 아닐까요? 여기 거짓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참과 거짓 여부는 말하는 순간에 최종적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거짓이 참으로 바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제가 자책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담치료를 계속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 또한 이 지평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 때문에 훨씬 더 격렬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부부 상담의 경우, “이야기의 진실성” 문제는 첨예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아내의 말이 100% 참이고, 남편의 말을 들으면 남편의 말이 100% 참인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둘의 말이 모순된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쪽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 처지를 최대한 반영하여 말하므로 자기 고통은 크고 뚜렷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고통은 “얼버무리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과장과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진실이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것은 인생에서 불가피한 일입니다. 모순의 공존이 빚어내는 역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서로 평등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대승적 진실성이 확보됩니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이야기도 지속됩니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흐름을 따라 진실이 형성되어갑니다. 진실은 불변적 실체로서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흔들리면서 결이 되어가는becoming 생명체입니다. 대한민국, 우리 공동체의 진실이 빠른 속도로 그 생명의 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거짓 이야기로 통치를 행사하는 권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부정선거, 대량학살, 역사쿠데타와 같은 이 시대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책임은 권력이 져야 하되 삶은 우리 몫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포스트모던적인 자아의 대안적 형태·······는 “타자를 위한 자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아”이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자아는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수 있다.·······(60-61쪽)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세상에 대한 책임이라는 생각은 포스트모던의 핵심적인 도덕을 반영한다. 이야기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큼이나 타자를 위한 것이다.·······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증언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65쪽)


몇 해 전 어느 교회에서 강연을 요청해왔습니다. 한의사가 마음의 병을 상담으로 치료한다 하니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정신과 양의사 두 사람이 앉아서 제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제 이야기가 무척 낭만적이라고 했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환우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을 전한 이에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문제라고.


물론 서양 정신의학은 의사를 치료의 단독 주체로 설정하므로 상담에서 평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환우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분석과 처방을 위한 것일 뿐 의학 서사의 주체적·능동적 콘텐츠로 삼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이들 서양 정신의학의 경계 지음을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러한 태도는 제가 낭만주의자라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견지하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와 의학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자아는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수 있다.


서양 정신의학에서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인 의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서양 정신의학에서 의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의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느냐 마느냐, 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세상에 대한 의사의-인용자 부가- 책임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생각입니다. 이는 비단 세상에 대한 책임 뿐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증언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자기 앞에 앉은 환우는 물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사가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않는다면 그 자체로 수탈 행위입니다. 특정 병력이 있느냐와 상관없이 의사 또한 완전하지 않은 도상의 존재입니다. 의사 또한 죽는 날까지 자라가야 하는 과제를 지고 있습니다. 자라감으로서 치료는 상호작용입니다. 의사는 증언의 의무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정교한 거짓말(허윤진 평론집 『5시 57분』44쪽)에 지나지 않는 이른바 ‘과학인 의학’ 위에 올라타 떠는 시건방을 의사는 즉각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자를 위한 자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아”의 길로 내려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길을 이탈한 자들은 의사뿐이 아닙니다. 부패한 사회의 지배층은 모두 이런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드디어 엊그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세월호를 뒤집던 그 협잡으로 이번에는 역사를 뒤집겠다고 날뜁니다. 자기 삶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아니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 이야기를 거부하려는 저 인간 아닌 종자들을 우리가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