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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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우리의 몸(body)이 자아의 전부이자

운명이 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내 몸 안에만 있었다.·······나의 몸은·······나의 재앙이었다.

나의 몸은 나의 신체적(physical)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엄이었다.


저자가 제사題詞에 장 아메리의 말을 올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장 아메리는 제가 지난 2~4월에 주해 리뷰 37개를 쓴 책 『늙어감에 대하여』의 저자입니다. 기억하실 테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전사로 나치한테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의 증언을 책의 첫머리에 내세운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곡진한 지향과 육중한 문제의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문당해 짓이겨진 몸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몸은 다릅니다. 그 몸의 마음도 다릅니다. 마음이 다르면 증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지만 완전히 쪼개지지는 않습니다. 고문당한 외상도 결국은 질병입니다. 수많은 질병들이 사실상 사회정치적 고문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양자의 내적 중첩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대놓고 논급하지는 않습니다. 장 아메리의 인용이 독자들에게 초두효과를 일으켜 책 전체 내용의 행간을 읽는 인상으로 작용하리라 믿습니다.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은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재앙이 “자아의 전부”입니다. 자아의 전부는 “나는 내 몸 안에만 있”습니다. 내 몸 안에만 내 “운명”이 흐릅니다. 운명으로서 “나의 몸은 나의 신체적(physical)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엄”입니다. 존엄의 인식과 공유는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의 증언은 인간 윤리의 불가피한 지성소입니다.


인간 윤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공존입니다. 공존의 윤리는 고통 받은 몸의 경험이 서로에게 번져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서로에게 번져가는 숭고한 수평 운동을 우리는 연대라 이름 합니다. 연대는 책임입니다. 책임의 자각은 고통 받는 몸에서만 일어납니다. 고통 받는 몸을 통해 발효되지 않은 그 어떤 깨달음도 부패한 깨달음일 따름입니다. 부패한 깨달음이 오늘 여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 세상은 더는 공존을 꿈꾸지 않습니다. 공존을 꿈꾸지 않는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할까요?


고통 받는 몸들이 일어나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서로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서로 그 재앙에, 그 운명에 감응해야 합니다. 재앙과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정치학은 정치인의 것이 아닙니다. 거짓 정치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의학은 의사의 것이 아닙니다. 거짓 의료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돌들이라도 소리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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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저 처연했던 모습의 

예은 아빠가


2015년

여전히

광화문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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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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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118쪽)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심리 통치에 굴종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심리 때문입니다. 고통이 주는 불편을 피해 안락하게 살고 싶은 심리. 결핍이 주는 불편을 피해 풍요롭게 살고 싶은 심리. 우매가 주는 불편을 피해 지혜롭게 살고 싶은 심리.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심리 지향에 가짜 답을 주어 착취하는 신노예제사회를 구축하였습니다. 안락 대신 향락을 주었습니다. 향락은 병인 중독입니다. 풍요 대신 집요를 주었습니다. 집요는 죄적 탐욕입니다. 지혜 대신 지능을 주었습니다. 지능은 지의 무지입니다.


향락을 내려놓습니다. 집요를 내려놓습니다. 지능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집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으로 부정不定에 이릅니다. 부정不定의 자유, 저 광대무변한 우연성에서 뛰노는 아기로 태어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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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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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111쪽)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117-118쪽)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 그리고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서나 성공하는 상위1%의 사람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들이 세상을 망칩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은 우울을 장애로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지배당하고 이들이 세상을 떠받칩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애를 장애로 지닌 사람입니다. 이들이 지배자의 마름 노릇을 하고 이들이 세상을 통속화합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사람이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내재적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보입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아야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개별성이나 주체성”에 묶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독특함, 특이성”이 본질로 자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놓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일 수 있습니다.


길은

외줄기

오직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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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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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지금까지 통용되던 것,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건자연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일어난다.·······사건은 어떤 외부적인 요소를 판 안으로 끌어들여, 주체를 열어젖히고 예속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사건은 새로운 자유 공간을 여는 단절과 불연속성을 의미한다.

  ·······사건은 전환이다. 전환을 통해서 전도, 지배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진다.(107-109쪽)


TV나 라디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대한민국은 뉴스 과잉 사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송되는 횟수나 시간 면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런 양적·외적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뉴스의 질적·내적 측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땡× 뉴스’를 필두로 정치경제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 왜곡된 홍보성 사이비 뉴스입니다. 저렇게까지 세세히 알릴 필요가 있을까 싶도록 사회악과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선정적 뉴스도 넌덜머리가 납니다. 재벌가나 연예인 관련 뉴스는 마치 악머구리 소리 같습니다.


이렇게 날뛰는 저질 뉴스가 저지르는 두 가지 패악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사실 보도를 가장한 주입식 교과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수시로 이런 뉴스에 강제되어 피폐해집니다. 비판과 저항의 힘을 잃어갑니다. 이를 뉴스포스News-force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민들로 하여금 뉴스에 빠져들면서 우리사회의 모든 면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쾌감을 느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마치 건강한 감시자가 된 듯 착각합니다. 사회적 관음증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습니다. 이를 뉴스포르노News-porn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들이 ‘사건’이라고 떠들어대는 것들 대부분은 “통계적 개연성”(107쪽) 안에서 조종되는 부역附逆의 에피소드들입니다. 본디 사건은 조종되지 않은 것,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입니다. 사건은 “주체를 열어젖히고 예속 상태에서 해방”하는 “단절과 불연속”의 솟아오름입니다.


우리사회는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뉴스포스는 사건을 사고로 왜곡하고 조작합니다. 뉴스포르노는 사고의 전모를 보여준다며 주변을 들춰내 싸구려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건은 “지금까지 통용되던 것, 기존의 질서”로 통합됩니다. 보상으로 끝납니다.


세월호사건, 바로 이런 뉴스포스와 뉴스포르노의 협잡으로 세월호사고가 되어 다시 침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으로 반드시 세월호사고를 세월호사건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잊지 맙시다. “사건은 전환이다. 전환을 통해서 전도, 지배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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