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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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질환이 이야기 속에서는 서로 공유하는 취약함을 통해 육체들을 연결시키는 고통의 공통분모가 된다.

  ·······환자로서, 사람들은 돌봄을 받는다. 그러나 스토리텔러로서, 그들은 타인들을 돌본다. 아픈 사람들, 그리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 역시 치유자일 수 있다. 그들의 상처는 그들의 이야기가 갖는 힘의 근원이 된다.·······이야기는 치유의 힘이 있으므로, 상처 입은 치유자와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물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26-28쪽)


고통의 치유는 그것을 온전하게 경험할 때에만 가능하다. _마르셀 프루스트


고통의 온전한 경험은 고통에 감응response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고통에 감응하면 그 고통은 이야기가 됩니다. 그 “이야기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갖는 힘의 근원”은 “상처”입니다. 상처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힘이 있다. _스타호크


두려움이 있는 곳에 있는 힘을 우리는 용기라 부릅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없앤 자리에 돌연 들어서는 무엇이 아닙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열리는 옹골찬 깨달음입니다. 옹골찬 깨달음은 우리가 금이 가 있는 존재임을 직시할 때 얻어집니다.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그것이 빛이 들어가는 길이다. _레너드 코엔


그렇습니다. 빛이 들어가려면 먼저 금이 가 있어야 합니다. 금은 틈입니다. 틈은 “분리”입니다. 분리의 고통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연결”됩니다. 연결은 “공유”의 조건입니다. 공유로써 “취약함”의 낮은 연대가 일어납니다. 낮은 연대가 치유입니다. 치유가 자유입니다. 자유가 구원입니다. 구원은 상처 입은 우리 스스로의 온전한 고통 경험에서 옵니다.


온전한 고통 경험 여부가 갈리는 지점은 두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두려움이 건네는 앎의 방식이 아프고 불편하여 거절하면 그 즉시 격분이 들이닥칩니다. 격분은 감정 아닌 폭력입니다. 폭력으로서 격분은 탐욕을 두들기고 무지를 뒤흔들어 자타공멸의 길로 질주하게 합니다. 목하 대한민국은 격분 공화국입니다. 지배층과 그 마름들이 길길이 날뛰며 공동共同체를 공동空洞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시민의 선한 분노, 곧 용기를 격분으로 왜곡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저들의 협잡에 휘말리지 않고 존엄한 분노, 준엄한 용기를 간직하고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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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은 질병을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운명을 경험으로 전환시킨다.(26쪽)


<너에게>


유치환


물 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젊은 날 노래로 만들어 부를 정도로 애송했던 시입니다. 시에 따르자면 “운명”이란 삶의 능동적 수용입니다.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험”의 철학적 정의는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 지각, 내성內省 작용 전체 또는 그 과정에서 획득된 의식 내용입니다.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운명을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전형이 있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바로 노자 『도덕경』​ 제1장입니다. 허다한 대가들의 해석과 달리 저는 이 문장을 의학적 견지에서 이렇게 이해합니다.


“도를 도 이야기로 만들면 비상한(치유의) 도가 된다. 명을 명 이야기로 만들면 비상한(치유의) 명이 된다.”


비상한(치유의) 도/명이 다름 아닌 “경험”입니다. 이야기를 통해 달여진 경험이 고통의 공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고통의 공유가 치유의 연대를 이룹니다. 치유의 연대는 지상의 연대입니다. 지상의 연대인 까닭은 개인의 아픈 운명에서 공동체의 거룩한 경험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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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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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으로서의 질병illness-as-normality·······이것은 질병과 질병이 부과하는 어떤 요구나 제한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이 “정상적”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이 서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적은 질병에 주목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소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 유형이다. 왜냐하면 질병 혹은 장애는 최소화를 요구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19쪽)


제법 오래 전 티베트 의학승 다이쿠바라 야타로가 쓴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신선하여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서구 세계는 병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여기지만 티베트나 인도에서는 병을 함께 살아갈 친구로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이 책은 나중에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아마 이마저도 절판되었을 것입니다만.


아픈 사람들이 의사에게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완치되느냐?’입니다. 특히 정신적 장애로 찾아온 사람들의 이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큽니다. 제 경우 각기 다른 구체적 상황에 따라 여러 대답을 하지만 맨 마지막에는 ‘마음의 병에 완치 개념이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마음은 기억이고 기억이 있는 한 마음의 아픔은 도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래도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에게 ‘병을 친구 삼으면 푸근한 마음으로 한 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뒷단속을 해줍니다.


서양의학은 약으로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어줄 것처럼 떠벌이지만 실제로 그 변화는 증상을 찍어 눌러서 나타나는 것이지 치료가 아니므로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400가지 이상의 심리치료에서 쓰는 각종의 요법, 예컨대 EMDR, EFT, NLP 같은 것들도 피상적인 걷어내기skimming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도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장애에서 말하는 정신은 근원적으로 분석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은 자체로 형용모순입니다.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은 그러면 비정상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이 바로 “정상성으로서의 질병illness-as-normality” 서사입니다. 이 서사의 핵심 주장은 “질병과 질병이 부과하는 어떤 요구나 제한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이 “정상적”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감합니다. 동의합니다. 수용합니다. 단, 결론에 이르는 논리는 바꾸어야 합니다. “에도 불구하고”가 아닙니다. “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따라오는 불편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니!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따라오는 불편함이 없는 존재는 당최 인간 일 수 없습니다. 인간인 한, 아픕니다. 아픈 인간만이 정상적인 삶이 무엇인지 증득證得할 수 있습니다.


질병에 주목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은 아파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입니다. 아픔 때문에 혼돈에 빠질 지경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삶이 아픔에 함몰되고 마는 상황이기에 말입니다. 결국 아파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필요충분조건은 질병 또는 장애가 “최소화를 요구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설한 중도中道이며, 중도가 정도正道입니다.


우리 모두 아프지 않고 살다 죽으면 더는 소원 없겠다 말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비정상입니다. 아픔을 맞닥뜨리면 대뜸 진통제부터 처방하는 현대의학은 비정상 의학입니다. 비정상 의학에 몸을 맡긴 채 인류는 전방위적인 진통의 중독으로 빨려들고 있습니다. 부디 중독에서 벗어나, 인간 생명은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죽음을 향해 가는 유한한 현상이라는 사실, 그래서 아프다는 사실, 아파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길 기원합니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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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없이는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9쪽)

  ·······의학적 서사가 아픈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너무 많이 빠뜨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학적 이야기는 빈약하다. 그것은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과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포함하지 못한다.·······질병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자아를 재창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에 의료 서사는 빈곤한 자원이다.(16-17쪽)


이론을 다루는 의학서든 임상에서 나오는 진료부든 의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모두 외국어일 따름입니다. 아픈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모국어의 세계에서 외국어의 세계로 내팽개쳐집니다. 그들의 모국어는 아주 조금, 증상과 치료 과정에서 지각되는 변화의 표현 정도를 빼면 의학적 서사에 끼어들 틈이 전혀 없습니다. “의학적 서사가 아픈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너무 많이 빠뜨린다”는 지적은 지적 이상으로 사실입니다. ‘아픈 사람 없이 아픈 사람에 대한 것만 있는’ 난해 서사가 바로 의학적 서사입니다. ‘아픈 사람 없이 아픈 사람에 대한 것만 있는’ 난해한 의학적 서사에 대해 여태까지 아픈 사람들이 본격적인 의문을 제기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진단과 치료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자리 매겼기에 목소리가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기되지 않았으므로 문제일 수 없었던 이 문제를 이제 정색하고 제기해보겠습니다.


의학적 서사는 인간 생명의 질병 현상과 그 치료를 다루므로 그 어떤 서사보다 핍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핍진함은 의당 아픈 사람의 경험과 증언에 힘입어야 합니다. 물론 진단과 치료에서 전문적 지식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 일일이 아픈 사람의 경험과 증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질병도 생명 현상의 하나이며 생활의 일부이므로 질병의 진단·치료가 그 생명·생활 주체를 배제한 의사의 단독행위일 수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질병과 그 진단·치료를 둘러싼 사태 전체에서 의사가 개입하는 의료 부분은 중요하지만 극히 작습니다. 의사의 의료적 개입이 유효하지 않은 경우가 유효한 경우보다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픈 사람의 삶에서 명멸해가는 육체적·심리적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경제적 문제,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의사는 개입하려고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현행 의료적 서사가 “빈약”하고 “빈곤”한 소이입니다.


새로 쓰는 의료적 서사는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과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질병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자아를 재창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서사는 일으켜지는 장場이 아픈 사람의 질병과 생활이므로 기본적으로 아픈 사람, 그 당사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아픈 사람의 식민지성 극복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연대가 불가피합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이 이 서사를 빚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의사가 도울 수 있으려면 의학 개혁이 선행돼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류의학의 기계론적 패러다임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의학교육에서 인문교육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인문교육을 제대로 하는 의대는 전혀 없습니다. 현행 의학과 의학 교육으로 양성되는 의사가 아픈 사람의 삶, 자아 재창조 문제에 관심 두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픈 사람들은 함께 뛰어야 합니다. 의사들은 날아야 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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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몸(body)이 자아의 전부이자

운명이 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내 몸 안에만 있었다.·······나의 몸은·······나의 재앙이었다.

나의 몸은 나의 신체적(physical)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엄이었다.


저자가 제사題詞에 장 아메리의 말을 올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장 아메리는 제가 지난 2~4월에 주해 리뷰 37개를 쓴 책 『늙어감에 대하여』의 저자입니다. 기억하실 테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전사로 나치한테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의 증언을 책의 첫머리에 내세운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곡진한 지향과 육중한 문제의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문당해 짓이겨진 몸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몸은 다릅니다. 그 몸의 마음도 다릅니다. 마음이 다르면 증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지만 완전히 쪼개지지는 않습니다. 고문당한 외상도 결국은 질병입니다. 수많은 질병들이 사실상 사회정치적 고문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양자의 내적 중첩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대놓고 논급하지는 않습니다. 장 아메리의 인용이 독자들에게 초두효과를 일으켜 책 전체 내용의 행간을 읽는 인상으로 작용하리라 믿습니다.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은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재앙이 “자아의 전부”입니다. 자아의 전부는 “나는 내 몸 안에만 있”습니다. 내 몸 안에만 내 “운명”이 흐릅니다. 운명으로서 “나의 몸은 나의 신체적(physical)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엄”입니다. 존엄의 인식과 공유는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고통 한가운데 있는 몸의 증언은 인간 윤리의 불가피한 지성소입니다.


인간 윤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공존입니다. 공존의 윤리는 고통 받은 몸의 경험이 서로에게 번져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서로에게 번져가는 숭고한 수평 운동을 우리는 연대라 이름 합니다. 연대는 책임입니다. 책임의 자각은 고통 받는 몸에서만 일어납니다. 고통 받는 몸을 통해 발효되지 않은 그 어떤 깨달음도 부패한 깨달음일 따름입니다. 부패한 깨달음이 오늘 여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 세상은 더는 공존을 꿈꾸지 않습니다. 공존을 꿈꾸지 않는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할까요?


고통 받는 몸들이 일어나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서로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서로 그 재앙에, 그 운명에 감응해야 합니다. 재앙과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정치학은 정치인의 것이 아닙니다. 거짓 정치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의학은 의사의 것이 아닙니다. 거짓 의료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돌들이라도 소리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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