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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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투명성정치적 요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그것은 참여하는 시민의 요구가 아니라 수동적인 구경꾼의 요구다.·······구경꾼과 소비자 들이 거주하는 투명사회는 구경꾼 민주주의를 수립한다.(22-23쪽)


‘남의 집 불구경 않는 군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집만 아니면 불구경만한 구경꺼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담았습니다. 구경꾼 심리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본디 구경이란 그런 것입니다. 구경꾼에게는 구경 그 자체가 이득인데 부가적 이득이 있는 구경꺼리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굿입니다. 여기서 생긴 말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입니다. “구경꾼과 소비자 들이 거주하는 투명사회” 심리 풍경에 대한 이보다 더 절묘한 묘사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긍정심리가 갑인 사회, 대한민국.


불이든 굿이든 구경꾼에게는 어차피 남 일이니 거기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고 다만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는 정도가 최대한의 부정성 표현입니다. 변화는 언감생심 엄두조차 못 낼 일입니다. 남 일이니 세월호에 300명 넘는 사람들이 죽어도 궁시렁궁시렁하다 맙니다. 남 일이니 메르스에 걸려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도 궁시렁궁시렁하다 맙니다. 설혹 이런 일들이 누군가의 고의와 조작으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나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니 궁시렁궁시렁하다 맙니다. 궁시렁궁시렁·······


그러다 느닷없이 또 다른 세월호사건이 나를 덮치면, 또 다른 메르스사태가 나를 덮치면, 어찌 할까요? 답은 딱 하나뿐입니다. 공포 속에 죽어가는 것. 아무리 이웃을 향해 소리쳐도 돌아오는 반응은 궁시렁궁시렁 뿐입니다. 아무리 ‘그 누군가’를 향해 고함쳐도 돌아오는 반응은 가만히 있으라 뿐입니다. 수동적 소비자 구경꾼은 이렇게 서로 고립되어 함께 죽어가는 모순에 처합니다. 떡이나 먹지 하다가 떡이나마 먹었으면 하다가 떡마저도 먹지 못 하고 맙니다. “구경꾼”의 종말입니다. “구경꾼 민주주의”의 종말입니다.


꽤 오래 전, 수많은 인연 가운데 제 속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어떤 이한테서 ‘너는 네 자신의 삶에서조차 구경꾼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과한 표현 같아 서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저는 30대 중반 무렵 벗 하나가 건넨 ‘청초하다’는 느낌이 저를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믿어왔으니 말입니다. 결곡하게 따지면 구경꾼이란 표현이 진실에 가깝지 싶습니다. 60년 동안 제가 제 삶과 세상에 궁시렁궁시렁하며 산 것 아닐까, 돌아봅니다. “참여”를 소환하겠습니다. 제 시민 민주주의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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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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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우리가 빚이 없다면, 즉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18-19쪽)


저는 생애 초기 10년 동안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자랐습니다. 10대의 10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20대의 10년을 다시 헤어져 살았습니다. 30대 초반 아버지는 60이 안 된 나이에 세상과도 헤어졌습니다. 함께하지 않은 20년은 물론 함께한 10년 동안에도 아버지는 거의 아버지로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제가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서 결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순간, 앞 옆 뒤 어디에도 서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이제 60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결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에 대해 지녔던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두려움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찮은 일과 커다란 일 사이에 구분 없는 절대 두려움이 매 순간 들이닥치곤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발끝이 타들어오는 듯했던 이 경험들이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우울증의 발화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데에는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유에는 당연히 얽매이지 않을 것,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매우 중대한 요소를 우리는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내맡김은 믿음을 전제합니다. 믿음은 주체, 그리고 주체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으로서 신뢰입니다. 인간의 상호작용으로서 신뢰는 인간의 근본 환경을 형성합니다. 인간의 근본 환경의 핵심에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의 핵심에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 가운데 아버지는 아이의 자유에 내맡김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내맡기지 못한 채 망설이고 미루는 두려움이 자유를 잠식합니다. 행동의 순간마다 아버지가 그리운 소이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 그 누가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단과 행동과 책임의 전후 맥락에서 완벽한 자유를 구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현실과 가능했으면 싶은 이상의 경계에서 집적된 실용적인 지혜가 “신을 발명”하였습니다. 이 발명된 신은 두려움을 맡아주는 대리 부모 노릇을 합니다. 절대적 드넓음the Spaciousness으로 승격된 이 대리 부모에게 의지하는 모든 종교의 본질은 유아 행태입니다. 아이의 현실에서 어른의 이상으로 나아가는 숭고를 체념한 타협입니다. 아니 중독입니다.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깨달음은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가 아닙니다. “완전히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입니다. 자유로운 자가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자가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립지만 저는 아버지를 찾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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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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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다.(18쪽)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한오그룹 총수인 서회장이 ‘로마로 치면 대통령은 서민이 뽑은 호민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위에 원로원과 집정관, 그리고 황제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가 황제라는 것입니다. 이 소름 돋는 말의 단도직입적인 해석이 바로 “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다.”입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우리 역사와 사회를 돌아보면 이 해석이 얼마나 리얼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신영복 선생이 ‘인조반정 이후 이 나라는 서인노론의 나라였다. 지금도 바뀐 것이 없다.’는 요지의 말씀을 했고, 이것이 한 동안 논란꺼리가 되었습니다. 서인노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선생의 말씀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를 비롯한 영남패권의 인맥 다수는 남인 계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통치권자와 그 위요집단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매판적 본질을 통해 자본을 구축한 주류 지배층의 최근 맥락을 서인노론에서 잡는 것은 그리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정권을 잡으려는 집단과 그 정점에 있는 통치권자에게 준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서인노론과 그들의 족보를 정신적으로 사들인 자들이 지닌 엄청난 돈입니다. 독재와 그에 준하는 통치를 구가했던 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조종하는 최종의 배후는 교육·문화·종교계에 비정치의 탈을 쓰고 똬리 튼 매판자본입니다. 그들에게 계시가 내려오는 지성소는 ‘스위스’ 또는 ‘버진 아일랜드’입니다.


자본의 신성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신약성서(마 6:24)에 나오는 예수의 칼 같은 말씀을 다시 칼 같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대로라면 대한민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이야말로 재물, 말하자면 자본과 대척점에 서 있어야 옳습니다. 물론 말과 달리 저들 대부분은 하나님 아닌 재물을 섬깁니다. 물론 착오와는 달리 그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적은 돈의 역사役事일 뿐 하나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재물을 섬기고 재물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는 그들인 만큼 당연히 정치로써도 그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군정 이래 개신교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부조리에 주도적으로 개입해왔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개신교의 내부적 진실은 ‘재물을 섬기는 정치집단’으로 요약됩니다. 물론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매판식민세력과 독재세력, 그리고 분단고착세력에 부역하는 수구守舊입니다.


정치가 자본의 하수인인 상황에서 우리가 더 섬뜩하게 직접 마주치는 것은 자본의 신성성이 아니라 하수인으로서 정치의 비열함과 잔혹함입니다. 마치 국권상실기의 일본인보다 그 앞잡이 노릇 한 친일파 조선인이 그랬듯 말입니다. 정치의 권위와 물리력으로 죽이고 빼앗는 현실의 공포는 가차 없이 대중을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의 존엄과 기본적 소득을 동시에 수탈당한 노예는 이내 자발적 예속상태로 빠져듭니다. 참혹함의 극치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 99%가 바로 그 참혹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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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꿈과 꿈으로 마주했던 공간들

이제 인적이 드물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참 역사가 되고 사회가 되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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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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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자본의 간계, 자본의 음모로 나타난다.·······자본은 개인적 자유를 수단으로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교접한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12-13쪽)



요즘 통속한 TV드라마에는 거물 정치인, 재벌 총수, 스타 연예인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거기서 드러나는 저들의 공통적 면모는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을 위해서라면 범죄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랑으로 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회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을 위해서만 야차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설마 저러랴 싶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훨씬 더 심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우리사회의 실제 거물 정치인, 재벌 총수, 스타 연예인들의 면면 일부만으로도 그 증거는 충분합니다.


이들이 지닌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의 자유에 놓여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공적 차원으로 이들의 삶이 번져가야 함에도 철저히 사적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에서 무한히 자기 증식만을 거듭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암입니다. 이들이 구가하는 자유란 결국 자기 자신을 사회의 암적 존재로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를 죽이고 종당 자기 자신도 죽이는 이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은 치명적 중독일 뿐입니다.


자유가 인간의 개념인 한 자유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만 자유롭고 한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유로운 사람의 자유를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자유롭지 못한 것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상태가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는 당최 거론할 수조차 없습니다. 오직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하는 “성공적인 공동체”에서만 자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필경 공공公共 운동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매판자본과 독재권력, 그리고 세속종교가 야합하여 세운 저들만의 패거리 정치위원회입니다. 저들은 이른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외치지만 그 ‘자유’란 참 자유를 질곡으로 몰아넣은 가짜입니다. 그 ‘자유’는 “자본의 성기” 노릇으로 대박 난 자들이 환각으로 느끼는 가짜입니다. 세월호를 바다에 빠뜨려 250명의 꽃 같은 아이들을 죽인 '자유'입니다. 메르스를 방치하고 전쟁 위험을 조장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자유’입니다. 그 ‘자유’로 참 자유를 구축驅逐한 이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공동체성이 붕괴된 사회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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