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만한 분은 다 알고 계시지만 삼각지 뒷골목에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수집이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무더위 기승이 여전한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소문대로 손님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온溫 국수를 시켰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국수가 나왔습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터라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혹시 이 국수도 곱빼기가 있습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선선히 되물으셨습니다.


“양이 적으시다면 더 부어드릴까요?”


저는 그 말뜻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중에 아예 하나 더 시키지요.”


잠시 후 아주머니는 작은 그릇에 국수를 담아 들고 다시 오셨습니다. 가득 차도록 부어주셨습니다. 제가 심상히 다시 질문했습니다.




“곱빼기 값은 얼마입니까?”


아주머니는 또 선선히 대답하셨습니다.


“저희는 곱빼기 값을 따로 더 받지 않아요.”


어허, 이런! 이 사실 하나만으로 <옛집>은 우리 시대 지상의 국수집입니다. 한 가난한 소년에게 로망이었다가 수십 년이 지나 치유로 자리 잡은 소면 국수에 이런 내러티브를 얹어주는 국수집. 다음에는 그 주인 할머니와 눈 맞춘 채 이야기 한 번 나누리라 다짐하며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삼각지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만이 아닙니다. 덥혀진 제 영혼이 발맘발맘 돌아가는 삼각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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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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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5: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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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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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두려움의 경험에서 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근본 조건입니다. 근본 조건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피할 길 없는 대상은 직면하고 맞아들여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온전하게 함께 살려면 불안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불안에 귀 기울이면 불안이 건네주는 생의 전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생의 전언대로 극진히 나아가면 불안은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습니다.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는 불안은 충분히 귀중한 생의 일부입니다.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자유로운 개인이 어느 날 국가가 이백오십 명의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을 TV 화면을 통해 봅니다. 두려움이 들이닥치고 절망이 덮쳐오고 슬픔이 밀려드는 급박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맙니다. 그 순간 이후 자유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울울한 불안이 온 영혼을 점령해버렸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484일이 지나도록 숨 막히는 악몽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불안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키는 국가에 종속된 민중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탐욕스런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가 담합하여 국민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현실에서 개인은 개인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정서는 없습니다. 개인의 격정은 없습니다. 개인의 정신장애는 없습니다. 불안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안의 병리는 개인의 병리가 아닙니다. 불안에서 오는 질환은 개인의 질환이 아닙니다. 불안은 공공의 문제입니다. 불안은 대한민국이라는 생명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각자도생의 치유와 행복을 넘어 공적 참여로 여는 생명연대가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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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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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을 맡아줄, 즉 선택의 가능성을 사실상 박탈해 가져가버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선택이 넘쳐나고 향락이 필수인 시대에 주체는 사실 자신의 주이상스를 규제해줄 주인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이상스 규제에 대한 요구는 주인이 사실 자신을 위한 주이상스를 훔쳐가고 있다는·······공포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리라.(270-272쪽)


종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지겨워진 한 노예가 주인에게 간청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기쁨에 겨워 길을 나선 노예는 얼마 못가서 두 갈래 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왼쪽 길로 가면 산적을 만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길로 가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바다로 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노예는 끝내 울면서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리현상 “뷔리당티스”와 본질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완벽히 똑같은 조건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 프랑스 철학자 뷔리당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양쪽에 똑같은 먹이를 놓아두었을 때 당나귀가 어느 쪽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다.](111쪽 각주7)


본문에서 “주체”의 “개성” 그러니까 “선택의 가능성”과 “주인”의 “주이상스 규제”는 불안을 볼모로 잡고 거래하는 모순적인 힘입니다. 주체가 개성을 발휘할수록 그 자유가 동반하는 불안이 커집니다. 주인이 주이상스 규제를 강화할수록 안정이 동반하는 종속이 커집니다. 인간은 결국 이 두 힘의 쏠림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삶의 맥락을 구성하고 지평을 구획하는 운동 과정 그 자체입니다.


불안에 함몰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불안과 절연된 것도 인간이 아닙니다. 100% 자유는 인간이 아닙니다. 100% 종속도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과 불확실은 인간의, 생명의 숙명적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지상의 예의입니다. 이 예의에 터하고서야 존엄이 성립합니다.


존엄은 모순을 타파하거나 극복하는 것으로 다다르는 경지가 아닙니다. 불안 없는 자유, 종속 없는 안정을 누리거나 그 둘 모두를 누리는 경지를 무어라 표현하든 그것은 이미 인간을 떠난 시공입니다. 여기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깨달은 마귀’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엄한 인간은 인간의 불완전과 불확실을 인정하고 불안과 종속을 끌어안는 치열한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이 존엄의 과정은 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홀로 성취한 것은 열반이든 행복이든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문득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항진자본주의 세상에서 ‘무소유’의 삶을 통해 맑은 울림을 주었던 법정이 길상화吉祥華 김영한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뜻을 기려 한식집 대원각을 도량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조용히 경내를 거닐다 홀연 돈점頓漸 논쟁의 다른 새김이 떠올랐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홀로 깨달았으니 홀로 실천한다는 말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홀로 깨달았으되 이웃에 스며들어 실천한다는 말이다.”


이웃에 스며드는 데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에는 불안과 종속이 무한히 교차하고 뒤엉킵니다. 불안과 종속의 괴로움에 흔쾌히 함께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비입니다. 개체로서 주체의 각성이 전체로서 공동체와 함께 갈 때만 참 각성입니다. 참 각성은 반드시 공존, 그러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자리이타의 큰 수레 속에서 불안은 이치대로 일어나 자라고 스러질 것입니다. 그 자체로 병 될 리 없습니다. 다른 병으로 확산될 리도 없습니다. 불안은 그저 불안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불안이 아닙니다. 불안을 그저 불안이 아닌 것으로 몰아가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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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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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는 외상적 기억이 불안 상태에 대한 특정한 해결책이 된다.(227쪽)


상담치유 하는 의자醫者로 살아오는 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면 수백 권의 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치유의 길을 찾은 사람들도 있고 끝내 길을 찾지 못한 채 저와의 인연이 끝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이야기들 가운데는 격정 상태에서 부풀려진 에피소드도 있었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숨긴 사실도 있었을 터이니 그 이야기들을 죄다 어김없는 사실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치유 이야기에서 참·거짓 문제는 그 진부함에도 아랑곳없이 늘 새로운 쟁점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순간마다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정색하고 질문해보겠습니다.


“거짓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병을 치유할 수 있는가?”


상처에 대한 거짓 기억을 말하는 것이 과연 치유 효과를 내는 자기언급self-reference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답하기 전에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연유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참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을 치유해야 본디 이치에 맞는다는 전제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면 두 가지 선결 문제가 생깁니다. 우선 과연 온전한 참 기억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상처로서 기억 때문에 마음병에 걸린 사람이 온전한 참 기억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모든 기억은 해석입니다. 기억은 녹음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순수 사실의 기억은 없습니다. 참 기억이란 해석을 포함하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해석은 기억하는 주체의 모든 주관적 조건을 반영합니다. 주체마다 기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통시적 맥락과 공시적 지평을 모두 고려하여 판단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거짓이고 저것은 참이다 결론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더욱 엄밀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마음이 병리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자체가 이미 격정emotionalism 상태이므로 여기서 이른바 참 기억을 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격정 상태의 해석을 그대로 담은 기억이 도리어 참 기억일 것입니다. 더더욱 세밀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생애 초기 상처의 기억으로 갈수록 깊은 마음병의 근거가 되고 참과 거짓의 구분도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결국 마음병이란 이렇게 어린아이 상태, 또는 그와 본질이 같은 격정 상태의 유지·확산 반응입니다. 치유는 양육 과정입니다. 이런 진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짓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병을 치유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이미 자기 답이 정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거듭 질문해보겠습니다.


“거짓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병을 치유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100% 온전한 참 기억이란 없다는 사실이 옳다고 전제할 때 말입니다.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100% 온전한 거짓 기억이란 없다는 사실이 옳다고 전제할 때 말입니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과 거짓의 이분법으로 풀어낼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참과 거짓은 필연적으로 공존하며 뒤엉킵니다. 기억 치유에서 참인가 거짓인가를 따지는 것은 관건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격정이 촉발되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유지·확산되어 가는지 살피는 것이 관건입니다. 아픈 사람의 격정적 진실과 건강한 사람의 정서적 진실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 전자를 거짓이라 하는 것은 치유의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판단하는 일종의 범주오류입니다. 치유는 격정 반응을 아픈 사람의 진실로 가감 없이 수용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격정 반응을 정서 감응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과정이 치유 과정입니다. 치유는 거짓을 바로잡아 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아이 상태에서 건강한 어른 상태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둘 중 하나를 단박에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 다를 끌어안고 발효시키는 기다림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격정에 사로잡혀(합일) 있던 아이 상태를 벗어나(분리) 자유로운 정서를 구가할 수 있는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치유자는 엄마가 되기도 하고 멘토가 되기도 하고 아군이 되기도 하고 적군이 되기도 합니다. 치유자는 모순입니다. 이로써 아픈 사람과 더불어 역설을 빚어내면 다시없는 인연일 것입니다. 물론 그 치유자가 꼭 남일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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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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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이와 맺는 관계는 흔히 특정한 환상 시나리오를 포함하며, 그녀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이 시나리오이다. 어머니는 이 환상의 도움으로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아이에게 있는 아이 이상의 것-대상a, 주체를 특징짓는 결여의 대역인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 시나리오를 만든다.·······

아이를·······파괴하는 것은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있는 당신 이상의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절단해 훼손한다.”·······

·······어떤 면에서 사랑에 빠지는 모든 행동에는 약간의 망상이 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첫 순간은 흔히 일종의 섬망으로 경험된다. 주체는 대타자를 과장하고 그 혹은 그녀를 대상a를 소유한 누군가로 인식한다.·······(206-207쪽)

·······어머니는 더는 아이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아이도 어머니의 사랑이 결코 없애주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겪어봐야 한다.(215쪽)


정신과의사인 프로이트에게 정신은 정신과적 분석 대상인 정신입니다. 라캉에게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상대방을 “절단해 훼손”하는 사랑이라면 라캉이 말하는 사랑 또한 그런 성격을 지닐 것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이다.’(『몰락의 에티카』654쪽)라는 신형철의 설명은 타당합니다. “환상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는 사람과 “섬망으로 경험”하는 “망상”인 살레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은 이런 것입니다.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은-인용자)·······반성 없는 흐름이(다.-인용자)·······욕망은 환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다음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발생한다.·······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정신분석의 영토 밖에 있습니다. 아니 이 사랑은 당최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라면 세상 모든 어머니가 바로 이 사랑을 할 법하지만 현실 어머니 사랑은 이 사랑과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림의 지점은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 체제는 치명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리사회 어머니 대부분이 자녀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여 망가뜨리는 논리가 바로 불의한 권력과 매판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의 직간접적인 교사敎唆에서 나옵니다. “다 너 잘되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목적은 오직 높은 자리에서 돈 많이 가지고 살다 천당 가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과정에서 남을 수탈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앎에도 행복의 이름으로 무시하며 넘어갑니다. 사랑으로 욕망을 은폐하듯 행복으로 범죄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하고자 할 때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진실을 훼손하는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어 우리사회는 공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멈추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도저한 현실 인식이 우선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현실 인식은 라캉 등의 난해하고 복잡한 이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석과 철학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세상에 와 닿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서구 천재들의 이론은 천착장애hyper-inquiry disorder라 불러야 할 정도의 극단적인 파고듦으로 말미암아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상에 적용되지 않는 위대한 이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이한 삶으로 이행되지 않는 난해한 분석은 과잉 진화된 대뇌전전두엽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 모호한 명료성을 드러내고 그에 맞게 하나하나 움직여가는 일입니다.


아이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보려면 질문하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내가 지금 아이를 사랑하는 게 맞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대답했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아이가 내 사랑을 사랑이라 느끼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는 답을 들으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와 아이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를 때 누가 포기할 것인지 말입니다. 설혹 아이의 생각이 틀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 안음으로써 아이와 나의 불연속을 인정하고 결과를 수용할 때 비로소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애지중지 학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자기 탐욕의 대행자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거르기를 빠져나간 것은 이미 정신병 단계입니다. 사랑을 논하기에 앞서 치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마 우리사회 상당수 어머니가 이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병식 없이 소리 없이 제 자식을 죽이고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세월호사건의 또 다른 배후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사건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지겹다, 시체장사다, 빨갱이다·······소리가 나옵니다. 그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으므로 진실은 은폐됩니다. 그들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므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인데.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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