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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어머니가 아이와 맺는 관계는 흔히 특정한 환상 시나리오를 포함하며, 그녀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이 시나리오이다. 어머니는 이 환상의 도움으로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아이에게 있는 아이 이상의 것-대상a, 주체를 특징짓는 결여의 대역인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 시나리오를 만든다.·······
아이를·······파괴하는 것은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있는 당신 이상의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절단해 훼손한다.”·······
·······어떤 면에서 사랑에 빠지는 모든 행동에는 약간의 망상이 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첫 순간은 흔히 일종의 섬망으로 경험된다. 주체는 대타자를 과장하고 그 혹은 그녀를 대상a를 소유한 누군가로 인식한다.·······(206-207쪽)
·······어머니는 더는 아이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아이도 어머니의 사랑이 결코 없애주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겪어봐야 한다.(215쪽)
정신과의사인 프로이트에게 정신은 정신과적 분석 대상인 정신입니다. 라캉에게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상대방을 “절단해 훼손”하는 사랑이라면 라캉이 말하는 사랑 또한 그런 성격을 지닐 것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이다.’(『몰락의 에티카』654쪽)라는 신형철의 설명은 타당합니다. “환상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는 사람과 “섬망으로 경험”하는 “망상”인 살레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은 이런 것입니다.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은-인용자)·······반성 없는 흐름이(다.-인용자)·······욕망은 환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다음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발생한다.·······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몰락의 에티카』659쪽)
이 사랑은 정신분석의 영토 밖에 있습니다. 아니 이 사랑은 당최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라면 세상 모든 어머니가 바로 이 사랑을 할 법하지만 현실 어머니 사랑은 이 사랑과 그 자신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림의 지점은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 체제는 치명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리사회 어머니 대부분이 자녀를 “자신을 완벽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이용”하여 망가뜨리는 논리가 바로 불의한 권력과 매판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의 직간접적인 교사敎唆에서 나옵니다. “다 너 잘되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목적은 오직 높은 자리에서 돈 많이 가지고 살다 천당 가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과정에서 남을 수탈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앎에도 행복의 이름으로 무시하며 넘어갑니다. 사랑으로 욕망을 은폐하듯 행복으로 범죄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하고자 할 때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진실을 훼손하는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어 우리사회는 공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멈추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도저한 현실 인식이 우선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사이비 사랑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현실 인식은 라캉 등의 난해하고 복잡한 이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석과 철학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세상에 와 닿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서구 천재들의 이론은 천착장애hyper-inquiry disorder라 불러야 할 정도의 극단적인 파고듦으로 말미암아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상에 적용되지 않는 위대한 이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이한 삶으로 이행되지 않는 난해한 분석은 과잉 진화된 대뇌전전두엽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 모호한 명료성을 드러내고 그에 맞게 하나하나 움직여가는 일입니다.
아이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 보통사람의 삶의 전후 맥락과 전체 지평을 살펴보려면 질문하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내가 지금 아이를 사랑하는 게 맞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대답했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아이가 내 사랑을 사랑이라 느끼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는 답을 들으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와 아이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를 때 누가 포기할 것인지 말입니다. 설혹 아이의 생각이 틀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 안음으로써 아이와 나의 불연속을 인정하고 결과를 수용할 때 비로소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애지중지 학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자기 탐욕의 대행자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거르기를 빠져나간 것은 이미 정신병 단계입니다. 사랑을 논하기에 앞서 치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마 우리사회 상당수 어머니가 이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병식 없이 소리 없이 제 자식을 죽이고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세월호사건의 또 다른 배후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사건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지겹다, 시체장사다, 빨갱이다·······소리가 나옵니다. 그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으므로 진실은 은폐됩니다. 그들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므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인데.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