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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선택이 범람하는” 사회의·······사람들은·······모든 자유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선조들보다 삶에 더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일까? 하나의 대답은 주이상스는 우리에게 참 생경한 무언가라는 라캉의 서술에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려고 애쓸 때 흔히 가장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것이다.·······그 결과 주체의 불안은 커지는데 내면의 자아의 또 다른 요구-초자아의 요구-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은 죄책감과 결부된다.(126-127쪽)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요? “무언가” 두 개와 “그리고” 한 개가 “그러므로”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궁금증을 끝내 외면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무언가” 두 개를 던져 놓고 저자가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아 오리지널 라캉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라캉이 분명한 말을 했다면 저자가 인용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니 당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논리적 연결이 아니고 덧붙임에 지나지 않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뒤에 오는 문장은 도리어 길 찾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난감한 상황 이대로 길을 찾습니다.
“무언가” 두 개가 우리를 답답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짚고 일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생경한”이란 말과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이란 말이 있으므로 생각의 거점으로 삼아 보겠습니다.
생경한 무엇으로서 주이상스라면 향락의 단일성에 금을 내는 낯선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낯설음을 극한까지 밀어가면 모순이 나옵니다. 즐거움의 모순은 괴로움입니다. 따라서 주이상스에는 괴로움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과 연결하는 일은 어렵거나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즐거움의 잔을 마셨는데 괴로움의 독이 들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형식논리학의 파탄입니다. A≠∼A(모순율)를 넘어간 것입니다. 이 정도를 몰라서 “무언가”라는 말로 얼버무렸다고 하면 이는 천하의 라캉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문제의 어려움은 논리 자체가 아니라 경험과 정서의 실재에 있습니다. 즐거움의 잔을 들다 어떻게 괴로움의 독을 마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반대로 괴로움의 독배를 들다 어떻게 즐거움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이 때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떻게 관계하는 것인가? 이 의문은 과학, 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의학의 경계를 가로지릅니다. 세계 진실의 전체에 주의하지 않으면 대놓고 틀리거나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게 됩니다.
“선택이 범람하는” 사회. 이 말의 갈피를 잘 뒤적거리면 고수들이 선뜻 말해주지 않는 진실의 언저리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범람’이라는 용어는 본디 자연현상에 대한 것이어서 인간 의도를 은폐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조절구조가 결딴난 통제 불능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해보입니다. 파국 기미를 노출하는 문명비판의 냄새도 맡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빛이 입자이자 파동인 것처럼 자연의 이치로 따지자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존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선 종種 차원의 문제입니다. 본디 빛에서 100% 입자인 경우와 100% 파동인 경우는 자연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100% 즐거움인 경우와 100% 괴로움인 경우를 실재 개념으로 전제하거나 수용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진화는 대뇌 전두엽 부위에서 임계점을 넘어버려 음성되먹임이 되지 않습니다. 극단의 즐거움과 극단의 괴로움에 분열적으로 집착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성공의 이름으로, 그러나 병의 실상으로 인간에게 이런 중독현상은 과잉 진화의 대가로서 숙명처럼 따라다닙니다. 극단을 버리고 정도正道인 중도中道를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맞은편과의 조우는 외상外傷이 되고 공포가 됩니다. 외상과 공포로 말미암아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도착倒錯됩니다. 도착은 지상의 자유와 선택권을 혼효混淆로 몰아넣어버립니다. 도착의 혼효 속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회 차원의 문제입니다. 인간사회는 의도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의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견지에서 보면 국가라는 이름의 사회가 즐거움과 괴로움의 분열을 조장하는 한편 그 상황을 적대 구조로 만들어 수탈을 극대화함으로써 소수 지배집단의 향락에 복무하도록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하이퍼-자본주의로 무장한 국가는 일단 각 개인을 가급적 많이 이런 질병 상태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거기서 다시 지배집단은 무제한 즐거움의 추구하고, 피지배집단은 무제한 괴로움에 빠져드는 전선 구도가 형성됩니다. 타자의 멸절을 통해 획득한 행복은 자기 자신의 멸절을 부릅니다. 공멸의 정치입니다. 전멸의 문명입니다.
이 시대의 주이상스는 저주받은 즐거움입니다. 저주를 풀려면 즐거움만으로 세상을 구성하려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즐거움이 한 이치[일리一理]이듯 괴로움 또한 한 이치입니다.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즐거움도 이치에 속하니 그렇다 하고 괴로움도 이치에 속하니 둘 다 그렇다 해야 합니다[개시皆是]. 즐거움만으로는 이치의 다가 아니고 괴로움만으로도 이치의 다가 아니니 둘 다 아니다 해야 합니다[개비皆非].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둘이 뒤바뀌거나 뒤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 부조리를 기획하는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주이상스는 “생경한 무언가”도 아니고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무언가”도 아니게 됩니다. 반갑고 신나는 “참” 주이상스입니다. 이 주이상스를 우리는 무애無碍라 이름 합니다. 무애는 화쟁으로 이루어집니다. 화쟁은 원효에게서 왔습니다. 원효를, 라캉 치운 자리에 세우는 것이 이제 여기를 사는 우리의 천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