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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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양육과 관련한 불안을 목격하고 있다. 이 불안은 자녀를 기르고 그들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최상의 방법에 대한 어떤 합의도 더는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부모들은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과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껴 왔고, 이는 무수한 저자들이 양육을 지도하는 책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조언들은 대개 서로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다.(179쪽)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실은 중학생 때 저와 치유상담을 진행하다가 그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던 아이입니다. 그 때 찾아온 까닭은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까닭 또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한층 더 격렬해진 아이는 때로는 가슴을 치며 때로는 온몸을 떨며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녀양육법을 가르치는 나름대로 유명한 강사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어떤 내용을 강의하는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인 한 근본적으로 흠을 지니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기 확신에 맞아 시퍼렇게 멍이든 자기 아이가 다른 상담자, 그것도 자기가 금지한 상담자를 2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어머니를 가르치는 이 어머니의 비극에 대하여 삼가 극진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할 따름입니다.


저도 아비입니다. 우리가 범속한 부모로서 한 시대의 뒷자락, 이 사회의 변두리를 떠돌며 자녀 양육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부正否·승패勝敗를 떠나 그 자체로 불운이며 불행입니다. 원하지 않은 삶의 조건에 휘말렸으니 불운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녀 양육이 각자 해결할 문제로 변해버린 근대 이후를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맑은 행복에 깃들 수 없으니 불행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명령하는 매뉴얼을 따르면 그대로 인간파멸이고 중용을 따르면 극심한 불편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시공은 이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판이어서 불안 증폭의 기울기가 가파르기 그지없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약탈구조를 이끌어온 매판 지배집단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미증유의 살해와 착취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속한 부모로서 우리는 대부분 대박을 꿈꾸며 자녀를 다그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의 지속성이 강화되어 생사 차원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든 책이든 강의든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자녀 양육법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지도가 성공하는 예는 드뭅니다.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녀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식 부모 편견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 양육의 문제가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아니고 내 자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과연 내 자녀는 어떤 삶을 살면 행복해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자세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쉬울 리 없습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쪽박의 증거가 되는 대한민국이니까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래도 우리는 새끼들이 살아 있으니 이런 고민의 고민에라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때같은 새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걸 목도하고서도 왜 죽였는지 알 수조차 없는 부모들 앞에서 이것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진 고민 아니던가요. 죽음의 하루하루가 쌓여 470일이 된 어느 날 욕먹고 뺨 맞은 부모 앞에서 차마 변명 못할 고민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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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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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흔히 연애 문제에 대해·······강박적 의례들과 스스로 부과한 규칙들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여성은 상대 남성에게 자신이 어떤 대상인지에 관한 난제에 부딪힐 때 연애를 거부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우울하고 무관심한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사랑받지 못했음을 깨닫거나 자신이 더는, 남성의 연애 환상을 형성하는 중심인 대상a가 아님을 인정할 때 흔히 체념의 몸짓을 보인다.(165쪽)


서구의 뜨르르한 ‘지식’을 대하다 보면 한 순간 어이없어지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겪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적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실수 아닌 실패를 하는 것일 테지요. 문명적 패권과 진실의 보편성을 혼동한 결과입니다. 민속학적 수준의 관찰을 여과 없이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미 익숙한 풍경입니다. 라캉이 강박 이야기를 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를 들먹인 것이 그 예입니다. 규범적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데 엉성한 우발적 예시로 치밀한 구성적 열거를 대체하는 것도 상습화된 전략입니다. 여기 본문의 히스테리(신경증)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히스테리신경증을, 정신적 에너지가 육체적 증상으로 바뀌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미국 정신의학 협회의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5>는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라고 이름 합니다. 전환장애라는 이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의미 함축은 본질을 꿰뚫은 것이 아닙니다. 본질을 놓치다보니 일시적 기억 상실, 의식 소실, 마비와 같은 증상들을 “우울하고 무관심한 상태”나 “체념의 몸짓”이라는 부정확한 표현의 예시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환장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강박장애와 비대칭적 대칭 관계에 있다는 진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통찰이 없기 때문에 자꾸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는 어떤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떨쳐버리고 싶은데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라고 흔히 정의됩니다. 이 정의도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강박장애는 변화에 대한 불안의 병리적 처리 반응입니다.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을 강고하게 붙잡음으로써 변화가 몰고 올 위험을 막으려는 방어 작용입니다. 이와 반대로 전환장애는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이 지니는 인과구조나 필연적 알고리즘에 대한 불안의 병리적 처리 반응입니다. 법칙이나 규칙적 리듬에서 비인과적으로 갑자기 이탈함으로써 현실 고착이 몰고 올 위험을 피하려는 방어 작용입니다. 전환은 강박의 상대어입니다. 정신적 에너지가 육체적 증상으로 바뀌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기억상실이나 의식 소실과 같이 육체 증상이라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전환장애라는 말은 잘못 쓰이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진실에 부합하는 이상한 용어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부장적 사고의 유제를 불식시키지 않은 냄새가 나지만 저자가 강박과 히스테리를 남녀에 각각 연계한 것은 역학疫學적으로는 물론 뇌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의 지평에서 보더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박은 좌뇌형 이성주의 지배체제의 보수 계략에 가 닿습니다. 전환은 우뇌형 감성주의 양육체제의 혁신 운동에 가 닿습니다. 질병으로서 강박장애, 전환장애의 진단과 치료도 이런 광폭 시각에서 전면 재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전환장애에 대한 남성가부장의학의 굴절된 시선부터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진실을 세우기 위한 본격 연구를 이제 시작해야 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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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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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어머니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가 늘 곁에 있는 것·······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대상들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어머니가 늘 아이 곁에 있어 숨 막히게 하면 아이에게는 욕망이 발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늘 곁에 있어 생기는 불안은 바로 아이가 결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35쪽)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딸은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그렇게 숨 막힐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우연한 기회를 타고 엄마한테서 도망쳤습니다. 10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 지나면서 딸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20대 중반 돌아온 딸은 어머니와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은 10년 전보다 더욱 울울한 불안을 몰고 왔습니다. 어머니의 일방적·폭력적 변화를 예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측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의 무방비성이 지닌 막막함을 더욱 날카롭게 감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상담했던 한 젊은 여성의 말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유학 보내 죽기 살기로 일해서 공부시켰다며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라캉과 라캉주의자들은 집요하게 불안을 결여 여부와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은 무엇이 있거나 없는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정서가 아닙니다. 있거나 없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어날 가능성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을 예상할 때 생명 감각이 발동시키는 경계의 신호가 불안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유지와 고양을 향한 욕망의 위축·단절을 막기 위한 방어 작용입니다.


불안의 통시通時적 축은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의 변화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불안의 공시共時적 축은 분리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자타의 분리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이러한 불안의 생리적 작용과 구조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난삽한 개념 유희를 전시하는 것은 불안이 전하는 소식을 통해 삶을 건강하게 영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 시공의 축을 따라 나타나는 각종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꾸짖음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독임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각성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소한 오늘의 분별지를 지니고 겹과 결을 넘나들며 살아보지 않은 채 거대한 영원의 무분별지를 말하는 것은 물색없는 허영입니다.


세상에서 다시없는 사랑을 지닌 어미라고 스스로 생각한 어머니가 딸의 인생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닫기까지는 아직 남은 날이 많습니다. 하지만 딸이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뒤 어머니는 문득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위해서입니다. 딸도 그 기미를 느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딸과 어머니가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딸이 흉흉한 소문 아닌 노문 놓기로서 불안을 삶의 소중한 일부로 끌어안을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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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all Me Inspirational: A Disabled Feminist Talks Back (Paperback)
Harilyn Rousso / Temple Univ Pr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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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정희진의 글을 읽고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독서는 매우 천천히 띄엄띄엄 이루어졌습니다.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지 않는 글 솜씨에서 나온 글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는 먹물 티내는 글에 익숙해온 터라 처음부터 바싹 다가들어 읽지 못하였습니다. 느슨하게 읽어 가다가 뒷부분 어디쯤부터 속도가 빨라지고 독서 지속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은 가야금산조 휘모리장단으로 들었습니다.

 

1. 마침 라캉주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읽으면서 주해 리뷰를 쓰는 중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정반대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책입니다. 해릴린 루소를 다 읽고 난 뒤 든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라캉 같은 천재의 난해한 이론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애 여성으로서 산 삶과 거기서 배어나오고 거기로 배어든 생각들을 쉽게 정직하게 쓴 글을 읽으며 받는 감동이 라캉의 고도한 사유의 겹과 결을 뒤적이며 맛보는 충일감보다 훨씬 더 휴먼스케일에 가까웠습니다. 높고 깊고 넓은 인문 지식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걸음 앞을 보아서 한 걸음 나아는 것이 인간의 변화입니다.

 

2. 저자 스스로 이 책을 콜라주라 했듯 자유분방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랄 것도 없는 구조입니다만 마지막 여섯 장은 가히 일품입니다. 이 부분만 떼어 읽어도 저자가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맨 마지막 세 장은 천하의 명품 코다coda입니다.

 

나의 비장애인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괴물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장애인 자아에게 바치는 글

 

비장애인 자아는 이상理想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비장애인은 정상인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괴물 자아는 저주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장애인은 비정상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널을 뛰며 살았습니다. 흔쾌히 인정하고 흔쾌히 떠나보냅니다. 남은 것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실재, 장애인 자아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딱 100점짜리 자아입니다. 정상인이 100점짜리 자아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상인은 당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온몸으로 온 삶으로 깨달은 그 진실을 이렇게 나지막한 우뚝함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든 몸뚱이야, 넌 내게 참 잘해줬어. 내가 너에게 한 것보다 훨씬 자비롭게 나를 대해줬어. 우리 둘 중에 네가 더 품위 있고 더 지혜롭구나. 네가 나를 품어주었듯이 이제 나도 너를 품어주고 볼품없는 움직임을 한계가 아닌 생명의 신호로 받아들일게.”

 

3. 저자는 이 깨달음을 실어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라고 일갈했지만 정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은이가 몹시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우리가 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나도 눈물이 나려 한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시시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일 수도 있고 비장애인일수도 있습니다.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비장애인이면서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시한 우리입니다. 이제 눈물이 나려 하십니까?

 

4. 장애는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인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를 몸의 장애인처럼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울장애를 지닌 사람을 우울증 환자라고 부르는 것과 뇌성마비를 지닌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립니다. 본질은 동일합니다. 마음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괴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널을 뜁니다. 그들에게도 치유의 외길은 자신의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실제로 마음의 문제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 국민국가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문제입니다. 통계에 잡힌 것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 인구 10% 이상이 마음의 장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0. 오늘도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떤 분과 긴 시간 상담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장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간곡히 권했습니다. 너나없이 그게 잘 안 되는 이 ‘시시함’에 함께 서서 붙들고 울어보실까요?

 

* 도서 검색에 번역본이 뜨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원서 를 올렸습니다. 번역본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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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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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범람하는” 사회의·······사람들은·······모든 자유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선조들보다 삶에 더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일까? 하나의 대답은 주이상스는 우리에게 참 생경한 무언가라는 라캉의 서술에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려고 애쓸 때 흔히 가장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것이다.·······그 결과 주체의 불안은 커지는데 내면의 자아의 또 다른 요구-초자아의 요구-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은 죄책감과 결부된다.(126-127쪽)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요? “무언가” 두 개와 “그리고” 한 개가 “그러므로”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궁금증을 끝내 외면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무언가” 두 개를 던져 놓고 저자가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아 오리지널 라캉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라캉이 분명한 말을 했다면 저자가 인용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니 당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논리적 연결이 아니고 덧붙임에 지나지 않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뒤에 오는 문장은 도리어 길 찾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난감한 상황 이대로 길을 찾습니다.

 

무언가” 두 개가 우리를 답답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짚고 일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생경한”이란 말과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이란 말이 있으므로 생각의 거점으로 삼아 보겠습니다.

 

생경한 무엇으로서 주이상스라면 향락의 단일성에 금을 내는 낯선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낯설음을 극한까지 밀어가면 모순이 나옵니다. 즐거움의 모순은 괴로움입니다. 따라서 주이상스에는 괴로움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과 연결하는 일은 어렵거나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즐거움의 잔을 마셨는데 괴로움의 독이 들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형식논리학의 파탄입니다. A≠∼A(모순율)를 넘어간 것입니다. 이 정도를 몰라서 “무언가”라는 말로 얼버무렸다고 하면 이는 천하의 라캉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문제의 어려움은 논리 자체가 아니라 경험과 정서의 실재에 있습니다. 즐거움의 잔을 들다 어떻게 괴로움의 독을 마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반대로 괴로움의 독배를 들다 어떻게 즐거움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이 때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떻게 관계하는 것인가? 이 의문은 과학, 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의학의 경계를 가로지릅니다. 세계 진실의 전체에 주의하지 않으면 대놓고 틀리거나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게 됩니다.

 

“선택이 범람하는” 사회. 이 말의 갈피를 잘 뒤적거리면 고수들이 선뜻 말해주지 않는 진실의 언저리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범람’이라는 용어는 본디 자연현상에 대한 것이어서 인간 의도를 은폐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조절구조가 결딴난 통제 불능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해보입니다. 파국 기미를 노출하는 문명비판의 냄새도 맡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빛이 입자이자 파동인 것처럼 자연의 이치로 따지자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존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선 종種 차원의 문제입니다. 본디 빛에서 100% 입자인 경우와 100% 파동인 경우는 자연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100% 즐거움인 경우와 100% 괴로움인 경우를 실재 개념으로 전제하거나 수용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진화는 대뇌 전두엽 부위에서 임계점을 넘어버려 음성되먹임이 되지 않습니다. 극단의 즐거움과 극단의 괴로움에 분열적으로 집착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성공의 이름으로, 그러나 병의 실상으로 인간에게 이런 중독현상은 과잉 진화의 대가로서 숙명처럼 따라다닙니다. 극단을 버리고 정도正道인 중도中道를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맞은편과의 조우는 외상外傷이 되고 공포가 됩니다. 외상과 공포로 말미암아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도착倒錯됩니다. 도착은 지상의 자유와 선택권을 혼효混淆로 몰아넣어버립니다. 도착의 혼효 속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회 차원의 문제입니다. 인간사회는 의도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의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견지에서 보면 국가라는 이름의 사회가 즐거움과 괴로움의 분열을 조장하는 한편 그 상황을 적대 구조로 만들어 수탈을 극대화함으로써 소수 지배집단의 향락에 복무하도록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하이퍼-자본주의로 무장한 국가는 일단 각 개인을 가급적 많이 이런 질병 상태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거기서 다시 지배집단은 무제한 즐거움의 추구하고, 피지배집단은 무제한 괴로움에 빠져드는 전선 구도가 형성됩니다. 타자의 멸절을 통해 획득한 행복은 자기 자신의 멸절을 부릅니다. 공멸의 정치입니다. 전멸의 문명입니다.

 

이 시대의 주이상스는 저주받은 즐거움입니다. 저주를 풀려면 즐거움만으로 세상을 구성하려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즐거움이 한 이치[일리一理]이듯 괴로움 또한 한 이치입니다.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즐거움도 이치에 속하니 그렇다 하고 괴로움도 이치에 속하니 둘 다 그렇다 해야 합니다[개시皆是]. 즐거움만으로는 이치의 다가 아니고 괴로움만으로도 이치의 다가 아니니 둘 다 아니다 해야 합니다[개비皆非].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둘이 뒤바뀌거나 뒤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 부조리를 기획하는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주이상스는 “생경한 무언가”도 아니고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무언가”도 아니게 됩니다. 반갑고 신나는 “” 주이상스입니다. 이 주이상스를 우리는 무애無碍라 이름 합니다. 무애는 화쟁으로 이루어집니다. 화쟁은 원효에게서 왔습니다. 원효를, 라캉 치운 자리에 세우는 것이 이제 여기를 사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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