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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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어머니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가 늘 곁에 있는 것·······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대상들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어머니가 늘 아이 곁에 있어 숨 막히게 하면 아이에게는 욕망이 발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늘 곁에 있어 생기는 불안은 바로 아이가 결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35쪽)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딸은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그렇게 숨 막힐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우연한 기회를 타고 엄마한테서 도망쳤습니다. 10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 지나면서 딸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20대 중반 돌아온 딸은 어머니와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은 10년 전보다 더욱 울울한 불안을 몰고 왔습니다. 어머니의 일방적·폭력적 변화를 예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측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의 무방비성이 지닌 막막함을 더욱 날카롭게 감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상담했던 한 젊은 여성의 말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유학 보내 죽기 살기로 일해서 공부시켰다며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라캉과 라캉주의자들은 집요하게 불안을 결여 여부와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은 무엇이 있거나 없는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정서가 아닙니다. 있거나 없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어날 가능성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을 예상할 때 생명 감각이 발동시키는 경계의 신호가 불안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유지와 고양을 향한 욕망의 위축·단절을 막기 위한 방어 작용입니다.


불안의 통시通時적 축은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의 변화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불안의 공시共時적 축은 분리에 대한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자타의 분리가 생명의 안정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느끼는 감각 기제입니다.


이러한 불안의 생리적 작용과 구조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난삽한 개념 유희를 전시하는 것은 불안이 전하는 소식을 통해 삶을 건강하게 영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 시공의 축을 따라 나타나는 각종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꾸짖음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독임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각성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소한 오늘의 분별지를 지니고 겹과 결을 넘나들며 살아보지 않은 채 거대한 영원의 무분별지를 말하는 것은 물색없는 허영입니다.


세상에서 다시없는 사랑을 지닌 어미라고 스스로 생각한 어머니가 딸의 인생 전체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닫기까지는 아직 남은 날이 많습니다. 하지만 딸이 단 한 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뒤 어머니는 문득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위해서입니다. 딸도 그 기미를 느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딸과 어머니가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딸이 흉흉한 소문 아닌 노문 놓기로서 불안을 삶의 소중한 일부로 끌어안을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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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all Me Inspirational: A Disabled Feminist Talks Back (Paperback)
Harilyn Rousso / Temple Univ Pr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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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정희진의 글을 읽고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독서는 매우 천천히 띄엄띄엄 이루어졌습니다.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지 않는 글 솜씨에서 나온 글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긴장감과 책임감을 유도하는 먹물 티내는 글에 익숙해온 터라 처음부터 바싹 다가들어 읽지 못하였습니다. 느슨하게 읽어 가다가 뒷부분 어디쯤부터 속도가 빨라지고 독서 지속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은 가야금산조 휘모리장단으로 들었습니다.

 

1. 마침 라캉주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읽으면서 주해 리뷰를 쓰는 중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정반대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책입니다. 해릴린 루소를 다 읽고 난 뒤 든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라캉 같은 천재의 난해한 이론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애 여성으로서 산 삶과 거기서 배어나오고 거기로 배어든 생각들을 쉽게 정직하게 쓴 글을 읽으며 받는 감동이 라캉의 고도한 사유의 겹과 결을 뒤적이며 맛보는 충일감보다 훨씬 더 휴먼스케일에 가까웠습니다. 높고 깊고 넓은 인문 지식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걸음 앞을 보아서 한 걸음 나아는 것이 인간의 변화입니다.

 

2. 저자 스스로 이 책을 콜라주라 했듯 자유분방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랄 것도 없는 구조입니다만 마지막 여섯 장은 가히 일품입니다. 이 부분만 떼어 읽어도 저자가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맨 마지막 세 장은 천하의 명품 코다coda입니다.

 

나의 비장애인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괴물 자아를 떠나보내며

나의 장애인 자아에게 바치는 글

 

비장애인 자아는 이상理想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비장애인은 정상인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괴물 자아는 저주의 상태로 부풀려진 자아입니다. 장애인은 비정상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따른 극단화입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널을 뛰며 살았습니다. 흔쾌히 인정하고 흔쾌히 떠나보냅니다. 남은 것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실재, 장애인 자아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딱 100점짜리 자아입니다. 정상인이 100점짜리 자아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상인은 당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비정상인으로서 100점입니다. 온몸으로 온 삶으로 깨달은 그 진실을 이렇게 나지막한 우뚝함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든 몸뚱이야, 넌 내게 참 잘해줬어. 내가 너에게 한 것보다 훨씬 자비롭게 나를 대해줬어. 우리 둘 중에 네가 더 품위 있고 더 지혜롭구나. 네가 나를 품어주었듯이 이제 나도 너를 품어주고 볼품없는 움직임을 한계가 아닌 생명의 신호로 받아들일게.”

 

3. 저자는 이 깨달음을 실어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라고 일갈했지만 정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은이가 몹시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우리가 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나도 눈물이 나려 한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시시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일 수도 있고 비장애인일수도 있습니다.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비장애인이면서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시한 우리입니다. 이제 눈물이 나려 하십니까?

 

4. 장애는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인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를 몸의 장애인처럼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울장애를 지닌 사람을 우울증 환자라고 부르는 것과 뇌성마비를 지닌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립니다. 본질은 동일합니다. 마음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괴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널을 뜁니다. 그들에게도 치유의 외길은 자신의 장애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실제로 마음의 문제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 국민국가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문제입니다. 통계에 잡힌 것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 인구 10% 이상이 마음의 장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0. 오늘도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떤 분과 긴 시간 상담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장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간곡히 권했습니다. 너나없이 그게 잘 안 되는 이 ‘시시함’에 함께 서서 붙들고 울어보실까요?

 

* 도서 검색에 번역본이 뜨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원서 를 올렸습니다. 번역본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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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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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범람하는” 사회의·······사람들은·······모든 자유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선조들보다 삶에 더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일까? 하나의 대답은 주이상스는 우리에게 참 생경한 무언가라는 라캉의 서술에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려고 애쓸 때 흔히 가장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것이다.·······그 결과 주체의 불안은 커지는데 내면의 자아의 또 다른 요구-초자아의 요구-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은 죄책감과 결부된다.(126-127쪽)

 

왜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요? “무언가” 두 개와 “그리고” 한 개가 “그러므로”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궁금증을 끝내 외면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무언가” 두 개를 던져 놓고 저자가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아 오리지널 라캉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라캉이 분명한 말을 했다면 저자가 인용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니 당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논리적 연결이 아니고 덧붙임에 지나지 않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뒤에 오는 문장은 도리어 길 찾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난감한 상황 이대로 길을 찾습니다.

 

무언가” 두 개가 우리를 답답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짚고 일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생경한”이란 말과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이란 말이 있으므로 생각의 거점으로 삼아 보겠습니다.

 

생경한 무엇으로서 주이상스라면 향락의 단일성에 금을 내는 낯선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낯설음을 극한까지 밀어가면 모순이 나옵니다. 즐거움의 모순은 괴로움입니다. 따라서 주이상스에는 괴로움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과 연결하는 일은 어렵거나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즐거움의 잔을 마셨는데 괴로움의 독이 들어 있더라는 말입니다. 형식논리학의 파탄입니다. A≠∼A(모순율)를 넘어간 것입니다. 이 정도를 몰라서 “무언가”라는 말로 얼버무렸다고 하면 이는 천하의 라캉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문제의 어려움은 논리 자체가 아니라 경험과 정서의 실재에 있습니다. 즐거움의 잔을 들다 어떻게 괴로움의 독을 마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반대로 괴로움의 독배를 들다 어떻게 즐거움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는 것인가? 이 때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떻게 관계하는 것인가? 이 의문은 과학, 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의학의 경계를 가로지릅니다. 세계 진실의 전체에 주의하지 않으면 대놓고 틀리거나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게 됩니다.

 

“선택이 범람하는” 사회. 이 말의 갈피를 잘 뒤적거리면 고수들이 선뜻 말해주지 않는 진실의 언저리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범람’이라는 용어는 본디 자연현상에 대한 것이어서 인간 의도를 은폐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조절구조가 결딴난 통제 불능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해보입니다. 파국 기미를 노출하는 문명비판의 냄새도 맡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빛이 입자이자 파동인 것처럼 자연의 이치로 따지자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존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선 종種 차원의 문제입니다. 본디 빛에서 100% 입자인 경우와 100% 파동인 경우는 자연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100% 즐거움인 경우와 100% 괴로움인 경우를 실재 개념으로 전제하거나 수용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진화는 대뇌 전두엽 부위에서 임계점을 넘어버려 음성되먹임이 되지 않습니다. 극단의 즐거움과 극단의 괴로움에 분열적으로 집착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성공의 이름으로, 그러나 병의 실상으로 인간에게 이런 중독현상은 과잉 진화의 대가로서 숙명처럼 따라다닙니다. 극단을 버리고 정도正道인 중도中道를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맞은편과의 조우는 외상外傷이 되고 공포가 됩니다. 외상과 공포로 말미암아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도착倒錯됩니다. 도착은 지상의 자유와 선택권을 혼효混淆로 몰아넣어버립니다. 도착의 혼효 속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회 차원의 문제입니다. 인간사회는 의도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의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견지에서 보면 국가라는 이름의 사회가 즐거움과 괴로움의 분열을 조장하는 한편 그 상황을 적대 구조로 만들어 수탈을 극대화함으로써 소수 지배집단의 향락에 복무하도록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하이퍼-자본주의로 무장한 국가는 일단 각 개인을 가급적 많이 이런 질병 상태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거기서 다시 지배집단은 무제한 즐거움의 추구하고, 피지배집단은 무제한 괴로움에 빠져드는 전선 구도가 형성됩니다. 타자의 멸절을 통해 획득한 행복은 자기 자신의 멸절을 부릅니다. 공멸의 정치입니다. 전멸의 문명입니다.

 

이 시대의 주이상스는 저주받은 즐거움입니다. 저주를 풀려면 즐거움만으로 세상을 구성하려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즐거움이 한 이치[일리一理]이듯 괴로움 또한 한 이치입니다.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즐거움도 이치에 속하니 그렇다 하고 괴로움도 이치에 속하니 둘 다 그렇다 해야 합니다[개시皆是]. 즐거움만으로는 이치의 다가 아니고 괴로움만으로도 이치의 다가 아니니 둘 다 아니다 해야 합니다[개비皆非].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둘이 뒤바뀌거나 뒤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 부조리를 기획하는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주이상스는 “생경한 무언가”도 아니고 “외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무언가”도 아니게 됩니다. 반갑고 신나는 “” 주이상스입니다. 이 주이상스를 우리는 무애無碍라 이름 합니다. 무애는 화쟁으로 이루어집니다. 화쟁은 원효에게서 왔습니다. 원효를, 라캉 치운 자리에 세우는 것이 이제 여기를 사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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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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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욕망과 주이상스의 정중앙에 있다.·······불안은·······주이상스와의 고통스러운 마주침을 경고하는 정서·······다.·······성공을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주이상스와 가까운 것으로 여긴다면 불안은 욕망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주이상스에 대한 보호막으로 인식할 수 있다.(108-110쪽)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리로이 존스(아미리 바라카)가 NY 할렘에서 행한 연설문 일부입니다.

 

쇠사슬 자랑하는 노예는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벌거벗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빛나고 무거운 쇠사슬을 자랑하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7억 명 이상이 마음병을 앓고 있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고통체”로서 자신의 아픔을 즐기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주이상스는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한 중독 정서입니다. 미리암 그린스팬이 말하듯 그런 유의 “즐겁게 느끼기”는 가장 근본적인 중독입니다. 죽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충동인 “주이상스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불안이라면 이 불편한 정서야말로 우리 삶의 관건적 일부임에 틀림없습니다.

 

한약이나 침으로 병을 치료할 때 증상 심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원칙입니다. 병에 굴복했던 몸이 한약이나 침의 알림과 도움으로 자연치유력을 회복하는 기전에서 나오는 불편함입니다. 통증·발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불안과 본질에서 닿아 있습니다. 통증·발열이든 불안이든 불편하지만 생명 편에 서 있습니다. 여기다 대고 무조건 항불안제, 진통제를 투입하는 서구의학은 죽음 편에 서 있습니다. 주이상스 의학입니다. 의학이 아닙니다.

 

칼 구스타프 융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어둠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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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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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대상의 결여가 아니라 결여의 결여, 즉 결여의 자리에서 대상이 출현함으로써 유발된다.·······불안은 특별히 자유와 연관되었다.·······자유로운 주체는 바로 불확정성, 즉 자유에 수반되는 “가능성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하다.(108-110쪽)

 

결여의 결여는 부정否定의 부정입니다. 통속한 서구논리로 하면 부정의 부정은 긍정입니다. 한[아래아 한], 그러니까 원효 논리로 하면 부정의 부정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은 불확정성, 즉 자유에 수반되는 “가능성의 가능성”입니다. 불확정성으로서 부정不定은 불변하는[상常] 실체[아我]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무상·무아無常·無我]. 무상이고 무아인 상황은 무한히 세워지고[입立] 무한히 깨드려집니다[파破]. 세우고 깨뜨리는 찰나마다 주체의 자유가 작동합니다. 무한을 향해 열린 자유는 그 아득함으로 말미암아 불안이 생명 감각에 배어들게 합니다. 생명 감각으로 들어온 불안은 자유에 휴먼스케일의 지표를 숨은 그림으로 새겨 넣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떠난 자유는 영혼을 허영에 들뜨게 하거나 참담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허영은 행복의 이름으로 오는 위장된 질병입니다. 참담은 질병의 이름으로 오는 억압된 행복입니다. 행복의 이름으로 오는 허영은 돌아오기 어려운 파멸의 길입니다. 하이퍼-자본주의는 이를 축복하여 파멸을 재촉함으로써 돈벌이에 이용합니다. 질병의 이름으로 오는 참담은 아프게 돌이키면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하이퍼-자본주의는 이를 약물로 꼬드겨 옆길로 새도록 함으로써 돈벌이에 이용합니다. 휴먼스케일을 떠나지 않는 자유는 무한히 세워지고[입立] 무한히 깨드려지는[파破] 마주침과 맞물림을 투철하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화쟁和諍]으로만 가능합니다. 화쟁으로 열린 세계의 진실은 비대칭의 대칭이 온통으로 펼쳐진 전체[일심一心]입니다. 일심의 손바닥 안이라면 불안은 아무리 날뛰어도 문제될 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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