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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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공백void, 무인 것으로 보인다.(42쪽)

 

밤늦게 술 취해 들어와 발로 차서 구두 벗어 던지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래 층 사는 사람이 그 소음 때문에 잠을 깨는 피해를 견디다 못해 그러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날 밤 무심코 구두 한 짝을 발로 차서 벗어 던지다 아차 하고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남은 한 짝은 손으로 벗어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래 층 사람이 더욱 화가 나서 올라왔습니다. 남은 구두 한 짝을 언제 벗어 던질지 몰라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우스개입니다. 남은 한 짝을 언제 벗어 던질지 몰라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던 감정 상태가 바로 불안입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조건으로서 “공백void, 무”는 이 경우 알 수 없음으로 드러나는 인식론적 “공백void, 무”입니다. 존재론적 “공백void, 무”가 전형적인 불안의 조건임은 물론입니다. 범위를 조금 넓히면 윤리적 “공백void, 무”도 불안의 조건이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적 “공백void, 무”도 불안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공백void, 무”가 불안의 조건인 것은 인간 생명이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은 신의 창조 행위가 아닙니다. 신의 창조행위가 아니므로 무엇인가를 항상 필요로 합니다. 필요는 자동적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애써 채워야 합니다. 스스로 애쓰는 이성·의지는 “공백void, 무”에 대한 감지 감성인 불안의 신호를 받아 작동합니다. 불안은 인간 생명 운동의 안내자입니다.

 

생명운동의 안내자로서 불안은 그 자체로 항상성을 유지하는 어떤 구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감정 수준을 넘어 격정상태emotionalism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공백void, 무”와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호작용 여하에 따라 불안은 침착하고 옹골찬 계획·준비·실행·점검을 낳을 수도 있고 다양한 정신장애·정신병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치를 따지면 전자에 대한 극진한 관심과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현실에서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세속종교가 야합하여 격정불안을 토건 방식으로 유도하고 그렇게 해서 생긴 정신장애·정신병 치료 사업을 또 토건 방식으로 벌이는 전천후 장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격정불안의 전천후 장사판은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으로서 인간 생명을 교묘히 악용합니다. 실재로서 “공백void, 무”는 물론이고 충만fullness, 유有까지 “공백void, 무”로 인지하도록 환상을 불어넣습니다. 충만fullness, 유有를 극한적으로 전시하면 그 경계가 무너집니다. 경계가 무너진 충만fullness, 유有는 곧장 “공백void, 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경계가 무너진 충만fullness, 유有를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화된 “공백void, 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면 아득하다, 까마득하다, 막막하다, 망망하다가 됩니다.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막막하고, 망망하면 가차 없이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렇듯 인간 문명은 불안의 녹조를 증식시키는 악질 토건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증식된 불안은 허영의 먹이로 주어집니다. 허영은 불안을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가 집니다. 허기진 허영의 몸은 다만 “공백void, 무”를 느낄 따름입니다. 이 악순환은 무한궤도로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멸망하는 종種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멸을 면하려면 서둘러 불안토건이 세운 보洑를 폭파해야 합니다. 생명을 자연히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 흐름 속에서 불안은 건강한 삶을 빚는 감지감성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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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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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배냇우울증’이라 이름 지은 뿌리 깊은 우울증으로 50년 넘게 시달리는 동안 제 영혼은 크리스티안 노드럽Christiane Northrup이 말한 이른바 존재론적 우울감에 점령되어 있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감정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 식민지적 삶을 혁명하고자 내면의 격檄을 쓴 것이 30대 후반, 밖으로 깃발을 내건 것이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겪은 우울증을 바탕으로 한의학 지평 위에 독자적 공부 길을 내고 달려와 이제 60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50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벼락같은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적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 50여 년이 무하마드 알리한테 무수히 잽을 맞아 그로기 상태에 빠진 세월이었다면, 그 2-3년은 조지 포먼에게 어퍼컷 한 방을 맞고 쓰러져 누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치명적 방식으로 단박에 일깨운 감정은 바로 불안이었습니다. 우울에 점령되어 있는 동안 무의식 깊이 숨어 잠자던 유서 깊은 불안도 화들짝 놀라 튀어나왔습니다. 이 불안들이 우울을 대체했음은 물론입니다.

 

점령군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식민지 실제 상황은 우울과 불안이 중첩된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본질상 같으므로 후자가 전자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일본 식민지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과 같습니다. 우울과 불안은 고통의 시너지를 일으키며 제 영혼과 삶을 결결히 겹겹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모멸감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30cm 밖으로 결코 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불행에게는 등이 붙은 행복이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 그 악조건에서 저는 감사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기에 우울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듯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면서 비로소 불안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론으로만은 사유로만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감정의 살갗이 있으니, 제가 당한 저 불안의 고통은 필경 우울과 불안이 비상하게 증폭되는 이 시대를 마주해야 할 못난 의자醫者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제가 얼마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는 것은 남은 제 시간이 우울과 불안을 속 깊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우울과 불안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마음에 가 닿아야만 하는 과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운명을 천명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행복과 도리는 즐거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남을 위해 이제부터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차분히 읽어 나아가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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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생활습관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심한 공복 상태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 이상, 그러니까 3km 이상을 걸어 한의원으로 출근합니다. 잠시 땀을 들인 뒤 단원의 아이들 250명의 이름이 담긴 문서를 엽니다. Jacqueline Mary du Pré의 <Larmes Du Jacqueline>를 켭니다. 삽시간 명상에 듭니다. 눈을 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호피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집에서 싸가지고 온 소박한 도시락을 엽니다. 1인분으로 251명이 함께 아침식사를 합니다. 한의원의 하루하루를 이렇게 엽니다.

 

이렇게 바뀐 생활습관 때문에 한 동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은은히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체중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얼굴의 살이 현저하게 빠집니다. 급기야 초췌한 몰골이 드러납니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나옵니다. 갈증이 일어납니다. 눈이 흐릿해집니다. 머리가 맑지 않아 붕 뜨고 투미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대변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암의 현저한 가족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아버지, 형님, 누이동생·······.

 

몇날 며칠 뒤척거리다 문득 한 마디 말을 떠올렸습니다.

 

“청초淸楚의 땅 앞에는 초췌憔悴의 강이 가로놓여 있다.”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찰나에 초췌憔悴의 강을 건너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찰나에 청초淸楚의 땅으로 들어서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영혼의 울음과 웃음이 회오리치는 것을 목도합니다. 물론 이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입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은 신호입니다. 지나온 삶의 초췌를 마치 들이닥치는 불치병처럼 느끼고서야 비로소 청초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서야 삶의 가치 딱 한 줌을 거머쥘 수 있다는 진실. 훗날 어떤 변화의 결에서라도 이 깨달음만은 감사할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터에 메르스마저 과따티고 있는 지금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가난한 마을 한의원은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간호사는 물론 찾아오시는 환자들까지 민망해할 정도입니다. 70대 초반은 젊은이라고 할 만큼 고령의 어르신들이 드나드시는 한의원인데 그 분들이 꼼짝 못하시는 상황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홀로 의로우신 신께서는 초췌의 강을 파 엎어버리고 청초의 땅만을 전유하고 계십니다. 과연 거룩하고 또 거룩하십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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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5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메르스대란으로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나라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권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후흑전사가 되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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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를 놓고 한국 문단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문학인 아닌 사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독자 입장에서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로 소설가 이동하 선생, 그리고 중견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 님과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 이 분들 가운데 누군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아무래도 직접 입 대기는 힘들 듯합니다.

 

개인적 인연도 쉽지 않고 객관적 비판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비호에서 비난까지 다양한 평가가 난무하는 반응들로 말미암아 당분간 더 뒤엉킨 상태로 문제는 표류할 모양입니다. 심지어 우리끼리 싸우면 일본이 좋아한다는 등의 해괴한 발언까지 등장해 비본질적 지평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사자는 침묵하고·······.

 

오늘 아침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작가의 표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기회에 또 우리는 스스로 ‘자기표절’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 말이다. 강연을 다니면서 느끼는 괴로움이 바로 동어반복의 괴로움이다. 반성하는 자의 뇌가 녹슬지 않는다.”

 

저 또한 어줍지 않은 이런 글을 쓰다보면 허다히 동어반복의 ‘자기표절’을 하게 됩니다. 작은 하나의 모티브를 키워 큰 글로 만드는 과정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기표절’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거나 강요이므로 할 짓이 못 됩니다. 늘 깨어 있어, 늘 경이로움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어떤 글이든 글 쓰는 자의 ‘자기의무’입니다.

 

저는 안도현 시인이 언급한 동어반복의 ‘자기표절’ 문제를 오늘의 한국문학 전체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문학은 모두 ‘자기표절’이라 일반화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이든 소설가든 거의 모든 작가가 세월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상상력을 가지고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을 표현만 바꾸어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작품들을 그런 인지 도식 안에서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내용적 동어반복이랄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시 묻지 않는 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조작할 때 문학은 그 허구를 가지고 세월호의 진실을 구축해야 하는 게 맞는다면, 세월호사건 이후 한국문학이 구축해온 진실은 불행히도 호곡號哭의 지평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든 곡소리는 곡소리일 따름입니다. 무슨 하소연이 변주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의 호곡문학을 가지고 세월호사건으로 넘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2015년 6월 22일 오늘로써 43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면 “아이고~ 아이고~” 소리 아닌 소리를 낼 것입니까.

 

저는 신경숙을 모릅니다. 어디 신경숙뿐이겠습니까. 모르는 작가가 아는 작가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나름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독자입니다. 애정 어린 충고라면 진부한 말일 테지만 그래도 그리 하겠습니다.

 

“한국문학, 지금 특정인 특정 집단의 권력 이야기 가지고 떠들 만큼 한가하거나 떳떳하지 않습니다. 호곡문학인 주제에 독자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한국문학은 통째로 권력입니다. 세월호 영령들 앞에서 더 이상 호곡하지 마시라. 표절하지 마시라. 권력의 협잡에 부역하지 마시라. 왜냐고 묻지 않으려거든 붓을 꺾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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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6-2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리를 여기서 하고, 저기서 하고 자기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 지 궁금하군요. 그래서 저는 여러 작품을 쓴 작가들의 대표작만 읽는주의가 때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더 웃긴건, 책 하나에서 계속 똑같은 소리를 주어 서술어 순서만 바꿔서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요즘 인기있는 자기계발류책들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