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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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배냇우울증’이라 이름 지은 뿌리 깊은 우울증으로 50년 넘게 시달리는 동안 제 영혼은 크리스티안 노드럽Christiane Northrup이 말한 이른바 존재론적 우울감에 점령되어 있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감정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 식민지적 삶을 혁명하고자 내면의 격檄을 쓴 것이 30대 후반, 밖으로 깃발을 내건 것이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겪은 우울증을 바탕으로 한의학 지평 위에 독자적 공부 길을 내고 달려와 이제 60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50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벼락같은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적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 50여 년이 무하마드 알리한테 무수히 잽을 맞아 그로기 상태에 빠진 세월이었다면, 그 2-3년은 조지 포먼에게 어퍼컷 한 방을 맞고 쓰러져 누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치명적 방식으로 단박에 일깨운 감정은 바로 불안이었습니다. 우울에 점령되어 있는 동안 무의식 깊이 숨어 잠자던 유서 깊은 불안도 화들짝 놀라 튀어나왔습니다. 이 불안들이 우울을 대체했음은 물론입니다.

 

점령군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식민지 실제 상황은 우울과 불안이 중첩된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본질상 같으므로 후자가 전자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일본 식민지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과 같습니다. 우울과 불안은 고통의 시너지를 일으키며 제 영혼과 삶을 결결히 겹겹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모멸감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30cm 밖으로 결코 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불행에게는 등이 붙은 행복이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 그 악조건에서 저는 감사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기에 우울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듯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면서 비로소 불안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론으로만은 사유로만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감정의 살갗이 있으니, 제가 당한 저 불안의 고통은 필경 우울과 불안이 비상하게 증폭되는 이 시대를 마주해야 할 못난 의자醫者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제가 얼마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는 것은 남은 제 시간이 우울과 불안을 속 깊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우울과 불안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마음에 가 닿아야만 하는 과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운명을 천명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행복과 도리는 즐거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남을 위해 이제부터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차분히 읽어 나아가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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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생활습관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심한 공복 상태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 이상, 그러니까 3km 이상을 걸어 한의원으로 출근합니다. 잠시 땀을 들인 뒤 단원의 아이들 250명의 이름이 담긴 문서를 엽니다. Jacqueline Mary du Pré의 <Larmes Du Jacqueline>를 켭니다. 삽시간 명상에 듭니다. 눈을 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호피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집에서 싸가지고 온 소박한 도시락을 엽니다. 1인분으로 251명이 함께 아침식사를 합니다. 한의원의 하루하루를 이렇게 엽니다.

 

이렇게 바뀐 생활습관 때문에 한 동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은은히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체중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얼굴의 살이 현저하게 빠집니다. 급기야 초췌한 몰골이 드러납니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나옵니다. 갈증이 일어납니다. 눈이 흐릿해집니다. 머리가 맑지 않아 붕 뜨고 투미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대변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암의 현저한 가족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아버지, 형님, 누이동생·······.

 

몇날 며칠 뒤척거리다 문득 한 마디 말을 떠올렸습니다.

 

“청초淸楚의 땅 앞에는 초췌憔悴의 강이 가로놓여 있다.”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찰나에 초췌憔悴의 강을 건너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찰나에 청초淸楚의 땅으로 들어서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영혼의 울음과 웃음이 회오리치는 것을 목도합니다. 물론 이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입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은 신호입니다. 지나온 삶의 초췌를 마치 들이닥치는 불치병처럼 느끼고서야 비로소 청초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서야 삶의 가치 딱 한 줌을 거머쥘 수 있다는 진실. 훗날 어떤 변화의 결에서라도 이 깨달음만은 감사할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터에 메르스마저 과따티고 있는 지금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가난한 마을 한의원은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간호사는 물론 찾아오시는 환자들까지 민망해할 정도입니다. 70대 초반은 젊은이라고 할 만큼 고령의 어르신들이 드나드시는 한의원인데 그 분들이 꼼짝 못하시는 상황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홀로 의로우신 신께서는 초췌의 강을 파 엎어버리고 청초의 땅만을 전유하고 계십니다. 과연 거룩하고 또 거룩하십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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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5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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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메르스대란으로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나라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권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후흑전사가 되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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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를 놓고 한국 문단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문학인 아닌 사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독자 입장에서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로 소설가 이동하 선생, 그리고 중견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 님과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 이 분들 가운데 누군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아무래도 직접 입 대기는 힘들 듯합니다.

 

개인적 인연도 쉽지 않고 객관적 비판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비호에서 비난까지 다양한 평가가 난무하는 반응들로 말미암아 당분간 더 뒤엉킨 상태로 문제는 표류할 모양입니다. 심지어 우리끼리 싸우면 일본이 좋아한다는 등의 해괴한 발언까지 등장해 비본질적 지평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사자는 침묵하고·······.

 

오늘 아침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작가의 표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기회에 또 우리는 스스로 ‘자기표절’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 말이다. 강연을 다니면서 느끼는 괴로움이 바로 동어반복의 괴로움이다. 반성하는 자의 뇌가 녹슬지 않는다.”

 

저 또한 어줍지 않은 이런 글을 쓰다보면 허다히 동어반복의 ‘자기표절’을 하게 됩니다. 작은 하나의 모티브를 키워 큰 글로 만드는 과정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기표절’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거나 강요이므로 할 짓이 못 됩니다. 늘 깨어 있어, 늘 경이로움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어떤 글이든 글 쓰는 자의 ‘자기의무’입니다.

 

저는 안도현 시인이 언급한 동어반복의 ‘자기표절’ 문제를 오늘의 한국문학 전체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문학은 모두 ‘자기표절’이라 일반화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이든 소설가든 거의 모든 작가가 세월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상상력을 가지고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을 표현만 바꾸어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작품들을 그런 인지 도식 안에서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내용적 동어반복이랄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시 묻지 않는 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조작할 때 문학은 그 허구를 가지고 세월호의 진실을 구축해야 하는 게 맞는다면, 세월호사건 이후 한국문학이 구축해온 진실은 불행히도 호곡號哭의 지평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든 곡소리는 곡소리일 따름입니다. 무슨 하소연이 변주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의 호곡문학을 가지고 세월호사건으로 넘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2015년 6월 22일 오늘로써 43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면 “아이고~ 아이고~” 소리 아닌 소리를 낼 것입니까.

 

저는 신경숙을 모릅니다. 어디 신경숙뿐이겠습니까. 모르는 작가가 아는 작가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나름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독자입니다. 애정 어린 충고라면 진부한 말일 테지만 그래도 그리 하겠습니다.

 

“한국문학, 지금 특정인 특정 집단의 권력 이야기 가지고 떠들 만큼 한가하거나 떳떳하지 않습니다. 호곡문학인 주제에 독자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한국문학은 통째로 권력입니다. 세월호 영령들 앞에서 더 이상 호곡하지 마시라. 표절하지 마시라. 권력의 협잡에 부역하지 마시라. 왜냐고 묻지 않으려거든 붓을 꺾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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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6-2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리를 여기서 하고, 저기서 하고 자기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 지 궁금하군요. 그래서 저는 여러 작품을 쓴 작가들의 대표작만 읽는주의가 때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더 웃긴건, 책 하나에서 계속 똑같은 소리를 주어 서술어 순서만 바꿔서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요즘 인기있는 자기계발류책들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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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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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98쪽)

 

지난 일요일 아내의 스마트폰 벨 소리가 새벽 정적을 뒤흔드는 순간 우리 부부는 직감했습니다. 뇌수술 후 지난 1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존엄이 무너지고 고통만 가득한 삶을 살아오셨던 장모님께서 드디어 영면에 드신 것 말입니다.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비교적 침착하고 능숙하게 장례를 치러냈습니다.

 

슬픔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웃음소리가 그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문상을 온 수많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조의금으로 푼돈을 낸 사람도 거액을 낸 사람도 한 자리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고인과 나눈 서사가 있었던 사람들은 소리 내어 울며 비탄의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육개장 놓인 밥상 앞에 앉으면 마음 풍경은 금세 일상의 장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왁자한 전체 분위기는 부분적인 에피소드들의 깊이와 높이를 눙치면서 매끈하게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딸의 슬픔과 상조회에서 파견한 용역직원 아주머니의 짜증이 동급이 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습니다. 다양하게 얽힌 사회조직의 기계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별다른 일 없이 순식간에 장례식은 투명해졌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법하지 않은 사회의식이 그 2박3일 여정을 해남 어느 고즈넉한 마을 뒷산에서 끝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등성이 소나무를 지나 무덤을 평평하게 쓸고 지나갑니다. 이 평평함에 실어 남은 사람들은 고인과의 인연을 개켜 넣고 각자 남을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장례 때문에 중단했던 진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틈틈이 생각에 잡깁니다. 삶의 마지막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죽음은 끝내 불투명한 심연이고 그에 대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므로 인간은 끝내 스스로의 삶까지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거꾸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삶을 생각한다면 투명해지지 않을까·······.

 

사실 여태까지 『투명사회』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 투명의 뜻을 부정적인 여러 각도에서 음미하였습니다.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진,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에서 구성원이 요구하는 절박한 투명이 아니라 권력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지배집단이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적반하장의 투명에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진 국민이 부역하는 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투명이라면 불투명한 세계의 진실에 터하여 무너뜨려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무릇 불투명한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투명을 벼리는 과정이 아니던가요. 세계 진실은 불투명하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투명의 어법이 아니던가요. 바로 이 역설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이자 도리입니다. 불투명과 투명의 경계에서 부단히 만들어지는 사건 자체가 인간을 형성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불투명 여부 자체가 아닙니다. 투명의 독재가 편만할 때는 혁명합니다. 불투명의 참주가 날뛰면 방벌放伐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모녀의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어머니를 잃은 아내 마음을 제가 모조리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모자의 인연이 끊어진 채 살아온 제 마음이 아내 마음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 안다고 설칠 수 없고 모른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경계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 저는 아내를 가만히 지켜보며 머무릅니다. 부부 사이의 도덕적 기반 도덕적 가치를 생각합니다. 진실과 정직을 생각합니다. 신뢰와 투명을 생각합니다. 불투명성의 투명성과 투명성의 권력관계가 스며든 틈을 살펴봅니다. 죽음에 기대어 우리는 또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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