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를 놓고 한국 문단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문학인 아닌 사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독자 입장에서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로 소설가 이동하 선생, 그리고 중견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 님과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 이 분들 가운데 누군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아무래도 직접 입 대기는 힘들 듯합니다.
개인적 인연도 쉽지 않고 객관적 비판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비호에서 비난까지 다양한 평가가 난무하는 반응들로 말미암아 당분간 더 뒤엉킨 상태로 문제는 표류할 모양입니다. 심지어 우리끼리 싸우면 일본이 좋아한다는 등의 해괴한 발언까지 등장해 비본질적 지평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사자는 침묵하고·······.
오늘 아침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작가의 표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기회에 또 우리는 스스로 ‘자기표절’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 말이다. 강연을 다니면서 느끼는 괴로움이 바로 동어반복의 괴로움이다. 반성하는 자의 뇌가 녹슬지 않는다.”
저 또한 어줍지 않은 이런 글을 쓰다보면 허다히 동어반복의 ‘자기표절’을 하게 됩니다. 작은 하나의 모티브를 키워 큰 글로 만드는 과정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기표절’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거나 강요이므로 할 짓이 못 됩니다. 늘 깨어 있어, 늘 경이로움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어떤 글이든 글 쓰는 자의 ‘자기의무’입니다.
저는 안도현 시인이 언급한 동어반복의 ‘자기표절’ 문제를 오늘의 한국문학 전체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문학은 모두 ‘자기표절’이라 일반화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이든 소설가든 거의 모든 작가가 세월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상상력을 가지고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을 표현만 바꾸어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작품들을 그런 인지 도식 안에서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내용적 동어반복이랄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시 묻지 않는 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조작할 때 문학은 그 허구를 가지고 세월호의 진실을 구축해야 하는 게 맞는다면, 세월호사건 이후 한국문학이 구축해온 진실은 불행히도 호곡號哭의 지평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든 곡소리는 곡소리일 따름입니다. 무슨 하소연이 변주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의 호곡문학을 가지고 세월호사건으로 넘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2015년 6월 22일 오늘로써 43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면 “아이고~ 아이고~” 소리 아닌 소리를 낼 것입니까.
저는 신경숙을 모릅니다. 어디 신경숙뿐이겠습니까. 모르는 작가가 아는 작가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나름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독자입니다. 애정 어린 충고라면 진부한 말일 테지만 그래도 그리 하겠습니다.
“한국문학, 지금 특정인 특정 집단의 권력 이야기 가지고 떠들 만큼 한가하거나 떳떳하지 않습니다. 호곡문학인 주제에 독자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한국문학은 통째로 권력입니다. 세월호 영령들 앞에서 더 이상 호곡하지 마시라. 표절하지 마시라. 권력의 협잡에 부역하지 마시라. 왜냐고 묻지 않으려거든 붓을 꺾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