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학 연구자로 소개되며 스스로는 생계형 글쓰기 노동자라 부르는 파워라이터 정희진의 어느 글 가운데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쓴 대략 이런 내용을 기억합니다.

 

어느 강연에서 화장실 다녀올 사람들을 위해 휴식 시간 5분을 주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한 사람이 와서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는 즉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 장애인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미안하다는 말은 다음에 또 그러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인터뷰한 오늘(6월 13일) 한겨레신문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김정욱은 뜬금없이 “공장 안에 있을 때 작업복 입는 걸 꽤나 좋아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대공장 사업장에 있으니 더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자꾸 있어서 작업복 입고 집회 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하세요.

 

“저도 과도하다고 느낄 때가 좀 있어요. 그래도 뭔 생각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게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그 미안함이 김정욱이 오랫동안 싸워온 원동력이었나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게 아….”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말이 저를 좀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힘이기도 하고요. 저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아요.”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신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제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라’고 말해요. 그런데 항상 받는 건 많은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고,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좀 있어요. 좀 더 건강하게 뭔가를 좀 더 해야 하는데….”

 

인터뷰는 김정욱의 ‘미안하다’는 말로 끝났고 기자는 그의 ‘미안하다’를 곡진히 해석함으로써 기사를 끝냅니다.

 

긴 인터뷰가 끝나자 김정욱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우리도 이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는데, 버려졌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죠. 우리가 끊임없이 얘기했던 ‘함께 살자’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지요.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여지없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미안하다는 김정욱의 말은 함께 살자는 말이다. 굴뚝과 세상이 남긴 상처에도, 김정욱은 먼저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미안하다’가 있습니다. 상처 입히는 사람의 작은 자아가 들이미는 못 깨친 ‘미안하다’가 그 하나입니다. 상처 입은 자의 큰 자아가 내미는 깨친 ‘미안하다’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물론 상처 입힌 사람의 ‘미안하다’에는 그 어떤 진심도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미안하다’에는 그 어떤 어두움도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함께 살려는 낮은 연대의 생명감각 유무가 둘 사이를 분명하게 가른다는 말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그 동안 어떤 ‘미안하다’를 입에 올리며 살아 왔는가?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념들로 일렁이다가 문득 인터뷰 기사 중 한 대목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해요.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아… 우리가 대신 싸우고 있는 거구나. 우리가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힘들다는 생각보단 사람들 만나면 에너지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죠.”

 

지난 몇 년간 이 땅의 처참한 싸움터를 기웃거리며, 그 소식을 들으며 느껴온 감정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부끄럽다’입니다. 또 하나 결코 떨칠 수 없는 것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초라하다’입니다. 이 두 감정을 한 데 묶으면 제 인생은 ‘남루하다’라고 쓰고 ‘미안하다’라고 읽어야 할 무엇이 됩니다. 싸움터 한복판에 서 피 흘리는 분들에 대한 ‘미안하다’. 알량한 제 삶의 인연 자체에 대한 ‘미안하다’.

 

저는 제 이 '미안하다'가 앞서 말씀드린 세상의 저 두 '미안하다'의 경계에 서 있는, 아직은 이름 올릴 수 없는, 끝내 김정욱의 ‘미안하다’로 흘러가야 할, 생성중인 ‘미안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 ‘미안하다’에 몸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 김정욱이 걱정한 이창근, 그의 아내 자영에게 전화부터 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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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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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신을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101-102쪽)

 

지난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때 대한민국의 장군들은 두 패로 나뉘어 보복 공격을 할 것인가 일주일 동안 입씨름하다가 결국 한미연합사령관에게 가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시키지 않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대한민국 군대의 이 한심한, 그러니까 매국적인, 아니 ‘종북’적인 상황은 대체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이 신식민지이기 때문입니다,

 

신식민지란 제이차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를 말합니다. 독립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군사적으로 사실상 다른 나라에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왜 어떻게 신식민지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74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

 

대통령의 국군 통수의 핵심은 전시 작전통제권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국군 최고 책임자)에게는 전시 작전통제권이 없습니다. 1950년 이승만이 자발적으로 미국에 헌납한 이후 되찾아오지 못한 까닭입니다. 국가원수에게 국군 통수의 핵심권한이 없는 국가가 왜 어떻게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일 수 있는지요.

 

이 참담한 대한민국의 국군 수뇌부가 지난 대통령선거에 개입했습니다. 쿠데타에 준하는 헌법 유린 행위임에도 이렇다 할 정치권의 문제 제기가 없자 저들은 도리어 정신전력원을 만들어 종북 퇴치 교육을 하겠다고 의기양양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자가당착입니다.

 

신식민지주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상황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신식민지 “건설에 동참”합니다. 저들이 함정에 빠진 까닭은 신식민지주의가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투명사회의 기만적 통제와 감시가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순의 땅입니다.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는 통제와 감시는 이미 본 바와 같습니다. 국내적으로도 형식은 멋진 민주공화국이지만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이 민주주의도 공화국도 해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신노예제 전제군주국 “건설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투명사회』저자는 간결하고 냉정한 문장으로 책을 닫습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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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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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83-86쪽)

 

늦깎이 의자醫者로서 오십 넘어 처음 한의원 열던 때의 일입니다. 경험 있는 젊은 선배들의 도움을 여러 면에서 받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테리어 공사 문제였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접촉해보고 결정하라는 말들을 듣고 8개 업체한테서 도면을 받았습니다. 선택지가 많으면 좋겠거니 싶은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것들을 펼쳐 놓으니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삶 전반에 걸쳐 정보와 판단 문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택지가 3 개를 넘어서면 판단력에 비상이 걸립니다. 6개를 넘어서면 마비 지경이 됩니다. 객관식 시험 문제의 선택지가 4-5개인 것은 이런 심리 추이를 고려한 지혜의 소산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때 저는 인테리어 회사 대표의 사람됨을 보고 최종 판단을 내렸습니다. 잘한 일이었습니다.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정보가 많아질수록 부정성의 사유 능력은 사위어가기 마련입니다. 부정성의 사유가 작동하고서야 잉태할 수 있는 진리를 “정보의 무더기”가 “낳는 것은” 남자 혼자 아이를 낳는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투명하게 조작된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불투명한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가 불투명한 것은 세계가 무한 스펙트럼의 비대칭적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대칭적 대칭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기 때문에 무한 스펙트럼의 불투명한 ‘지성소至聖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불투명한 ‘지성소’는 정보적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금단의 땅입니다. 이 금단의 땅이 ‘불온하고 발칙한’ 변화의 본진이기 때문에 투명사회는 한사코 여기를 궤멸시키려 합니다. 여기가 궤멸되면 투명사회, 아니 세계 자체도 궤멸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대한민국의 ‘지성소’는 어디일까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정보적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대뜸 “청와대”라고 답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불온하고 발칙한’ 변화의 본진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지성소’가 될 수 없습니다. 청와대는 ‘지성소’를 한사코 궤멸시키려 하는 투명사회의 컨트롤타워입니다. 이 컨트롤타워가 진실로 컨트롤하지 않는 것이 ‘지성소’입니다.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이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거짓 정보로 ‘전시’해버린 세월호의 진실, 메르스의 진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지성소’입니다. 저들이 쌓아 놓고 던져준 “정보의 무더기”로 투명해진 “진실”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부정성의 복원을 통해 확보한 증거와 논리가 저들이 붕괴시킨 서사를 다시 구축할 때 비로소 참된 진실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실 속에 끝내 꿰뚫을 수 없는, 차마 꿰뚫어서는 안 될 불투명한 숭고와 존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더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긍정화에 세뇌되어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짓을 보아도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는 이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저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의 무더기 정보에 질문과 저항의 칼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아무 짓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처럼 꾸미는 통치의 거짓 “진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기어이 사는가 싶게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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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1960년대 서울의 성북구 동소문동 616번지는 달동네의 대명사였다. 가로세로 두 뼘 크기 창문을 열면 남산 정상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그 동네 오막살이집에서 10대의 10년을 살았다.

 

수많은 기억 가운데 가난의 표지인 우동국수가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다. 동네 큰길 한 켠에 왕가 성을 가진 아저씨네 국수공장(!)이 있었다. 기계에서 뽑아낸 기다란 국수를 높다란 건조대에 널어 말리는 풍경은 매우 익숙하고도 아득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수에도 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넙데데하고 누런, 그래서 값싼 우동국수와 날씬 동글하고 뽀얀, 그래서 값비싼 소면국수. 이 둘의 차이는, 적어도 어린 내 눈에는, 하늘과 땅이었다. 사실 이런 느낌은 '면' 자체보다 완성된 상태의 '국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절 허다한 아버지들이 그랬듯 오랜 실직 상태에 있었던 선친의 가난 탓에 간장 국물로 삶은 우동국수를 그나마도 하루 두 번 마시면(!) 호사였다. 주린 배를 움켜쥔 소년에게 그윽한 멸치 국물 아니면 빠알간 무채 김치와 어우러진 소면의 그 도도하고 낭창낭창한 자태란 가히 로망이었다. 언감생심 밥은 꿈도 꿀 수 없는 환상이었고.

 

오십 년 세월 흐른 어느 날 지하철역에 걸린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를 읽는다. 문득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소면 국수가 먹고 싶다. 소면은 내게 로망이었다, 아니, 이다, 아니, 일 것이다, 쭈욱~. 가난한 한의사의 허름한저녁식사여서 더욱 소담할 소면 국수. 치유가 걸어온다, 도도하고 낭창낭창한 자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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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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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투명성의 공식이다.·······친밀성의 독재는 모든 것을 심리화하고 개인화한다.·······친밀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73-77쪽)

 

예일대학교 한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다른 방식, 예컨대 책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며 우월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연구 내용에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모든 것을 심리화하고 개인화”하는 “친밀성의 독재”가 낳은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빠져버린 오류의 심연입니다.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하는 풍경입니다. 모름지기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과 접속하는 젊은 세대에게 만연해가는 현상이 일종의 경계선장애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하는 병리현상인데 저는 서구 정신의학과 달리 특정 질환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한테서 남을 쪼개내는 극단적 자기애와 남한테 나를 포개버리는 극단적 자기소외의 비대칭적 대칭의 축을 가리킵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분열형’ 마음병인 전자와 ‘우울형’ 마음병인 후자를 아우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은 극단적 자기애하고만 연결될 것 같지만 본질이 자기 신뢰의 상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통 기반으로 하는 극단적 자기소외와도 연결됩니다. 양자가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기도 합니다.

 

자기 신뢰의 상실은 사회가 강요하는 투명성 때문입니다. 신뢰는 근본적으로 불투명성을 전제하므로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리는 “무한한 친밀성”으로 드러나는 투명성은 자기 신뢰를 원천적으로 제거합니다. 남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무근거한 나르시시즘입니다.

 

투명성이 깊어질수록 이 나르시시즘 냄새는 더욱 짙어지기 마련입니다. 적정한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고 타인과 소통하여 공감·공유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체취는 고독하고 유독합니다.

 

고독은 자기를 죽입니다. 우울증입니다. 유독은 타인을 죽입니다. 사이코패스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말하면 유독한 사이코패스 환자는 수탈을 자행하는 지배층입니다. 고독한 우울증 환자는 수탈당하는 피지배층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 전형을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국민을 끊임없이 죽이면서 유체이탈 어법으로 자기신화만 쓰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이코패스 집단, 그 무한한 자기친밀성. 종말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문을 다시 인용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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