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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36쪽)
한의원에 와서 진단 받는 분들 가운데 적잖이 물어오는 것이 다름 아닌 체질 여하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저는 “각자 자신의 경향성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평생 변하지 않는 개념으로서 체질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체질은 사상‘요법’의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인가, 하는 질문에 저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먼저, 체질은 변하지 않는가에 관하여.
우리사회에서 체질이라는 용어는 이미 변하지 않는 타고난 성질이라는 뜻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설혹 타고난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주도하지는 못합니다.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최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체 구조 못지않게 외부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사건으로서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상‘요법’의 경우 이제마가 처음부터 이런 불변의 체질을 전제했다면 이는 그가 지니고 있는 삶의 조건에 터한 하나의 사유 프레임일 것입니다. 개인의 사유 프레임에 인간의 몸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다음, 체질은 사상‘요법’이 구별하는 그 넷뿐인가에 관하여.
넷이라는 숫자는 그저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편은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하여 실재보다 작은 도구입니다. 마치 무수한 중간색의 존재를 빨주노초파남보로 묶어낸 일곱 빛깔 무지개 개념과 같습니다. 구태여 이름 하면 수많은 “점이체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점이체질이 아닌 전형적인 체질이 도리어 예외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좀 더 날카롭게 말하면 전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체질의 소유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치상 맞습니다. 이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100% 입자이기만 한 빛도, 100% 파동이기만 한 빛도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하지 않습니다. “포르노적”이지 않습니다. “복합성을 띠”고 있습니다.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의 몸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합성을 축소”하는 일이 아닙니다. “속도를 늦”추는 일입니다. 시간을 들여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무한한 주름 속에서 그 결과 겹을 더듬어가야 합니다. 체질이론은 다만 하나의 편법일 뿐입니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MRI를 포함한 서구의학의 모든 기계진단 기술은 물론 정교한 진단명, 치료 매뉴얼과 화학합성 약물 모두 사람의 몸을 기계로, 그러니까 투명한 사물로 전제한 것들입니다. 서구의학은 투명사회 건설에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역하는 세력의 신념체계입니다. 서구의학이 전시하는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합니다. 굴곡진 구석이 없습니다. 삽시간에 떼돈을 벌어다 주는 포르노입니다. 의학이든 뭐든 빠른 속도로 돈만 만들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함부로 덤비는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의 제2강령은 이것입니다.
“복합성을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