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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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다.········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다름의 부정성이 전혀 없는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 역시 외설적이다. 모든 것을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성의 영역에 내던지는 강압적 힘은 외설적이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내놓은 육체와 영혼은 외설적이다.(32-34쪽)

 

하필 포르노만 외설적이고, 하필 외설만 색정적이고, 하필 색정만 쾌락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대사회 자체가 망상적 쾌락에 중독된 향락사회입니다. 포르노와 외설을 돋을새김 하는 까닭은 색sex 문제가 제의-전시, 공적 윤리-사적 욕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월등한 도발적 쟁점이기 때문입니다.

 

향락사회의 전반적인 음탕함과 난잡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정치를 보면 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치적 음란의 기본은 “대놓고” 해먹는 것입니다. 여기에 “함부로”를 더하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대놓고 해먹는 짓도 기가 찰 판인데 함부로 해먹는 짓과 맞닥뜨리면 기도 안 찹니다. 바로 이 경지에 오른 이명박 정권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적 음란은 단군 이래 단연 발군이라 할 만합니다.

 

저들이 함부로 음란함을 드러내는 것은 발칙한 자신감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 자신감은 뇌 없는 부동의 추종자들과 알량한 기득권에 눌러앉아 꽃놀이 패 하고 있는 야당에 힘입은 바 큽니다. 하지만 이 모든 질탕한 힘은 제 나라를 팔아 스스로 외설적 삶에 빠져든 매판집단과 식민세력의 계략에서 온 것입니다. 저들의 준동이 극에 달했다는 느낌과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것은 암울한 전망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처리 과정을 보면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의 희생이 우리사회의 ‘발효’제로 작동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패’를 심화시키는 계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함부로 저지르는 권력의 외설적 악행이 이제는 “거침없다”는 느낌으로 가고 있습니다. 외설 매판이 주도하는 포르노 국가, 그 국민으로 태어나 사는 인연, 슬프고 또 슬픕니다.

 

정작 슬픈 일이 남아 있습니다.

 

망각.

 

그렇습니다. 포르노 국가의 지휘 아래 포르노 언론은 아이들이 살해되는 과정을 “과도한 가시성”으로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에 실어 실시간 “전시”했습니다. 이 기억을 잊는다면 오늘 여기는 저주받은 슬픔의 시공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불망不忘의 제의로라도 포르노 외설 판에 맞서야만 합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니,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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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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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secret, secretus), 구획, 폐쇄의 부정성은 제의가치의 본질적 구성 성분이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28-29쪽)

 

현대사회 또는 서구문명을 시각독재로 규정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성 가부장의 ‘중심시각’에 들어오는 상품으로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오직 그렇게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는 사물들로 가득 찬 세상이기에 말입니다.

 

그 사물들 중에 명품으로 전시된 인간이 가장 좋은 상품임은 물론입니다. 하여 인간은 대박 나는 상품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전시하는 일에 죽기 살기로 몰입합니다. 각종 대중매체에 전시되어 돈과 명성을 쓸어가는 이른바 ‘셀렙’celebrity의 언행 모두가 전시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전술의 산물입니다. ‘셀렙’은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대박을 더 집중시킵니다. 그럴수록 ‘루저’looser의 쪽박은 확산됩니다. 대박과 쪽박의 양극화, 궁극적으로 신노예제 사회를 완성하는 것이 전시사회 프로젝트입니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의 향기는 시각독재 사회에서 가치가 없습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오직 눈에 띄어야 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어도 있는 것입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합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김선우는 진실을 이렇게 밝혀줍니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김선우의 사물들』130쪽)

 

능동적인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도저한 생의 감각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의 거처이며, 가장 예민한 감정의 결이며, 인격적 사회적 본질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따라, 사건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것이 나自입니다. 나는 그런 것입니다.

 

요컨대 나는 관계 맺는 존재로서 인간이 상처를 따라 그려 나아가는 신음과 치유의 궤적입니다. 신음은 반응reaction이며 치유는 감응response입니다. 물론 감응은 반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반응의 불을 댕기는 것이 바로 후각입니다. 냄새 맡지 못 하면 결국 치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여, 살아야 하는, 살아 내야만 하는, 생명은 끊임없이 냄새를 좇아 흘러가는 것입니다.

 

나를 가리키는 한자, ‘스스로 자自’는 갑골문자 형태로 볼 때 코를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동아시아인은 왜 코로써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아를 환유換喩 또는 제유提喩하였을까요? 그들이 꿈꾼 존재, 그들이 사랑한 가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紛郁郁其遠蒸兮분욱욱기원증혜

滿內而外揚만내이외양

情與質信可保兮정여질신가보혜

羌居蔽而聞章강거폐이문장

 

고운 향기 물씬물씬 멀리 퍼지니

안에 가득 차서 밖으로 날리는 것이네.

진실과 기품을 미쁘게 지키면

아! 가려 두어도 그 내음 모두 맡으리.

 

굴원屈原의 〈사미인思美人〉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가려 두어도 모두 그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전시되지 않아도 가치 있는 그런 사람이 모름지기 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삶, 그런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이제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후각혁명의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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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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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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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5: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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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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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26-27쪽)

 

말의 쓰임새에서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진리라는 말처럼 조롱당하는 것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진리가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가 된 것은 긍정사회 덕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진리가 긍정사회 속에서는 탐낸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탐욕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조롱거리로 만들어서 가짜와 일치시키는 것으로 답을 찾습니다.

 

긍정사회의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탐욕과 두려움, 그리고  무지의 삼두사三頭蛇에 제대로 물린 인간은 미친 듯 약을 찾아 나섭니다. 문제는 인간이 찾는 약이 해독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진통제를 찾고 있습니다. 현대의학과 심리학에 세뇌 당했기 때문입니다. 진통제의 진리는 돈·향락·정보입니다. 돈·향락·정보에는 부정의 되먹임이 통하지 않습니다. 광란의 일방질주, 그 종착지가 다름 아닌 중독입니다.

 

중독의 극대화는 자본주의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쌍끌이는 소유와 소비입니다. 소유가 장엄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제적 처분의 한계를 넘어선 소유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장엄은 가짜입니다. 소비가 숭고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구체적 지각의 경계를 넘어선 소비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숭고는 가짜입니다.

 

가짜를 아무리 축적해도 진짜로의 질적 전환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유가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소비가 영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통이 해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독은 소유를 내려놓고, 소비를 포기하고야 가능합니다. 돈·향락·정보에 부정의 되먹임을 걸어야 가능합니다. 부정의 되먹임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직시할 수 있게 합니다.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직시해야 진리 구축이 가능합니다.

 

진리는 선험적으로 정의될 무엇being이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이 이치에 맞게 살아내어 그 내용을 채워가야 하는 과정becoming입니다. 과정으로서 진리는 긍정으로 투명해지는 정답이 아닙니다. 여러 개의 답이 공존할 수 있는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느낌과 알아차림과 받아들임을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가령 아래 두 가지 현상을 놓고 곰곰 생각해봅시다.

 

한국인이 중산층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 원 이상, 자동차 2000cc 급 중형차, 통장잔고 1억 이상, 해외여행 1년에 몇 회 이상. 미국인이 중산층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과연 누가 스스로 문제 제기를 하는 진리의 사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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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은 색깔이 없다.·······색깔은·······몰이데올로기적인 의견에 한해서만 허용된다. 의견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견에는 뒤집어 엎어버리는 부정성이 없다. 그리하여 오늘의 의견사회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로 놓아둔다.(25쪽)

 

민주화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가, 호랑이굴로 들어가 싸우겠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고 매판독재세력 품에 스스로 안겼던 몇몇 인사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 중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진심으로 그리 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확신의 근거가 가소로운 것이기는 합니다. 선 자리가 바뀌는 순간 자신들의 주장이 이데올로기에서 의견으로 강등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니 말입니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견에는 뒤집어 엎어버리는 부정성이 없다.

 

하기는 그 뒤 정치적 거물이 된 두어 사람의 행태를 보면 처음부터 이 점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민주화투쟁 전력을 정치적 야망을 위한 제물로 삼았거나, 최소한 수단쯤으로 이용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동안 그들이 제시한 의견意見은 의견조차 되지 못 하고 그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한 의견義犬의 짖어댐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목하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른바 “의견사회”의 의견은 그 사전적 의미인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하여 자기 마음에서 판단하여 가지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로 놓아”두는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그야말로 투명한 생각 무더기입니다. 그것은 결정적일 때 이런 ‘왕따’를 당하면서 고립됩니다.

 

“필자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이비 중립문장을 대체 어떤 의도에서 누가 만든 것인지 모릅니다. 관용을 과시하면서 자기집단의 ‘꼴통’성을 은폐하려는 수작이든 그 반대이든 우리사회에 관한 한, 병리현상의 한 표지처럼 보입니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의견이 과연 무슨 힘을 지녀서 전체를 장악하고 꿰뚫을 것입니까. 게다가 뒤집어 엎어버리다니, 이 무슨 언감생심 꿈이나마 꿀 수 있는 일일 것입니까.

 

의견은 더 이상 필요 하지 않습니다. 색깔이 필요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는, 견고히 축조된 거짓의 체계를 뒤흔드는, 저 부정성이 필요합니다. 색깔을 죽이기 위해 만든 색깔론을 타파해야 합니다. 빨간 목도리 하고 ‘빨갱이’ 타령하는 후안무치 넘어 빨강으로 박애를 선포했던 프랑스대혁명의 색깔정신을 불러내야 합니다. ‘빨갱이’는 색깔이 아닙니다. 빨강이 색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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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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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격한 의미에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역시 부정성의 현상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결단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이야기로서 구별의 경계선을 만든다.·······구별의 부정성이 없다면 사물들은 온통 제멋대로 증식하며 난교 상태에 빠질 것이다.·······부정성으로서의 이론은 언제나 현실 자체를 현격히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22-23쪽)

 

저는 마흔 다 돼서 외동딸 하나를 얻었습니다. 예쁜 이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탐욕이다 싶은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이라는 외자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금이 아니고 은이냐 했지만 사실 그 ‘은’은 조사助辭입니다. 출생신고 할 때에도 한글로 올렸습니다. 이름 뜻을 부모 탐욕으로 채워 닫지 않고 열어두어 아기 스스로 완성해가라는 소망을 담은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부모는 정성을 다해 그 아기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 정성이 때로는 부모의 탐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기 인생의 좌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은 그 뒤로 수없이 불리며 아기와 일생을 함께 합니다. 이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선언하는 표지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구별의 경계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그토록 고심하며 짓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초심을 잊은 부모는 어느 때부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가령 “지민아! 화장대 위에 놓인 면봉 하나만 가져와.”할 것이 “야! 저기 하얀 그거 하나만 가져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화장대를 ‘거기’로, 면봉을 ‘그거’로, 지민이를 ‘야’로 부르는 것은 각각의 경계선을 지워 매끄럽고 평탄한 사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물1, 사물2, 사물3으로 불러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론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일반화한 체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론은 어떤 이치의 이름인 셈입니다. 이치의 이름이기 때문에 논리적 일반화라는 체계가 필요할 뿐입니다. 구별의 부정성이라는 점에서 이론 또한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이름 지음 덕분에 인간의 삶은 각각의 방향과 구획이 생기고 규모가 정해집니다. 때마다 곳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나타납니다.

 

현실을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나타나게 해주는 이론의 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그 어느 사회보다 절실한 오늘 여기 대한민국입니다. 그 무엇보다 2014년 4월 16일 맹골수도에서 일어난 세월호참사를 위한 바른 이론을 세워야 합니다. 바른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단순 교통사고라는 이론 정립을 위해, 세월호사고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 온갖 포악질을 하고 있는 협잡배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아침 25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름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들은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우리 현실을 비춥니다.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들이 어디서나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 우리 현실을 창조해 나아갑니다. 이 이름들을 허공에서 흩어지게 하고서는 우리 모두 인간이 아닙니다. 부디 이 이름들로 말미암아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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