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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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faux, c'est la mort.(121쪽)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우제는 100%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가볍게 들으면 실소 흘리고 지나갑니다.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의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것을 과연 기우제라고 할 수 있는가?” 그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더라도 때가 되어 올 비가 온 것이라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 답은 자명해집니다. 이 합리성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세계관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범주적 질문 앞에서 답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기우제가 없었다면 비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옳고(皆是) 둘 다 그른(皆非) 것입니다. 둘 다 옳은 까닭은 둘 다 진실 아닌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그른 것은 진실의 전체를 모두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그름의 영토를 줄이고 옳음의 영토를 넓히려면 자기 경계를 넘어 상대의 진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가로지름의 실재the Real를 얼마나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서 천지가 갈립니다.

 

Le faux, c'est la mort.

 

장 아메리가 인용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어떤 문맥에 이 문장이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진의를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임을 감안한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번역자의 번역도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오류, 그것은 죽음이다.”입니다. 간단해서 복잡한 속살을 알기 어려운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앞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우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삶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 쓸 수 없는 말입니다. 죽음(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설혹 안다고 해도 산 사람이 자기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도 실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에게서 들려오는 풍문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삶의 끄트머리, 죽음에 육박한 최후 시각, 그러니까 ‘23시 59분 59초’에 느껴지는 경계 감각입니다. 문제는 사실상 이 경계 감각입니다.

 

사이후이死而後已.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입니다. 처음 원문을 보았을 때,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죽음이란 끝난 다음(일)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산 사람 영역 밖의 생각에 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런 뜻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해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해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멈춘다).” 아,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표현과 새김은 오류입니다. 죽은 뒤에는 그만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갈량도 해석자들도 모를 리 없습니다. 수사학적 표현임은 물론입니다. 그러고 넘어가려다 다시 정색하고 곰곰 생각합니다. 삶의 끄트머리, 죽음에 육박한 최후 시각, 그러니까 ‘23시 59분 59초’에 느껴지는 경계 감각이 다만 그뿐일까, 하는 의문이 솟아오릅니다. 말하자면 삶의 마지막 감각이 죽음의 첫 감각에 가닿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과 같은 유類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어떤 연속처럼 삶과 죽음의 어떤 연속 또한 진실의 분명한 특이점 아닐까요?

 

Le faux, c'est la mort.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저는 맹골수도의 아이들에게 죽음의 바다를 건너 지금의 역사로 돌아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에 어떤 분명한 연속이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마음 실재의 요청입니다. 여전히 죽음은 산 사람에게 오류입니다. 산 사람이 죽음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죽음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삶의 마지막 감각으로 아이들의 죽음 첫 감각에 가닿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없이 절실하고 거룩한 거래입니다. 이 거래가 변화를 낳을 것입니다. 아니 새로움을 지을 것입니다. 산 사람의 삶이 광활함the Spaciousness으로 나아가는 꼭 그만큼 실재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실재가 현실이 되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Le faux, c'est la mort.라는 논리와 철학의 문장이 다음과 같은 정치경제학비판의 문장으로 변화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Le faux de Corée, c'est la mort lycéene 250 de 2014. 4. 16.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변화하더라도 죽음의 오류를 진실의 화엄으로 끌어안는 것은 산 사람의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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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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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존재는 가진 게 얼마나 되느냐는 소유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주어질 뿐이다.·······소유의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요구의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유의 세계는 나날이 자신을 새롭게 기획해보는 아웃사이더를 갈수록 더는 허락하지 않는다.(108-110쪽)

 

아무리 자본에 제압된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돈에 대한 탐욕이 덜해야 할 직업이 있습니다. 법조계, 종교계, 그리고 의료계. 저는 이 세 계통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비교적 소상히 그 내막을 아는 편입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이야기입니다.

 

법조계는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바 권력을 통해 돈을 대놓고 노리는 일등 집단이니 췌론의 여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법의 힘으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종교계는 가장 고결한 언어로 추악함을 가리고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존재를 돈에 팔아넘긴 가장 비루한 집단입니다. 영혼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목사, 신부, 승려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의료계는 과학이라는 사이비 진리 담론에 빙의되어 제약회사, 의료기기회사의 하수인 노릇하며 돈에 인격을 파는 첨단 영매 집단입니다. 생명과 건강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의사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소유가 늘어갈수록 영혼은 파리해진다.” 이 땅의 부자는 돈 없는 사람을 ‘근본 없는 것’이라 멸시합니다. 그럼 이 땅의 부자에게 ‘영혼 없는 것’이라 하면 존경의 표시겠군요. 근본 없어도 사람이지만 영혼 없는 것은 당최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소유가 사람을 야차로 만들었습니다.

 

야차의 세상은 다르게 사유하는 독립된 주체의 자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돈 앞에서 무색투명한 클론만 일방통행로를 행진할 뿐입니다. 제가 한의사라 말하면 으레 묻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하십니까?” 매출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겠다는 말입니다. 돈이 아니면 묻지 않습니다. 오직, 돈만 궁금합니다.

 

생명과 진실엔 아랑곳없이 돈만 궁금한 권력은 세월호‘사건’을 교통‘사고’로 왜곡하고 그에 다른 ‘보상’ 수준을 정합니다. 권력의 주구는 세월호사건 유족한테 퍼줄라고 담뱃값 올렸다 떠들어댑니다. 다른 모든 가치를 먹어치운 돈의 식욕은 언제쯤 멈출까요? 제 주인을 먹어버리고 배가 터진 바로 그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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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모순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죽음은 애초부터 우리 안에 숨어서 애매함과 모순이 생겨날 여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나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다.·······부정은 곧 우리 자신의 긍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낮과 밤이 여명 속에서 서로 맞물리듯이.(93-94쪽)

 

언제 어느 때든, 아니 결정적일 때는 반드시 장 아메리 앞에 나타나는 난제가 다름 아닌 모순 또는 이율배반입니다. 현실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므로 그의 언어는 “논리적 모순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식의 방어적 평서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은 곧 우리 자신의 긍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식의 유보적 의문문입니다. 끝내 ‘일지라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 안에 있는 유럽인에게는 A가 참이면 non A는 반드시 거짓이어야만 합니다. 이것만을 인정하는 이치二値논리를 저들은 표준논리라고 합니다. “나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다.”가 평온하게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올 리 없습니다. 장 아메리의 고뇌는 늙어감 자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늙어감에 대한 사유 논리에 이미 고뇌의 DNA가 심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인은 일찍부터 A가 참일 때 non A도 참인 것이 진리의 기축임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다치多値논리에 따르면 논리적 모순‘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 모순‘이므로’ 기꺼이,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순이 이미 논리 안에 들어와 있으므로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본디부터 있었으니 말입니다.

 

장 아메리에게 낮과 밤은 여명 속에서 맞물리지만 아시아인에게 낮과 밤은 여명 속에서만 맞물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낮에도 밤이 들어와 있습니다. 한밤에도 낮이 들어와 있습니다. 삶과 죽음 또한 그러합니다. 늙어감에 대한 장 아메리의 사유에 아시아인의 이 논리가 흘러들어간다면 과연 어떤 내용을 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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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자아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자아 못지않게 우리의 본래적 자아다.(89쪽)

  이제 좋든 나쁘든 자아는 사회의 좌표이기 때문에, 관계 좌표·······를 잃어버린 노인의 자기소외·······는 몸의 통증과 물질화로 이룩한 자아 발견보다 더 끈질길 뿐만 아니라, 보다 결정적이다.·······더욱 더 현실적이라고 할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도 관계를 통해 빚어진 것이며, 동시에 여전히 변화하며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욱 절박하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회에서 관계할 힘을 잃어버린 자기 소외다.(88쪽)

 

20대 중반의 젊은, 아니 아직은 어린 여성과 인문의학적인 치유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 가운데 가장 기초基礎적이고도 기축機軸적인 것이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기 경계를 설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중대현안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지만 그에게 유독 더욱 날카로운 연유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방으로 들어올 때 노크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의 방에는 아예 잠금장치가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니까, 아버지니까, 당연하다고 합니다. 이런 침습을 끊임없이 받고 살아온 그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 감각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 인사를 건네 올 경우 대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로 응대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짓는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그 감정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경계를 세우지 못하여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는 물론 심지어 어머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과 맺는 관계가 딸이 맺을 모든 사회관계의 근간임을 모를 리 없음에도 이렇게 딸에게서 관계의 힘을 빼앗아버린 그의 부모는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며 아빠라고 자처합니다. 그는 이런 학대를 내면화하여 끈질기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킵니다. 문제를 직시하는 반복된 훈련을 하면서 현재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디 이 여성뿐이겠습니까. 어디 한 개인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지배집단은 단박에 수백, 수천, 수만의 사회적 노인을 폭력으로 만듭니다. 정치로 눙칩니다. 법으로 못 박습니다.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입법예고가 떴습니다. 저 협잡이 제노사이드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회적 노화, 아니 살해 공작을 기필코 저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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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란·······변증법적 격변의 순간이다. 파멸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몸의 양量은 변형된 나라는 새로운 질質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인가? 그럼 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한밤중에 치통 때문에 깨어난 A는 격렬한 통증의 집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79쪽)

·······A가·······온전히 자신의 고통으로 몰입하는, 그래서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닐까.(85쪽)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화를 낳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이렇게 쓰이는 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문맥상 장 아메리의 결곡함과 자연스럽게 아귀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노화라는 커다란 문맥 안에 통증이 놓이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인간의 본질”, 나아가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에 이르면 노화의 문맥이 붕괴되는 느낌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런 난제를 유보한 채 통증에서 출발하여 고통의 축제로 이어지는 문맥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통증은 인간의 본질로서 축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문장이 장 아메리의 본의를 전하는 것이라면 실로 경탄할만한 깨달음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육박하며 원효의 실천에 접근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통증은 인간 존재의 숙명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통증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원인이며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편하거나 즐겁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편의와 쾌락으로 경도된 문명화로 나아가면서 통증의 숙명성에 체계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급기야 무통문명. 통속종교와 의약자본이 이 무통문명의 쌍끌이입니다.

 

그러나 이 불편하고 성가신 통증은 생명을 열고 이어주는 신호이며 전언입니다. 자연치유의 증거입니다. 만일 이 통증이 편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면 인간은 진작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면역 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고 성가신 것이야말로 생명에게 주어진 자연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통증에는 분명히 축제의 성격이 내재해 있습니다. 밤이 있어야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기 파괴적 탐욕인 무통의 추구를 멈추어야만 합니다. 불편하고 성가신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리에게 부가되는 축복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러니까 직시하면 역설적으로 불편함과 성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통증만이 인간에게 주는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깊이의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통증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장 아메리의 통찰이 책 전체를 관통했더라면 혹시 우리가 더 주옥같은 그의 글들을 접하는 행운을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이 한 동안 맴돌았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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