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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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의 나는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79쪽)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판결에서 다수의견에 가담했던 두 재판관이 이른바 대역불사론大逆不赦論을 펴며 이례적으로 보충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맹자와 한비자를 동원해가며 사뭇 비분강개한 어조로 민주주의 수호의 결기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민주주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봉건주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법 판단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추론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통합진보당 정체성 문제나 헌법재판소 판결 문제를 직접 거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충의견에 나타나 있는 병리적 정서 상태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두 재판관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중을 염두에 두고 그리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글이 실체적 진실에 터하지 않은 훈계조의 선동문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그런 주장과 선택의 배후에는 공포와 불안, 적어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포와 불안은 문제를 과도하게 의식하도록 조종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을 전제하고, 실제로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 힘을 부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전선을 형성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적대시”라는 병리적 정서 반응reaction입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등한시”입니다. 문제를 소홀하게 여기거나 문제에 무관심함으로써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병리적 정서 반응입니다.

 

적대시도 등한시도 문제에 대한 과민한 반응입니다. 반응은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병적인 행위입니다. 등한시는 외면의 전형입니다. 적대시는 외면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또한 외면입니다. 있는 그대로 문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까요? 적대시와 등한시의 경계에 있는, 바로 이것입니다.

 

직시.

 

직시는 과대화도 과소화도 하지 않은, 고요하고 맑은 건강한 감응response입니다. 감응은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치유적인 행위입니다. 감응이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은 데서 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정 판단도 긍정 판단도 하지 않은 데서 옵니다. 모든 판단을 멈추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직시입니다. 판단을 멈춘 마음은 고요하고 맑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은 문제의 불투명성을 그대로 끌어안습니다. 장 아메리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 경계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대시와 등한시의 모순이 그에게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움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은산철벽 앞에 서보지 못한 자들의 싸구려 중도中道가 끼치는 해악을 우리는 너무나 처절하게 목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최고 경지의 대승불교라 자부하는 대한민국 불교 조계종이 세월호사건 직후 왕생극락 기원하는 현수막이나 내걸면서 붓다의 길을 따른다고 떠드는 것이 극명한 예입니다. 차라리 찰나마다 은산철벽에 부딪치며 피 흘리는 장 아메리의 비애가 숭고를 넘어 장엄에 육박하는 진실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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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과정에서 몸은 갈수록 질량이 되며, 갈수록 에너지를 잃는다·······(77쪽)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세우기 전까지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질량과 에너지는 동등성equivalence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할 때 질량이 줄어들면서 에너지가 되는데 그렇게 발생되는 에너지에 대한 방정식이 바로 저 유명한 E=mc²입니다(E는 에너지의 양, m은 감소된 질량 값, c는 광속).

 

여기서 동등성equivalence의 문제를 조금 더 엄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동등성을 지닌다는 것은 상당相當하다는 것입니다. 동일Oneness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에서 입자와 파동은 동일한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의 진실은 완전히 쪼개지지도 완전히 포개지지도 않는 비대칭적 대칭으로 드러납니다.

 

장 아메리가 질량과 에너지를 말한 것은 일종의 유비analogy이면서 또한 유비가 아닙니다. 100% 질량이 시체임을 생각하면 인간의 생명 과정에서 질량성이 증가할수록 에너지성이 감소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인간 생명에서 질량과 에너지는 훨씬 더 광활한 내러티브를 품고 있음 또한 진실입니다. 그 내러티브가 장 아메리의 고뇌를 깊게 합니다.

 

에너지로서 인간 생명은 자유·평등·행복의 추구와 구가로 나타납니다. 자유·평등·행복 추구와 구가가 위축되는 것이 질량이 되는 것입니다. 질량은 그러므로 억압·차별·착취의 결과입니다. 장 아메리가 말하는 늙어감에는 당연하게도 개인의 생물학적 노화 넘어 사회적 부조리에 따른 ‘산화酸化’가 포함됩니다. 그의 언어가 신랄해질 수밖에 없는 소이입니다.

 

250명의 생떼 같은 목숨을 끊어놓고도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종북이니 세금도둑이니 하며 날뛰는 불의한 자들의 에너지가 넘칠수록 의로운 사람들은 질량이 되어갑니다. 국가를 사적 도구로 전락시킨 매판집단의 에너지가 강할수록 자주시민은 질량이 되어갑니다. 344번 째 2014년 4월 16일 오늘 우리는 얼마만큼 에너지이며 얼마만큼 질량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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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4-0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 질량이 시체라는 말은 인상적입니다. 질량과 에너지라는 자연과학의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인간사회를 설명할 때는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군요. 아메리의 원문을 읽어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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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우리의 말은 진실이다.(74쪽)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40대 중반 후배와 최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새로 구상한 사회적 시도에 관해 언급했더니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 형님! 지금 연세가 얼마신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요. 전면에 나서지 마시고 뒤에서 지도만 하세요.”

 

취중이긴 했지만 그의 말은 분명히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서늘한 생각에 잠길 즈음, 음식점 대형 TV 화면은 노래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절거림과 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우줄거림을 장착한 아이돌그룹으로 어지러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판 과두寡頭 ‘근본 있는’ 늙은이들-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늙은이가 아니다-과 그 떨거지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중문화 전반이 기획 작품인 젊은, 아니 어린 기능인들의 학예회 판으로 변한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어가는 ‘근본 없는’ 것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늙어가는 ‘근본 없는’ 것들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늙은이에게만 있을 수 있는 지혜·기품은 “개나 주어버려”야 할 것이 된지 오래입니다. 늙은이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 세상에서 멘토는 그저 대박의 과외교사로 고용됩니다. 늙은이의 따끔한 꾸짖음에 “헐~”로 대응하는 세상에서 힐링은 그냥 “네가 최고다”를 되뇌는 아첨의 기술입니다. 늙은이는 경로석으로 격리됩니다. 늙은이는 달랑 1500원 들고 한의원 가면 풀코스(!) 치료 받는 박리다매 상품으로 처리됩니다. 급기야 대학에서 문과가 폐지되듯 늙은이는 세상에서 폐지됩니다.

 

세상에서 폐지된 늙은이는 자신을 폐지한 세상에 도착적으로 매달립니다. 자신을 폐지한 세상이 자신을 지켜왔고, 지키고 있으며, 지켜갈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이 뒤집힌 신앙은 정치폭력집단을 형성합니다. 자신이 늙어가는 과정을 훼절하고 기만하며 수탈하는 불의한 매판독재세력의 주구 노릇을 자청합니다. 늙은이는 이렇게 자신의 늙어감에 예의를 표하고 품위를 지켜줄 인간다운 세상 만드는 일에서 등을 돌립니다. 마침내 늙은이는 스스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불치병으로서 늙어감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현재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잔혹사건입니다. 늙어가는 사람에게서 세상이 등을 돌리는 것이 보편적 진실인 그 이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늙어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등을 돌립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늙어가는 사람이 늙어감에 대한 장 아메리의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정녕 등을 돌리는 대한민국을 똑바로 보는 늙어가는 사람만이 그 뼈 시림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결국 늙어감이란 시간 경과에 따른 생물학적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하고야 맙니다. 늙어감은 정치경제학적 공간 사건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 의미가 더 중요하거나 본질적입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면 그것이 바로 늙어가는 사람입니다. 졸지에 올라버린 담뱃값에 스트레스 받는 노동자면 25세라도 늙은이입니다. 세금 면제로 부를 더 축적한 재벌총수면 75세라도 젊은이입니다.

 

이제 모두에 말씀드린 제 후배의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어이쿠, 형님! 지금 때가 어느 땐데요······. 아무도 나서지 않아요. 전면에 대의 내걸지 마시고 뒤에다 슬쩍 장식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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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이다.(71쪽)

 

새삼스럽게, 정색하고, 멱살 잡아 온 몸을 흔들어대는 추상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저는 열흘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 닫은 열흘이 까마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열흘의 한가운데 쯤 저는 한의원 문을 닫고 10,000리 밖 코타키나발루로 날아갔습니다. 제 손에는 크리스틴 콜드웰의『몸으로 떠나는 여행』딱 한 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사흘 동안 이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절반도 채 못 읽은 채 돌아와 다시 들어앉았습니다. 오늘 오후 비로소 푸시시 깨어나 책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의도醫道에 입문한 날의 기억은 하마 가물거릴 지경인데 인간의 몸을 치료한답시고 살아온 세월이 마치 시커먼 공동空洞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수히 손 댄 아픈 이들의 몸을, 하물며 그 “지극한 진정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짓눌려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 자신의 몸조차, “지극한 진정성”으로 대하지 못하였다는 통렬한 각성 때문에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삥삥매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일에 삶의 중심이 기울어진 뒤부터 몸을 마음의 은유로 읽는 ‘악습’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돌연 진료를 멈추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저는 이 열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열흘이 제게 무슨 큰 성취를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진실에 대한 각성·인정·수용·실천 모두가 몸에서 일어나 몸으로 돌아간다는 깨달음의 각인을 다시 뚜렷하게 남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몸이 마음의 몸이기 전에 먼저 마음이 몸의 마음이었다는 진실을 사무치게 느끼는 순간순간을 마주하게 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습니다. 필경 이것은 향후 제 인생 행보에 지속적으로, 아니 확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몸을 뒷전 하는 마음 치료가 더는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육중한 경고음을 날로 무겁게 발할 것입니다.

 

의자醫者인 제게 이토록 큰 충격인,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이다”라는 장 아메리의 통찰은, 그러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장 아메리의 구체적 삶과 연결해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 문장의 단호한 긍정성, 절대적 타당성과는 달리 앞뒤 문맥에는 깊고 푸른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은 결정적 시사를 던져줍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한 인식은 몸에 대한 인식으로 응축됩니다. 몸에 대한 인식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당한 고문의 경험으로 응축됩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당한 고문의 경험보다 더 “지극한 진정성”으로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71쪽) 것이 또 있을까요? 죽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가혹한 폭력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몸의 “지극한 진정성”을 두고 그 누가 차마 희망을 말할 것입니까.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장 아메리의 이 래디컬한 말은 부박한 몸 담론 모두를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래디컬한 말은 본디 자기 영지를 지니지 않습니다. 장 아메리가 몸소 그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우리입니다. 장 아메리가 남긴 수직의 진실에서 얼마간 타협한 사선을 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과연 우리 몸을 어떻게 “지극한 진정성”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이제 여기서 정말 몸을 느끼고는 있을까요? 고통에 찬 몸의 소리를 알아차리고 삶의 필연적 일부로 인정할 수는 있을까요? 어두운 몸도 사랑으로 껴안을 수는 있을까요? 내 몸이 남의 몸과 닿고서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진실을 실천할 수는 있을까요?

 

오늘도 몸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하루를 살았습니다. 한의원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제 몸을 생각합니다. 만집니다. 소리를 듣습니다. 냄새를 맡습니다. 거울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지극한 진정성”에 가만히 깃들어 봅니다. 아직 벼락같은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언제 쯤 제가 그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는지 기다려 달라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끝내 아무 소식이 없거든 그냥 잊으십시오. 하기는 이 남루한 언어들이야 잊으려 하기 전에 잊히고 말겠지요. 적요 뒤에 홀연히 몸, 그러니까 바로 그 몸이 온다면 지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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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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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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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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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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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역설이랄까. 그 극단에 빠진 경우가 바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다.(66쪽)

 

장 아메리가 멜랑콜리를 의학적 우울장애와 같은 의미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할 경우, 놀랍게도,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운운하는, 그러니까 우울장애를 기분장애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식 주류의학보다, 의학과 무관한 그가 우울장애의 본질을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랑콜리를 나르시시즘과 모순관계에 놓고 그것이 한 인격 속에 역설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우울장애는 단순한 기분장애가 아닙니다. 깊고 질긴 우울감은 우울장애의 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울장애의 핵심은 자기인정·자기신뢰의 붕괴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정도의 자기비하에서 무거운 자기무화無化까지 일련의 자기부정 스펙트럼이 드러내는 병리적인 양상을 우울장애라 합니다. 우울장애의 모든 증상은 이 자기부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기부정의 경향성이 깊어질수록 그 맞은편에 뚜렷이 맺히는 허상이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입니다. 나르시시즘의 근원은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허구적 대전제인 이상적 자아상입니다. 이 이상적 자아상은 대개 순수·지선至善·진정성 등의 윤리적 결곡함을 속성으로 지닙니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자아상에 대한 애착이 바로 나르시시즘입니다. 이 허상의 기준점이 높을수록 나르시시즘은 멜랑콜리를 강화합니다. 멜랑콜리가 강화될수록 나르시시즘이 강화됩니다. 인과因果가 맞물린 채 악무한으로 치달아갑니다. 이것이 우울장애의 자기운동입니다.

 

세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장애는 ‘단극單極성’우울장애입니다. 나르시시즘이 멜랑콜리 울타리 안으로 포개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라는 장 아메리의 말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르시시즘을 사로잡은 멜랑콜리”입니다. 이에 비해 흔히 조울증이라고 말하는 ‘양극兩極성’장애는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가 둘로 쪼개져서 널을 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는 본디 대칭 구조를 이루는 양극입니다. 둘은 온전히 포개진 하나여서도 안 되고 온전히 쪼개진 둘이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극단에 육박한 것일수록 심각한 질병입니다. 전자를 우울장애라 하고 후자를 양극성장애라 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가 유지되도록 역동적 거래가 이루어질 때, 그러니까 모순이 역설적 공존 운동을 할 때 건강한 것입니다.

 

역동적 거래니 모순의 역설적 공존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애써 만들었지만 실재를 엄밀하게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장 아메리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

 

자기긍정의식도 자기부정의식도 “가지지 않아야” 건강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만도 자학도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건강한 것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마음이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을 먹어치웁니다. 멜랑콜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먹히고 맙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마음의 이러한 논리는 곧장 사회정치 현실로 이어집니다. 나르시시즘에 걸린 상위 1%는 제 곳간만 채웁니다. 멜랑콜리에 걸린 다수 민중은 제 곳간을 털립니다. 건강한 중산층이 든든하게 형성되어야 사회를 인간다움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나르시시스트의 악정으로 중산층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사회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중증 정신장애의 폐쇄병동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가 도발한 세월호사건, 이것이야말로 우리사회의 병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 대표적 증상입니다. 그 진실 규명 여부가 이후 우리사회의 향방을 결정할 것입니다. 멜랑콜리에 빠져들어 거기 머무르지 않으려면 평범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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