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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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는 곧 무의미다.(44쪽)

 

My life has no purpose, no direction, no aim, no meaning

 

스누피, 찰리 브라운이 등장하는 만화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Charles Schulz가 한 말입니다. 장 아메리의 말보다 더 서늘합니다. 찰스 슐츠의 말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and yet I'm happy. I can't figure it out. What am I doing right?

 

장 아메리의 말에는 차꼬가 채워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뭉쳐진 시간덩어리다.······A는 후회했다. 그저 변두리에만 머물러 산 인생을. 모든 것을 놓쳐버린 지금 물끄러미 바라보는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

 

인생의 의미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이 여기 강아지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과 다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사람 생각에 따라 있다, 없다 ‘말해진’ 대로일 뿐인 것만도 아닙니다. 삶의 전체 문맥에 따라 때로는 ‘무의미’가 의미가 되기도 하고 ‘의미’가 무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무의미에 대한 두 사람의 사뭇 다른 언급 또한 그렇게 뒤적이며 헤아려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찰스 슐츠는 무관심한 아버지와 거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늘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낙제생이었습니다. 선착순 100명을 뽑을 경우 가진 힘 다해 달려가 보면 언제나 101등인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만화 그리기였습니다. 평생 만화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삶의 의미도 아닌 만화로, 삶의 목표도 아닌 억만장자가 되는 불가사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과연 이 삶이 무의미한 것일까요?

 

한스 마이어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그 인문학 공부의 연장선에서 나치와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나치 패망 이후 장 아메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독일을 떠나 벨기에로 갔습니다. 거기서 날카롭고도 치열한 사유로 글을 써 유럽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과연 이 삶이 무의미한 것일까요?

 

찰스 슐츠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장 아메리는 (비록 A의 이름으로이긴 하지만)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행복과 후회는 같은 지평의 대대待對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찰스 슐츠의 행복은 사적 비전의 중심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장 아메리의 후회는 공적 로직의 변방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리며 우리 자신의 삶을 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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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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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적 감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28쪽)······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듯.(32쪽)······늙어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해야 한다.(39쪽)

 

우리사회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한테 존경 받는 어른 가운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십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셨던 분입니다. 선생님의 글 중에 이런 요지의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랫동안 감옥의 좁은 독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석방되고 나서 툭 트인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맞닥뜨리는 벽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시간은 내적 감각으로 형성되고 쌓여 인생으로 기억된다는 장 아메리의 말이 소환해낸 오래된 제 기억입니다. 장 아메리의 수용소 삶 또한 본질적으로 이와 동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니,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당하고 언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아우슈비츠라면 훨씬 더 극단적·배타적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밖으로 한 치도 확산될 수 없는 영어囹圄의 시간, 죽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시간, 이것이 바로 장 아메리를 짓누르고 있는 “늙어감”입니다. 다짜고짜 죽음으로 몰아쳐가는 노도의 시간 앞에서 “늙어감”이란 어감이 주는 경과의 느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물학적 연령 여하도 부질없습니다. 찰나마다 죽음이 엄습해오는 장 아메리의 “내적 감각”으로는 시간도 “늙어감”도 점點적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그의 사유는 극한으로 밀어붙여지기를 거듭합니다. 시간은 곧장 “늙어감”으로, “늙어감”은 곧장 죽음으로, 죽음은 곧장 절대허무로.

 

오늘 아침 어느 신문을 보니 죽음에 대한 특별한 사유체계를 지닌 티베트 승려와 인터뷰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익숙한 이야기가 오늘따라 진부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승려의 뜻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그 동안 저 역시 맹골수도 영령들에게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와 이 땅의 새로운 역사가 되어주기를 323일째 간절히 빌어 왔기 때문입니다.

 

불현듯 장 아메리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당한 폭력, 그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 거기서 그가 살아낸 시간의 무게, 단도직입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이 조건에서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은 안일하거나 호사스러운 관념놀이였을까. 명상이나 선 수행을 통해 빚어낸 이야기와 고문을 당하며 빚어낸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진실이라는 것도 인연의 문제, 아니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깨달아야 할 진리를 못 깨달았다고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장 아메리를 부둥켜안은 채, 저는 또 저의 운명시간을 따라 두 손을 모읍니다. 하루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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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겨울에

씨를

뿌렸다

 

봄이

오며는

씨를

거두리

 

*

 

하필

사막에

씨를

뿌렸다

 

옥토

이르면

씨를

거두리

 

*

 

하필

이땅에

목숨

두었다

 

매판

치우면

목숨

거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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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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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temps vécu일 따름이다.······시간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공간세계의 비유를 필요로 한다.(21-24쪽)

 

바로 앞에서 기호A를 이야기하며 역설 문제를 화두로 든 바 있습니다. 사실 역설이라는 표현도 다치多値 논리를 수용하는 동양전통에서 보면 그다지 탐탁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가 지닌 대칭성의 진실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니 구태여 역逆이라는 역한 표현을 쓸 까닭이 없으니 말입니다. 대칭성에서 예시한 것 가운데 동同:이異는 일치(포개짐)·맞물림·항상恒常과 차이(쪼개짐)·어긋남·변역變易의 문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항상恒常과 변역變易의 짝을 뽑아 오늘 이야기의 주제로 삼겠습니다.

 

세계는 늘 그러한 존재being와 바뀌어 되어가는 생성becoming의 대칭으로 구성됩니다. 그 구성 세계는 자발적으로 깨어져 사건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이 대칭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공간과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항상성의 축에 서고 시간은 변역성의 축에 선다는 말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항상성은 변역성에 포함包涵(包含 아님)됩니다. 붓다는 이를 무상無常의 진리로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여기 우리의 필요를 좇아 말한다면 시간이란 변화의 장이자 그 인식조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이야기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공간세계의 비유”로만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변화의 결과가 그렇게 현현되기 때문입니다. 공간 은유로 전해지는 시간-사건, 그러니까 변화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실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는 말에 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장 아메리의 진실은, 그러나 부분적 진실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가기 전에 시간과 더불어 왔습니다. 오지 않았다면 가지 못합니다. 오고감의 쌍방향 변화, 그 무상의 진실을 깨친 붓다의 진리를 만났다면 장 아메리는 과연 어찌 되었을까요? 대답은 진부합니다. 그 진부한 대답 대신 우리는 돌이켜 이런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장 아메리는 왜 변화, 그것도 사라짐에 이토록 강고하게 착념하였을까?”

 

장 아메리에게 시간은 “살아낸” 것만 시간입니다. 그가 살아낸 시간은 나치가 파괴한, 그러니까 변화시킨 세계와 맞선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투쟁의 와중에 잡혀 잔혹한 파괴, 그러니까 변화의 폭력을 온몸으로 당한 시간이었습니다. 멀쩡한 뼈가 으스러진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마이어가 아메리로 바뀐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시간에서 그에게 강요된 변화가 너무나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불가항력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변화의 시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로 규정된 것입니다. 그 늙어감의 변화가, 그 죽어감의 변화가 균형·타협·통속화·싸구려 위로로 희화되는 꼴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분은 오류입니다. 그러나 장 아메리의 오류를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살아낸” 시간을 톺아보아야 합니다. 그의 “시간,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가 그의 “살아낸” 시간에서 가지는 진릿값은 남은 사람의 “살아낸” 시간에 따라 1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살아낸” 시간을 균형·타협·통속화·싸구려 위로로 검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21일째 2014년 4월 16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일까요? 우리는 시방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고 있는 중일까요? 영령들이 생사의 강을 건너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도 그들을 역사로 세우지(常) 못한 채 신화로 떠내려가게(變)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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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검은 세상에

네가 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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