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시인>*

 

김용만

 

내 아내 맨날 뭐라 한다

사십이 넘어도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남의 글이나 읽고 산다고

시인들아

우리 집에 책 보내지 마라

부부 쌈 난다

 

 

<못난 의자>

 

강용원

  

내 아내 맨날 뭐라 한다

육십이 되어도 병원 한 채 짓지 못하고

맨날 글이나 쓰고 산다고

독자들아

여기 글에 댓글 달지 마라

부부 쌈 난다

 

*「못난 시인」(실천문학사, 2014)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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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7 2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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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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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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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다.(152쪽)

 

어린 시절 계모나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그 때마다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쓸데없는 폭력> 장을 읽으면서 자꾸 그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아니, 또다시, 마음이 몸을 떠나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낭창낭창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는 일이 힘듭니다. 몇 시간을 그저 망연히 앉아 있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뒤로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야말로 바닥을 칩니다.

 

쓸데없는 폭력, 이것은 필경 폭력의 극한일 터입니다. 오직 고통을 줄 목적으로, 그러니까 오직 “인간 이하로 비하”하기 위해 가하는 폭력이니 말입니다. 구태여 유용성을 찾는다면 가해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하는 것인데 사실 이 유용성은 가해자 스스로 “인간 이하로 비하”되기 위한 것이므로 유용성을 획득하는 찰나 그 유용성이 파괴되고 마는 무의미한 개념입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 ‘유용함’이 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냥, 쓸데없는 폭력은 그 쓸데없음으로 죄악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폭력일 따름입니다. 거기서는 가하는 자나 당하는 자나 마음이 사라졌으니 사람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사회의 최근 7년, 특히 2년은 쓸데없는 폭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는’ 복마전이었습니다. 목하 판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근본 가치를 모조리 희화戱化하며 저들은 마침내 스스로도 미쳐가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자기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습니다. 광란의 질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사이 국밥 값을 남기고 한 독거노인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세 모녀가 죽었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26명이 죽었습니다. 단원 아이들 250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체 어떤 유용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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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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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나는, 어리석으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인 폭력의 극단적 예로서 인간의 신체를 마치 물건처럼, 곧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양 자의적으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다룬 무자비한 사용에 대해 좀 더 언급하고자 한다.·······

  ·······라거나 가스실로 보내진 여성들의 잘린 머리카락·······은 독일의 몇몇 섬유기업이 구입해서 침대 카버나 다른 산업용 직물로 제조하는데 사용 되었다.·······이윤을 얻으려는 동기보다 잔학한 폭력의 동기가 우위에 있었·······다.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 사용되었다(150-151쪽)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나는 세상에 왔습니다. 존엄한 삶을 살던 어느 날 영문 모른 채 잡혀 기차에 태워졌습니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주먹에 맞으며 형언할 길 없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쭈그려 앉아 용변을 보았습니다. 벌거벗겨진 몸에 문신이 새겨졌습니다. 개처럼 혀로 죽을 핥아먹었습니다.

  마침내 가스실에서 숨이 멎었습니다. 차가운 육신을 빠져나와 떠돌다가 문득 살인자들이 머리카락을 채취해 침대 카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육신을 태우고 남은 재를 살인자들이 노상 밟고 다니는 길바닥에 자갈 대신 뿌리는 것을 봅니다.

  죽어서도 그 밑에 깔리고 밟히는 광경을 보며 통곡합니다. 울고 또 울다 이윽고 칼을 듭니다. 심장을 향해 힘껏 찌릅니다. 칼은 바람소리를 낼 따름입니다. 돌연 칼끝을 돌립니다. 그 형상을 따라 나를 창조했다는 신을 향합니다. 거기도 바람소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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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질문이다. 질문과 질문 사이에 답은 틈으로 존재한다. 틈은 다음 질문을 위한 틔움이다. 틔움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신봉하는 것을 '진리'라 한다. '진리'는 신봉자들을 노예를 만든다. 노예는 질문할 줄 몰라서 죽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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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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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에서 노동은 순전히 박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 실제로 생산 목적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노동이란 말의 일반적 의미에서 봤을 때 체제의 비천한 적수들은 노동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동은 고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146-147쪽)

 

나고 죽는 것, 숨 쉬는 것, 성을 나누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하는 것은 인간에게 범주적인categorical 거룩함입니다. 이 가운데 일하는 것, 그러니까 노동은 특별히, 거의 유일하게 인간의 사회적 속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의 거룩함이 가장 숭고하고 역동적인 사건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한편, 거대하고 광포한 지속성을 지닌 폭력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기도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생산을 향합니다. 생산은 생명의 연속과 확산을 향합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은 노동의 거룩함이 번져가는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고통이며 폭력입니다. 아우슈비츠의 노동이 그랬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노동이 또한 그렇습니다. 생명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노동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가장 참람한 거역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참람한 거역으로서 노동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보다 더욱 해괴한 거역이 있습니다. 자칭 거룩함의 본진인 종교가 거룩함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데 앞장선다는 경악할만한 사실 말입니다. 종교 없이 거룩할 수는 있지만 종교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거대종교의 노동인 예배·미사·예불과 그 연장에 있는 종교인들의 사회적 실천이 그 어떤 거룩함을 빚어내고 있습니까.

 

 

내일이 이른바 성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이 성탄을 전유하도록 명명한 것 자체가 이미 거룩함의 파훼이거니와 더더구나 이 땅의 교회, 특히 개신교가 세속의 힘과 돈에 무릎 꿇은 상황에서 오늘,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의 흥청거림부터 내일 성탄 축하 의식까지, 거기 거룩함이 깃들 수 있을까요. 거룩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노동이 폭력이며 고통이란 사실을 저들이 알고 있기는 한 걸까요.

 

30대에서 40대를 넘어오면서 제게는 삶의 일대전환이 있었습니다. 한의학도로 살기 위해 기독교 성직의 길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직후 제 직업은 우유배달이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점검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배달 끝나 마지막 빈 박스를 리어카에 내려놓는 순간 거기서 저는 아기예수를 보았습니다. 비로소.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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