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딸아이가 아침 식탁에서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습니다.

 

“24일 저녁에 알바 가야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받아 무심히 답했습니다.

 

“아빠도 상담치료 예약돼 있어.”

 

딸아이가 어릴 때에는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게 어린 딸의 즐거움을 위해 이른바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를 사놓고 조촐하게 ‘예수님 생신축하파티’를 하곤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예수 탄신을 축하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시류에 무심코 합류하는 축하라면 쓸데없는 향락일 뿐이고, 유심히 정색하여 하는 축하라면 기독교 신앙 아니라도, 아니 아닐수록 거룩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견지에서 예수 신앙은 구원의 문제이므로 신앙 밖 일을 거룩하다 할 수 없겠지만 이치상 예수는 기독교만의 전유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지금처럼 예수를 교회에 가두면 가둘수록 자신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자기들만의 천국을 구가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세속 권력과 자본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한, 저들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침 치료 받으러 오신 어르신 한 분이 연민과 독선 사이에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게 묻습니다.

 

“원장선생, 예수 믿으시오?”

 

저는 활짝 웃으며 대답해드렸습니다.

 

“어르신께선 예수 믿으시는군요. 저는 예수 살고 있습니다.”

 

부디 오늘 하루만이라도, 예수 나심을 기리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 더 특히 개신교인은 “교회 밖에서” 그 분을 만나보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거기서 그 분을 뵐 수 없다면 이른바 신앙이란 다만 삿된 탐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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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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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대문 역시 치고 들어가야 했단 말인가? 왜 그들을 머나먼 곳에서, 무의미한 여행 끝에 폴란드의 가스실 문턱에서 죽게 만들려고 굳이 끌고 가 기차에 태우는 그 고생을 해야 했단 말인가?·······위로부터 강요된 선택은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정신적·도덕적 고통을 짜내는 것·······‘적’은 죽어야 할 뿐 아니라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145쪽)

 

중국 유학의 준봉인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명나라 제10대 무종 정덕제의 총애를 받아 전횡을 일삼던 유근劉瑾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장형 40도와 용장龍場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유근은 왕수인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자객을 보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왕수인이 얻은 깨달음을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하거니와 바로 여기서 그의 심학이 탄생하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조건을 마련해준(?) 유근은 그 뒤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무려 3,357번(4,780번, 심지어 6,000번이라는 기록도 있음)의 칼질을 당하는 형벌에 처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흔히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알고 있는 능지처사陵遲處死라는 형벌입니다. 죄인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도록 조금씩 살을 저며 내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극한의 고통을 가한다, 그러니까 극한의 고통을 가한 끝에 끝내 죽음을 놓는다는 이 절정의 잔학성은 아마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어두운 속성일 것입니다. 존재가 존재 자체를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기술이 진화의 정점일진대 이 진화는 존재윤리의 역방향으로 진행된 저주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일부러 폭력으로 끌어내어 열차에 태우고, 짐승처럼 싸게 하고, 벌거벗기고, 핥아먹게 하고, 점호를 받게 하고, 침대를 정리하게 하고, 몸에 문신을 새겨 넣음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해 죽이는 것은 오직 그렇게 하는 것 자체만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를 자행하는 자는 이를 즐긴다고밖에 볼 수 없는 정신질환 상태에 놓입니다.

 

개인이 홀로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집단이 한꺼번에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특히 정념적인 성향이 강하여 트라우마에 취약한 집단에게는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목하 우리 앞에 그 어둠이 이미 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마음치유를 천명으로 삼은 의자醫者에게는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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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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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작업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1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문신의 상징적 의미는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즉,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 표지標識(번역에는 표식이라 되어 있으나 너무나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 정색하고 바로잡습니다.)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결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 문신의 폭력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다. 바지에, 상의에, 겨울용 망토에 천으로 꿰매 붙인 숫자 세 개로 충분치 않았던가?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을 느끼도록, 말의 형태가 아닌 다른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흔히 젊은이들이 나에게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질문하는데 이는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143-144쪽)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인「수호전」에는 형벌刑罰 문신이 등장합니다. 양산박 108호걸 가운데 무송, 양지, 임충 등 귀양살이를 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형벌 문신인 자자刺字형을 받았습니다. 죄상을 얼굴 혹은 팔에 새겨 넣어서 범죄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명 공개'나 '전자 발찌'와 같은 의미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호전」에는 다른 문신도 등장합니다. 예컨대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은 9마리의 용을, 화화상花和尙 노지심魯智深은 꽃들을 온몸에 새겨 넣었습니다. 호걸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시하기 위해 문신을 새겨 넣는 것입니다. 사실 어찌 보면 형벌 문신에 대한 능동적 역발상의 표현이자 저항이랄 수도 있습니다.

 

옛 중국에는 형벌과는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닌 문신이 또 있었습니다. 노예에게 새기는 낙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증명서였습니다. 타인의 노예라는 것만큼 잔혹한 형벌이 다시 있을까요.

 

아우슈비츠 포로들에게 가해진 문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자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이었습니다. 무고한 이들에게 가한 문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그 마름들은 세월호사건의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에게 “놀러가다 사고로 죽은 애들”이라는 영원한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게다가 유족들에게는 “종북”이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또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희망한다는 말을 한 이효리에게는 “좌효리”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유족들도 이효리도 억울하고 분할 것입니다. 이 때 누군가 이들에게 ‘달리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프리모 레비에게 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단호한 반문을 기억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유족들도 이효리도 쉽사리 이렇게 반문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 그렇습니다. 지금 광기어린 폭력이 해일처럼 우리를 덮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공포와 불안의 노예로 마음에 문신 새겨진 채 형벌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분명히 이 문제는 정치 그 너머, 인간의 인간다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다움 그 너머, 인간 생명 자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내가 숨을 죽이면 내일은 누군가 목을 조이러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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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거대종교는 예외 없이 광활한 대지, 높은 산, 큰 강, 황량한 사막에서 태어났다. 이런 조건이 종교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내러티브를 골간으로 삼는다. 영원. 극락. 천국. 해탈. 구원. 너무 멀고,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 아득하다 못해 가뭇없이 사라진다. 종교가 일상의 삶 문제, 그러니까 정치경제 문제에 무력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종교 아니냐고 할 것인가. 여기서 무력함이란 해결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종교라면 그게 왜 필요한가.

 

 

진정한 종교에서라면 지금이 영원이어야 한다. 진정한 종교에서라면 여기가 극락이며 천국이어야 한다. 진정한 종교에서라면 자본의 수탈에서 놓여나게 하는 것이 해탈이어야 한다. 진정한 종교에서라면 권력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구원이어야 한다. 멀어도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높아도 오를 수 있어야 한다. 깊어도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넓어도 번져갈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가 정녕 인간의 것이려면 시내 하나 품어 인간다운 삶을 키워내는 낮은 산 아래 마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 앞에서 감히 주절거리지 말라. 얼쩡대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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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2-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ow and Here...현현하지.못하는.메시아는 사악한 악마보다 헛되죠. 운주사 가서 자리펴고 누운 와불 보고 쓸쓸했던 기억이.

bari_che 2014-12-23 19:12   좋아요 0 | URL
각자 자기 자신의 메시아로 순간순간을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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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수용소에서 하루에 한두 번 점호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호명하는 점호는 아니었다.·······점호는 날씨와 상관없이 실시되었고(물론 옥외에서)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다. 셈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탈출이 의심되면 심지어 스물네 시간이나 그 이상까지 이어졌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혹한의 날씨에는 노동 그 자체보다 더 심한 고문이 되었고, 저녁이면 노동의 피로에 고스란히 보태졌다. 점호는 무의미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인식되었다.(138-139쪽)

 

(2) 침대 정리는 일어나자마자 막사 전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모든 침대는 1, 2분 안에 정리되어야 했다. 광란의 순간이었다. 병사의 공기는 뿌연 먼지와 팽팽한 긴장감, 온갖 언어로 주고받는 욕설로 가득했다. ‘침대 정리’·······는 엄격한 철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할 신성한 작업이었다.·······정리와 규율의 상징이었다. 침대 정리를 잘못했거나 잊어버린 사람은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혹시라도 들쑥날쑥한 것들은 센티미터까지 맞춰가며 다시 옮겼다. 고통 이상의 이러한 정리벽은 터무니없고 기괴해보였다.(141-142쪽)

 

아우슈비츠가 독일 군대의 희화戱化라는 사실은 프리모 레비가 이미 밝힌 바입니다. 군대란 전쟁, 그러니까 생사를 건 싸움에 존재의의가 있는 조직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해서 하는 것이니만큼 시공간적 일치, 그러니까 절대통제 아래 명령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는 전쟁을 위한 군대가 아닙니다. 군대가 아닌 포로들에게 이런 식의 통제를 가한다는 것은 오직 통제를 위한 통제, 그러니까 고통을 주기 위한 쓸데없는 폭력을 가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쓸데없는 폭력의 가닥은 둘입니다.

 

하나는 점호입니다. 점호는 통시적diachronic 일치, 그러니까 동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어제하고 오늘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시간을 무제한 사용합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점호는 이데올로기 조작을 통한 통치의 영속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역사 왜곡입니다. 일본·중국은 가학적으로 하는데 반해서 대한민국 지배집단은 피학적으로 그 짓을 합니다. 독립혁명가들을 깡패·테러리스트로 몰고, 도리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부역한 매판인사들을 영웅·신으로 떠받드는 역사 교과서를 아이들한테 들이미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침대정리입니다. 침대정리는 공시적synchronic 일치, 그러니까 단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기하고 저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간 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허용된 시간은 딱 1, 2분입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침대정리는 시스템 조작을 통한 통치의 공고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헌법기관 왜곡입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이 3인, 대법원장이 3인, 국회가 3인을 뽑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여당 몫이 1인이며, 여야합의로 1인을 뽑는다는 데 있습니다. 대통령이 사실상 8인의 임명권을 행사합니다. 민주주의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인가, 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수의 탐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차선의 장치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민주주의조차 못되는 제도를 유지할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복잡하고 이론적인 쟁점과 무관하게 이런 상태로 말미암아 사람이 떼거지로 죽어나가고 있다면 문제는 이미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이른 것입니다. 자살로 위장된, 사고로 은폐된 제노사이드를 정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스스로 포기한, 아니 거절한 지배집단은 본질상 범죄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비겁하고 치졸한 공작을 하면서 저들은 언제나 강박적으로 일치를 선동하고 협박했습니다. ‘국론통일’이라는 말이 일세를 풍미하더니 뒤를 이어 ‘국격’이 득세했고 지금은 ‘국기國紀’가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이 일사불란하게 통제되고 있습니다. 우리역사는 지금 점호 중입니다. 우리사회는 여기 침대정리 중입니다. 죽임의 행렬은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죽임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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