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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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폭력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불행하게도 그렇다.·······히틀러의 12년은 다른 많은 역사적 시공간들과 폭력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기만의 특징이 쓸데없는 폭력의 만연이었다고 믿는다. 오로지 고통을 유발하려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 말이다. 그 폭력이 때로 어떤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너무 지나쳤고 언제나 목표 자체에 비하여 균형을 벗어난 것이었다.(126-127쪽)

 

사회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지닌 어느 여성의 토크콘서트를 ‘종북’으로 규정한 한 고교생이 현장에 사제폭발물을 던졌습니다. 소년은 자신을 윤봉길 의사에 빗대었습니다. ‘일베’ 집단은 즉시 소년을 ‘열사’라고 칭함으로써 소년의 코미디를 완성해줌과 동시에 매판 과두의 철없는 주구를 독립투사와 일치시키는 역설을 창조해냈습니다. 저들만의 대한민국 역사에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새겨 넣었습니다.

 

저들은 결국 저들이 행사하는 일체의 폭력이 “오로지 고통을 유발하려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입니다. 제 딴에는 분명한 대의가 있고 나름 논리가 있지만 전체적 진실에서 보면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으므로 폭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 폭력이 때로 어떤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너무 지나쳤고 언제나 목표 자체에 비하여 균형을 벗어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 동안 거듭 증명된 이상, 저들의 폭력은 “쓸데없는 폭력”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일베’와 그 동종교배 집단들 모두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소수 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이 나라 매판 과두의 대표적 주구집단입니다. 정치적·법적 비호를 받는 난공불락의 용병집단입니다. 그 무엇보다 열렬 무쌍한 ‘주권자’ 집단입니다. 이들을 치지도외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엄존하는 한 대한민국은 “쓸데없는 폭력의 만연” 현상과 결별하기 힘듭니다. 아, 팍팍하여라, 이 참담한 유사 공화국의 신민으로 사는 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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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불탄다

무섭다

엄마가 아이를 돌려 세워 감싼다

 

집이 불탄다

무섭다

엄마가 아이와 함께 그것을 본다

 

훗날 병든다

마음에

상처받은 아이 둘 중에 누구일까

 

오늘 눈물로

아이를

사랑한다 하는 너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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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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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7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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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또 그런 시대에는 다른 모든 자유도 곧 시들게 된다. 토론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며,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비관용은 검열의 경향을 띠고, 검열은 타인의 논리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124쪽)

 

급기야 서북청년단 재건. 점입가경입니다. 아니 화룡점정입니다. 저는 이승만 시대에 태어나 박정희를 보면서 성장한 세대입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망령이 귀환하더니 이제는 이승만 망령이 귀환합니다. 저주의 심메트리symmetry.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저 하수인들은 자신의 이른바 반공주의가 어떻게 이 땅에 자리 잡은 이데올로기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매판독재세력이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게 ‘빨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매판 과두의 노예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나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알 것입니까. ‘빨갱이’라고 몰아버리는 순간 이미 상대방은 인간이 아닌데 어찌 인간 아닌 존재의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까.

 

‘빨갱이’ 잡겠다고 날뛰는 저들은 착각이나마 그래도 정의와 명분을 내세웁니다. 엊그제 나온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새누리당 추천 위원 명단을 보면 정의도 명분도 없고 그저 두 눈 질끈 감은 채 매판 과두의 방패막이 노릇을 하겠다는 맹목적 의지만 드러나 있을 따름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이 빨갱이인 것도 아니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부모들의 하소연이 공산당선언도 아닌데 영화 <변호인>의 배경인 ‘부림사건’의 담당 공안검사 출신 인사를 떡하니 뽑아놓았는가 하면, 심지어 처음부터 세월호특별법 제정 자체를 반대했던 인사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경멸입니다. 조롱입니다.

 

저들이 위원회에 들어가 할 일이란 오직 ‘검열’ 뿐입니다. 날조는 이미 끝났으되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조사와 해석을 사전에 흔들어 왜곡하고 은폐하는 짓 말입니다. 누구보다 그런 일에 능한 자들이며 또 그것을 알고 선발했으니 앞날에 대한 예측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검열은 타인의 논리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

 

저들에게는 선순환일 터입니다. 이렇게 더 좋은 상황을 정치의 이름으로 만들어주면 서청은 이미 천명했다시피 법 밖에서 법의 비호를 받으며 공공연한 폭력을 휘두를 것입니다. 암흑이 이 사회를 뒤덮을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무슨 자유를 꽃피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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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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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소통의 측면에서도, 아니 오히려 의사소통의 결여라는 측면에서도 우리 생존자들의 경험은 특이하다.·······

  우리는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소통불가능성을 경험했다.·······이탈리아 보안국 관리들이 마지못해 SS 당국에 우리를 넘겨주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우리는 검은 패치를 단, 경멸을 드러내던 남자들과의 첫 접촉에서부터 독일어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생존의 분수령이 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검은 남자들은 무시무시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방식으로 반응했다.·······

  만약 누군가 머뭇거리면(모두가 머뭇거렸다.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또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먹세례를 퍼부었고, 이것이 같은 언어의 다른 형태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생각을 소통하기 위해 언어능력을 구사하는 것, 곧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필요충분의 기제는 여기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저들에게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하나의 신호였다.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은·······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 언뜻 보기에는 굶주림과 추위, 피로, 병 때문인 것 같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정보의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105-110쪽)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116쪽)

 

한의사가 임상 현실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이곳저곳 양의 진료소를 떠돌다 누군가에게서 “침이나 한 번 맞아보지 그래”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환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왜 이런 거예요?”

 

이 말은 무엇보다 “어디 고쳐봐라”의 다른 표현이지만 이 의중이 의문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곡절이 있습니다. 도대체 양의들이 알아듣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악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체로 전문가 집단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그러니까 타인에게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누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다만 의료의 사회적 행태 차원에서만 논의될 문제가 아닙니다. 의학 본질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정보가 진단의 영역 넘어 치료 효과와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이 그 아픈 이치를 알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치료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학적 정보가 진단자의 전문적 진단 영역에 볼모잡혀 있으면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보로서 의학은 의자와 환자 사이에 공유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그 통증을 잡기 위해 곧바로 ‘치료’에 돌입하는 것이 의자, 특히 서구의학으로 치료하는 자 대부분의 습관적 행위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선, 통증 그 자체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의학적 오류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통증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통증을 없애려고 달려드는 것은 통증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꾸로 통증을 아주 미세하게 강화하면 자연치유력을 돕는 것이 되어 치료 속도가 빨라집니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의학적 치료행위는 침습·공격적입니다. 다짜고짜 이런 침습·공격을 받으면 몸도 마음도 그것을 폭력으로 해석합니다. 치료가 오히려 트라우마trauma를 남기게 되는 이치입니다.

 

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정보 내지 지식의 전달 자체가 가장 우선적이고 섬세한 치료 수단이라는 진실을 알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영국 왕실병원이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동종요법의 본질이 바로 정보 치료입니다. 한의학의 침과 한약의 기본적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말’입니다. 의자와 환자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 고통의 내력과 진실이 있는 그대로 환자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이 ‘말’에는 음성적이지 않은 ‘몸말’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저는 대부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거나, 손바닥으로 쓸어주거나 다독거린 뒤에 시침施鍼합니다.

 

잘못된 교과서적 의학이 의료 현장에서 이런 실수, 아니 실패를 양산해낼진대 하물며 대놓고 폭력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아우슈비츠가 어찌 신속·과감하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은·······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 언뜻 보기에는 굶주림과 추위, 피로, 병 때문인 것 같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정보의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

 

인간 존재에게 언어, 그러니까 정보가 얼마나 치명적 문제인가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폭력으로서 언어가 몰아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 졸지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존엄, 압도적 절망·······어찌 격렬한 죽음의 에너지가 아닐 수 있었겠습니까. 가스실이 아니어도 그냥 그렇게 선 자리에서 얼어붙어 죽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이 세월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와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죽음이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성실히만 살아도 행복을 느끼는 날이 올까요.

 

권력집단은 침묵으로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다가 입을 열면 자기 말만하고 다시 입을 닫습니다. 침묵 사이에 나온 그 짧은 단호한 말마저 거짓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일이 감히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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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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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의사소통은 타인의 평화와 자기 자신의 평화에 기여하는 쉽고도 유용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신호의 부재인 침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이지만 모호하고, 모호함은 불안과 의심을 낳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이다. 의사소통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 의사소통에 대한 성향을, 특히 언어라는 고도로 진화되고 숭고한 형태의 의사소통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105쪽)

 

세계의 구조는 기우뚱한 비대칭의 대칭을 이룹니다. 기우뚱한 비대칭의 대칭은 자발적으로 깨뜨려져 세계의 운동으로 일렁이며 번져갑니다. 자발적 깨뜨려짐을 되풀이하면서 세계는 구조와 운동의 무한 거래去來를 이어갑니다. 이 거래를 인간 척도human scale에서 표현한 것이 바로 의사소통입니다. 의사소통은 그러므로 인간 척도에서 구현해내는 세계의 진실입니다.

 

의사소통은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를 “언어라는 고도로 진화되고 숭고한 형태의 의사소통의 성향”이라 표현합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어법을 이어갑니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부정하는 것은 거짓이다”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다

 

존재론적 차원의 “숭고한” 것을 아우슈비츠의 나치가 폭력과 수탈의 메커니즘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을 부정하고 거부한 것은 곧바로 포로들의 인간성 부정·거부, 그러니까 살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에 대한 원천적 접근불가능성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의적으로 ‘일상’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바로 그 단절 상황을 살해의 근거로 삼은 그악한 범죄의 문제입니다.

 

의사소통의 부정·거부는 세월호 사건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자행되었습니다. 배가 기울고 물이 들어오는 순간에 아이들의 의사와 행동 표현은 차단되었습니다. 오직 이 말만이 일방적·폭력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직 이 말만이 말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다른 언어를 침묵으로 묶어놓았을 때 “불안과 의심”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휴대폰을 붙잡고 불안과 의심을 진정시키는 의사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외로운 소통은 손자국으로 남았습니다. 그 손자국을 지우기 위해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다시 부정과 거부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죽여지고 또 죽여졌습니다.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는 곧바로 살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침묵이 퍼뜨리는 불안과 의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 전체에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가 강요되고 있습니다. 침묵이 퍼뜨리는 불안과 의심이 마침내 모든 백성의 마음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 마지막 문장 뒤에 놓인 이 문장을 꺼내 듭니다. 인간이기 위하여.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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