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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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압제자 측의·······수많은 고백, 증언, 시인 등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개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보다는, 왜 그랬는가, 범죄를 저지를 때 이들을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동기와 정당화에 대한 물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자신들이 야기한 죽음과 고통의 어마어마함과 늘어놓는 변명 사이의 불균형을 못 볼 리 없다. 그렇다. 그들은 속이는 줄 알면서 속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적이다.

  ·······세부 사항들을 여기저기 갈고 다듬으면서 자신이 거듭 반복해온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고 만다. 처음의 악의는 선의가 되어버렸다.·······속이는 사람은 더 잘 속이고 자신의 역할을 더 잘 연기하며 판사에게, 역사가에게, 독자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더 쉽게 신뢰받는다.

  사건들이 과거 속으로 멀어질수록 편리한 진실의 구축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완벽해진다.(26-28쪽)

 

우리사회의 부박함과 저질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지배집단이 자행하는 거짓말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갈고 다듬으면서 그것을 정치라고 거짓말의 거짓말을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숙련 덕분에 갈수록 더 잘 속이고, 더 쉽게 신뢰받는 호사를 누리며 승승장구하는 중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수많은 고백, 증언, 시인 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일으킨 사건들이 과거 속으로 멀어질수록 편리한 진실의 구축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완벽해집니다. 편리한 진실이 실체적 진실을 질식시키고 단 하나의 투명한 진실로 군림합니다. 이렇게 초월적 권위를 스스로 장착한 거짓말 가운데 우리 공동체의 민주적정체성을 일거에 무너뜨린 참람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일어나시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입니다.” 자신들이 야기한 죽음과 고통의 어마어마함과 늘어놓는 변명 사이의 불균형을 못 볼 리 없을진대 그들은 속이는 줄 알면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놓고 악의적입니다. 노골적 악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감은 악의를 선의로 둔갑시킵니다. 선의로 둔갑한 악의는 맹목적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됩니다. 우리사회가 병적인 광기로 들끓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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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다시 한 번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장 아메리·······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 철저하게 그를 무無로 만들어버린 데서 오는 혐오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첫 따귀로 이미 금이 가고, 이어지는 고문으 로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그에게 고문은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아메리, 그는 1978년에 자살했다.(24-25쪽)

 

아메리, 그는 1978년 자살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이 문장을 쓴 프리모 레비도 1987년, 결국, 자살했습니다. 여기로 생각이 흐르자 눈물은 이내 강이 됩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질문 하나 떠오릅니다.

 

이들의 죽음이 어째서 ‘자살’이란 말인가?

 

치유 불가능하다,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마침내’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로 이어지는 이 도저한 참혹의 행렬 뒤에 무심히 나타난 자살했다는 말은 얼마나 낯선 것이고 또 얼마나 긴 숨을 내쉬게 하는 것입니까. 끝나지 않는 죽음에 닿아 있는 죽음은 어떻게 세상의 모든 말을 한 순간에 췌사贅辭로 만들어버립니까.

 

이 먹먹한 가슴으로 더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으려나봅니다. 저 참혹한 언어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끼들 뒤를 따라 한사코 맹골수도에 뛰어들고만 싶을 어미 아비의 한 뿐입니다. 무슨 말을 보태도 부박할 터이므로 삼가 침묵으로 예를 표함이 도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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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23쪽)

 

인간은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써만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허물 수 있습니다. 경계를 세우고 허무는 변화과정이 인간입니다.

 

진실은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진실은 사실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써만 진실은 사실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을 딛고 뛰어넘는 운동과정이 진실입니다.

 

역사는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역사는 오늘이 어제를 계승하게 합니다. 기억으로써만 역사는 오늘이 어제와 단절하게 합니다. 오늘이 어제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역사입니다.

 

사회는 기억입니다. 기억으로써만 사회는 너와 나의 쌍무계약이 됩니다. 기억으로써만 사회는 너와 나의 파약송사가 됩니다. 너와 나의 계약과 파약으로 뒤엉킨 판이 사회입니다.

 

 

인간도 진실도 역사도 사회도 순도 99.99%의 놀라운 기억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도리어 더 많은 속이기 쉬운 기억 위에 세워집니다. 기억의 실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불가피합니다. 타인과도 자기 내면과도 고요히 또는 맹렬히 싸워야만 합니다.

 

인문의학으로 상담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런 순간들과 매우 자주 마주칩니다. 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기억을 스스로를 파괴하는 쪽으로 자꾸 재구성합니다. 과장하거나 축소합니다. 부가하거나 누락시킵니다. 심지어 당최 없었던 것을 새로이 지어내기도 합니다.

 

치료되고 싶다는 소망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치료과정이 불편하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연장하고 급기야 즐기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이쪽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곡진하고 결곡한 치료적 접근이 없는 한 평생 이렇게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기억을 위한 투쟁으로 다시없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조선의 멸망에서 시작하여 식민지·군정·내전·민간과 군부의 독재·매판 세력의 귀환으로 이어지는 정치사적 트라우마. 그리고 마침내 세월호사건. 219번 째 4월 16일, 오늘 우리 기억은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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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21쪽)

 

피할 수 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는 질문. 서문의 뒷자리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이 질문을 그대로 결론의 맨 뒷자리로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요. 인간이고자 하는 자들의 가슴을 영원히 두드려대지 않을까요.

 

수용소라는 이름은 매우 고지식하고 어수룩합니다. 현대세계는 이제 이런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보육·교육·학문·오락·예술·스포츠·산업·의료·종교 등 모든 사회 영역과 그 활동이 다양한 갈래의 수용소 시스템으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가정·학교·기업·병원·교회라는 낯익은 이름으로 자발적 수용을 유도합니다. 이들의 컨트롤타워가 국가입니다. 국가는 수용소의 가장 기만적인 별명, 아니 본명입니다.

 

수용소 시스템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더 광폭으로 진화합니다. 여기서 수용소는 더 이상 스톡stock 개념이 아닙니다. 플로flow 개념입니다. 진지전이 아닙니다. 기동전입니다. 공간성spatiality 차원이 아닙니다. 공시성synchronicity 차원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국적 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프로작이란 약물로 전세계 우울증 환자 4천만 명을 동시에 노예로 수용하는 글로벌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자본과 신자유주의 이념이 야합해서 일구어낸 이 폭력적 약물문명은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세계를 신노예제 사회로 급격히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지구의 새로운 이름은 이제 라티푼디움입니다.

 

우리사회도 교묘하고 기만적인 이름과 형태의 다양한 수용소로 이미 뒤덮여 있습니다. 세월호는 그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핵발전소는 더 무서운 수용소입니다.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권을 타국에게 자진 양도하고 되찾지 않으려 꽁무니를 빼는 지구상의 유일한 가짜 독립 국가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수용소입니다. 이 수용소를 굴리고 있는 매판집단은 나치보다 더 살 떨리는 무리입니다.

 

우리,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포(불안)와 탐욕, 그리고 무지(어리석음)의 덫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진실을 세우기 위해(慧) 공포를 뚫고(定) 함께하는(聯) 일이 발본의 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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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 가운데에는 포로생활 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17쪽)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누군가 바친 꽃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용모만 그때그때 다를 뿐 내용이 한결같은 우리나라 TV드라마에는 온갖 막장 에피소드를 돌파하고 기어이 살아남아 용서와 성공의 화신이 되는 선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런 해피엔딩의 속임수는 시청자들에게 애먼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악의 세력에 부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는 주인공이 반드시 존재한다, 라는 헛꿈 말입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대부분 죽거나 고통과 몰이해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처합니다. 이회영이 그랬고, 유관순이 그랬고, 김구가 그랬고, 장준하가 그랬고, 수없이 조작된 시국사건의 희생자들이 그랬습니다. 단원의 이백예순여섯 아이들 또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왔다, 장보리!’는 없습니다. 영원히 가버린 ‘바리’들로 넘쳐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남은 자the Remnant’들이 쓰는 역사만이 우리를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어떤 특권은 돌이켜 이제 분명한 의무를 부여해줍니다. 그 의무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진실은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자가 바닥까지 가본 사람에게 바치는 헌정입니다. 자기 경계 너머 푸른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무릎 꿇는 눈물입니다.

 

팽목 바다 위에 누군가 띄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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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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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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