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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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매우 투철한 고찰,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관통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 책은·······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다.(272쪽)

 

프리모 레비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관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의 피해자이자 ‘인간성 파괴’의 희생자인 당사자”(273쪽)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극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여태껏 이런 글쓰기는 없었던, 그런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관견으로 볼 때 프리모 레비의 삶과 그 이야기는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조차 담지 못한 삶이며 이야기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른 인연을 짓게 마련이지만 거대한 권력집단이 치밀한 기획으로 대량학살, 회자되는 바 6백만 명을 살해한 수용소에서 붓다 공자 그리스도 그 누가 살았으며 팔만대장경 사서삼경 신구약성경 코란 그 무엇이 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까.

 

이것은 심오함이나 방대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반드시 인식 주체의 삶의 경험에서만 나오지는 않겠으나 경험에서 나온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가 만일 프리모 레비와 같은, 아니 (불가능한 가정이니 표현을 바꾸어)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아니, 좀 더 시비조로, 좀 더 진부한, 그러나, 그래서 본질에 육박하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이 그토록 고결하고, 그 분들을 따르는 무리가 지구를 뒤덮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들의 높은 깨달음이 하늘에 닿아 있었는데 어찌하여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우슈비츠 가스실 한복판에서는 어찌하여 저 전능한 신들이, 저 살아 있는 말씀들이 속수무책이었을까요?

 

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님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답은 거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나옵니다. 답은 거기 높은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답은 여기 낮은, 낮디낮은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기필코 사상적 좌표축을, 아래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환희의 높이를 말하지 말고 고통의 깊이를 말해야 합니다. 고결한 깨침에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깊디깊은 고통으로 떨어지지 않고 일상을 보전하는 것에 열반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나라로 들림 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가스실에서 죽임당해 깊은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종교가, 철학이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과 악의 세력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신군부가 광주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 1980년입니다. 그 이듬해 성철은 돈오돈수의 기치를 높이 듭니다. 달마 이래 최고 선사라 하는 성철이 이룬 돈오돈수가 무고히 죽임당한 광주 시민의 목숨에 대해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대승이란 말입니까? 히틀러의 만행을 보다 못해 그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한 목사가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정녕 대승이 아닐까요?

 

이 땅의 언필칭 대승불교가 ‘참 나’를 찾는다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개신교가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불의한 권력은 생떼 같은 아이들을 “가만히 있으라.” 윽박질러 맹골수도 깊은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니까 ‘참 나’를 찾기 위해, ‘천당’과 ‘지옥’의 사이에 선 존재임을 자각하기 위해 과연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서경식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드리워진 프리모 레비의 감정 상태를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으로는 태부족입니다. 거기에 덧붙입니다.

 

“삼킬 듯이 달려드는 공포, 저미는 슬픔, 가뭇없는 허무,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립감, 짓이겨오는 수치심, 아득한 막막함. 이 모든 것들이 엉겨 붙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멸의 정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열반도 구원도 허망한 말장난이며 잡생각일 따름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절멸의 정서에 휘감겨 가라앉은 지, 오늘 209일 째입니다. 209년, 아니 209겁이 지나도 우리는 이 좌표축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인간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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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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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두 개의 동사가 끈질기게 반복된다.·······‘이해하다’와 ‘용서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읽기 위한 두 개의 올바른 열쇠인가?

 

‘이해하다’는 네, 맞습니다.·······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제게는 하나 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제게 짐 지워진 말이지요.·······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뉘우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러나 말로만 뉘우치는 것은 안 됩니다. 저는 말로 하는 뉘우침으로는 만족하지 않아요. 팩트로써 자 신이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물론 너무 늦지 않게 증명해야겠지만 말이죠.(257-258쪽)

 

용서. 인간의 말 가운데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들의 목록 선두에 놓아야 할 이 용서.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 용서를 함부로, 가볍게, 무책임하게, 주제넘게, 그러니까 ‘개나 소나’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인플레이션 현상의 가장 큰 진원지는 아마도 개신교이지 싶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와 그것을 영화로 만든 이창동의 <밀양>을 기억하면 대뜸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업화 진행과 같은 궤도를 타고 급속히 약진한 개신교의 담론이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고 그에 따라 헐값이 된 두 단어가 다름 아닌 용서와 사랑입니다. 산업화 진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기 어려워질수록 두 말은 더 많이 남용되었습니다. 남용될수록 속절없이 그 숭고함은 훼손되었습니다. 이제는 용서가 정치적 수사修辭를 넘어 적반하장의 가십으로까지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사기꾼이나 진배없는 장사치가 ‘호갱님’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지절댑니다.

 

저 프리모 레비에게 수많은 독자들이 용서 여부를 물어왔다고 합니다. 왜 그들에게 용서가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 관심사가 대부분 모종의 당위감에 근거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위감은 모름지기 심각한 허위의식에 터한 것일 테고요. 하지만! 타인에게 용서를 묻거나 권면할, 그러니까 짐 지울 자격을 가진 자 그 누구입니까. 신에게도 없는 그 자격을 심지어 흉내 내는 자 그 누구입니까.

 

프리모 레비는 단호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나 소나’ 떠드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하는 것입니다. 피해 당사자는 전인적 변화로써 뉘우치지 않는 범죄자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를 인간으로서 진정 위한다면 그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임을 ‘이해’하는 만큼 뉘우칠 수도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 뒤 비로소 용서는 용서입니다. 무조건적 용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는 이 지점에서 치명적으로 망가졌습니다. 값싼 용서, 쓸개 빠진 용서, 물색없는 용서, 생색내는 용서,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용서가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흘려지면서 정치는 통치로, 도덕은 도적으로, 윤리는 금리로 영락해갔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권력이 만든 폭력의 확대 메커니즘,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작품임은 물론입니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 용서는 철저히 개인 차원에서 교양인의 미덕으로 계발되는 웰 빙 상품이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개념이 어떻게 마침내 전복되고 마는지 우리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참담하게 목격하였습니다. 죽인 자들이 도리어 ‘지켜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죽는 시늉을 하자 죽임 당한 자들이 그 악어눈물을 덜컥 닦아주고 말았습니다. 그 뒤 가해자들의 태도가 돌변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이 꼴 보기 전에 표표히 떠난 일은 미상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인제 그만 하자고, 들 합니다. 그 말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 말 하는 사람 면면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과연 누굴까요. 40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프리모 레비를 두고 고작 207일 째인 우리가 어째서 그 말에 대해 마음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용서, 어림없습니다. 시방 예은 아빠한테 주제넘게 용서를 입에 올리는 자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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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그러한 경험의 역사성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경험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의 두려움을 향하고 있는가?

 

그러한 경험을 현재화한다는 것은 제 희망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제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 제는 우리가 그러한 경험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에요.(256쪽)

 

우리의 삶이 형성되는 시간은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양적·객관적 시간입니다. 흘러가는 연대年代로서 시간입니다. 한 번 가면 그만인 평평한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질적·주관적 시간입니다. 의미를 지닌 특이점을 형성하는, 날카롭게 솟아오르는 시간입니다. 실존의 결단과 기회로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Chronos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맥락으로 드러나는 연대기적 역사를 독일어로 Historie라 합니다. 이 역사는 과거에 묶이는 박제와 같은 역사입니다. 학문적 작업으로 정제된 역사입니다. 카이로스Kairos로 점멸하는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로 소환할 수 있는, 미래로 열어갈 수 있는 실존의 역사입니다. 이를 Geschichte라 합니다.

 

서양 역사철학이나 신학에서 나온 이해방식이라 이원론적·관념론적 냄새가 풍기지만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이런 식으로 문제의 대립각을 첨예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Historie로 흘려버리려 했듯, 끝내 그 흔적조차 지우려 했듯, 이 땅에도 세월호를 단순 교통사고로 규정해 Historie로 흘려버리려는, 끝내 그 흔적조차 지우려는 세력이 준이蠢爾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흘려버린 Historie는 역사로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망각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도 힘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어둠의 세력은 자신의 폭력 현장을 모조리 Historie로 만들기 위해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를 전천후로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 짓을 저들은 정치라 이름 합니다. 물론 아닙니다. 통치, 그것도 더러운 통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색하고 Geschichte를 구축해낼 책무가 있습니다. 저들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를 뚫고 망각을 저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그러니까 현존하는 두려움에 직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슈비츠는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세월호는 지금도 대한민국 도처에서 침몰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들만 죽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시시각각 죽임 당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세월호를 지금 당장 우리 면전에 불러올 수 있는 역사로서 Geschichte를 구축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다름 아닌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에 입각하면 우리 아이들 250명은 죽었습니다. 진실에 입각하면 우리 아이들 250명은 살아 있습니다. 생물학적 사실의 실재actual reality만 실재가 아닙니다. 엄마 마음의 실재virtual/mindful reality도 실재입니다. 진실의 세계에서는 후자가 더욱 뚜렷한 실재입니다. 이 진실을 지켜내야 합니다. 진실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2014년 4월 16일은 영원한 현재가 됩니다. 오늘은 206번째 4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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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가까이에, 우리 주위에 있어요. 그리고 폭력이 낳은 폭력도 있습니다.·······폭력 사이에는 숨어 있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미디어를 통해·······폭력을 보급합니다. 폭력을 확대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거죠.(256쪽)

 

변호사인 한 친구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보수적 정치 경향을 지닌 그의 입에서 법에 대한 정의가 나왔습니다.

 

“자네는 법학도에서 멈춘 다음 성직자와 의료인의 삶을 살아왔으니 여전히 법에 대해 이상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있을 걸세. 현실 법조인인 내 견지에서 보면 법이란 다만 기득권 집단의 곳간을 더 채우는 일에 봉사하는 장치일 뿐이야.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보장도 결국은 혁명을 막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지.”

 

그의 말은 의외인 측면도 있고 당연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의 솔직함이 이 대칭성을 가로지르게 해줍니다. 우리사회의 실상을 감안할 때 부득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입니다. 행정부 소속인 검찰은 차치하고 사법부인 지방법원부터 헌법재판소까지 최근 나오는 판결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 있습니다. 거대 로펌으로 상징되는 변호사 집단 또한 법의 이러한 정의를 뒷받침해줍니다.

 

이런 사회 상황을 설명할 핵심 개념이 권력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력은 정치를 통해 형성되고 정치는 법을 통해 정당화됩니다. 결국 권력은 법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폭력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아(생산) 양육(보급)하는 확대재생산의 메커니즘 그 자체가 바로 권력인 것입니다.

 

폭력으로서 권력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폭력으로서 권력이 세월호를 만들었습니다. 이 권력과 저 권력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탐욕. 그 보편적 탐욕. 제약 불가능의 탐욕. 권력의 탐욕을 지탱해주는 힘은 다시 폭력을 당하는 자들의 알량한 탐욕, 그러니까 권력이 떨어뜨려주는 추악한 미끼에서 나옵니다. 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는 곡절은 공포와 무지에 있습니다. 권력은 미디어를 통해 공포를 증폭시키고 지식을 통제합니다. 우리는 205일 째 이 미디어를 통해 세월호에 대한 공포와 무지를 원 없이 공급받고 있습니다.

 

겨울은 가차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 차가운 팽목 바다 어찌 하려고 우리가 이렇게 맥없이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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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대가 지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의 시대를 포함해서요. 해가 감에 따라 제게는 이 기억들이 이해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표류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어요.” 레비는 종종 학교에서 젊은이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감정적인 참여가 있어요. 격렬하지만, 역사적인 동참은 아니에요.·······(255쪽)

 

이성복이 말합니다.

 

“구원이 온다면 망각과 함께 오리라.”(「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192쪽)

 

그러니 구원 받기 위해 잊자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함으로 죽임 당할지언정 그런 구원이라면 거절한다는 기상을 담았을 터.

 

프리모 레비가 정곡을 찔러옵니다.

 

표류.

 

기억이 진실을 붙잡고 있는 한 그것은 표류, 그러니까 떠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시대는 지나갈 지라도 진실의 기억은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당위를 무심코 밀어내면서 기억이 지나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프리모 레비가 의표를 찌릅니다.

 

감정적 참여.

 

대체 감정적 참여가 어쨌기에? 이 또한 프리모 레비로 돌아가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동참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감정과 역사를 대칭으로 구성하여 이해한다면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 다시 그 내면에서 스러진다는, 그러니까 흘러가버린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역사는 흐른다.’ 뭐 이런 역사가 아니라, 진실을 길이 담아두는 실재로서 역사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배 밖으로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자기가 검을 떨어뜨린 곳, 그러니까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다음에 거기서 찾으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자신이 탄 배가 계속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이야기입니다.

 

흔히 이 이야기를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것만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진실을 놓치고 떠내려가면서도 그런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역사적인 동참이 아니기 때문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감정적 참여입니다. 역사적인 동참을 하는 사람은 뱃전에 표시를 하는 대신 검을 떨어뜨린 순간의 전체 좌표를 기억해두고 가급적 빨리 그 배에서 내립니다. 그 기억을 잃으면 안 됩니다. 검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배를 타고 끝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멀어지고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집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 사용을 구체화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함께 살아내는, 그러니까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기억을 흩트리려는 세력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 행위를 우리는 그 동안 공포에 떨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기억이 흩어진 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구원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이기심을 우리는 그 동안 서럽게 지켜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배가 멀리 떠내려가도록 시간을 끄는 세력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 행위를 우리는 그 동안 공포에 떨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멀리 떠내려가는 게 행복한 삶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이기심을 우리는 그 동안 서럽게 지켜보았습니다. 204일 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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