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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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기실 욕망의 긍정이란 싸우는 자의 윤리가 아닌가.(708쪽)

 

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질문이 옹골차게 성립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뜨겁게 불타야 합니다. 자기 삶이 활활 불타는 것이 아니면 타인에게 뜨거움이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것이 되고 맙니다.

 

오래 전 애제자 한 녀석이 술좌석에서 정색하고 제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의 삶에 냉소적인 분이십니다.”

 

방향이 슬쩍 빗나간 베기였지만 입은 자상刺傷은 매우 깊었습니다. 저는 그 뒤 줄곧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너는 너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 때마다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너는 네 인생의 장작개비이기보다는 남의 인생의 부지깽이였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히 임하지 못하고 남의 삶을 기웃거리는 알량한 오지랖으로 60년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회한이 엄습해올 때마다 가슴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연기의 뿌리 부분에 입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한 마음, 글쎄 명상이라면 명상이고 기도라면 기도인 것을 가만가만 올려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한 순간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를 빌면서 후욱후욱 조심스레 불어넣는 것입니다. 성직의 길을 버린 지 실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진정으로 광활함the Spaciousness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느린, 늘인 삶입니다. 새로운 이 시작은 전과 전혀 다른 시작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다시 새로운 뜨거움을 일으켜 남은 생을 가차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차 없는 삶은 필경 싸움이 될 터입니다. 이 싸움은 치료를 포함하면서 치료를 넘어선 인문운동, 아니 “인문전쟁”이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의 인연에서 만나는 욕망의 실재를 인정한 터 위에 타자의 욕망과 마주하며 어떻게 해야 건강한, 그러니까 건전하지 않은 싸움을 싸울 수 있는지 찰나마다 곡진·결곡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이것이 싸우는 자의 윤리이며 스피노자가 찬미한 것이라면 그 또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근본적으로 삶을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태아기부터 청소년기 까지 일방적으로 부모의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공격력은커녕 수비력조차 갖출 겨를이 없었습니다. 노다지 당하는 것이 단 하나의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십대 끄트머리에 홀연히 찾아든 대칭성의 사유 틀 덕분에 성인기의 삶은 어느 정도 관통과 흡수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생애 초기에 입은 트라우마 때문에 관통보다는 흡수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거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스한 시선으로 지키면서 열정을 다해 달리는 데 서투릅니다. 정당한 분노를 유지하면서 전략적으로 싸움을 이끌어가는 힘이 약합니다.

 

제 삶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제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진실 말입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공격과 수탈을 자행하는 거대하게 기울어진 싸움판이 바로 우리사회입니다. 매판행위로 돈과 힘을 거머쥔 자들이 삿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도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찾고 의로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저들에 맞서는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진실하고 의로운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이 어떻게 진실하고 의로울 수 있을까요?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념passio을 자비慈라는 능동적 정서affectus로 전화해냄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 싸움은 기쁨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슬픔을 담금질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생떼 같은 새끼를 잃은 슬픔에 감응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싸워서 우울증에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바야흐로 남의 인생 불 뒤적거리는 부지깽이 너머 장작개비로서 제 인생을 훨훨 태울 때가 왔습니다. 제 주위로 의로움의 열기와 진실함의 온기를 번지게 하는, 사람다움의 밝은 기운을 퍼지게 하는 삶을 시작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여기는 겨울 사막이 막 끝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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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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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기쁨’이라면,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슬픔’이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142쪽.)·······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지배당하여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어떤 정념에 수동적으로 빠져들 때, 그 정념은 모두 슬픔이다. 슬퍼하는 자는 모두 노예다. 그래서 ‘명랑해져라’는·······정언명령이다. 슬픔이라는 정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694쪽)

 

첫 문장으로 인용된 내용이 기쁨과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 해석의 진면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몰락의 에티카」진술이 스피노자의 견해를 온전히 수용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163-178에 있는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내용을 보면 한정 수용이라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 또한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스피노자를 둘러싼 시공의 STUDIUM을 담고 스피노자 자신의 PUNCTUM을 품은 것입니다. 오늘 서구 사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지젝의 발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럴, 그래야 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해석은 서구세계가 장구한 세월 유지해온 빛과 어둠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신성의 빛을 향해 확산되어 가는 것이고,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죽음을 향해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둠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슬픔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A와 non A가 대칭되어 있을 때, 하나가 진리이면 맞은편은 반드시 비-진리이어야 하는 형식논리학의 일극집중구조입니다. 둘 다 진리인 경우는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해서는 안 되고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겠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과연 노예일까요? 기뻐하는, 그러니까 명랑한 자는 자유인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 그 자체는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슬퍼하는 게 왜 노예일까요?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명랑해야 자유인이란 말인가요? 이 질문이 당연한 진실을 겨냥한 것이지만 어쩐지 억지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설마 스피노자나 「몰락의 에티카」가 그런 정도도 모르고 말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럴까요, 과연?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문제는 슬퍼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고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슬픔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함은 물론 일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오늘날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울증은 더 작은 완전성, 그러니까 소멸, 그러니까 죽음으로 이행하는 수동, 그러니까 노예, 맞습니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본격적인 질문이 둘 생겨납니다.

 

첫째,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면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은 압니다. ‘힘내라’는 말이 격려가 아니고 ‘염장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물며 ‘명랑해져라’는 명령이야 어떻겠습니까. 힘낼 수 없는, 명랑해질 수 없는 조건 아래서 우울증에 빠져버린 사람에게 그것들을 주문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됩니다. 명랑해지는 것이 일종의 정신력 문제라면 정신력 강한 사람은 처음부터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정신력 약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력 약한 사람에게 정신력 강해져라 명령하는 것은 ‘돈 있으면 빵 사먹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 명랑해지기를 바란다면 명랑해지라고 명령하기 전에 명랑해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어야만 합니다. 그 조건이 바로 지금 그가 빠져 있는 명랑하지 못한, 그러니까 우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명랑이라는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울증이라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이것을 건너뛴 명랑은 실제로 또 하나의 증상, 그러니까 가면일 따름입니다. 가면을 참 얼굴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나 기쁨을 늘 유지하면 자유인이 되는가?

 

고착된 슬픔을 우울증이라 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면 고착된 기쁨은 무엇이라 할까요? 우선 이 질문 자체가 거북하실 것입니다. 늘 기쁘면 행복하지 뭘 그것을 가지고 고착이라 하는가? 바로 여기가 함정입니다. 빛과 어둠을 선악 구도에서 보고 악은 없애야 하고 선만 남겨야 한다는 함정 말입니다. 선만 남겨졌을 때 그것을 과연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선이란 악을 전제하고서야 성립하는 개념 아니던가요. 이런 이치를 따라 보자면 고착된 기쁨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할까요? 슬픔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울고 앉아 있는 것을 (우)울증이라 하니 기쁨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조증이라 해야겠지만 조증만 나타나는 경우를 따로 조증이라 하지 않고 현대의학에서는 정신분열증, 최근에 바꾼 이름으로는 ‘조현병’이라고 합니다. 순 우리말로 하면 아마 ‘미쳤다’가 가장 근사한 표현일 것입니다. 미친 사람을 자유인이라 하나요?

 

고착된 슬픔의 대안은 고착된 기쁨이 아닙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착된 슬픔이 사람과 삶에 해가 되는 것과 똑같이, 아니 훨씬 더, 고착된 기쁨도 해가 됩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은 인격적인 차원으로까지 침륜되었어도 장애 수준이므로 정신분열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착의 양극단은 모두 취할 바 아닙니다. 답은 중도입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중도는 중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양극단을 떠나 서로 마주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관통-흡수 운동입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일리一理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서로 관통하고 흡수해서 삶의 전체 진리를 형성해가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고착된 기쁨은 열반으로 담금질 되고 고착된 슬픔은 자비慈로 담금질 됩니다. 열반은 자리自利로, 자비는 이타利他로 나아갑니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 밀고 당기며 함께 사람과 삶의 진실을 열어갑니다.

 

기쁨으로 상처를 다스리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기쁨만으로는 상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상처는 다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처는 감응의 대상입니다. 상처 없는 영혼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일극집중구조인 기독교와 형식논리학에서 시작한 서구문명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면서 오늘날 이기적 개인, 그러니까 영혼 없는 성공기계만을 양산하여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는 과정에는 긍정주의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긍정주의가 바로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의 충실한 개입니다. 이 개의 목줄을 따라가 보면 어디쯤엔가 스피노자의 굳센 손이 있습니다. 그런 스피노자라면 저는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4월 16일 이후 우리 곁에 슬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그들에게 ‘명랑해져라’ 해야 할까요. 대체 그들이 어찌 명랑하면 되겠습니까. 그 명랑이 어떻게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명랑의 명령은 슬픔의 진실을 덮기 위한 음모이며 공작이 아닐까요. 명랑의 투명함 대신 슬픔의 결들이 겹쳐 있는 불투명함을 끈덕지게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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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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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결핍인 것들은 타자에 의존해야만 기만적인 자기 확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타자를 ‘제물’로 삼거나 ‘장식물’로 걸치려 한다.(685-686쪽)

 

이 두 문장은 전후 문맥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 읽어도 어디를 향한 글인지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 수 있는 STUDIUM을 지닙니다. 그런가 하면, 뒤 문장 생략 부분에 ‘~이라는’ 구체적 단어만 집어넣으면 어떤 PUNCTUM과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보편타당하되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각별하게 돋을새김되는 진실을 잘 맞물려 놓은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제 경우 대뜸 떠오르는 것은 끊임없이 제물 또는 장식물을 찾아 헤매는 환우들 모습입니다. 오직 자신의 결핍에만 집착할 뿐 타자와 정서적 상호교류를 거절한 채 떠돌고 있는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실과 이치를 외면하고 자신이 느끼는 호감 여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여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아서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아주 기민하게 사유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우리사회와 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특별한 알레고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에서 ‘결핍인 것들’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결핍인 것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제물로 삼았는지, 장식물로 걸쳤는지 신물 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역사적, 그러니까 정치적 시공에서 결핍인 것들은 아픈 개인과 달리 윤리적·법적 정당성이 결핍된 것들입니다. 그 결핍을 덮으려고 제물을 만들어냅니다. 방법은 매카시즘과 ‘사고’입니다. 그 결핍을 감추려고 장식물을 만들어냅니다. 방법은 신비와 연민입니다. 전지전능함으로 제물은 제거하고 장식물은 장려합니다. 당연히 백전백승입니다.

 

 

백전백승으로 자기기만은 목하 구약성서 급 내러티브를 쓰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양 99마리 가진 1%의 사유가 되고 손해는 양 1마리 가진 99%의 공유가 되는 기적이 더욱 기괴하고 섬뜩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종말이 뭘까, 자기기만은 생각 않기로 머리를 비웠습니다. 그 생각하는 순간, 기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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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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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오작동이다. 비유컨대 현실이 어떤 그물망 같은 것이라면, 그 그물망의 어딘가가 찢어질 때 그 망의 틈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 혹은 찢어짐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실재다.·······실재의 미학과 실재의 정치학을 분별해야 한다·······실재에 대한 집요한 미학적 추구가 어떤 매개도 없이 실재의 정치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괴함과 섬뜩함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기괴함(grotesquerie)이 낯선 것들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라면 섬뜩함(uncanniness)은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효과다. 현실적인 것의 내부로 잠입해 들어가 그것과 뒤섞여 종내에는 현실적인 것의 내부에서 그것을 찢고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기괴함은 섬뜩함으로 도약하고, 실재의 미학은 실재의 정치학과 결합한다.(671-672쪽)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섬뜩함이 일상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로서 섬뜩함은 적어도 우리사회에서는 현실의 그물망이 찢어질 때 나타나는 실재가 아닙니다. 현실의 그물망 자체가 섬뜩함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최근 보도에 따르면 전문 직종 종사자 가운데 성직자의 성범죄율이 압도적 1위라 합니다. 성직자는 영적 권위로서 우리에게 낯익은 존재입니다. 어느 날 그가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습니다. 이 절대적으로 낯선 순간, 즉각 영적 권위에 대한 외경을 버리고, “손 치워, 이 새끼야!” 날카롭게 소리칠 수 있는 여성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영적 권위와 비윤리적 범죄 사이 그 어떤 이음새도 없는 모순이 찰나적으로 생성될 때 모든 사람은 아득한 무서움과 진저리칠 끔찍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섬뜩함입니다. 이 섬뜩함에 터한 초현실적 권위가 일상으로 군림하는 사회의 이름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입니다.

 

현실을 찢고 나오는 오작동, 그러니까 ‘어긋냄’으로써 추구해야 할 실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악의 실재가 현실을 식민화한 상태입니다. 국권상실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통치 집단은 기탄없어지고(無忌憚-중용 제2장), 피치 집단은 노예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 집단은 대놓고 권위를 사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피치 집단은 그를 받아들여 내면화했다는 것입니다. 피치 집단의 내면화는 섬뜩함을 섬뜩함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숭배하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정신장애 상태입니다. 선의 부재라는 속임수를 쓰던 악이 실재로서 전면으로 나와 거침없이 살인과 수탈을 자행해도 마냥 순종하고 찬양합니다. 세속화한 신비주의 정치종교의 맹신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처한 피치 집단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현실의 그물망을 찢는 물리적 방식이 아니고 오염 또는 중독 상태를 정화하는 화학적 방식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해결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정치제도나 정권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인문적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인문적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을 찾기 위한 대장정에 지금 당장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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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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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659쪽)

 

이른바 ‘연민정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인기 절정의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끝났습니다. 전체 서사에서도 세부적 미학에서도 그리 탁월한 작품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나름 전문가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성공적 측면이 있는가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 또한 악을 잘못, 적어도 서투르게 다룸으로써 악의 실상을 은폐한 전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결국 ‘근본 있는’ 부잣집 혈통의 의로운 인물(들)이 ‘근본 없는’ 천한 것(들)의 욕망에서 비롯한 악을 응징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부동의 주제를 관철시킨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제 판단의 기본적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이 드라마가 연민정과 장보리의 성격을 뒤바꾸어놓았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어찌 결말지었을까요?

 

목양견이 양 무리를 모으고 모는 이치가 있다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양들의 본능을 이용하여 하나의 점처럼 양 무리를 모으는 것collecting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답니다. 그 뒤에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몰아가는 것driving입니다. 인간이라고 다를 까닭은 없습니다. 이미 익히 겪어온 바 아니던가요?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 대상은 죽음입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을 위협하면 인간은 공동체의 헤게모니블록이 주입하고자 하는 주류적 메시지의 중심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습니다. 존일숭미·반공·개신교신앙으로 무장하고 권력과 돈과 정보를 독점한 집단에 속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진실·정의·공존은 이미 가치의 땅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인 집단은 반성 없이 타자를 파괴하면서 직진합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옳으며 선하며 아름답다고 확신합니다. 변방에 선 상실자들은 시기하고, 넘보고, 떼쓰는 그저 근본 없는 쌍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대한 구슬려 써먹다가 종당 죽여 없앨 존재들일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 되자’ 말합니다. 뒤로는 ‘너는 나와 다르다’며 밀어냅니다.

 

환유를 은유로 속여 욕망 추구의 영속성을 보장 받기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가 바로 ‘국가’입니다. 전능한 로봇 말입니다. 자신들이 입력한 것만 투명한 진실이니 나머지는 모두 어두운 음모와 유언비어로 몰고 잡아들이고 급기야 숨통을 끊습니다. 우리가 최근 반 년 동안 몸서리치게 겪어온 국가란 혹시 이런 국가 아니었을까요. 기괴한 느낌으로 묻습니다.

 

‘근본 있는’ 인간 장보리는 시종일관 의로움과 선함을 유지해서 행복을 되찾고, ‘근본 없는’ 인간 연민정은 끝내 삿됨과 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파멸하고 만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지난 반 년 동안 세월호 사건의 고통과 이렇게 동거해온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마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이 바로 그, 그 숫자란 말인가요? 섬뜩한 느낌이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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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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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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