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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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욕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다. 욕망은 개체보다 크다. 내가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나의 주인이다.·······욕망은 반성을 모르고 후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최종적인 목적어가 없는 동사다.·······내가 원하는 그것을 너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욕망의 서사를 대체로 비극으로 만든다. 애착은 불안을, 불안은 집착을, 집착은 파괴를 부를 것이다.(653-654쪽)

욕망(핏물)을 충실히 탐구하지 않은 사랑(눈물)은 힘 있는 자들의 거드름이거나 위선이기 쉽다.·······욕망은 가까운 곳에서 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은 먼 곳에서 단 하나의 얼굴로 빛나고 있다.(665쪽)

 

대한민국은 드라마공화국입니다. 드라마가 하루를 열고 드라마가 하루를 닫습니다. 드라마가 입시경쟁률을 뒤흔들고 드라마가 특정 개념에 대한 사회통념을 바꿉니다. 드라마 속 인물과 현실 배우를 일치시켜 환호하고 욕하는 풍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이 드라마 대부분은 선악의 대결을 극단적으로, 그러니까 ‘막장’으로 끌고 가 시청자를 움직임으로써 시청률과 광고수입을 연동시킵니다. 선악 대결이 돈을 ‘대박’으로 물어오려면 해피엔딩이라는 미끼가 있어야 합니다. ‘연민정’은 파멸하고 ‘장보리’가 끝내 이기고야마는 행복한 결말을 전제해야 ‘연민정’의 악행을 재미지게 즐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함정입니다.

 

해피엔딩의 함정에 빠진 대중은 몇 가지 착각에 중독됩니다. 우선, 자기 속의 악을 은폐하고 스스로 의롭다 여깁니다. 그 다음,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의로움에 참여했다고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현실도 해피엔딩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착각에 인정할만한 요소가 들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통찰해보면 실로 엄청난 왜곡을 깔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흔히, 그래서 치명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악인을 보면서 현실에는 저런 악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드라마 속 의로운 주인공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대개 자신과 일치시켜서 생각합니다.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드라마 속 악한보다 훨씬 더 사특한 존재들은 득실거리고 의로운 주인공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 전에 다 쓰러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주인공이 되는 일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서사성과 논리성 무시한 채,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악행을 하던 악인이 어이없이 ‘용서당하고’ 화해의 일원으로 포용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지켜보면서 대중은 악을 제대로 다루는 감각을 상실합니다. 악의 실재를 가볍게, 우습게 여기도록 세뇌됩니다. 악에 대해 일으키는 공분의 힘은 국론분열, 종북, 무임승차, 떼쓰기, 유언비어, 시체장사, 국가모독 등 숱한 이름의 악으로 도리어 매도당합니다. 결국 의도했든 아니든 드라마왕국의 작가와 감독들은 현실인식의 전도현상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선악의 진실을 뒤집어 이해하고 있는 동안 헤게모니블록은 자신들의 욕망을 무한 증폭시키는 일에 몰두합니다. 욕망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악의 문제를 처리해주는 공신들이 있으므로 일이 마냥 쉽습니다.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도 온갖 설정과 의미부여로 ‘사랑’이라 인증해주니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노사이드에서 민영화까지 천 개의 얼굴을 한 거대한 욕망이 눈앞에서 자신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늘 높이 뜬 빛나는 ‘하나’에 눈 팔려 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악을 낳으면서 작동하는지 충실히 탐구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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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허구한 날

마음 아픈 사람

마주하는데

당신은 아프지 않느냐

예, 아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사느냐

아픔이 아픔을, 진짜배기로 만나면, 그

뭐랄까, 어이 어이

힘이 나요

그래서 살지요

치료란

그런 겁니다

같이 아파서 나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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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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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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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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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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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고도를 기다리며」 1막)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잠든 밤에’ 누군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그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눈물이다. 다만 그들은 ‘당신’과 달리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자리에 운 나쁘게 서 있을 뿐이다.·······‘눈물을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윤리감각이다.(642쪽)

 

사무엘 베케트의 말이 사실임을 조건으로 한 저 해석, 그러니까 누군가 눈물 흘릴 때 그 눈물은 세상의 눈물이고 그 세상의 눈물은 운 나쁜 사람이 짊어진 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우리는 곤혹스럽게도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 구조 속으로 동시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개인의 눈물이 사회의 눈물,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공적인 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저 여성학적 선언과 공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갈라 침으로써 돈을 상위 1%에 집중하는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이자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말입니다.

 

다른 하나, 눈물 흘리는 사람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뿐, 그러니까 눈물 흘리고 거두는 차이가 정녕 운의 문제일 따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운을 다른 어떤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눈물 흘리는 자리에 선 것이 그 개인의 책임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세상 자체 또는 세상에 속한 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까지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허무를 부르는 음울한 노래입니다.

 

뜻밖에 여기서 하나의 윤리감각이 솟아오릅니다. 눈물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 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는 것입니다. 이 윤리감각의 터전은 무엇일까요? 운에서 의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허무에서 당위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함께 우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아서 당위를 끌어내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학에 기대보아도 철학에 기대보아도 사회이론에 기대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하찮은 논리뿐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냥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642쪽) 그리 한다고 왠지 ‘모를’ 소리 하는 것이 고작 아닐까요. 하기는 윤리감각이든 생명감각이든 ‘감각’이란 것이 본디 그렇게 배어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못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명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이후, 그대가 그 감각 때문에 자꾸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몸이 끌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알아차림에 터하여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대답이 가능한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불가능성은 차치하고 우리사회가 그 동안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제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 16일에 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질문하는 일입니다.

 

“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길을 선택하려,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앞선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었던 연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질문할 줄 몰랐으므로 공적인 눈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꼭 그만큼 공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가 새끼들 목숨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엎드린 채 넘어간다면 바로 그 다음 표적은 우리 목숨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는 거두면서 타인에게 세상의 눈물을 흘리도록 강제하는 자가 누군가? 그는 무엇으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더 이상 그 강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어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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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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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도 웃지도 않는다.(627쪽)

 

적극적 사고방식 또는 긍정의 힘이 석권해버린 자기계발 시장에서 ‘들뜬 원숭이’들을 사로잡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웃음요법입니다. 이 물건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억지웃음이라도 건강에 좋다며 일부러 미친 사람처럼 웃도록 이끕니다. 최근에 억지웃음은 오히려 심리적 상처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긍정주의에 날린 어퍼컷 같은 내용인데 아마도 웃음 파는 긍정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긍정주의는 유구한 서구적 사유체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모든 분야에 이런 사유체계가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학이 예외일 리 없습니다. 증상으로 나타나는 병을 그들은 적, 그러니까 부정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적은 무조건 타격해야 할 존재입니다. 적이 열이면 해열제, 통증이면 진통제, 염증이면 소염제, 우울이면 항우울제로. 약, 그러니까 긍정으로 타격하는 일 말고는 방법을 모릅니다. 일극집중으로 몰아가는 이 대결구조는 질병과 치료의 진실을 무자비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감기가 걸려 열이 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서구의학을 배운 의사는 무조건 열을 타격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해열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이 때 열은 몸 스스로 방어하고 치료하는 과정이자 그 산물입니다. 해열제를 투입하는 것은 몸의 자가 치료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면 몸은 자가 치료 능력을 잃고 맙니다. 이런 어이없는 광경은 서구의학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광경은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 벌어지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일에 울었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일에 웃었다·······.(627쪽)

 

앞서 억지웃음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연구에는 정색正色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는 내용이 더 들어 있습니다. 정색하는 것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 것입니다. 문득 멈추어서는 것입니다. 문제 상황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응시하는 것입니다. 판단·평가·선택을 유보하고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허령虛靈함으로 문제에 들러붙은 어둠의 당김 줄을 풀어줌과 동시에 청랭淸冷함으로 해결을 향한 날선 시선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스스로의 영토적 경계를 지니지 않습니다. 점의 위상으로 문제를 관통합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문제입니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므로 문제를 정확히 읽는 것이 관건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읽으려면, 일단, 무조건, 정색해야 합니다. 정색하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경직이 풀립니다. 경직이 풀리면 놀 수 있습니다. 놀이 속에 수많은 답들이 뛰어다닙니다. 뛰노는 답들이 비로소 우리에게 자유자재로 ‘울기도 웃기도 하는’ 세상을 열어줄 것입니다.

 

 

개천절인 어제 소설가 김훈이 문인들을 이끌고 ‘기다림의 버스’에 실려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아직도 열 명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 문제의 바다. 김훈은 ‘현상’만 늘어놓고 세월호 사고는 끝났다 떠드는 무리들을 향해 ‘진상眞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진상’을 확인하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정색을 유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울지도 웃지도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위처럼 버티고 기다릴 까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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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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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597쪽-마지막 두 문장의 순서 바꿈은 인용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의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 은폐의 다시없는 수단이 됩니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상, 그러니까 생명의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있음은 물론입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의 마약인 셈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곡진·결곡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미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말씀드렸듯 ‘봉헌의 기적’, 그러니까 (여기서)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은 “아름다운 둘이 되는 것이 바로 결합하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역설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것.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것.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것. 아니. 당최 없다는 것. 그것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의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것.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제 진경眞景으로 썩 들어서 볼까요.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것이 핵심의 핵심입니다.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일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습니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쪽)한 “심연”(597쪽)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쪽)을 “선택”(5쪽)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 아름다”(5쪽)운 것입니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둘의 표정은 “숭고”(5쪽)합니다. 아프(痛)되 괴롭지(苦)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집니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집니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시”(613쪽)라 합니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일 것입니다. 사탄의 주구가 떼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들의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시인’이여, 오늘이야말로 참으로 섹스 ‘하는’ 시를 쓸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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