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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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서, 인간은 태어남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달려갈 수 없다. 오로지 섹스만이 인간의 소관이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596-597쪽)

 

남성가부장이 지배해온 역사는 전복顚覆의 역사입니다. 위대함과 사소함을, 거룩함과 속됨을 홀랑 뒤집어버린 과정이 우리가 겪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참 위대함·거룩함을 감추기 위해 사소함·속됨을 위대함·거룩함으로 둔갑시킨 것이 바로 창조와 심판의 능력을 부여해 신이라 이름 지은 허깨비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사 문제를 지배하려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내러티브가 남성 이미지로 칠갑한 신화와 종교경전입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것은 다름 아닌 섹스입니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허접한 가십 류 담론을 배설해왔습니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적은 저 사소하고 속된 신에 관한, 그러니까 생사 문제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급 담론을 빚어왔습니다.

 

섹스가 이렇듯 사소하고 속된 것으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이 섹스에 대한 남성의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한 주제에 지배하려니 진실을 비튼 ‘구라’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섹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생명의 창조, 그 이니셔티브가 여성에게 있으며 심지어 전 과정에 걸친 섹스 감각마저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싫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으므로 남성은 전천후로 섹스 문제를 왜곡하였습니다.

 

섹스라는 어휘를 쓰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딱합니다. 섹스라는 영어 어휘에 해당하는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순우리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공식적으로 ‘점잖은’ 글에 쓸 수 없는 뉘앙스를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저기 「몰락의 에티카」에도, 여기 제 글에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중 억압, 그러니까 중압重壓입니다.

 

억압을 풀고 전복을 다시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섹스가 왜 위대하고 거룩한가를 근본에서 밝히는 일입니다. 정치와 도덕의 그늘을 벗어나 진실의 태양 아래서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디테일은 뒤로 미루고 간단명료한 이치 하나만 밝혀보겠습니다.

 

섹스는 비대칭적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진실의 요체에 해당합니다. 관통과 흡수를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모든 거래去來의 시원에 다름 아닌 섹스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먹기와 싸기, 잠자기와 일어나기, 일과 쉼, 이 모든 대칭적 거래 사건, 그러니까 거룩한 생명운동 시리즈는 섹스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통찰을 건너뛴 이른바 큰 지혜들이 공허한 까닭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진실에서 벗어나 남성가부장의 ‘야동’적 관점을 고수하는 한 인간의 깨달음과 슬기로움은 미망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국가가 300명 넘는 국민을 고의로 죽이고도 ‘사고’로 처리하는 몰염치 또한 결국은 ‘야동’적 관점으로 정치를 타락시키는 자들의 탐욕에 기인한 것입니다. 근본을 말아먹고 진위를 전복한 사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적나라한 진실의 정곡을 단도직입으로 찔러 들어가 모든 것을 흔들어 깨우는 결기가 필요합니다. 에두르는 얄팍한 타협이 지속되는 만큼,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통권80호 세월호 특집 중 박민규의 글 제목을 인용함)에서, 생명은 지금처럼 속절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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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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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너’에게 먹임으로써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593쪽)

 

칼릴 지브란을 듣습니다.(연 구분-인용자)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거의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합니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입니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요? 그래야 할까요?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습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들은 한 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의 소리를 내지르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한 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 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의 경우, 가부장적 우리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것입니다. 둘 다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어찌 난센스가 아니겠습니까.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봉헌의 쌍방향성 여부입니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긍정’(593쪽)이 가능합니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의 모순이 공존의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일방적 희생의 자기해체도, 일방적 수탈의 자기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긍정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사회는 이중부정의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습니다. 헤게모니블록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의 부정, 자기상실의 부정 말입니다. 극소수 헤게모니블록은 파렴치한 자기구축을 위해 절대다수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합니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4월 16일 이후 전방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대체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대체 어찌 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요.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두려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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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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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을 향해 걸어가라·······. 단 유의할 것이 있다. 느리게 걸어야만 그리움은 살아남는다.(568쪽)

 

 

느린, 늘인 걸음으로”(569쪽-황동규의 재인용) 떠돌며 살아온 삶이라면 저 또한 누구 못지않습니다. 사십대 중반까지 이 골짝 저 들녘을 배회하다가 친구들보다 이십오 년 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오십대 초반 한의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친구들로 치면 이제 삼십대 중반 직장인 정도인 셈입니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친구들이 많은 현실이고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은 시간만큼은 제 느린, 늘인 삶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동안 친구들과 만나는 일도 느린, 늘인 시간 속에 두어왔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들과 이따금씩 어울리는데 소통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미상불 제 느린, 늘인 삶이 가져다 준 사유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 차이 가운데 아마 그리움에 대한 태도가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베이비부머 선두 세대로서 속도에 휘말려 살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은 대부분 오늘에만 집중함으로써 삶의 두려움을 내쫓기에 바빴으므로 그리움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든 여럿이 왁자하게 만나든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들을 챙겨보면 오늘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그저 그것을 위해 동원되고 소비될 뿐입니다. 추억도 없고 전망도 없습니다. 이른바 대박난 자도 이른바 쪽박난 자도 부유하는 오늘의 이야깃거리를 서로 붙들고 되씹을 뿐입니다. 드물게 누군가 제법 육중한 화제를 꺼내들지만 이내 농지거리와 술잔 부딪는 소리에 묻히고 맙니다. 뒤끝 없는 만남입니다.

 

그들이 오늘에 매달리는 것은 두려움, 그러니까 결핍 때문입니다. 결핍 문제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반응reaction입니다. 병리 상태에서 성찰은 불가능합니다. 성찰은 결핍에 대한 건강한 감응response이기에 말입니다. 결핍을 무턱대고 채워 넣으려 하지 않고 세계의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삶의 결을 들여다보는 힘은 느린, 늘인 시간 속에 자기를 맡길 때 생깁니다. 어제와 내일의 소통인 한에서 오늘은 위대합니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어떤 슬픔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를 개인적 욕망으로 엮어 노년의 문턱까지 허덕지덕 달려오는 동안 그들의 생각은 오직 제 가족에 묶이고, 그들의 말은 다만 지배 문법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은 사회의 어둠을 돌아볼 수 없고, 그들의 입은 더 이상 진실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대가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이 도저한 결핍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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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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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술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과 결합하면 소진되는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이어서 늘 충족의 유예 상태 속에서 존재를 추동하는 욕망의 기술이고, 그 덕분에 지금 여기 ‘나’의 결핍을 ‘객관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기술이니까 말이다.(568쪽)

 

 

 

 

그리움은 끼쳐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에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이 배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추억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낙엽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입니다.

 

그리움은 어제의 불씨를 빌어 오늘의 애태움을 피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오늘이 어제를 찾아가 내일을 함께 여는 일입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더해서 채우는 부요의 나날이 아닙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밝혀서 바르게 하는 진실의 나날입니다.

 

그리움 없이는 오늘 광화문 위에 하늘도 없습니다.

그리움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단 하나의 극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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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구성한 존재다

인간이니까, 는 없다

인간이려면, 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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